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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무형과 마음 닦는 것의 중요성

– 수련생의 문장을 읽은 소감

[밍후이왕] 오늘 수련생의 문장 대법의 홍대함, 원용과 엄격을 체험하다는 글을 읽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나의 20여 년 수련의 길을 회고해 보면 걸리고 부딪히고 여러 차례 넘어지면서 걸어왔다. 사물의 현상으로 일체를 논하면서 안으로 찾았지 근본원인은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 수련생의 문장을 읽고 내가 넘어진 근본원인은 자신은 법의 표면만을 알았을 뿐 법 공부를 진정하게 하지 못하여 대법수련의 실질 즉, 대도무형과 마음 닦는 것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지 못한 데 있었다.

나 자신도 매일 법을 공부한다. 많은 법리를 깨달았고 한동안 수련을 순조롭게 걸어왔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법 중에서 수련했다고 느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일종의 극단과 고집하는 사유를 가지고 사부님의 법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법에 대한 이해는 매우 국한되고 얕은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수련이 항상 하나의 극단에서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나아가게 했는데 대법수련의 근본 즉, ‘마음수련(修心)’을 진정하게 틀어잡지는 못했다. 때문에 수련형식을 완벽하게 하는 수련에 치우치게 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을 수련하는 길은 마음이 지름길이라 대법은 끝없나니 고생을 배()로 삼을 지니라’[1]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준 대법은 비할 바 없이 홍대하고 아름답다. 신들도 모두 이는 고덕대법(高德大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사상중의 극단적인 사유방식을 의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생들은 대법제자인 나에게서 대법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직 질병제거와 신체건강의 층에서만 대법을 인식함으로써 법을 실증하는 데 손실을 조성했다.

수련 초기, 법공부가 깊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활과 사업상의 많은 문제에 대해 모두 대충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예를 들면 색욕심을 제거하는 데 극단적인 방식을 취했는데 법을 막 얻고부터 부부관계를 단절하였다. 왜냐하면 당시는 수련이 제1위였고 나의 수련에 영향 주는 것은 모두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최후에 모순은 갈수록 첨예하게 됐고 아내는 내가 연공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교란을 나에 대한 고험이거나 마의 교란으로 여기며 법에 대조하여 자신을 찾아보지 않았다. 결국 제3자까지 끼어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며 자신이 수련을 잘한다고 여겼다. 자신의 수련이 극단으로 치달아 조성된 것임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마음 닦고 욕구 끊어 집착을 버려야 하건만(修心断欲去執著)’[2]라고 하셨다. 마음 수련이 근본이고 욕망을 끊는 것은 형식이다. 나는 형식상에서 수련했는데 이는 과거의 종교와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진정하게 마음수련을 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체험한 것은 우리의 수련은 오직 대법으로 자신의 내심을 개변하는 것이고 형식상에서 어떠한 생명에게 상해주는 것이 아니며 사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와 접촉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처한 이 사회는 우리가 마음수련에서 가져온 표현을 보고 모두 우리를 좋은 사람이라 말하고 모두 파룬궁은 좋다고 말한다! 이는 무의식 중에 세인과 사회를 감화하게 하고 개변한 것이다. 이런 개변은 생명의 내심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이래야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3]인 것이다.

속인의 일을 하는 데도 겉보기에 나는 부지런하고 상사가 지시한 일을 여태껏 골라 하지 않았으며 모두 제때에 완성했다. 그러나 내심은 빨리 일을 마치고 시간을 짜내 법 공부를 하려는 생각이었다. 일과 수련을 완전히 구분한 것이다. 실질은 일종의 대충 일하는 작법인데 마음 써서 일하지 않은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나는 자신을 수련인으로 간주하며 마음을 써서 자신이 완성해야 할 일을 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하는 일(사업) 자체는 수련이 아니지만 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사업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의 수련과정인 것이다.

박해가 시작되자 사부님께 대한 공정한 대우와 또 사부님과 대법의 청백(清白)을 되돌리기 위해 나는 북경에 상방(청원)하러 갔다. 당시 나는 일체를 버리고 생명도 버린다는 견정한 일념으로 북경에 갔다. 지금 보면 일체를 버리는 배후는 비장한 생사의 이별이며 자신이 인위적으로 가상한 결과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한 속인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상방할 때 이런 일체를 버리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오직 정황을 반영하고 문제의 합리적인 해결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포기하는가? 우리는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이며 대법수련 자체가 본래 복분(福份)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근원은 그래도 낡은 우주중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다의 낡은 수련방식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왜 어떤 수련생은 인신을 잃었는가, 나 자신도 직장을 잃었었다. 이는 사부님께서 배치한 것이 아닌데 그럼 왜 발생했는가? 자신의 인식이 낡은 세력의 배치에 부합했고 법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법 공부를 통해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생존환경, 생활방식과 사업은 모두 원인이 있으며 간단한 것이 아니고 모두 무량대궁의 체계가 정법 중에서 구도되고 바로잡힐 수 있는지의 여부와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지금 인식하게 됐다. 낡은 세력은 우리의 사람마음과 법리가 청성하지 못한 것을 이용하여 이것을 파괴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보충하지 못한다면 파괴된, 대응한 우주천체는 정법 중에서 오직 새롭게 만들 수밖에 없는데 이는 정법에 손실을 가져온 것이다.

