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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륙 수련생은 ‘협조인’에 대한 의지와 맹종을 내려놓아야 한다

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밍후이왕] 중국대륙에서 협조인에 대한 화제는 늘 있지만 그래도 한 번 교류하고자 한다. 사부님의 정법은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상당한 수련생들이 아직도 법을 사부로 삼지 않고 협조인의 안배에 의지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문제가 점점 불거져 직접 현지 수련생의 수련과 대법을 실증하는 환경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지에서 발생한 사례를 들어보겠으니 수련생께서 사부님의 정법의 각도에서 진정하게 문제를 보고 협조인에 대한 의지와 맹종을 철저하게 내려놓으며 자신의 수련의 길을 걷기 바란다.

중국 협조인은 특수한 시기의 배역

중국공산당이 대법을 박해한 초기에는 많은 중국수련생이 사악한 기세에 놀랐다. 대법을 수련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이런 사악한 형세를 마주하자 일시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때 일부분 수련생이 먼저 나서서 거대한 압력을 무릅쓰고 세인들에게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더 많은 수련생이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하도록 이끌었다. 수련생을 도와 진상 자료점(資料點: 자료 만드는 곳)을 세우고 필요한 설비와 사람들을 연결해주며 협력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초창기 협조인이 되어 중국 수련생들의 반박해 활동과 법을 실증하는 선도적 작용을 했다. 그래서 중국 조기의 협조인들은 진정으로 적극적이고 바른 작용을 일으켰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수련이 깊어지면서 수련생들의 심성도 제고 되고 지혜와 능력도 점점 제고되어 표출되었다. 이렇게 되자 협조인들이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이끌고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됐다. 수련인은 모두 자기가 깨달은 것이 있고 수련 중에 자기가 넘어야 할 고비가 있으며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이 있는데 이런 것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협조인이라도 대체할 수 없다. 특히 수련의 마지막 단계에서 이 문제가 더욱 불거졌는데 이런 시기에 협조인이 광범위하게 수련생의 일을 배치한다면 저도 모르게 법의 지도를 벗어나 수련생의 수련을 교란할 수 있다. 심지어 사부님께서 수련생에게 순서 있게 배치하신 것까지 교란하면서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

사실 엄중한 박해를 받는 지역에서 모두 협조인을 추앙한다는 것이 아니라 협조인이 과분하게 두드러진 지역에서 쉽게 엄중한 박해를 받을 수 있다. 성(省)내 몇 개 지역이 모두 이러하다. 특히 현지에서는 협조인의 지휘를 각별히 강조했는데 이로 인해 전 성(省)에서 박해가 가장 엄중한 곳이 되었다. 어떤 지역에는 큰 협조인이 전혀 없어도 수련생이 주동적으로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그곳 전체 상황은 아주 좋아 몇 년래 납치 사건이 없었다. 최소한 수련생은 평화적인 환경에서 진상을 알릴 수 있다. 우리 성에 이런 지역이 있는데 밍후이에서도 보도한바 있다.

우리는 이속에서 한 가지 이치를 깨달을 수 있다. 한 지역에서 과분하게 협조인의 작용을 강조하면 개인 수련생의 능력 발휘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협조인의 역할을 강조하지 않는 지역은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법을 사부로 모시고 대도무형(大道無形)의 길을 걷고 있다.

2. 협조인도 보통의 수련인

수련생들은 다 알 것이다. 협조인이 법을 실증한 일을 얼마나 많이 하든지 심성수련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을. 협조인도 보통의 수련인으로서 다른 사람보다 특수한 점이 조금도 없다. 심지어 잘 수련하지 않으면 일반 수련인보다 못하다.

많은 중국 수련생은 습관적인 그릇된 심리가 있다. 협조인은 수련을 잘 했고 높게 수련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협조인의 말에 따르며 협조인의 언행이 법에 있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의 기점은 일하는 데 있지 법을 사부로 여기기 어렵다. 쉽게 본인의 대법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고 경솔하게 협조인의 의견을 듣는다.

