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월 25일, 밍후이에서 ‘2016년 세계 파룬따파의 날 원고 모집 통고서’를 받은 후,
2월 26일, 우리 셋방 주인이 갑자기 주택을 팔아버렸고 새 주인이 5월 1일에 결혼해 입주하기로 해서 우리는 빨리 이사를 가야 했다.
2월 27일, 28일, 나는 외현(外縣) 대법제자 집으로 자료를 보내고 원고 소재를 수집하기로 결정했다.
3월 1일, 2일 사부님의 신경문 ‘홍음4’를 받았고, 법공부하고 인쇄 일을 상의했다.
3월 3일, 이사하려고 집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3월 4일, 남편이 길을 걷기가 어려워 나에게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시댁에서 전화했다. “무릎이 붓고 아파서 위층으로 올라가기 힘들어.”
3월12일, 새 집을 구해 이사하려고 물건을 정리했다.
3월 19일 이사했다.
……
생사의 고비를 넘다
침대를 놓으니 살 곳이 있게 됐다. 120차를 불러 남편을 데려왔다.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대소변도 침대에서 보았다. 이 며칠 사이에 이 모양이 됐다. 무슨 원인일까? 알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하자고 해도 그는 가지 않고, 의사를 청해다 치료하자고 해도 싫다면서 나에게 이렇게 시중만 들라고 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를 시중들어 본 적이 없는지라 그야말로 허둥거리기만 했다. 집안은 엉망이고 이삿짐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다리는 부어서 아래 위가 굵기가 똑같았고 신발도 신기 어려웠다. 집 안팎 일을 도와주는 사람은 내 여동생이었는데 그녀 역시 대법제자다. 하지만 이 며칠 간 직장에서 그녀 일자리를 회복해주겠으니 그녀에게 반드시 이른바 대법 수련을 포기한다는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그녀가 쓰지 않으니 학교는 그녀를 시 ‘610’에 고발했고 ‘610’은 아파트 단지에 지시를 내려 집에 가 소란을 피우게 했다. 매부는 나에 대해 여태껏 공손하고 예의가 발랐는데 이번에는 내 앞에서 나를 증오한다고 했다. 내가 여동생을 이끌어 대법 수련을 하게 했기 때문에 온 집안이 이렇게 여러 번 소란과 박해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1]였다. 아, 그러니 원고를 쓸 마음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혼란스러웠다.
다른 공간에서 들어온 정보는 너무 명확했다. 죽음, 나에게 죽으라는 것이고 남편과 함께 죽으라는 것인데 안방에 하나, 큰 방에 하나씩이라는 것이다. 조각조각 정보들을 나에게 보낸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은 이미 침대에 굳어져 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생사를 내려놓아야 하거니와 또 구세력의 배치를 단호히 부정해야 한다. 남편은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이고 대법이 구해낸 생명이다. 이 몇해 동안 박해로 그는 나와 함께 무수한 고생을 했다. 게다가 염이 아주 바르니 그는 반드시 법정인간 그날까지 걸어가야 한다. 밤에 나는 여러 번 남편 방에 건너가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아직 숨이 붙어있는지지켜보았다.
다른 공간은 너무 난잡하고 모두 진득거리는 것이었는데 발정념해도 미처 어쩔 수 없었다. 수련생을 불러 도움을 청하려 해도 모두들 다 바빴다. 한 학생 수련생이 찾아왔는데 그녀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넉넉하기에 나에게 발정념을 해주기를 바랐다. 교류를 마치고 막 마당을 나서다가 새로 산 그녀 차가 긁혔는데 교란이었다. 오후부터 나는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여동생과 함께 발정념을 했으나 완화되지 않았다. 여동생은 내 다리의 통증을 조성한 요소가 너무 오래 되고 복잡한 것을 보았다. 저녁 때 고통이 더 심해지고 배가 경련을 일기 시작했으며, 사지가 마비되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으며, 피가 머리로 쏠리고 목마저 다 뻣뻣했다. 다른 공간에서 보내온 정보는 의심할 나위 없이 죽음이었다! 나는 부정하고 항쟁하며 사부님께 요청을 드렸으며 수련생들에게 전화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막 퇴근했다. 내 도움과 요청을 받고부터 10여 명 수련생이 나에게 발정념 해 밤 10시 반이 돼서야 조금 나아졌다. 그 사이 사악은 나를 박해해 죽일 수 없음을 보아내고 악독하게 말했다. “죽지 않는다 해도 너를 마비시키겠다!” 부정! 무수한 부정을 했다. 나는 사부님의 가호로, 수련생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이 생사의 관을 넘겼다.
