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창춘(長春) 대법제자
[밍후이왕](경축 513 밍후이 특집 원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사부님의 노제자다. 1992년 9월에 사부님께서 창춘에서 개최한 제4회 학습반에 참가한 후부터 지금까지 헤아려보니 25년이 다 된다.
법을 얻은 초기
일찍부터 기공에 관심이 있었고 70년대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모든 것을 다 해봤다. 일찍이 OO기공을 배웠었고 또 화타의 오금희를 배웠었으며 소림사의 ‘일지선(一指禪)’을 배웠었고 이후에는 불교를 믿고 귀의했었으며 마지막에는 밀교에서 한동안 배우기도 했다. 기공책만 해도 많이 샀는데 그 책들도 싸지 않았다. 여동빈의 도가공은 얇디얇았지만 한 권에 100위안씩 했는데도 샀고 손에 있는 돈은 모두 기공책으로 바꿨다. 집에 한 상자 기공책이 있다. 향도 피우고 염불도 하며 주문도 외우고 부적도 그렸다. 그때 50여 세고 신체가 튼튼해 사람들은 나를 ‘OO젊은이’라고 불렀고 다소 쿵푸가 있었다.
승리(勝利) 공원 허우산(猴山) 부근에서 기공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는데 어떤 사람이 파룬궁은 불가 공법이라며 내게 소개해줬다. 그렇지만 나는 불교에 귀의도 했고 절에서 귀의한 법호도 있다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때 리훙쯔 사부님께서는 허우산 동쪽 일대에서 수련생을 데리고 연공했고 나도 허우산 동쪽에서 북쪽으로 약간 편향되는 곳에서 밀교 공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사부님과 20,30보 거리밖에 되지 않았는데 뜻밖에 보지 못했다. 아! 인연이 아직 되지 않았던 것 같다!
92년 7,8월 어느 날 아침에 연공을 마치고 승리공원 정문(동문)에서 나가는데 누군가 파룬궁 책을 판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당시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는데 ‘중국파룬궁’ 한 권밖에 남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 보자. 아! 이것이야말로 진짜구나! 기공에서 몇 년간 헤매고 찾아다녔는데 지금에야 찾았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 어찌 보지 못했을까! 당시 바로 사람들을 데리고 밀교를 배우지 않고 한마음으로 파룬궁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에 밀교를 배우던 사람들 중 백분의 80%가 모두 파룬궁을 연마했다.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기공을 배우는 한 친구 집에 갔다. 올라가고 있는데 정면에서 몇 명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장 앞에서 선 사람은 키고 크고 건장하며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복도 굽은 길에 서서 길을 비켜주는 순간 그 사람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쳤다. 멍했다. 모르는 사람인데 왜 어깨를 치지? 스쳐지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생각났다. 이 분이 바로 ‘중국파룬궁’ 책 중 사진 속의 사람이 아닌가! 그 사람 뒤에는 바로 내가 찾으려는 친구가 있었다. 나도 이 사람들을 따라 계단으로 내려갔고 그 사람이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봤다. 당시 머리가 텅 비었다. 나중에 정신이 돌아와서야 알았다. 난 파룬궁 사부님을 만났던 것이다!
인연은 이렇게 찾아왔다!
며칠 안 되어 즉 92년 9월 8일에 승리공원 허우산 남쪽, 단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둔 성위원회 강당에서 사부님께서는 파룬궁 제4기 학습반을 개최하셨다. 당시 사부님께서는 아직도 기공 형식으로 설법하셨다. 사부님께서 먼저 설법하시고 다음에 수련생에게 공을 가르쳐주시고 마지막에 직접 수련생의 연공동작을 바로잡아 주셨다. 동작을 바로잡아주시면서 수련생들의 신체를 청리해주셨고 한 번 또 한 번 아래로 잡아주시고 밖으로 뿌리치셨다.
