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후난(湖南) 청년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2008년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한 청년 대법제자이며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대학에 가고 졸업하며 사업하느라 몇 년이 지났다. 수련 중 넘어지고 부딪치면서 그냥 걸어왔다. 과거에는 법에 대해 알 듯 말 듯 하던 감성적 인식이 점차 이성적 인식과 개인 수련의 성숙함으로 대체됐다.
법의 장엄함과 수련자의 믿음
이전에 나는 불도신(佛道神)이 신통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육체가 설령 법에서 여러 해 수련했다 하지만 얼마만한 능력을 갖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 혈기를 게양하거나 혈기가 날리는 것을 볼 때면 발정념을 하기도 했지만 뜻대로 된 적은 없었다. 그러므로 신통과 정념의 위력에 대해 진정한 인식과 이해가 없었다.
하지만 법의 위엄과 정념의 위력은 표면적인 사람의 생각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인가? 내가 하려는 것은 발정념을 잘해 부패된 이런 물질 배후의 요소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표면 공간에 나타나든지 여부를 막론하고 나는 모두 ‘믿음(信)’에서 절충이 없어야 한다. 표면적인 환상은 원래부터 진실한 것이 아니고 이건 미혹의 공간으로서 곳곳에 ‘깨달음’이란 요소가 가득 찼다. 진정 법 속의 신으로 수련성취 하려면 표면상 신통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심성이 수련인의 표준에 부합되고 문제를 보는 각도가 법에 있는가에 달렸다.
관념을 개변한 후 어떤 때 나는 무의식간에 발견했다. 문제에 부딪혔을 때 당시에 어떻게 어렵든지 막론하고 오직 마음을 내려놓고 더는 집착하지 않기만 하면 자연적으로 해결이 됐던 것이다. 진상은 사실 한 공간의 간격이 있을 뿐인데 하필이면 자신이 세간의 온갖 변화에 집착하고 사람 마음에 따라서 움직일게 뭐란 말인가?
법리를 알고 이익의 마음을 버리다
지금의 속인사회는 이익이 없는 곳이 없다. 백화점에서 행사를 벌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물건을 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백화점에서 ‘세일’ 문구를 내 걸면 사람들은 광고를 보고 벌떼처럼 모여든다. 사실 가격을 먼저 올렸다가 이후에 낮추는 것이다. 상업계에는 기만과 허풍으로 가득 차 진작부터 성실하게 장사하고 값이 싸며 품질도 믿을 만하게 해야 한다는 상도(商道)를 잃은 것이다. 나도 현대의 이런 기형적인 상업 형식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인터넷으로 물품을 구매할 때면 먼저 할인쿠폰을 수령한 다음 할인하지 않으면 사지 않다가 일단 할인하면 대량으로 사들였다. 결과적으로 산 물품이 단가로 계산하면 싼 것 같지만 총 값으로 계산하면 싸지 않아 많은 낭비를 조성하기도 했다. 고대에는 그렇게 많은 종류가 없었고 옛 사람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현대의 각종 직업은 인심이 들 떠 규범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무엇이든 다 계산에 넣으려 한다.
수련인으로서 “세상 쇠락을 끊어 막노라”[1]를 해내야지 계산에 밝거나 시시콜콜 따지지 말아야 한다. 속인은 내가 살림살이를 잘하고 돈을 아낄 줄 안다고 하지만 이런 ‘총명’은 오히려 오성이 나쁜 것의 표현이다. 사부님께서는 복권에 당첨됐지만 돈을 도리어 직장에 찬조했다는 실례를 말씀하셨다. 수련인이 어찌 주동적으로 남의 이익을 차지할 수 있는가? 보기에는 잠시 좋은 점을 얻은 것 같지만 앞으로는 다른 경로 아니면 각종 의외적인 일로 잃어버릴 것이며, 이익에 집착하면 진정으로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덕을 손해 보거나, 시간을 낭비하고, 심성을 제고하지 못하며, 고비도 넘기지 못하게 됨으로 그야말로 얻는 게 잃기보다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속인 중 생활하는 수련인은 필수품이 부족할 때라야 물건을 살 수 있고 기타 불필요한 것 역시 모두 망념이다.
나는 월급이 높지 않지만 우리는 대법제자가 되기 위해 세간의 재산을 버렸다는 사부님 말씀을 생각할 때면 빙그레 웃음을 짓게 된다. 대법제자는 아무것도 다 모자라지 않고 무엇이나 다 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부처란 궁(窮)함을 말하는 것이 아닌”[2] “부이유덕(富而有德)”[3]을 말한다.