모두들 돌아갔다. 이 한차례 격전을 거친 후 나는 너무 지쳤다. 비록 아직도 간헐적인 통증이 있긴 했지만 침대에 쓰러져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었다. 그런데 내 이곳에서 발생한 일체를 남편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이 대재난을 넘겼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을 만나게 됐는가? ‘5.13’ 세계 파룬따파의 날은 세상 모든 사람이 함께 경축한다. 수련생이 하는 말이, 그녀가 원고를 쓰니 모든 것이 그녀에게 길을 비켜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 뭇 신들이 모두 길을 인도해주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큰, 이렇게 집중된, 이렇게 각종 형식의 교란을 만났는가? 안으로 찾자, 무조건적으로 안으로 찾자. 이는 내가 반드시,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이다.
누락을 닦아버려야
남편을 데려온 후 겪어야 할 첫 번째 곤란이 바로 소변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환자를 시중든 적이 없었고 양쪽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나는 일하지 않았기에 어떻게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더럽고 냄새 나고 구역질이 나 너무 짜증스러웠다. 더러워진 물건을 나는 일률로 씻지 않고 버렸다. 하지만 그는 기저귀를 쓰려 하지 않고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침대에 싸버릴 테니 당신이 어쩌는지 보겠어!” 마음이 내킬 때면 내 아명을 부르고, 화가 날 때면 별명을 부르면서 한두 번 안에 듣지 못하면 곧바로 욕설이 나온다. 어찌 이렇게 살겠는가? 내가 어찌 이런 시달림을 당하겠는가? 이 몇해 동안 박해를 당하면서 각종 치욕을 다 당했지만 이런 욕설은듣지 못했다. 이 울안에 사는 사람은 모두 대학 교수여서 이사 올 때 이웃에게 신분을 알려주었는데 이렇게 욕설을 퍼부으면 이웃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그래서 나는 문을 꽁꽁 닫았다. 그런데 그는 밤중에 이렇게 울고 외치고 하면서 타이를수록 더 기를 썼다. 식사도 그의 입에 맞지 않으면 단식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권해도 소용없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여태껏 만나본 적이 없는 일이다. 그 마음이 일어나면 억누르고, 일어나면 억누르는데 참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어떻게 할 것인가? 환자와 같아서는 안 된다. 그는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그러는 것이다.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서 나는 ‘홍음’을 외우고 법을 외웠다, 그 날 내가 “집착을 남김없이 수련하면 고진감래라 진짜 복이로다”[2]를 외우자 가슴이 꿈틀했다. 지금 나에게 닥친 것은 금생에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더럽고 냄새 나고 구역질나며 짜증스러운 문제에서 수련해 본 적이 없다. 이것이 바로 누락이 아닌가! 그러므로 구세력은 이러한 틈을 타고, 이러한 번거로움을 빚어낸 것이다. 나는 자신 수련의 부족함을 아는 한편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했다. 누락이 있지만 나는 법에서 수련하고 사부님께서 책임지고 계시므로 나에게 누락이 있다는 구실로 중생을 박해해 나에게 번거로움을 빚어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남편에 대한 나의 태도도 변화되고 있었다. 그날 밤중, 꿈속에서 갑자기 그의 고함소리를 들었다. 나는 맨 발로 그의 방에 달려가 전등을 켜니 그가 하반신을 벌거벗은 채 바닥에 서 있었고 바닥에 질펀하게 싼 오줌을 내가 밟았다. 남편은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말했다. “나 침대에 싸지 않았어.” 나는 닦으면서 그를 격려해 주었다. “발전이 있네요, 바닥에 누면 닦아내기 쉽지요. 더 좋아지면 우리 같이 화장실에 가요.” 내가 닦아버려야 할 이 마음을 제대로 찾아내니 남편도 재빨리 변했던 것이다. 며칠 후 그는 스스로 생활할 수 있었다.