몇 번째 날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몇 명이 배가 불룩 나온 중환자 한 분을 부축하고 무대에 올라갔다. 그 사람은 여자였는데 배에 큰 종양이 생겨 7, 8개월 임신한 사람 같았다. 지위가 높은 사람인데 국내외 병원에서 전부 치료할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파룬궁을 찾아왔다고 한다. 나는 강당 뒷좌석에 앉아 있었기에 서서 봤다. 사부님께서 손으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한번 휘저으셨는데 그 사람의 배가 단번에 쭈그러져 바지가 하마터면 내려갈 뻔했고 고름과 피가 바짓가랑이를 따라 무대 바닥에 한가득 흘러내렸다. 강당의 모든 사람은 놀라서 환호했고 박수소리가 났다. 사부님께서는 그녀보고 무대 위에서 몇 걸음 걸어보라고도 하셨다. 이후에 직원들이 무대의 더러운 물건들을 청소했는데 앞에 있는 사람이 코를 막으며 “아우, 냄새야!”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사부님께서 그저 손 한번 휘저으셨는데 얼마나 많은 나쁜 물건이 내려갔는가! 너무나 신기했다! 그렇게 많은 기공사를 접촉했는데 이런 공력을 본 적이 없었다. 대단했다!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파룬궁은 일반 기공이 아니고 불법 수련이고 진(眞)·선(善)·인(忍)의 표준대로 자신을 요구하며 심성수련을 중시해야 하고 동작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에 기공들은 이것을 주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10여 년 배웠지만 속인의 나쁜 버릇은 하나도 고치지 않았고 사람을 욕하고 싶으면 욕했고 성질을 부릴 대로 부렸는데 이번에는 마음을 연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설법 중 말씀하신 기타 기공을 배우면서 나타난 현상들은 모두 직접 겪어본 적이 있다. 원래 좋지 않은 물건이 머리에 너무 많이 주입됐기 때문에 이후의 수련에 영향 준 것이구나! 파룬궁은 부처로 수련할 수 있는 진정한 대법이고 반평생 찾아 드디어 찾았다. 너무 진귀하다! 다시는 함부로 뛰어다니지 말고 소중히 아껴야겠다! 그리하여 기공책들을 태워버릴 것은 태워버렸고 팔 것은 팔았으며 전부 처리했다. 그 기공책들 안에 있는 물건들이 너무 좋지 않았다. 태울 때 ‘툭툭’ 소리가 나기도 했다! 고대의 ‘기문둔갑’ 등 책들은 노점상보고 팔아달라고 했다. 책은 제거했지만 마음속으로부터 이 물건들을 철저히 내려놓는데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파룬궁을 배운 후 집에서 멀지 않은 얼퉁(兒童) 공원에서 연공했다. 사람이 많아짐에 따라 장소를 여러 번 옮겼는데 이후에 ‘주룽비(九龍壁)’ 앞에서 연공했다. 93년 초봄 어느 날, 사부님께서는 몸소 동식물원에 가서 연공장소를 골라주시고 장소를 청리해주시며 보호막을 내려주셨고 이후에 얼퉁 공원의 ‘주룽비’에 와서도 장소를 청리해주시고 보호막을 내려주셨다. 그 후로부터 우리가 연공할 때 아주 맑았고 에너지가 아주 강해졌다! 인연 있는 사람이 끊임없이 왔다.
좀 더 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설 자리가 없어 보도소에 장소를 바꾸자고 했다. 보도소 사람은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한 곳을 골라주셨다고 했다. 북쪽은 가산을 마주하고 있고 온실(수팡위안, 數芳園) 서남쪽에 있는 작은 수림인데 공원 어느 문에서 들어와도 이곳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연공 장소는 바로 여기다. 이곳은 얼퉁 공원의 중심지다. 가산의 북쪽 벽에 걸어놓은 파룬따파의 현수막은 아주 잘 보였고 얼마나 인연 있는 사람이 여기에 와서 대법을 얻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또 사부님을 청해 장소를 청리해주고 보호막을 내려달라고 했는데 사부님께서는 다 옮겨졌다고 하셨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주신 모든 것이 새로운 연공장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연공하면 아주 힘이 났다. 더운 여름에 모기에 물려도 수련생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엄동설한에도 두려워 달아나는 사람이 없었으며 음력 그믐날 밤에도 저녁밥을 먹고 연공장에 와서 연공했다.
초기 연공할 때 수련생들은 동작에 신경을 많이 썼지 수련의 깊은 층차를 아직 잘 몰랐다. 처음에 사람마다 가부좌 고비를 넘겨야 했고 아파서 얼굴이 일그러지고 앞뒤로 흔들고 온몸에 땀이 나는 이 단계를 겪었다. 가부좌 동작의 표준에 도달하기 위해 사부님께서는 여러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끈으로 다리를 묶어 다리가 미끄러져 내려오지 못하게 하거나 쌀자루로 높이 올라선 다리를 내리눌렀고 평소 여러 방법으로 다리를 연마했고 다리를 늘렸다.
집에서 가부좌할 때 허리띠로 다리를 묶었고 아프면 허리띠를 풀지 못하게 하기 위해 팔도 등 뒤로 허리띠로 묶어놓았다. 이러면 아파도 풀지 못해 이를 악물고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1분 1분 시간이 길어졌다. 그날 가부좌하는데 아내는 내가 아파하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는지 나갔는데 내가 가부좌하고 있다는 것도 잊었다. 다리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어 풀려고 해도 두 손이 등 뒤로 묶여있어 혼자서 풀 수 없어 마지막에 땀에 옷이 푹 젖었다. 원래 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의자도 넘어졌고 사람도 비뚤어졌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 했다. 고생이 정말로……. 그러나 하고 싶어서 한 것이고 빨리 표준에 도달하고 가부좌를 2시간 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 소업하고 도를 얻고 신으로 되고 되는 것이 그렇게 쉬울 리가 있겠는가!?