나는 또 깨달았다. 사실 우리가 기타 사람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때 역시 대동소이하다. 시간 낭비, 덕을 잃고, 심성이 떨어져 공이 자라지 못하는 등을 뻔히 알면서도 해내지 못한다. 이는 법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자신의 제고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진상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다 아주 잘 알고 있다. 단지 표면 공간으로 아직 반영되어 나오지 않았을 뿐이며 결국은 인위적으로 마난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구함이 없어야 스스로 얻는다”[4]를 증명
내가 문제에 부딪혔을 때면 늘 구체적인 문제 해결책을 생각하는데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치료하고, 발이 아프면 발을 치료하는’ 것과 같이 일시적인 것만 치료하고 근본을 다스리지 않았다. 수련생이 쓰는 기계가 정상이 아닌 것을 보고는 ‘먼저 자신을 닦고 후에 기계를 수리해라’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곤란, 장애, 마음에 걸리는 일을 만났을 때는 진정으로 수련인의 표준에 따라 법에서 사고해야지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사람 마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일을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 사람 중의 손해를 조성하게 될 것이다. 가령 우선 먼저 안으로 찾는다면 표면상으로는 내가 잘 처리할 능력이 있는지를 막론하고 문제의 성질은 곧 변화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心性(씬씽)이 얼마만큼 높으면 공이 그만큼 높다”[5] 사부님과 바른 신, 우리 자신의 명백한 일면을 포함해 자연히 표면적인 문제를 잘 처리할 수 있다(하지만 안으로 찾기만 하면 일이 전변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실제로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며, 진정으로 안으로 찾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불법 신통은 못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세간의 일체를 제약할 수 있다. 이러면 우리는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5]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전에 나는 교사 편성 시험을 쳤는데 꼭 합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시험 서적마저 다 외우지 않았고 단지 한 번 훑어보았을 뿐이나 오히려 아주 쉽게 면접시험 전까지 통과했다. 면접의 합격 비례를 보면 나는 원래 희망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1만 위안을 내고 성(省)에 가서 양성반에 참가하라고 할 때 나는 웃고 말았다. 합격되고 안 되고는 사부님께서 진작 안배하셨을 텐데 내가 애쓴다고 해서 얻을 수 있겠는가?
면접도 나는 별로 무슨 준비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우려와 걱정을 내려놓고 사부님 안배는 가장 좋은 것임을 믿었다. 결국 한 사람이 면접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내가 합격됐다. 학교 선택을 할 때는 성적에 따라 택하는 원칙을 취했으므로 남들이 선택한 후의 나머지가 내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먼저 선택한 학교의 환경과 근무 강도는 나보다 좋지 못했다.
이후 출근할 때에야 알게 됐는데 학교에서 초빙하려는 교사의 전공은 내 전공과 관련이 없었다. 초빙을 책임진 직원이 ‘잘못’ 보고 나를 초빙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 많은 기타 일이 보기에는 ‘우연한 듯’, ‘행운’인 듯 했다. 나는 노력을 얼마 들이지 않고도, 또 반드시 어떻게 돼야 한다는 마음도 없었지만 사부님께서는 오히려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 내가 또 무슨 이유로 이것저것에 집착한단 말인가?
중생을 구도
대법제자는 모두 호법(護法)의 신이 돼야 하고, 더욱이 호법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그럼 평소 생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호법할 수 있겠는가
속인이 대법제자에게 좋지 못한 염두나 행위가 있으면 구도될 기회를 잃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법제자에 대한 태도로 대법을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속인의 이런 나쁜 태도는 대부분 우리 자신이 잘하지 못한데서 조성된 것이다. 우리 자신의 언행이 법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속인에게 법을 오해하게 만든 것이다. 이는 실제상 우리가 그들을 대립 면으로 밀어놓은 것이다. 우리는 법을 수호하는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것이므로 조사정법(助師正法)이란 더욱 말할 바도 못 된다.
만약 대법제자의 사람 됨됨이와 심성이 속인의 인정과 찬사를 받을 수 있을 때, 우리가 다시 그에게 구원되는 방법을 알려주면 그는 아마 아주 잘 동의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행위가 법의 표준에 도달하는지 여부 역시 우리 ‘진상 알리기’의 한 방면이다.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자신의 언행이 얼마나 중요하가!
해내는 것이 수련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상사(上士)는 도를 들으매 깨달음에 의거하여 원만을 이룬다”[6]. 나는 법공부에서, 생활에서 ‘해내는 것’이 ‘깨닫는’ 것의 한 가지 직접적인 표현이고 “해내어야 수련”[7]임을 알게 됐다. 100% 신사신법에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를 진정으로 믿고 아울러 해낼 수 있는가가 포함된다. 이를테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수련은 가장 좋은 휴식이다.”[8] 그렇다면 내가 아침에 게으름을 피워 일어나기 싫을 때가 바로 사부님 말씀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않으며 속인의 사상으로 문제를 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졸지 않기 위해 연공한다’는 생각을 품으면 다른 일종 집착에 빠지게 되고 자신이 요구하는 효과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또 이를테면 자신이 평소에 연공을 적게 해 신체에 불편함이 나타날 때 사람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자신이 연공을 잘하지 않아 나타난 상태라고 하는데, 이는 또 나를 다른 일종 집착에 빠지게 하고, 비자각적으로 이런 비정상 상태를 인정해 구세력에게 이용당해 쉽게 틈을 타게 한다. 실제로 우리는 평소에 어느 방면에서 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이런 나쁜 상태의 출현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선 오직 사부님 안배만 바란다는 것을 분명히 한 다음 다시 서서히 잘해야지 자신에게 사람 마음이 있다고 해서 구세력의 각종 형식의 박해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
명명백백하게 진수제자로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시시각각 자신이 수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환경은 바로 속인 중에 있으므로 우리는 “오행 중에 있지 않고 삼계 밖을 벗어나다.”[5]의 대법제자다. 더욱이 함부로 자신을 깔보고 물결 따라 표류하지 말아야 한다.
시련과 위덕은 동시에 존재하는 바, 사부님께서는 ‘장계취계’[9]로 대법제자의 수련을 안배하셨고 우리도 그 시련 속에서 승화하고 있다.
개인의 깨달음에 제한이 있으므로 적당하지 못한 곳은 수련생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 ‘홍음2-널리 비추다’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부이유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6] 리훙쯔 사부님 저작: ‘스위스법회 설법’
[7]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착실한 수련’
[8] 리훙쯔 사부님 저작: ‘북미 제1기 법회 설법’
[9]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원문발표: 2017년 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2/18/3432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