아직도 질투심이 있었다
하루는 한 수련생이 자료를 가지러 와서 집안 형편을 보고 나에게 말했다. “언니, 찾아보세요, 남편에게 질투심이 있는 게 아닌가요?”, “질투? 그에게 뭘 질투한다는 거냐?” 나는 몹시 이상했다. “내가 말하긴 좀 거북한데 아무튼 찾아보세요.” 수련생이 지적하리라고는 의외여서 어쨌든 잘 생각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질투라, 뭘 질투한단 말인가? 무엇이 나를 질투하게 하는가? 도통 모르겠다.
그날은 예전에 알던이웃이 하이난에서 전화를 걸어부부가 함께 해외 관광을 가자고 했다. 이게 어찌 가능할 일인가! 그가 아프지 않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둘은 별로 동행하지 않는데 하물며 그렇게 먼데로 말이다! 눈앞에 그들 부부가 함께 여행하면서 즐거워하는 낭만적인 장면이 나타났다. 홀연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질투, 이것이 질투 아닌가? 남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으니 질투가 난 것이다. 남편이 나에게 줄 수 없는 것, 내가 부러워하고 바라는 것이 남에게는 있다는 것을 질투했고, 내가 바라는 것을 그는 줄 수 없다는 것을 원망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원망을 나는 줄곧 닦아 버리고 있지만 은폐된 질투심은 여태껏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때문에 질투하게 됐다는 것에 줄곧 머물러 있으면서 오히려 그에게 없지만 남에게는 있는 것 역시 나를 질투하게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한 가지 마음으로서 표현이 다를 뿐이다. 계속 찾아보니 뒷면에는 그렇게 많은 것이 숨어 있어 여태껏 건드려지지 않았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부부라면 마땅히 금슬이 처음처럼 좋고, 인생의 지향점이 서로 맞으며, 서로 호응하고 한 마음이기를 바라고 상상했다. 동시에 생생한 영상과 장면을 상상했지만 흔히 이장면은 오히려 빈번히 깨져 버려 흔적도 남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나는 마음이 썰렁할 때면 그들 부부가 함께 나가고 함께 들어오면서 함께 지내는 것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래오래 시간이 흘러 부러움은 다시 질투로 변했고 나는 이미 혼자 있고 혼자서 오가는데 습관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나에게 사람 마음이 있고 깊이 숨은 질투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질투는 또 사람의 것인 정(情) 속에서 파생돼 나온 구체적인 표현이다. 얼마나 두려운가! 다행히도 책벌레인 그를 만났기에 나는 얼마나 많은 로맨틱한 상상을 제거해 버렸고, 얼마나 많은 끝없는 상상을 부숴버렸으며, 얼마나 많은 부러움과 질투를 소멸했던가. 만약 내가 이른바 인생의 행복과 사랑에 대해 추구하고 상상만 했다면 진작 정신병에 걸렸을 것인데수련할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도 그가 나에게 수련 전과 수련 과정 중에 조금 조금씩 희망을 걸지 않게 했기에 많은 집착을 버리게 했던 것이다. 정말로 남편이 고마웠다.
진정으로 중생을 책임지다
오랫동안 함께 살지 않았더니 그가 많은 면에서 괴상야릇하고,말을 해도 중심이 없으며, 눈빛도 정상이 아님을 발견했다. 나는 그저 병에 시달려 그럴 것으로 생각하고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말했다. 20여 마리의 원숭이를 안고 온 밤 놀았는데 정말 재미있었다면서 멸종위기 동물이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동물 부체가 그를 해치고 있음에 놀라 깨어났다. 그러기에 병에 갑자기 걸리고 사람이 급격하게 여위며, 행위와 언어가 다 정상이 아니었구나. 그런 좋지 못한 것들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나는 즉시 발정념으로 남편 공간장의 모든 좋지 못한 것을 제거했다.