그때 연공은 정말로 고생스럽게 했다. 처음에 포륜할 때 포륜 하나 동작에 5분을 했는데 이후에 7분, 10분 했는데도 만족하지 않았고 우리는 더 연마하려고 매개 포륜을 20분했다. 연공장 수련생 전체가 이렇게 했다. 나는 포륜 하나 동작에 30분, 40분했다. 자신이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노력한다고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뜻밖에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칭찬하시지 않으시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포륜하면 다른 사람이 다 달아나지 않겠습니까? 포륜을 하고 싶으면 집에 돌아가 포륜하십시오!” 그제야 사부님께서 이렇게 큰 범위로 전하실 때 모든 수련생이 받아들이는 능력과 모든 수련생의 감당능력을 고려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동작은 보조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고 중점은 법공부하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습반을 따라다닌 증인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는 초기, 즉 92년 9월부터 94년 8월까지 성 위원회 성당에서 개최한 제5기 학습반, 지린(吉林)대학 밍팡궁(鳴放宮)에서 개최한 제6기, 7기 학습반(낮 학습반과 밤 학습반을 모두 포함)에도 참가했고 하얼빈 학습반에도 참가했다. 이 몇 회 학습반에서 문지기를 하고 매표하며 책과 자료를 팔았다. 학습반을 따라 다니며 법을 들었고 한 번 또 한 번 들었으며 들어도 또 듣고 싶었고 법리에 대한 깨달음이 갈수록 깊어졌다. 계속되는 심성고비와 법을 들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제고하고 있었다. 과정 중 대법의 신기함을 직접 봤고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고 사람을 구도하는 어려움도 직접 겪었다.
94년 5월 창춘에서의 제7기 학습반 때 발생한 기적은 매우 많았다.
얼퉁공원에 한 노년 수련생이 있는데 사부님께서 곡물기업에서 일하셨을 때의 동료였고 법도 일찍 얻었으며 수련도 일찍 시작했다. 사부님께서 ‘전법륜’ 중 “우리가 저번에 길림대학(吉林大學)에서 학습반을 열 때, 한 수련생이 길림대학 정문을 나와서 자전거를 밀고 막 길 가운데까지 갔는데, 승용차 두 대가 단번에 그를 가운데 끼워 넣어 부딪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이런 일들에 부닥쳐도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 순간 차가 멈췄으며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1]라고 예를 들어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제7기 낮 학습반 설법이 끝나고 벌어진 일이다. 그는 우리에게 차가 그를 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자전거를 밀고 자전거 차선에서 걸어가다가 뒤돌아보니 사부님께서 여전히 지린대학 옆문에서 그를 지켜보시고 있는 것을 봤다고 했다. 당시 그는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는데 이후에 ‘전법륜’을 배운 후에야 사부님께서 그가 목숨 하나를 갚는 것을 보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외지에서 설법하실 때 창춘 수련생이 부딪힌 한 차례 교통사고를 말씀하셨는데 내가 바로 그 장면의 증인이다! 그날 자전거를 타고 아내를 뒤에 태우고 학습반에 참가하는데 동중화로에서 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달리는 지프차 한 대가 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는데 방향을 꺾어 북쪽을 향해 인민광장 쪽으로 갔다. 그 차의 앞에 자전거 한 대가 걸려있었고 바닥과 마찰이 생겨 불꽃이 튕겼다. 그날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 젖은 바닥이었는데도 불꽃이 튕겼을 뿐만 아니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뭘 저렇게 빨리 달리지! 사고가 난 것이 틀림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이후에 바로 제7기 학습반에 참가하는 일가 3명이 차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았다. 기사는 술에 취해 사람을 치고도 전혀 상관하지 않고 줄곧 달렸고 인민광장 로터리까지 달렸을 때 경찰에 발견돼 지프차를 세웠는데 자전거가 여전히 지프차에 걸려있었다. 이후에 그 일가 세 식구는 신수련생이고 금방 법을 들으러 왔으며 심하게 부딪혔지만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일가족은 인민광장까지 걸어와서야 지프차가 압수당하고 자전거가 여전히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모든 수련생을 보호하시고 계신다!
학습반 개최 기간 어느 날 점심에 한 연공장의 수련생들이 사부님과 사진을 찍었다. 그 중 지식인 같고 60,70세로 보이는 한 노인이 있었는데 지팡이를 짚고 의자에 앉아서 사진을 찍으려고 사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오시자 그를 보시더니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의자를 치우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노인은 천천히 일어서서 먼저 의자를 치우고 이후에 지팡이를 집어던졌다. 그는 시험 삼아 왼발을 내디디고 또 오른발을 내디디고 이후에 강당문 앞에서 몇 바퀴나 돌았다. 그는 웃고도 울기도 했다! 사진을 다 찍고 그는 설법을 들으러 강당에 걸어서 들어갔다. 이후에 그는 고급 엔지니어이고 4년간 반신불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사부님을 믿었고 사부님 말씀을 듣자 나은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신기한 한 장면을 목격했고 “신기하다!”라고 모두 감탄했다. 나는 “이 사람의 깨달음이 정말 좋다”라고 감탄했다. 사부님께서 뭘 말하시면 그것을 믿으면 해낼 수 있고 변할 수 있는데 한순간의 일이다.
매표하고 문지기를 할 때 시시각각 심성관을 넘었다. 제7기 학습반 때 외지에서 사람이 많이 와 낮과 밤으로 나눴는데도 표를 사지 못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현장 스태프들도 표를 사놓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해 걱정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표를 그들에게 넘겨줬고 법을 듣게 했다! 자리가 없자 우리는 무대 막 뒤에 숨어서 서서 들었다. 사부님과 더 가깝고 더욱 똑똑하게 들었다. 어떤 때 문 앞에 무슨 일이 있으면 사부님께서는 우리보고 “나가서 좀 보세요!”라고 하면 뛰어가 문 앞의 일을 잘 처리하고 사부님의 설법이 영향 받지 않게 했다.