예를 들면 한 수련생은 현지 시민에게 광범위하게 진상 자료를 배포해야 한다고 깨닫고 협조인에게 각 지역에 알려 통일적으로 하자고 요청했지만 협조인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수련생은 또 협조인에게 말했지만 협조인은 여전히 입장을 밝히지 않아 이 일은 결국 흐지부지해졌다. 난관은 쌍방이 함께 만든 것이다. 사실 각 지역에서 꼭 통일적으로 할 필요가 없고 협조인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대법제자는 수련 중에 본인이 생각나는 것은 법으로 가늠해보고 법에 있다고 여기면 스스로 하면 된다. 본인의 지역을 잘하면 다른 지역의 수련생이 사람을 구하는 효과가 좋은 것을 볼 것이고 역시 주동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본인이 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점, 법에 대조하여 편차가 있는 것을 발견하면 제때에 고치면 된다. 사람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호의적으로 상대방과 소통하고 차이점을 대한다면 좋은 효과를 볼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협조인의 정념이 강하다고 숭상한다. 한 협조인은 넘어져 늑골이 부러졌지만 병원에 가 치료하지 않고 나아 수련생들은 그의 정념이 강하다고 탄복하는데 수련생은 왜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보지 않는가? 협조인이 넘어져 늑골이 부러졌을 때 왜 자기를 찾아보고 심성을 제고하지 않는가? 나는 제3자지만 이 일을 듣고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어떤 방면에 심성 제고할 점이 있어 사부님께서 나에게 이 일을 듣게 한 것인가?

수련생이 협조인을 일반 수련인으로 여기지 않고 그를 속인의 영웅 인물, 모범 인물로 본다면 다른 사람에게나 본인에게 다 해를 끼친다.

3. 일부 협조인의 편파적이고 부족한 점

일부 협조인은 곳곳을 다니며 교류하고 또 빈번하게 현지의 교류회를 소집하는 데 열중하면서 수련생의 시간을 빼앗고 안전까지 위협하는데도 장기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다. 허영심이 강해 명을 구하기 위해 늘 거짓말을 하는데 전형적인 사례가 있다. 수련생이 거대한 압력을 무릅쓰고 변호사를 청한 것이 성과가 있으면 협조인은 그들의 구출팀에서 한 것이라 말하며 다른 지역의 수련생에게까지 도처에 가서 선전한다.

전에 한 수련생이 우리 지역에 나타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춰 밍후이왕의 ‘총협조’ 관련 문장들을 편집했고 이를 우리 시의 각 공용 메일함(사서함)에 발표했다. 협조인은 문장을 삭제했고 수련생들이 보지 못하게 했다. 그 후 현지 수련생이 “중국수련생에게 ‘총협조’의 역할이 있어야 하는지의 여부를 말해보겠다”라는 문장을 써서 상세하게 현지의 문제를 말했다. 문장은 ‘밍후이 주간’에 실렸다. 협조인은 또 여러 차례 교류회를 소집하고 전부 부인했는데 전혀 수련인의 안으로 찾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후에 많은 수련생이 협조인에게 마음을 조용히 하고 한 동안 수련하라고 권했다. 유감스러운 점은 협조인이 본인은 사명이 있다고 우기면서 꼭 협조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부님께 향을 올려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향 한 대를 피울 때 (연기가) 가지런하면 사부님께서 본인을 계속 협조인이 되라고 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 향은 정말 가지런했고 그는 “사부님께서 협조인이 계속 되라고 한 겁니다.”하고 말했다. 이것이 법에서 온 건가?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을 사부로 삼으라 했지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았다. 향을 태워 어쩌고 하는 이런 말이 법을 사부로 여긴 것인가?

우리는 밍후이왕 내부의 소식들이 나타내는 분위기는 바른 것임을 다 알고 있다. 개인 간의 마찰은 개인적으로 얘기해야지 전체 메일함(사서함)에 공개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혼란해지고 간격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것은 협조인은 전체 메일함을 관리하면서 늘 개인적인 극단적인 언론(의견) 및 수련생 사이의 모순을 올리는데 다수는 부정적인 내용이어서 전체에 아주 큰 교란을 준다. 특히 협조인은 늘 개인 의견을 발표하고 현지에서 집필한 ‘일주 종합’에 넣어 수련생들에게 전하여 보게 한다. 어떤 땐 본인이 쓴 것을 ‘일주 종합’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고 수련생에게 추천한 밍후이 문장을 그 뒤에 놓는다. 더 심한 것은 협조인의 언론(의견)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매주 나오는 ‘일주 종합’에 나타나는데 몇 주 동안이나 내리지 않았다. 이런 수법은 수련생 사이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쳤다. 전체 메일함에다 협조인이 제 말만 해 수련생을 교란하고 오도하는 작용을 했다. 일단 누가 메일함에 협조인에게 다른 의견을 제출하면 메일함 비밀번호를 바꿔놓아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협조인의 배치를 인정하지 않는 수련생이 있으면 그 수련생에게 ‘전체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모자를 씌우면서 본인의 관념을 전체의 의견인 것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수련생이 납치되기만 하면 협조인은 그 수련생의 부족한 점을 끄집어내고 교류회에서 퍼뜨리면서 사악한 박해를 승인하는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악을 도와 납치된 수련생을 혼내준 꼴이 되었다.