사악은 일부 좋지 못한 것을 이용해 그를 해쳤고 그를 박해하는 목적은 나를 박해하려는 것임을 나는 그것들을 제거하는 과정에 서서히 알게 됐다. 구체적인 박해 방식은 ‘병(病)’적인 상태로서 우리 둘을 죽이려는 목적이었다. 수단은 마찬가지로서 우리 둘은 동시에 손발이 저리고 다리가 아프며, 대량의 음기를 체내에 넣는 것인데 그 형세는 죽지 않으면 마비에 걸리는 것이었고, 다른 공간에는 관 두 개와 휠체어 두 개를 준비해 놓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웃어버렸다. 나는 구세력에게 말했다. “너는 너무 나쁘다! 사부님 정법을 파괴하고, 대법제자 및 가족을 박해하면서 중생구도를 교란하는데 그게 어떤 죄냐?! 위에 있을 때 나는 사부님과 약속이 있었다. 사부님을 따라 정법하면서 내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사명을 완수할 것이며 어떠한 장애든 모두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나를 중도에서 포기하게 해 육신이 끌려가게 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생각하는 것마저 죄가 되고, 하는 것은 더욱 죄이며, 박해를 통해 구도하려는 중생으로 대법제자를 망치려는 것은 죄에 죄를 더한 것이다! 지시하고 이용당한 사람은 일률로 소멸이다!” 나는 발정념 시간을 연장하고 횟수를 증가했으며, 또한 수련생들께 발정념을 요청했다. 공간장은 재빨리 밝아졌다.
3월 28일, 원고를 쓰기 시작했고 즉시 좋은 상태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 나는 더욱 분명히 알게 됐다. 대법제자는 가정에서 가족을 보살피는 것을 포함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대법제자는 수련자이며, 어떠한 환경이든 모두 우리가 수련하는 마당이고, 더욱이 잘라 버리기 어려운 가족 정은 바로 이 마당에서 연마해야 한다. 대법제자는 더구나 정법(正法)하는 사람으로 사부님을 따라 정법하며 일체 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 잡는다. 바른 요소에 책임지고 진정으로 중생에 책임지는 이것은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사명이다. 나는 남편이 아주 바른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생각 밖에도 구세력의 변이와 부패로 사악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남편은 속인이고 아주 취약하다. 내가 그를 책임지고 나쁜 물건을 청리해주지 않는다면 사악에게 넘겨주어 함부로 해치게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나는 속으로 묵묵히 남편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너무 소홀해서 당신을 고생시켰어요!
근본적인 집착을 찾아내다
남편이 박해당한 데는 나의 책임이 없는가? 여러 번 안으로 찾았지만 그래도 나는 부정했다.
나는 누가 돈이 있어 얼마나 큰 벼슬을 하는지에 개의치 않았고 먹고 마시고 옷단장을 하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명성에 대해서는 아주 중하게 보았다. ‘기러기는 날아가면 울음소리를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좋은 이름을 남긴다’는 ‘고훈’은 아주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심어졌다. ‘몸을 힘들게 할지언정 낯 뜨거워지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내가 사람이 되는 신조가 됐다. 반평생 가운데서 여러 번 자발적으로 벼슬할 기회를 포기하면서 한 마음으로 학술 및 전문 기능 방면에 노력을 들였기에 중년에 이르러 얼마간의 수확을 얻었다. 나는 내 추구와 가치 표준으로 그를 격려해주었고 이 점에서는 그야말로 손발이 맞았다. 그의 연구 개발과 홍보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지불할 수 있었다. 결혼한 지 35년이 되도록 그의 돈 한 푼도 나는 쓰지 않았고많은 빚을 갚아주었고 가사는 전부 내가 담당하면서 그에게1분의 시간이라도 남겨 주어 지식을 전달하고 과학 연구를 하게 했으며, 아이는 전부 내가 키웠다. 딸은 30여 살이 됐으나 아버지와의 감정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아빠가 그녀에게 남겨준 기억이 너무도 적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날 병에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까지 나는 계속 그랬다. 그간의 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명성, 성취였다! 그야말로 생명으로 ‘인생신조’를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희로애락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수련을 한다고 했지만 역시 이 집착을 지니고 있었으며 범위를 이동시켜 대법제자 단체 중에 있는데 불과할 뿐이었다.
