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대법제자 위안룽
1. 착실한 수련
(1)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집착심을 내려놓다
나는 수련 전 승부욕이 강해 무슨 일에서든지 꼭 이기려고 했으며, 자신을 남보다 높은 위치에 놓았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난 28살 때 아직 아이도 없고 해서 엄마와 파룬궁(法輪功)을 배우게 되었는데, 대법의 신기함을 알게 되어, ‘만고의 기연을 만나 참으로 다행이로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업력과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심이 수련의 발목을 잡았다. 수련을 시작하면서부터 무엇에 집착하면 무엇이든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신이 되었을 때, 남자 아이기를 집착했지만, 딸을 출산했고, 애가 유치원 다닐 때 고쟁(古箏)을 사주고 가르쳤지만 정작 경연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나의 집착으로 몇 년을 더 가르쳐서야 마침내 시합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속으로 ‘딸이 연주를 잘해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할 것이다’라고 기대했지만, 연주솜씨가 평범해서 동상에 그치고 말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딸의 성적에 대해서 집착했지만, 가져오는 성적표는 기대 이하였으며, 또 딸의 시력에 집착한 결과 어릴 때부터 안경을 쓰게 만들었다.
모든 일이 내가 뜻한 대로 되지 않자, 승부욕이 강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내려놓고 타협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강한 승부욕은 첨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이미 그것에 대해 똑똑히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돈을 좀 많이 벌어서 집을 잘 안정시켜 놓으면, 나는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나는 다시 도를 닦겠다.’ 나는 당신이 망상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간섭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지할 수 없다. 아내와 자식, 부모형제를 포함한 그들의 운명, 그것을 당신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1] 나는 스스로 오성이 낮음을 깨달았다. 딸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거듭되는 심성마찰에서도 ‘구하지 않는다’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엄마로서 딸에게 해야 할 책임을 다하면서, 생활과 학습에서 양성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보살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적이 좋을 땐 격려해 주고 인정해 주며, 성적이 좋지 않을 때도 나무라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명예심, 바로 그 좋지 않은 마음이 자신을 교란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결심했을 때 사부님께서 그 패괴된 물질을 제거해 주셨다. 편안하고 기뻤다. 지난날, 딸의 성적표를 들고 노발대발했던 심태는 이제 멀리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속으로 우습기도 하다. ‘전에 왜, 그랬을까?’
(2) 딸이 내 마음의 용량을 넓혀주다
딸의 행동은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동작이 느리고, 게으르고, 게걸스럽고, 예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딸은 나에게 엄격했다. 식사할 때 소리가 크면 안 되고, 자기가 식탁에 앉기 전에 먼저 식사를 해도 안 되고, 반찬은 뒤적거리지 말고 곧바로 집어가야 하며, 젓가락으로 한번 건드린 반찬을 꼭 집어가야만 했다. 만약 내가 건드렸던 반찬을 집어가지 않으면, 딸은 눈살을 찌푸려 화를 내며 그 반찬을 냉큼 집어 내 밥공기에 넣어준다. 밥상을 차려 놓고 딸을 몇 번 불러도 오지 않아 내가 먼저 먹고 있었는데 뒤늦게 온 딸이 내 밥공기와 젓가락을 빼앗으며 소리쳤다. “내가 식탁에 오기 전에는 누구도 먼저 식사하지 말아요!”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바쁜 일을 마치고 겨우 음식을 마련해서 식사를 하려고 하면, 딸은 물을 가져와라, 국자를 달라는 등등 5, 6가지의 이것저것의 심부름을 시키기 일쑤였다. 한번은 딸이 식탁에 앉자마자 물었다. “내 젓가락은?” 나는 딸의 밥공기 옆에 놓여 있는 젓가락을 보고 말했다. “옆에 있지 않느냐?!” 그러자 딸은 그 젓가락을 바닥에 던지며 화를 내며 말했다. “이 젓가락은 제대로 씻지 않아 더러워. 나는 이 젓가락을 안 써!”