당시 학습반 때 책을 팔았는데 보도소에서 책을 많이 가져와 다 팔지 못했다. 남은 책을 접수실에 옮겨갔는데 한 무더기가 적어졌다. 어떻게 하지? 그리하여 우리는 계산해보고 몰래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 책값을 보탰다. 그런데 이튿날 접수실에 가보니 그 책들이 다시 돌아왔고 한 권도 모자라지 않았다. 아, 정말로 고험이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을 말하자면 아직도 하얼빈 학습반 때다. 94년 8월 초 하얼빈에서 학습반을 개최했는데 인원이 많았고 하얼빈 아이스하키 경기장에서 진행됐다. 당시 아이스하키 경기장은 아직 완공되지 않아 외부 환경이 비교적 난잡해 보였다.
당시 학습반을 개최하는데 교란이 아주 컸다. 사부님 눈에 핏발이 가득했고 창춘에서 간 보도원들의 눈도 다 뻘겋게 됐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실 때 계속 기침을 하셨고 우리의 목도 타고 따끔하게 아팠다. 이후에 사부님께서 다른 공간에서 내려온 좋지 않은 물건이 사부님의 목에 내려앉는다고 말씀하셔서야 그 물건들이 죽기 전에 그렇게 나쁘고 여전히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여름방학이므로 숙소는 다 비어있었기 때문에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현지 기공연구회에서는 외지에서 온 사람보고 모두 하얼빈 공업대학의 학생 기숙사에 묵으라고 했고 사부님께서도 여기에 묵으셨다. 그러나 하얼빈 공업대학은 단전과 단수가 됐고 그들이 말하는데 이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우리가 당했다고 했다. 마시는 물은 살 수 있지만 생활에 쓰는 물은 어떻게 하지? 세수도 할 수 없고 화장실 물을 내릴 수 없으며 또 무더운 여름이라 번거로웠다! 숙소부터 아이스하키 경기장까지 매일 버스로 우리를 바래다줬는데 어느 날 도중에 시동도 꺼지는 바람에 우리 보도원이 차에서 내려 아이스하키 경기장까지 차를 밀고 갔다.
저녁에 설법을 듣고 돌아왔는데 한 숙소 수련생이 침대에서 한바탕 야단을 치더니 그의 몸에서 족제비 한 마리가 내려갔다. 수련생들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족제비 한마리가 여전히 창문턱에 엎드려 안으로 덮치는 것을 봤다. 이것은 사부님께서 수련생을 위해 신체를 청리해주시고 나쁜 물건을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달가워하지 않아 아직도 수련생 몸으로 올라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수련생들이 나가서 그것을 때려 쫓아버렸다.
이번 학습반 때 내가 문을 지켰다. 학습반을 개최한 8일째이었다. 네 명의 남자가 환자를 들것에 실어왔는데 내가 지키는 대문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나는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사부님께서 중환자는 받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고 파룬궁은 수련이고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들어가지 못하자 그들은 아주 불쾌해했다. 당일 설법이 끝난 후 우리는 사부님께 이 일을 말씀드렸더니 사부님께서는 그 사람은 죽었고 원신이 이미 떠났다고 했다. 뜻밖에 이튿날, 즉 마지막 날에 사부님께서 설법을 끝내고 사람들이 자리를 떠날 때 그들은 또 그 들것을 들고 들어왔고 통로를 통해 직접 강단 앞으로 갔다. 우리 몇 명은 사부님을 따라 무대 뒤로 내려가 차를 타고 떠났다. 그들은 강당에서 한바탕 야단을 쳤다. 이후에 자리를 떠나는 수련생은 다 봤다.
이후에 들었는데 이 환자는 랴오닝 진저우에서 데리고 온 것이고 창춘의 한 수련생의 소개로 병을 치료하러 온 것이라고 했다. 이 수련생은 사부님보고 이 환자의 병을 치료해달라고 했는데 사부님께서 거절하셨다. 그는 가슴에 단 파룬 배지를 바닥에 내던지며 “연마하지 않겠어!”라며 사부님을 협박했다고 했다. 사부님께서는 엄숙하게 “당신은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그는 여전히 분개해 마지막 날에 죽은 사람을 들고 와 소란을 피우려 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는 과정 중에 역시 순조롭지 못한 데가 있었으며, 여러 방면의 교란 역시 아주 컸다.”[1]라고 말씀하셨다. 이 한 마디는 듣기에 간단하지만 여기 인간세계와 다른 공간에서의 정사대전이 얼마나 많은지 오로지 사부님께서만 알고 계신다! 또 ‘홍음’을 읽고서야 비로소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는 어려움을 체득할 수 있다. “재난이 오기 전에 법선(法船)을 몰고 오나니 억만 험난함이 첩첩이 막아서누나”[2], “정법 전(傳)함은 어렵고도 어렵구나 만마(萬魔)가 가로막나니 험난 속에 험난이 있구나”[3]. 우리가 아는 것, 겪은 것은 다만 자신이 인간세상에서 보이는 조금일 뿐이다.
