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주위 수련생은 물론 교류문장을 통해서도 수련생들이 엄중한 병업현상 중에 있거나 심지어 세상을 떠난 사례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일부 수련생들은 그런 현상에 대해 “세 가지 일을 모두 다 했는데,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가?”라고 곤혹스러워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점에 대해, 내가 체험했던 일을 수련생들과 교류하자고 한다.
나는 1997년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을 시작했지만, 정작 십여 년 후에야 진정으로 수련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무슨 문제에 부딪히면 도피하거나 돌아갔다. 그러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대법의 실증을 게을리했는데, ‘여유가 있을 때 밖으로 나가 대법을 실증하면 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후에 각종 큰 문제가 쌓이면서 더는 나갈 길이 없게 되고 나서야 안으로 찾았다. 나는 이론적인 법공부를 했을 뿐 진정으로 안으로 찾으며,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았다. 수련생들과 법리로 높고 낮음을 쟁론하기보다는, 하나라도 실천하는 실질적인 수련을 착실하게 해야 하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또 무엇이 수련인지를 알게 되었다.
때는 2012년, 나는 머릿속에 한 분계선을 그었다. 다른 수련생들이 하는 생각과 행동을 보게 될 때, ‘그의 생각과 말이, 과거의 내 모습인지? 아니면 현재 개변된 후의 내 모습인지를 분별하게 되었다. 그들의 몸에서 나타나는 증상과 현상들이 모두 무슨 문제로 나타난 것인가를 알게 되었고, 그런 현상은 모두 과거 나와 비슷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베이징으로 법을 실증하러 갔을 뿐만 아니라, 법 실증을 하는 모든 항목에 참여하면서 온 힘을 다했지만, 여러 방면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신체적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사악의 박해까지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열심히 한다고는 했어도, 수련을 중시하지 못했고, 또 어떻게 수련을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신체적으로도 고험의 연속이었는데, 생사의 갈림길에서 발버둥 치며 한 관을 넘기면, 또다시 나타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현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분계선을 그은 이 몇 년간에도 두 번 정도 다리가 아픈 증세가 나타났지만, 오직 세 가지 일을 하는 데만 정신을 쏟았을 뿐, 다리가 아픈 것에 대해서는 무슨 개념이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증이 없어졌고, 병업의 개념도조차도 없었다. 나의 체험으로 말하면 이런 현상은 근본적으로 심성개변으로 나타난 변화이다.
우리가 개변할 수 있는 근본적인 것을 말해보자. 간단하게 예를 들어, 우리가 2층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법칙이 무사무아라고 한다면, 마음이 무사무아 해야만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때 어떻게 힘을 쓰고, 속도는 어느 정도로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2층을 올라갔을 때 명백한 것은 어떤 법칙에 부합해서 올라온 것일 뿐, 큰 힘과 속도를 내서 올라왔기 때문에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란 것이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가려면 또 무슨 법칙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신은 2층으로 올라왔던 그런 수고로움이나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3층에 올라갈 때 만약 1층에서의 이념, 즉 ‘일을 많이 하면 얻는 것도 많다’고 집착한다면 3층으로 오르지 못할 것이다. 1층 이념대로 일을 많이 하면 얻는 것도 많다고 여겨 서로 다투어 한다면, 그건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비학비수가 없다. 다른 각도의 이론으로 볼 때 그건 이익을 추구한 것이므로 다만 사심에 의한 욕망의 확대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를 ‘정진’으로 잘못 인식하면 아무리 힘을 써도 모두 3층에 올라가지를 못할 것이다. 욕망과 사심을 내려놓고, 비학비수 하되 누가 속인의 집착심을 먼저 내려놓는가 하는 것이다. 마치 누구나 2층 3층을올라갔다고 해도 상을 타려는 마음이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나 사심과 누락을 모두 제거해야만 수련성취 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오직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대법제자의 사명을 잘 완성할 수 있다.”[1]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며 사람마음을 내려놓아야 할 뿐, 일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마음을 내려놓아야 세 가지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잘해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과거 법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때 이루었던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과거에 일을 많이 했고 이룬 것도 많은데 그런 위덕까지 전부 버리기가 참으로 아까웠다. 그렇지만 마음을 바로잡았고 전부 내려놓겠다고 생각했다. 이 일념이 나오자, 바로 2층으로 올라가는 감수를 느낄 수 있었다. 법공부를 하면서 내포도 볼 수 있게 되었고, 문제를 보는 각도도 바뀌었는데, 법공부를 해도 피곤하지 않으면서 점차 법의 내포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비정상적인 육신도 정상상태로 들어섰다. 