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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음’ 속의 대자재(大自在)

글/ 산시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람들은 보통 ‘참을 인(忍)자는 위에 칼 한 자루가 있다’며 인(忍)을 말하면 곧 고통을 떠올린다. 그럼 이렇게 고통스러운 ‘인’이 어떻게 대자재와 연결될 수 있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속인은 바로 자신의 명, 리, 정의 득실에서 기뻐하고 슬퍼한다.

수련자라면 오직 인(忍) 속에서만 집착을 똑똑히 보아내고 그것을 제거해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우리를 억울하게 대하거나 비난할 때 참지 못해 따지고 밝히려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이 때 당신은 자신의 명을 수호하기 위해 마음이 움직인 것이 아닌가? 만약 억울함을 참고 자아(自我)를 닦아 없애버린다면 억울함과 비난은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화낼 것이 없어진다. 그때 당신은 사람 속에서 벗어나 높은 위치에서 일을 보게 되어 잘잘못을 따지며 자신을 수호하려는 논쟁이 없어질 것이다. 그럼 대자재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몇 명이나 진정으로 참음 이후의 대자재를 해낼 수 있는가?

사부님께서는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1]고 말씀하셨다. ‘참음’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수련생들은 명확하게 분별해보기 바란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누구인가? 진정한 자신인가 아니면 가짜 나인가? 법리가 똑똑할 때 그건 후천적인 관념과 사상업으로 형성된 가짜 자신이 고통스러워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가 욕망과 유혹을 참는 중에서 갈수록 약해지고 결국 제거될 것이다. 또한 진정한 우리 자신은 바로 이 과정에서 승화되고 더러운 것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

신체가 좀 고달프면 이를 악물고 지나갈 수 있지만 유혹을 참아내기란 아주 어렵다. 속인 사회 형형색색의 유혹에서 일사일념을 바로잡고 모두 마음을 움직이지 않기란 아주 어렵다. 참지 못하고 마성(魔性)이 우리 행위를 통제해 방종하고, 설사 행동으로 억제했다하더라도 머릿속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진정으로 배척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휴대폰, TV 등의 유혹을 참지 못한다면 집착을 키울 수 있는데 늘 머릿속에는 놀기 좋아하고 스캔들, 여색, 정(情)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조장하게 된다. 맛있는 음식에 대한 유혹을 참지 못하면 미각 자극에 푹 빠질 것이고, 여색의 유혹을 참지 못하면 사람의 후천적인 더러운 물질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게 된다.

그러므로 머릿속에 좋지 못한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그것을 붙잡고 제거해버려야 한다. 허망한 미련을 버려야 진정으로 그런 좋지 않은 물질을 해체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냥 대충 참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넘어가려 할 뿐 철저히 제거하는 것을 아쉬워한다. 이것들은 후천적 관념과 업력이 당신의 주이스(主意識)를 교란하는 것이지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진정으로 결심을 하고 그것들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즉시 그 장애가 제거되고 승화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때의 참음은 고통이 아니라 심신이 승화된 후의 행복이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지이다.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루(無漏)’

원문발표: 2017년 4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4/12/34552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