사부님께서 창춘 제자와 보도원을 관심하시다
2년 수련하자 법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고 진정으로 기공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불법 수련을 하는 데까지 상승했다. 많은 수련생은 불교에서 들어온 것이라 “그때 불경도 다 외울 수 있는데 이렇게 좋은 법을 왜 외우지 않아요?!”라고 말하자 수련생들은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외운 것은 바로 ‘파룬궁(수정본)’의 심성 수련하는 일부분이었다. 교류 중 법을 외우는 체득도 서로 교류했다.
1994년 9월 18일에 외지에서 법을 전하고 돌아오신 사부님께서는 지린대학 물리화학(理化教學) 건물 강당에서 창춘 파룬따파의 보도원을 위해 설법하셨다. 우리 연공장 보도원은 수련생들이 법을 외운 것을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마지막에 사부님께서는 “우리가 나의 고향에서 선두로 나서서 좀 조직하면 좋겠다. 매 장(章) 매 절(節) 여러분이 읽고 토론해 보라. 학습시간의 안배는 단체연공처럼 고정해야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렇게 하면 좋은 점이 더욱 많고 겨냥성이 있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장래에 실제 문제에 부딪히면 의지할 법(法)이 있게 된다. 우리가 선두에 선다면 전국 각지 보도소에서 아주 좋은 선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후에 전국 각지에서 본받을 수 있다.”[4]라고 직접 제출하셨다.
이후부터 우리는 아침에 연공을 다하고 작은 수림에서 단체 법공부하고 법을 외웠다. 당시 배우고 외운 것은 아직도 ‘파룬궁(수정판)’이었으나 법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은 정말로 일취월장으로 변했고 심성을 제고하는 것을 첫자리에 놔야 한다는 것을 더욱 똑똑히 인식했다.
2개월 후 즉 1994년 11월 20일에 지린대학 밍팡궁에서 창춘 대법제자 제1회 심득수련교류회를 열었다. 이것은 파룬궁수련생의 첫 법회였다.
이번 법회는 너무 신성했다! 11월의 하순 동북은 이미 겨울이지만 그날 날씨는 그렇게 맑고 따뜻했다. 밍팡궁 밖에서 보면 주변에 모두 빛이었다. 나는 천목이 열리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천목이 열린 수련생은 우주 중 신불(神佛)이 다 왔는데 나뭇잎에도 있다고 했다. 문 앞에 두 하얗고 밝은 빛기둥이 서 있는데 빛 구름, 빛 뭉치가 있고 밀짚모자 모양의 빛도 있었으며 한 뭉치 한 뭉치, 한 줄기 한 줄기 수련생을 따라 잇따라 입장했고 우리 머리 위에서 아래로 회의장에 들어왔고 아주 순서 있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 한 수련생은 이 신기하고 신성한 장면을 녹화했고 각 법공부 팀에서 녹화를 틀어주기도 했다. 우리는 여러 차례 봤는데도 보고 싶었다. 초기 수련생들은 모두 이 일을 알고 있고 창춘의 많은 수련생은 그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 일을 사부님께서는 ‘파룬따파의해–전국 일부 보도소 소장들을 위한 광저우(廣州) 설법’ 중 “창춘(長春)에서 녹화를 했는데 수련생들의 이야기가 몹시 생동감이 있어 듣는 수련생도 아주 감동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눈물까지 흘렸다. 회의가 아주 생기발랄하게 열렸고 분위기 역시 아주 좋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매우 기뻐하였다. 마치 당신이 방금 말한 것처럼 그 장(場)에 나 본인이 없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모자라는 것이 없었으며, 마치 내가 학습반을 연 것과 같이 그 장(場)은 대단히 강했다. 그것은 法輪功(파룬궁)이 집결하여 법회를 연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효과가 아주 좋았다. 장래에 수련생이 많아지면 수련생들은 이런 형식으로 심득체험을 말할 수 있다. 법공부는 사람에게 아주 좋은 교육이 된다. 수련생 자신이 공(功)을 배운 이후 어떤 수확이 있는지를 이야기하는데, 어떤 방면에서 본다면 이는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도 더욱 생동적이다.”[5]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사부님께서 설법하신지 2년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수련인이 법에서 제고가 아주 빨랐다! 10여 명이 5시간 발언했다. 나는 듣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고 감동을 받았다! 당시 우주 중 신불은 우리와 함께 듣고 있었고 사부님과 대법은 우리를 개변하고 있었으며 우리를 개변하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
95년에 사부님의 ‘전법륜’이 출판됐다. 우리의 임무는 빨리 ‘전법륜’을 수련생 손에 전달해 주고 수련생이 법을 배우게 하는 것이었다. 먼저 수련생이 베이징에서 책을 가져오고 우리는 역전에 마중을 나갔다. 한 무더기씩 묶어놓은 책은 꽤 무거웠다. 그렇지만 한 손에 한 무더기씩 바로 들었고 아주 수월해 보여 순조롭게 역전 출구에서 나왔다. 다른 수련생은 무거워 보여 검사를 받아 과적 벌금을 냈다. 수련생들은 내가 그렇게 힘이 센 것을 보고 나보고 ‘OO젊은이’라고 불렀다.