우리에게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협조인을 포함한 수련생들이 모두 자신을 알고 법으로 자신을 대조하면서 각자 자신의 심성을 제고하고 호의적으로 모순 속에서 대법이 어떻게 자신의 심성을 제고하도록 지도했고 집착과 사람마음을 내려놓게 했는지 그 과정을 교류한다면 전체의 마당이 하나의 수련의 장으로 될 수 있다.

4. 모순이 늘 협조인에게서 발생할 때

십여 년 동안 현지 수련생과 협조인의 모순은 끊이지 않았다. 한 동안 지나면 협조인과 일반 수련생이 모순이 발생했다는 말을 꼭 듣게 되고 늘 모순이 아주 커 중재하기 어려웠고 많은 수련생들이 휘말려 혼란스럽게 끝없이 논쟁했다. 시간이 제일 짧은 것은 반년이 넘어서야 모순이 약화됐고 시간이 긴 것은 1년, 2년 넘어서야 잠잠해졌다. 제일 두드러진 현상은 누구와 모순이 발생했든지 협조인은 자기 잘못을 승인한 적이 없었고 항상 상대방이 어떻게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갑이 말한 말이 사실에 부합되지 않고 을이 한 말은 날조이고 병은 전체에 틈이 생기게 했고 정은 구세력이 파견한 것이라고 하면서 모두 갑, 을, 병, 정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본인 잘못이라고 말할 때가 없었다. 이 점은 이미 현지 수련생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고 현지 메일함에도 충분히 드러났다.

모순이 늘 협조인에게 발생할 때 사람들에게 각자 무슨 문제를 깨우쳐준 것인가? 우선 당사자 쌍방이 제고할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수련생들이 장기간 협조인에게 아부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하여 저도 모르게 들떠 있고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을 잊은 것이 아닌가? 무형 중에 명을 구하는 마음이 부풀어 올라 마음이 좁아져 한 마디 반박하는 말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수련은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사람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다. 건드리지 못하게 할수록 건드리게 될 것이며 모순도 자연히 적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탁상공론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직면해야할 문제이다.

아울러 수련생이 협조인을 숭배하는 마음을 질질 끌며 버리지 않으면 구세력이 만든 모순이 계속될 것이다. 수련생이 어느 때 그 마음을 내려놓으면 구세력은 물러날 것이고 협조인도 해탈될 것이다. 바로 이런 대응 관계다. 우린 구세력의 배치를 승인하지 않지만 일은 이미 확실히 발생했으니 교훈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협조인을 숭배하는 마음은 빨리 버릴수록 좋다.

5. 협조인을 상대할 때 수련인은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

협조인 표현이 좋은 것은 수련인의 본분이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숭배할 것이 없다. 협조인의 표현이 좋지 않은 것은 그 사람 개인 수련에서 바로잡아야 하고 제고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질책하고 원망하지 말고 가급적 호의적으로 귀띔해주고 도와주어야 한다. 대법제자로서 사사건건 대법으로 가늠해야 제일 올바른 길이다. 잘 수련한 사람은 법을 사부로 모신 사람이지 절대 하루 종일 협조인을 둘러싸고 도는 사람이 아니다.