그럴 때는 사람마음이 일어나서 참으로 슬펐다. 딸이 철이 없고 예의가 없다고 생각되어 상심했고, 심지어 큰소리로 질책하기도 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나한(羅漢) 그 층차에 도달하면 어떤 일과 마주쳐도 다 마음에 두지 않고, 속인 중의 모든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며, 언제나 싱글벙글하면서, 아무리 큰 손해를 보아도 싱글벙글하며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과위에 도달한 것이다.”[1] 끊임없이 깊이 법 공부를 하며 법에 대한 인식이 점차 제고됐다. 원래 나의 마음이 너무 좁았으므로, 마땅히 마음의 용량을 넓혀야 했다. 나는 모든 걸 깨닫고 그런 모순 앞에서 마음을 안정시켜 고인 물처럼 조용하게 유지하고 그것에 따라 움직이지 않자, 딸도 더는 말썽을 피우지 않게 되었고, 막돼먹게 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딸이 게으른 것은 내가 게으른 것이다. 지금까지 3시 50분의 아침 연공을 견지하지 못한 것이다. 딸에게 식탐이 있는 것은 내가 식탐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입의 집착이 없도다.”[2]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때로 고기를 먹으면 배가 아팠지만, 한동안 지난 후에는 그렇지 않아서, 딸을 핑계로 탕수육을 만들어 먹는다. 딸이 예의가 없는 것은, 내가 명령식으로 딸에게 말하기 때문이었다. 딸을 존중하지 않았다. 딸이 느린 것은, 나에게 조바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본을 찾은 것이다. 모든 것은 집착심이 만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배척하고 개변했다. 내가 모순에 부딪힐 때 고통스럽고, 또 슬픔을 느꼈는데, 내가 그것에게 끌려가지 않고, 그런 속인의 마음에 이끌려가지 않을 때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1]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3) 선을 수련해 내야 대자비심을 수련해 낼 수 있다.
우리 아파트 입구 출입문이 망가져서 아무나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장사가 잘되는 식당이 있었고, 그 식당 후문과 가깝게 접해 있었으므로 식당 종업원들이 후문을 자주 드나들며 휴식할 때는 우리 아파트 입구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워 꽁초를 수북이 던져놓고, 가래침을 함부로 뱉는 등 환경을 아주 지저분하고 더럽게 만들어 놓았다. 나는 처음 그런 꼴을 보고 아주 화가 났다. 맘속으로 그들을 경멸하면서 질이 낮은 인간들이라고 생각 했다. 매번 귀가할 때 마다 그런 지저분한 꼴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인상을 찌푸리며 망가진 한쪽 문을 힘껏 닫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언제나 자기마음대로 들어와 담배를 피우고 가래침을 뱉고, 심지어 종이박스를 바닥에 깔고 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날 아파트에서 내려와 그들 옆을 지날 때 갑자기 그 사람들이 가련해 보였다. 그들은 피곤하고 힘들어도 휴식할 마땅한 곳이 없기 때문에 이곳 땅바닥에 누어 자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 열 몇 시간씩 일하고, 또 자주 늦은 밤에 퇴근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 나는 문을 닫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들에게 마음대로 들어와 휴식하게 하자. 담배꽁초와 가래침을 내가 치우면 된다’ 내가 진정으로 그렇게 타인을 위해 생각하자, 후천적으로 형성된 위사위아(爲私爲我)의 마음이 제거됐고, 환경도 따라서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페트병에 담배꽁초를 담고, 가래침도 뱉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늘 자비롭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1] 전에는 그들을 만나면 얼굴을 붉히며 화를 냈지만, 지금은 나무라는 기색도 없이 그들을 미소로 대할 수 있었으므로, 그들도 나를 보면 먼저 인사를 했다. 내가 그들을 위해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할 수 있는 기초를 다져놓은 것이다. 나는 이 일을 통해 선에 대해 더욱 깊은 인식을 하게 되었다. 선은 입장을 바꿔서 타인을 먼저 생각하며, 무조건 구하지 않으며, 무슨 보답도 받지 않고 감당하는 것이니, 그 것이 무사무아(無私無我) 생명의 본성인 것이다.