한번은 창춘 총 보도소에서 중형 화물차량을 고용하고 나보고 다롄에서 ‘전법륜’을 싣고 오라고 했다. 차가 창춘에서 출발할 때 흐린 날씨였고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전법륜’을 싣고 와 빨리 수련생이 법을 배우게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돌아올 때 비가 심하게 왔는데 기사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러자 뒤에서 경찰차 한 대가 쫓아오더니 과속했다며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벌금은 문제가 아니고 돈을 주고 대법 책을 창춘으로 무사히 싣고 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400위안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웃으며 지갑을 뒤지며 “지갑에 돈이 얼마 있는지 볼까요. 다 드릴게요”라고 했다. 경찰은 “이 할아버지 태도가 꽤 좋네요”라고 했다. 돈을 헤아려보니 200위안 좀 넘었다. 잔돈은 남기고 200위안을 냈다. 경찰은 영수증을 찢어주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 벌금을 다 냈다고 하면 별 일 없을 거예요”라고 하자 나는 한숨을 돌렸다. 책을 무사히 싣고 오고 수련생들이 볼 책이 있게 하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대법 책을 보호하시고 계신다! 역시 당시 베이징 수련생의 손에서 광저우에서의 사부님의 설법 영상을 얻었다. 보도소에서는 이 테이프를 원본으로 많이 복사해 수련생에게 보내줬다. 이 녹화 테이프를 갖고 법을 널리 전하니 마음속으로 아주 기뻤다! 그동안 신수련생이 우르르 몰려왔다!
‘전법륜’이 출판된 후 사부님께서는 외국에 가서 법을 전하셨고 보도원은 수련생을 조직해 법공부하고 연공했다. 사람 마음이 무거웠다. 모두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자 모순이 아주 뚜렷해졌다. 사부님께서 곁에 계시지 않았지만 법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조금씩 해결했다. 모순은 바로 심성을 제고하는 기회라는 것을 다 알지만 수련하자면 여전히 어려웠다.
97년 여름, 창춘 지역 보도원 사이에 모순이 가장 첨예한 단계였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 사부님께서 돌아오시길 바랐고 사부님께 하소연하고 일러바쳐 모순을 해결해주시길 바랐다. 이번에 외국에서 돌아오신 사부님께서는 디즈궁(地質宮) 광장에서 일부분 보도원을 만나셨다. 그날 날씨는 흐렸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오시자 비가 그쳤다. 사부님을 보자 수련생들은 앞 다퉈 사부님과 악수했다. 나는 뒤에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뒤에까지 걸어오셔서 내 손을 꽉 잡으셨다. 사부님의 손은 크고 두껍고 푹신푹신하고 유난히 따뜻했으며 전류처럼 내 팔을 통해 온몸에 흘러 짜릿짜릿했다. 그 한순간에 마음속 풀리지 않았던 물건이 단번에 녹아버렸고 물어보려는 것이 없어졌으며 이해되지 않고 원망하고 속으로 불평하는 마음이 다 사라졌다. 아마 수련생들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누구도 모순의 말을 말하지 않았고 마치 단번에 모두 풀린 것 같았다. 수련생들은 웃으며 사부님을 에워싸고 사부님의 설법을 들었고 또 웃으며 사부님과 사진을 찍었다. 수련생들은 직접 사부님의 무량의 자비와 큰 에너지와 사부님께서 일하시는 태도를 느꼈다.
그 앞뒤로 사부님께서는 ‘청성(淸醒)’, ‘맹격일장(猛擊一掌)’, ‘가늠하는 표준을 다시 논함’, ‘정론(定論)’, ‘도법(道法)’, ‘속인 마음을 버리고 착실한 수련을 견지하자’, ‘취중(取中)’, ‘환경(環境)’등 경문을 발표하셨다. 보도원이든 아니면 보통 수련생이든 모두 방할이었다. ‘정진요지’의 목적은 우리가 전반 수련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 정확하지 않는 상태를 바로 잡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10번을 읽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 말을 들었다.
그해 ‘5.13’은 사부님께서 법을 전한지 5주년이었다. 창춘시 대형 서화전을 진행했다. 제2회 서화전은 난링(南岭) 운동장에서 진행했는데 전시홀이 크고 각양각색 작품이 있었다. 모두 수련생이 만든 것이고 아주 정교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두 와서 참가했다. 홍법 효과는 아주 좋았다. 서화전 과정에서 많은 기적이 나타났다.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이 서화전을 관람하고 대법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온 수련생이 전시회를 보고 모두 창춘과 유사한 전시회를 모방했다. 당시 모두 마음을 서화전에 놓아 표면 모순은 그리 첨예하지 않았다. 이후에 알게 됐는데 이것은 사부님께서 창춘 대법제자에게 정체 제고의 기회를 주신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국외에서 오시지 않았지만 사모님과 메이거가 서화전을 보았다. 이후에 사부님은 돌아오신 후 끊임없이 감탄하셨다. “공덕무량! 공덕무량!”