빈번하게 교류회를 여는 것이 의의 없다는 것을 아는 수련생도 있지만 협조인이 찾으면 거절하지 못한다. 이건 개인이 돌파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어떤 사람은 협조인의 요구에 협조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선량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는데 그건 잘 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요 몇 해 우리 지역에서 나타난 전체 문제는 협조인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난 모순이 제일 많다. 사람마음으로 맞장구치지 말고 인위적인 요소를 버리는 것이 바로 진정하게 협조인을 잘 대하는 것이고 협조인이 해탈되어 나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6. 협조인에 대한 의지와 맹종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지역 수련생의 전체 수련 상태가 좋고 나쁨은 현지 수련생이 대도무형의 길을 바르게 걸었는가와 아주 큰 관계가 있다. 소법소도(小法小道) 수련은 주지, 큰스님이 이끌고 수련해야 하지만 대법 수련은 ‘대도무형(大道無形)’, ‘법을 사부로 삼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법 제자는 사람마다 착실하게 수련하고 자기를 단련해야 하고 모두 한 몫을 감당하고 자기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일할 때 늘 그런 ‘고수(高人)’의 지도에 의지한다면 신사신법(信師信法) 정도가 부족한 것이고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기 힘들 것이다.

현지 수련생은 이 방면에서 제고해야 할 점이 있다. 주로 유형적인 것에 치중하고 있다. 많은 수련생이 다른 사람의 지휘를 듣기 좋아하고 관리 받기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이 관리하지 않으면 어떻게 세 가지 일을 할 것인지 모르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맞장구치길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 보고 따라하며 또 어떤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며칠동안 수련생을 만나 연구·토론하지 않으면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불안해한다. 이는 모두 법 공부가 깊지 못한 표현이다.

2002년부터 현지에는 한 달 남짓한 시간이면 몇 십 명이 참가하는 대형 교류회를 한 번씩 열었다. 십여 명이 참가하는 소형 교류회는 더 빈번했는데 일반적으로 모두 총협조인이 사회를 보고 수련생이 제출한 문제에 응답했다. 하지만 교류회는 진상 알리기에 필요한 실질적인 협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며 늘 재래시장에 가듯 함께 떠들고는 흩어졌다.

많은 수련생들도 이런 교류회는 실질적인 의의가 없고 시간만 지체할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음에 찾는 사람이 있으면 체면 때문에 또 참가하곤 했다. 심지어 늘 이렇게 하면서도 습관이 되어 예사로운 일로 생각했다. 이런 심리는 바르지 않은 요소를 키우는 조건이 되었고 사악이 박해할 수 있는 빌미를 남긴 것이다.

사실 우리 지역 수련생은 협조인에 대한 보호가 이미 극단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모 수련생의 부족 점을 지적하는 것은 문제로 삼지 않고 반응하는 수련생이 없지만 일단 누군가가 협조인의 부족 점을 조금이라도 말하면 수련생들은 즉시 무리지어 공격하고 장시간 질책한다. 이런 사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협조인이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협조인이 없으면 마치 모래알처럼 전체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대법 수련에는 ‘주지(住持)’가 없고 방장(方丈)과 큰스님이 없음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모든 수련생은 다 밥 짓는 작은 스님과 같고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늘 협조인을 둘러싸고 무리지어 떠들기를 좋아한다면 어찌 생명을 성취할 수 있고 사부님과 맺은 서약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대법 제자라면 다른 사람을 위해야 하는데 정말 협조인에 대해 책임을 지고자 한다면 철저하게 협조인에 대한 의지와 집착을 내려놓아야 하며 그래야만 본인도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얼마 남지 않은 기연 속에서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중국수련생이 협조인에게 의지하여 빚은 손실을 거울로 삼으라고 이 문장을 쓴다. 여기에서 보충 설명해야 할 점은 본문에서 말한 협조인은 실질적인 일을 하지 않고 겉치레와 형식적으로 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다. 집에 앉아 몇 십 개 메일함을 장악하고 광범위하게 수련생의 개인 정보를 장악하고는 오늘은 이 교류회를 열고 내일은 연구·토론을 하면서 늘 광범위하게 수련생을 자기 주위에 끌어들이는 사람을 말한다. 착실하게 일하고 진정하게 수련생을 돕기 위해 연락하는 사람이나 전체 항목을 위해 바삐 보내는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상은 개인의 현 단계 수련 중의 인식이니 꼭 옳은 것은 아니다. 이 문장은 미숙한 의견을 내놓아 협조인에게 의지하고 맹종하는 수련생을 깨우쳐주기 위한 것이다. 무엇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잘 대하고 자신을 잘 대하는 것인지는 우리 모두 법에서 배우고 깨달아야 한다. 문장 중에 완전하지 않은 점은 수련생께서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원문발표: 2017년 1월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7/1/14/34083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