현재는 정법(正法)이 결속되고 있기 때문에 시간에 대한 집착이 아주 돌출하게 표현된다. 어떤 수련생은 전력으로 속인의 일체 일과 생활을 대강대강 하는데 속인의 일이 자신을 지체시킨다고 여긴다. 어떤 수련생은 어떤 일을 하든지 출발점은 모두 결속된다는 것이다. 응당 꾸미고 장식해야할 집도 수리하지 않으며 본래는 일을 찾아 정상적인 속인생활을 해야 하지만 찾지 않고 집안의 저축이 법정인간 세상까지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수련생은 사당(邪黨중국공산당)이 곧 끝장날 것이기 때문에 돈을 벌어도 폐지로 변할 것이므로 일하여 돈 벌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등등이다. 정진(精進)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는 시시각각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고 자신을 닦아야 하며 중생구도가 곧 정진하는 것임을 시시각각 생각해야한다. 우리는 대법이 만든 생명이고 대법 입자의 하나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가 시간과 형세변화의 영향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기로 우리의 수련은 단순한 수련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길은 미래 우주의 참조이고 미래 인류의 참조인 것이며 미래에 남겨주는 것으로 미래 생명이 가야할 길인 것이다. 우리가 시간과 사회 형세에 대한 집착에서 표현된 부정확한 상태를 미래에 남겨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해주신 이전에 없었던 전부가 새로운 정법수련임을 정말로 청성하게 인식하고 극단적인 사유방식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 극단적인 사유의 근원은 곧 자아와 낡은 우주의 사심인 것이다. 정말로 진정하게 이런 극단적인 사유 중에서 걸어 나오려면 오직 자아를 내려놓고 사()를 버리고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되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선종(禅宗)에 대해 말씀하실 때 우리는, 이 법문은 곧 쇠뿔 끝을 파고드는 것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쇠뿔 끝을 파고드는 것이라고 하는가? 달마가 시작해서 안으로 파고들 때는 그래도 꽤 넓다고 느꼈고, 이조(二祖)가 파고들 때는 그리 넓지 못했으며, 삼조(三祖)는 그저 그런 정도였고, 사조(四祖)는 이미 매우 좁아져 버렸으며, 오조(五祖)는 기본상 별로 파고들 곳이 없었고, 육조(六祖) 혜능(慧能)에 이르러서는 정점에 도달하여 더는 파고들 수가 없었다.’[4]고 설명하셨다. 이전에 나는 이 단락의 법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에야 명백해졌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극단으로 가서는 안 되며 시시각각 법으로 자신의 수련기점을 수정하라고 점오해주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기를 부동한 층차에는 부동한 법이 있다’[4]고 하셨다. 바로 대법제자는 시시각각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바로잡고 대법 중에서 승화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어느 한 층차에서의 어느 단계 인식을 고수한다면 시작에는 어느 한층 법의 요구에 부합하여 법에서 승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이런 인식이 계속되면 우리의 길은 갈수록 좁아지고 법에서 승화하는 감수도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나는 또 인식하였다. 오늘날 대법제자 중에는 왜 납치돼 박해받고 병으로 박해당하며 또 사오(邪悟)하는 사람이 출현하는가? 아주 큰 하나의 원인은 사부님의 법을 진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극단적인 사유로 법공부하고 수련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바로 선종과도 같이 시작에는 무슨 감각이 없지만 장기적으로 끌면 우리의 수련이 일종의 쇠뿔을 뚫는 상태가 되어 버려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려해도 아주 곤란하게 된다. 각종 문제가 모두 출현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상은 현 단계에서의 개인적인 인식이므로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은 수련생들이 자비로 지적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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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가: 홍음>> 파룬따파>
[2] 리훙쯔 사부님 시가: 홍음>> 누가 과감히 속인마음을 버릴 수 있으랴>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파룬궁>> 1장 개론>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2017529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29/3488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