1년 후 98년 7월 말 우리는 보도원이 회의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마침 한 보도원의 아들이 결혼해 내가 그 집에 갔다. 보도원은 어린이공원 온실에서 예약된 꽃바구니를 가져오라고 했다. 거기에 가서 보니 10여개 대형 꽃바구니를 보았다. 즉시 알게 됐다. “이것은 결혼식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돌아오셨다!” 사부님께서 국외에서 법을 전하신 후 매번 귀국할 때 나는 예감이 있다. 나는 꽃바구니를 차에 싣고 결혼식에 참가한 후 보도원과 함께 샹그릴라에 갔다. 회의대기실은 다 배치되지 않았다. 그 자리는 선면처럼 배열했고 꽃바구니는 하나씩 무대 위에 배열했다. 나는 갑자기 발견했다. 무대 위의 큰 책상에 검은 천을 펴놓았다. 사부님께서 오셔서 설법을 하는데 어찌 검은 천을 펴는가? 나는 빨리 회의장을 책임자에게 반드시 노란 천을 펴야한다고 했다. 그들은 정신을 차리고 곧 큰 노란 명주 천을 가져와 펴놓았다. 온 회의장은 분위기가 극히 장엄했다.
보도원은 모두 보도원 회의만 하는 줄 알고 왔다. 하지만 회의장에 들어선 후 사부님께서 오셔서 설법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많은 사람은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전 성의 각지 보도원 700명이 와서 샹그릴라 다목적 홀, 창춘 가장 현대적인 회의실에서 조용히 사부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그 날은 98년 7월 26일이었다. 그 전에 즉 월초에 베이징 방송국 사건이 발생했고 사부님께서는 ‘뿌리를 캐다(挖根)’,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를 발표하셨다. 당시 일부 나쁜 사람은 선전도구를 이용해 대법을 파괴했고 대법에게 큰 손실을 가져다줬다. 당시 사회 분위기는 대법에 아주 불리했고 사람마다 일정한 압력을 느꼈다. 설법 중 사부님께서는 정확하게 이 일을 다 하도록 인도해주셨고 수련의 부족함을 지적해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수련생들에게 매우 많은 문제를 해답해주셨다. 각 법공부 팀과 개인 정황이 다르므로 어떻게 법공부 해야 하는 것을 겨냥해 사부님께서 우리보고 통독하라고 알려주셨다. 그 후로 발표된 경문은 ‘법 중에 용해되자(溶於法中)’였다. 이번은 박해하기 전 사부님께서 대륙에서의 마지막 설법이셨다. 당시 아직 잘 몰랐는데 잔혹한 박해를 겪고서야 알았다. 수련생들이 대법을 통독했고 끊임없이 법 중 용해했기 때문에 비로소 박해 중 걸어지나 올 수 있었다. 박해 전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사부님 설법을 듣는 것이었다. 당시 상태가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앞에 앉지 못했고 앞으로 다가가 사부님과 악수도 감히 하지 못했으며 맨 마지막 오른쪽에 앉아있었고 사부님 설법을 5시간 들었다.
사부님의 보호
98년 7월 26일 사부님께서 설법하시고 출국하셨다. 99년 ‘7.20’ 사악이 박해를 시작하고 대법제자마다 엄숙한 고험에 직면했다.
박해 초기 어느 날 집에 갑자기 7,8명 경찰이 왔다. 입구에 서서 감히 집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우두머리가 팔을 내밀고 손을 세우고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무술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요. 움직이지 마세요. 우리 말로 하죠. 경찰국에 한 번 가면 돼요.” 내가 공장의 한 사람에게 대법 자료를 줘서 신고를 당한 것이었다. 경찰국은 공장 보안처를 찾았다. 보안처는 말했다. “당신들 2명밖에 오지 않았네요. 그는 무술을 할 줄 알고 쿵푸가 있어요.” 그 뜻은 사람이 적으면 나를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기공을 하는 것을 공장에서 모두 알고 우리 집 근처 사람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대법을 수련하면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당시 집에 자료가 많았다. 내 조건은 그들이 내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었고 그들과 한번 가겠다고 했다.
사부님께서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곧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대법을 수련하기에 누가 무서운가!? 그러나 나는 속았다. 경찰지국에 파출소 경찰을 파견해 우리 집에 가서 대법 자료를 모두 가져갔다. 대법을 박해하고 남몰래 일을 저질렀다. 몇 년 전 또 나를 납치했고 차 한 대로 소품, 자료를 빼앗아가고 나에게 판결도 내렸다. 사부님의 보호로 얼마 후 돌아왔다.
평생 네 번의 교통사고가 있었다. 한번은 법을 얻기 전, 한번은 ‘7.20’ 전, 한번은 박해 후 스쿠터를 타고 수련생에게 자료를 가져다주다가 사고를 당했다. 네 번째는 택시가 나를 부딪쳤고 스쿠터는 망가졌으며 팔이 빠졌다. 기사는 놀라 나를 병원에 데려가려 했다. 나는 “괜찮아요.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기사는 안 된다며 결국 나를 데리고 맹씨 접골원에 가서 어깨를 맞췄다. 스스로 100위안 비용을 냈다. 과정 중 그에게 진상을 알리고 차도 그가 수리하지 않게 했으며 그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고 그의 장사도 지체되지 않았다.