그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데 바로 그러한 일념(一念)의 차이이다. 사람과 신(神)의 구별은 이 일념의 차이에 있다. 내려놓을 수 있으면 곧 수련인이고, 당신이 내려놓지 못하면 당신은 바로 사람이다.”[2] 내가 체험한 분계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는 바로 그때부터 정작 수련을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과거에는 ‘내려놓는다.’는 개념이 없었다. 전에는 ‘힘껏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을 담담히 하고, 모든 걸 내려놓아야 돌파할 수 있고,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받는다’는 것은, 사심을 내려놓고 나서야 곧 승화한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었다. 과거 제고하지 못한 것은,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초상적인 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부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하신 걸 내려놓았는가? 관념을 개변하라고 하셨는데 개변했는가?’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3] 내가 했는가? 모두 잘하지 못했다. 만약 우리의 사상이, 일하는 것을 수련으로 친다면, 일을 많이 하면 많이 얻는다는 그런 사상에 쫓기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근본적으로 개변하지 못한 것이다.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건 역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일할 때의 사상경지는 아주 중요하다. 어떤 정황에서나모두 안으로 찾고 정념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부딪친 마난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방할(棒喝) 하신 것으로 여겨, 다시는 사람마음과 집착에 머물지 않고 법의 요구에 따라 새롭게 잘해야 할 것이다.
다시 예를 든다면, 나와 친분이 있는 한 수련생이 농담조로 “당신의 문장이 또 발표되어 조금 질투하는 마음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 내가 먼저 수련할 그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질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그 수련생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문장발표가 되면 위덕이 있는 것이고, 곧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정황에서 표면적인 것만 수련하면서 정작 기본적인 것은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하기만 하면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곧 사심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4]라고 요구하셨다. 바로 그 요구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 볼 때는 ‘일을 많이 하면 곧 수련 성취한다’는 그런 변하지 않는 관념을 그대로 갖고 있고, 그런 관념을 기점으로 쟁투하고 질투한다면, 근본적인 개변을 하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얼마를 얻는 것을 질투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의 이념 중에는 그래도 그는 다른 사람은 얻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마음이 일어날 때, 자기가 얻는 것이 적다고 생각될것이 아니겠는가? 그럼 당연히 마음의 동요가 일게 마련이다. 또 예를 든다면, 어떤 수련생이 “나는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나는 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좋은 것은 정말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오직 속인의 마음인데, 당신이 추구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는다고는 해도, 그 관념을 개변하지 못했다면 당신은 습관적으로, 그래도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의 사상경지가 높아지면 세 가지 일도 갈수록 더욱 좋아질 수 있고, 신체도 역시 더욱 큰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엄중한 병업의 교란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병업, 병업을 말하겠는가? 당연히 더욱 깊고 높은 법리에서 문제를 보아야한다. 장기적으로 그런 잘못 속에서 몸부림치며 발버둥치지 말아야 한다. 오직 자기보호와 자기만족을 위해서 각종 좋은 처방을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수련을 이렇게 오래했지만, 얼마 멀리가지 못한 것 같다. 사부님께서 이렇게 큰 법을 전하셨는데, 우리가 깨달은 것은 이처럼 너무 적다. ‘좋은 처방’을 말한다면, 법으로 깨달아 근본적으로 자신을 개변해야만 한다. 그래야 병업의 현상이나 비정상적인 신체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를 위해 좋은 처방을 찾는 그런 저급한 상태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주:
[1]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남미법회에 보내는 축사’
[2]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휴스턴법회 설법’
[3]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가: ‘홍음-착실하게 수련’
[4]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지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원문발표: 2016년 12월 2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원지>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26/3393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