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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박해사실 문장 용어와 글쓰기 심태를 언급해보겠다

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밍후이왕의 ‘박해 사실 문장 용어와 글쓰기 심태에 주의하자’(이하 ‘주의’로 약칭함)를 읽고 공감했다. 이 방면의 체험에 대해 나도 몇 번이나 수련생들과 토론 연구하려 했지만 본인의 수련 상태가 너무 부족해 줄곧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오늘 수련생의 문장에서 격려를 받고 마침내 자아 보호, 나태함 등 사람 마음에서 걸어 나오기로 결심하고 글을 쓰게 됐다.

모 지역의 수련생 박해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진상 편지를 부치기 위해 나는 이 지역에서 최근 불법적으로 수련생을 법정 심문한 상세한 정황을 알아보려고 밍후이왕에 접속했다. 몇 편의 관련 문장을 본 후 콧마루가 시큰하고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이 두 사건을 겨냥해 이전에 수련생들은 진상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 편지를 쓰며 릴레이 발정념을 하고 근거리 발정념 등 많은 일을 했지만 두 차례 불법적인 재판 과정을 보면 박해가 점점 심해졌다. 그 속에 우리 전체 및 개인이 수련해 닦아야 할 요소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박해 문장을 쓰는 용어와 심태도 토론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박해를 폭로하는 문장 중에 ‘음험하고 간사하다’, ‘불량배’ ‘사기꾼’ ‘도덕성이 문란하다’, ‘서로 결탁해 나쁜 짓을 일삼다’, ‘무지막지한 농촌 여자’라는 단어로 법원 공무원들을 묘사했다. 우리는 밍후이왕 문장은 박해에 참여한 사람도 본다는 것을 다 안다. 그럼 관련인이 보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우리가 그들을 사기꾼, 불량배로 정했으니 변호사를 구타하고 불법적으로 변호사를 내쫓고 발정념하는 수련생을 납치하는 등 이런 일을 그들이 무엇인들 하지 않겠는가? 나는 ‘주의’ 문장의 관점에 동의한다. “박해를 폭로하고 악행을 저지하는 글쓰기 방법은 불만을 품지 말고 구체적인 사실을 진술하면서 전형적인 사례를 일반화하는 용어를 써야 한다.”

법에서 우리는 죄악이 극대한 소수 사람 이외의 세인은 모두 우리가 구도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법은 우리에게 사람을 구할 때 사람의 집착에 따라 말해야지 사람의 부정적인 요소를 자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수련생 말에 따르면 변호사도 우리에게 진상을 알릴 때 부정적인 요소를 자극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박해를 폭로하는 문장을 쓰는 목적은 그들의 악행을 세상에 폭로해 세인에게 그들이 한 나쁜 일을 알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목적은 박해를 저지하고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수련생과 이 문제를 교류했는데 어떤 수련생은 그가 그렇게 악하기 때문에 마땅히 이렇게 써야 한다고 여겼고 어떤 수련생은 대법은 자비로움과 위엄이 다 있기 때문에 대법의 위엄의 일면을 표현해 대법을 수호해야 한다고 여겼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자는 이번 박해를 사람이 사람에 대한 박해로 본 것으로, 사악한 요소가 사람을 조종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조종된 사람이 나쁜 일면이 있어 조종되긴 했지만 우리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은 사람의 양심과 선량함을 깨우쳐주어 사람 본성의 일면이 나오게 하고 대법을 바르게 인식하고 구도 받게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일면으로 대법의 위험을 수호할 수 있겠는가? 어려울 것이다. 수련인의 원망도 증오도 없는 자비롭고 평온하며 사심 없이 남을 위하는 경지는 모든 사악한 요소를 해체할 수 있다. 이것이 대법의 위엄을 수호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용어가 격렬하고 글 속에 깎아내리고 원망하는 말만 쓴다면 사람을 밖으로 미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당(黨)문화의 표현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업력은 속인 중에서 빚어낸 것으로 속인 중의 물질이다. 이것은 그렇게 미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만들 때의 그것은 극히 미시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업력은 섞여 들어갈 수가 없고, 단지 사람의 본성이 매몰되었을 뿐이다.”[1] 최근 몇 년 우리는 우리 지역의 일부 구체적인 박해 사건을 겨냥해 진상 편지를 썼다. 그중에는 교장, 국장, ‘610’인원이 있다. 나는 편지에서 우선 그들의 본성은 선량하다는 것을 긍정하고 좋은 사람을 박해함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들이 거짓말에 속았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진상을 모르는 피해자 위치에 놓았다. 법에서 우리는 확실히 이렇다는 것을 안다. 그 다음 기본 진상을 알리고 다시 구체적인 상대, 사건에 근거해 박해에 참여하면 본인 및 가족에게 주는 이해관계 등을 말했다. 그 결과 비교적 좋은 효과를 거뒀다. 그중 한 사람이 수련생에게 말했다. “편지를 보았는데 괜찮게 썼더군요.”

박해를 폭로하는 문장을 쓸 때 나는 박해에 참여한 경찰을 ‘악경(惡警: 사악한 경찰)’이라고 잘 쓰지 않고 진상을 모르는 경찰이라고 쓴다. 나는 확실히 이렇다고 생각한다. 한 속인이 진정하게 대법 진상을 알면 그는 박해할 용기가 없을 것이다. 아주 악랄한 박해 행위도 나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진술할 뿐 악랄한 단어로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사건의 악랄함 여부는 독자나 박해에 참여한 본인이 결론을 내리게 하면 된다. 법에서 우리는 이번 박해 중에서 진정하게 박해 받는 사람은 세인이라는 것을 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박해가 아무리 험악해도 / 우리는 모두 신의 길을 걷고 있음이라 / 세파에 휩쓸리는 세인이야말로 길 잃은 어린 양 / 위난 중에 신은 우리에게 각자의 지역을 / 구도하라 하네”[2] 우리가 그들을 구도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본다면 그들은 구도 받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련생을 구출하는 효과에도 영향이 미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생각하고 그들이 구도되길 바라는 심태로 글을 써야 한다. 진정으로 박해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성의와 선의를 느끼게 한다면 효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층차가 제한되어 있음으로 법에 있지 않은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2’

[2]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3-누구를 위해서인가’

원문발표: 2016년 11월 2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21/3379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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