기사는 거듭 감사하며 좋은 사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돈을 배상해야 했을지 모른다고 했다! 내 어깨를 맞췄지만 아팠고 감히 펴지도 들지도 못했다. 무거운 물건을 더더욱 들 수 없었고 밤에 아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연공만 견지했더니 1개월 넘어 완쾌됐다. 박해 중 사악은 늘 틈을 타고 대법제자에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줬다. 사부님의 보호가 없으면 얼마나 큰 일이 날지 모른다. 모두 사부님께서 감당하신 것이다.
그 몇 년간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법공부를 하고 연공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자료점을 세우고 기계를 수리하며 진상주간을 만들고, DVD를 제작하고 달력을 만들며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전화도 걸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수련생이 한 박스씩 ‘9평공산당’, 진상DVD, 달력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 속으로 기뻤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구도를 기다리고 있을까? 집의 인쇄설비는 누구 집에 꽃을 피우려 하면 가져갈 수 있다. 돈은 사부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모두 대법을 실증하는데 사용했다.
장쩌민을 고소하고 집의 가족과 대법제자와 진상을 알고 있는 속인은 함께 양고(兩高: 최고법원, 최고검찰원)에 고소장을 보냈다. 장쩌민 심판의 그날을 기다린다!
매년 ‘5.13’에 우리도 경축 활동을 한다. 거리에서 퍼레이드와 집회를 못하지만 우리는 집에서 경축하고 큰 현수막을 건다. ‘파룬따파 세계 홍전 O주년 경축’, ‘리훙쯔 사부님의 탄신을 축하!’ 사부님 법상에 꽃과 과일을 올려놓고 케이크도 올려놓는다. 수련생들은 번갈아 가며 향을 올리고 사부님을 위해 생신을 축하드리며 대법 홍전을 위해 경축한다. 어린제자는 춤을 추고 악기를 다루고 대법제자의 노래를 부르고 ‘홍음’을 외우고 시낭송도 하며 대법 수련 중의 이야기도 말한다. 국내 국외 모두 경축한다!
우리는 사부님의 설법 동영상을 보면 사부님을 본 것 같다. 우리도 교류회를 하고 사부님과 수련생에게 수련의 체험을 보고한다. 수련인의 승화와 회귀는 사부님께서 바라는 것이다. 모두 듣기 좋아하고 노제자가 그해 사부님과 함께 있던 일들이다. 비행장에 사부님을 배웅하러 갈 때 사부님께서는 우리 매 사람과 사진을 찍었고 사부님께서 성급 식당에서 우리에게 밥을 사주시고 사부님께서 풍성하고 맛있는 반찬을 시켜주셨다. 여러 번 사부님을 만났는데 사부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설법을 하셨다! 나는 초등학생처럼 공손하게 들었다. 장면마다 아름답고 행복하고 소중했다! 수련생들도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 장소에서 크고 작은 파룬이 무수히 많고 구석마다 내려왔고 돌고 돌았다. 대륙에서 잔혹한 박해 환경에서 우리의 경축 활동은 사람마다 사부님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표현하고 대법제자의 정념을 격려해주셔서 모두 떠나려 하지 않는다.
맺음말
마지막 한 차례 사부님 설법을 듣고 지금까지 20년이 됐다. 20년이다! 나는 더는 당시 ‘OO젊은이’가 아니고 80세가 되어 간다. 박해 중 곤두박질하며 걸어왔고 사부님께서 보호해주셔서 마음속으로 편안하다. 사부님이 생각나고 사부님이 보고 싶으며 사부님께 보고할 것은 사부님께서 하라는 일이다. 사부님을 만나려면 출국해야 한다. 하지만 창춘 여기도 내가 지켜야 하고 사부님의 고향이며 대법이 여기에서 전해졌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창춘, 길게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부님께서 오시기를 바란다. 사부님을 보고 싶으면 밍후이왕을 보고 션윈을 보며 사부님의 설법 동영상을 본다. 거기에 사부님 설법이 있고 사부님의 목소리가 있고 사부님의 형상이 있기에 사부님을 만난 것 같다. 매일 아침 나는 사부님께 향을 올리는데 사부님께서 여기에 계신다! 내가 잘하면 사부님께서 미소를 지으신다. 내가 잘하지 못하면 사부님의 얼굴이 어둡고 감히 사부님을 보지 못한다. 잘해야 하고 빨리 수련해 ‘사존께서 웃으시는 것을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정말로 빠르다. 사부님의 66세 탄신일이다.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고 공을 전한지 25주년이고 나는 사부님을 따라 25년 수련했다. 자랑스럽고 기쁘다. 몇 명이나 이런 연분이 있을까? 나는 아직 사부님을 따라 가고 있고 최후까지 걸어갈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여 소원을 전부 이루고 실행해야 할 것을 다 실행하며 최후에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다!
제자가 무릎 꿇고 사존께 절을 올립니다. 사존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사존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고도(苦度)’
[3]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난중불난(難中不亂)’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따파의해–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따파의해–전국 일부 보도소 소장들을 위한 광저우(廣州) 설법’
원문발표: 2017년 5월 11일
문장분류: 온고명금(溫故明今)>사부님의 은혜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5/11/34677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