수련에서 나는 한층씩 인식하면서 담담히 내려놓았지만 오히려 이는 내 근본 집착임을 의식한 적이 없었다. 사부님께서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란 경문을 발표했을 때 나는 마침 박해를 당해 노동교양소에 갇혀 있었고, 급급히 읽은 후 내가 입문할 때는 건강을 위해서였고 수련 후 몸이 좋아져 더는 나에게는 집착하는 것이 없다면서 그저 이렇게 대충대충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원인으로 나는 병을 얻었을까? 자신의 신체를 볼품없이 만든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근본 집착이고 게다가 지금에야 인식하게 됐던 것이다. 비록 각 층차에서 끊임없이 수련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는 남편의 인생은 불우하지만 그 중의 얼마는 내 근본 집착으로 촉성된 것임을 의식했다. 그의 오늘날 고난의 얼마는내 근본 집착의 요소가 아닌가? 나의 번거로움, 고통을 초래한 그런 업력 역시 자신이 늦도록 깨닫지 못하고 닦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대번에 집착의 뿌리를 찾았다. 마치 내 집착으로 조성된 업력으로 뒤덮인 면을 느낀 것 같았다. 내가 근본 집착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는가. 사부님 정법에, 중생구도에 얼마나 큰 장애를 가져다주었는가. 나는 고통에 겨워 깊이 머리를 파묻었다.
당(黨)문화의 극단적인 인식에서 뛰쳐나오다
수련 전 남편은 나의 백마 탄 왕자였고 그의 무엇이나 다 좋게 보였으며 전부 다 옳은 것 같았다. 그야말로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나 다 버릴 수 있었다. 그는 수련하지 않긴 했지만 박해 중에서는 아주 올발랐다. 하지만 이 몇 년 동안에 무엇이나 다 좋지 않고 그의 전신 모두 결점으로만 보이면서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감정상 단절된 감이 들었는데 실질로는 감정상의 혐오여서 그도 나와 함께 있기를 싫어했다. 나는 이건 얼마나 홀가분한 일이고 얼마나 많은 번거로움을 덜었냐고 생각했다. 최근 사부님은 해외 설법에서 대륙 대법제자가 당문화에 습관된 문제를 언급하셨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당문화 독주(毒酒) 속에 잠겨 자랐으면서도 당문화의 중독된 자신의 표현을 모르고 있었다.
그 며칠 동안 ‘해체 당문화’를 반복적으로 듣고 나서야 남편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극단적이었음을 의식하게 됐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심정이 우울했고 또 다른 공간의 교란도 있었다. 사람이 신을 믿지 않으면 좋지 못한 물건에 좌우지되지만 그는 능력이 없어 박해 당하는 일을 사당 법률에 의거해 해결하려 했다. 타일러도 듣지 않으니 얼마나 가련한가. 사람이 되면 그야말로 길이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박해 속에 있었지만 나는 뛰쳐나올 수 있었고 그는 뛰쳐나오지 못했으며, 나는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그는 내려놓지 못했으며, 나는 법에서 미래를 보았지만 그는 사람 속에 서서 미래를 보지 못했다. 사람은 너무 가련하다. 나는 극단적인 사유에서 나와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그를 대하면서 사부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상상해 보았다. 생명의 내력으로부터 보고, 지나온 역사 전 과정으로부터 보며, 다시 현세의 전 과정, 더욱이 대법이 널리 전해질 때의 태도, 박해 시 대법과 대법제자에 대한 태도를 보고, 그 생명의 진실한 태도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사악이 배치한 시기의 행위를 보았을 때에야 나는 생명에 대한 사부님의 마음을 깨닫게 됐을 뿐만 아니라 기회를 주시는 것을 소중히 여겼다. 나는 대번에 원래의 애정의 각도나 당문화의 극단적인 사유 방식으로 남편을 보던 상태에서 뛰쳐나와 대법의 각도에 서서 한 생명을 보았다.
그를 소중히 여기자. 그는 그가 대표한 세계에서 온 것이다. 그가 그렇듯 많은 고난을 겪은 것은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인데 어찌 극단적인 사유 방식으로 그를 보겠는가? 이로부터 나는 자신이 어느 일에 대한 인식과 처리 방식에서 극단적이었는지 찾아보았다. 모두 있었는데 의식하지 못한 것이 관건이었다. 극단적인 인식 및 방법은 상대방을 해치지 않았는가? 모두 서로 해친 것이 아닌가? 전 대륙은 사당의 통치에 있으니 극단적인 사유의 지배로 서로 해치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 가정으로 축소한다면 내가 남편을 상처 준 것이 아닌가? 답안은 긍정적이었다.