2. 대면으로 진상을 알릴 때 환희심, 과시심, 쟁투심을 제거하다
나는 일 년 내내 사람과 직접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는 것을 위주로 하며, 그 다음 부차적으로 진상전화를 하고 있다. 수련생의 도움으로 2015년 가정 자료점을 건립한 후, 대면해서 진상을 알려 삼퇴를 시켜주며, ‘삼퇴와 평안’,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 ‘밍후이주간’등 전단지를 배포한다. 매일 일정한 시간을 이용해 직접 진상을 알려 2, 3명에서 많게는 몇 십 명씩 삼퇴를 시킨다.
진상을 알리는 과정에서 심태가 좋지 않으면 순조롭지 않다. 즉시 자신을 찾고 심태를 바로 잡아 사람을 구하는 기점을 바로 세워서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을 찾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마다 다 탈퇴한다. 한번은 연달아 몇 사람을 탈퇴시켜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환희심이 생겼다. 속으로 ‘모 수련생을 만나면 자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때 60대 장사꾼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몇 마디 하자, 단번에 큰 소리로 내게 좋지 않은 말을 했다. 내가 그와 쟁론하려고 했을 때 사부님 말씀이 떠올랐다. “강변(強辯)에 부딪혀도 다투지 말지니, 안으로 찾는 것만이 수련이리라, 해석할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지거니, 마음 비워 집착 없으면 명견(明見)이 나온다네.”[3] 내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즉시 심태를 바꾸어 발정념으로 환희심, 과시심, 쟁투심 등의 물질을 해체시켰다. 다시 진상을 알릴 때는 환경이 순조로워졌다.
대면해서 진상을 알릴 때는 단정한 옷차림도 중요하고 또 적당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가사와 도포 같은 그런 옷차림이 아닌, 속인의 옷차림으로 속인 중에서 진상을 알리기 때문에 속인들이 쉽게 진상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옷차림이 적합하고 가급적 세련돼야 한다. 점잖지 못한 옷을 입거나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해서도 안 되고, 너무 허술하거나 초라한 옷을 입어도 안 된다. 예의 있게 호칭하되, 자신 있는 눈빛으로 대한다면,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 다른 공간의 바른 신이 돕고, 사부님께서도 가지해 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적은 노력으로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인연 있는 사람이 진상을 듣고 나서 삼퇴를 한 후 나에게 감사를 표할 때, 나는 그에게 “우리 사부님께 감사하라”고 일러 준다. 그렇다. 나는 신의 사자다. 사부님께서 안 계신다면 나의 모든 것은 없는 것이다. 나는 단지 몸만 움직이고 입만 움직일 뿐인데, 사부님께서 나에게 큰 위덕과 영광을 주신 것이다.
한번은 길가에서 한 중년남자에게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진상전단지를 진지하게 읽고 나서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살아있는 부처에요. 당신이 나를 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움찔했다. 몸과 마음은 더없이 편안하면서도 한편 책임감으로 어깨가 더 무거워진 것 같았다. 아직 많은 중생이 우리가 구도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대법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10여 년 수련의 길을 뒤돌아보면, 온몸은 업력으로 가득했고, 마음은 집착심으로 가득해서 타인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각박하게 대했다. 그러나 지금은 명리를 담담하게 보며, 타인을 선하게 대하고 누구로부터 총애를 받거나 모욕을 당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태연하고 침착한 그런 수련자로 변했다. 매 한걸음 걸을 때마다 아주 간고했는데,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의 과정을 통해 집착심을 서서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부님께서 내가 한관 한관을 넘을 때 마다 보호해주시고 가지해주셨다. 내가 미혹될 때 점화해 주셨고, 득의양양해 할 때 일깨워주셨다. 관을 넘지 못해 마음이 아플 때는 자비롭게 보살펴 주셨고,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도록 가지해 주셨다. 사부님께서는 자주 내 귀에, 가는 방향을 말씀으로 인도해 주셨다. 나는 법을 위해 왔다. 나는 대법제자다. 이 후 나는 더욱 정진하고 사부님의 자비 고도를 저버리지 않겠다. 사부님께서 노고가 적기를 바라고, 기쁨과 위안이 더 많으시기를 바란다.
주:
[1]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
[2]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 ‘홍음-도 중에서’
[3]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 ‘홍음3-논쟁하지 말라’
원문발표: 2016년 12월 1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13/33856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