자비의 눈물
금생의 남편은 너무 고생스러웠다. 어릴 때 집안 형제자매들은 모두 그를 업신여겼고 대학에 다닐 때는 식당에서밥을 먹다 음식물 중독에 걸려 아주 심한 위장병을 얻게 됐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는 선생님들을 이끌고 기술개혁을 했지만 학교 지도자는 약간의 돈을 탐오했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스스로 회사를 운영하니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 그의 기술을 팔아먹었고 내가 박해당한 후 악인은 그가 기술로 파룬궁을 도와준다고 의심하고는 그의 회사를 수색하겠다고 하기에 할 수 없이 집에 돌아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몇 해는 전문학교 지도자와 소송을 한 결과 법원 뜰 안에서 벽돌로 머리를 맞았다. 원래 돈이 없는데다 형제자매들은 또 우리 집을 팔아 돈을 나누겠다고 했다. 우리 집과 그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 또 부모님이 늙으시니 보살필 책임을 전부 그에게 떠밀어 놓았다. 곳곳은 모두 해치는 것뿐이었다. 나는 몰래 눈물을 흘렸다. 첫 번째로 그 때문에 흘린 눈물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으로서 묵묵한 것이었다. 아! 나는 그것이 자비의 눈물임을 그제야 알았다. 눈물에는 나의 어떠한 요구도 없었고 단지 구도만 있었다. 중생은 모두 법을 위해 온 것이다. 힘들게 오늘까지 기다렸으니 너무 고생스럽다. 오직 구도만 있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자비는 신의 영원한 상태이다.”[3] 이전에 나는 법으로 가늠하고 인식해 뼈를 깎듯 집착을 내려놓았다면 이번은 다른 한 가지 상태로서 바로 그런 자연적인 것이었고 법에서의 상태였다. 사부님께서는 한 걸음씩 승화하도록 안배하시어 점진적으로 여러 층차의 표준에 도달하게 하셨는데 실천 중에서 승화를 느끼게 하셨다. 나는 “당신의 본성이 돌아오면 당신의 인식 표준이 여기에 있을 것이고 그 표준이 바로 당신 자신이다.”[4]란 이 법리를 알게 됐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천 중에서 법의 상태, 표준과 법에 동화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알게 됐다. 이전에는 늘 환경의 변화만 바라고 자신의 개변은 중시하지 않았다. 자신이 승화하면 원래의 그 층의 입자, 그 층 공간을 초월하고, 자신의 공간보다 낮으면 자연적으로 변화해 좋지 못한 물질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좋은 방향으로 변하며, 일체는 우리를 따라 움직이고, 승화가 빠를수록 외부의 일체 변화도 빠르고 영향을 미치는 범위도 더 크다는 것이다.
맺음말
4월 13일, 원고 마감 마지막 날, 오후 5시가 넘어 결국 한 편을 완수했다. 이 50여일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을 겪으리라고는 예상 밖이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이 말했다. “이발하러 내려가야겠어.” 나는 놀랍게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가능하겠어요? 걸을 수 있어요?” 나는 그를 부축하고 작은 이발관에 갔다. 머리를 다 깎고 나자 그는 곧 정신이 났다. 맞은편은 식당이어서 식사를 하고 나니 힘도 생겼다. 며칠 후 그는 또 법원에 가서 사당과 소송했다. 그의 말로 한다면 “인간세상의 정의는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 속인의 정기이리라.
사부님 감사합니다. 이 투고 모집을 이용한 50일 동안, 가정환경이란 이 용광로는 나를 단련했고 나는 그렇게 많은 ‘첫 번째’, ‘생각 밖의’, ‘여태껏 없었던’ 것을 겪으면서 서서히 법에서 인식을 제고했고 서서히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됐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 ‘홍음-마음고생’
[2]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미혹 속에서 수련’
[3]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3-왜 거절하는가’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2권)’
(밍후이왕 제13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16년 11월 3일
문장분류: 대륙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3/3369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