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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과학의 관념은 수련의 길에서 거대한 장애

글/ 베이징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한 친구를 보러 갔다. 나는 그가 새롭게 수련의 길로 돌아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가 불교 이론에 대해 터무니없이 과장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사람의 맹목적인 망상이 얼마나 큰 마성(魔性)인지 의식했다! 가장 관건적인 것은 그는 학자가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으로 불교이론을 대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런 실증과학의 방법으로 마치 조금만 검증하면 그는 조금 믿고 조금이라도 검증을 얻지 못하면 믿지 않았다.

이것을 보고 나는 나의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보았다. 요 몇 해 동안 수련 과정에서 나는 매우 불안정하게 걸었고 비틀거리면서 여러 번 곤두박질해 넘어졌다. 매번 표면 원인은 모두 같지 않지만 최종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신사신법(信師信法)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평소 법공부를 하면 법에 대한 이해가 괜찮지만 관건적인 시각이 되면, 고험에 직면하면 사상 중에는 정념이 없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 사람의 염두다. 때문에 일처리 방식은 사람의 방법이며 결국 사람의 길을 걸었고 사람 중으로 돌아왔으며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지 못했다.

나는 20여 년간 학교를 다녔고 강렬한 실증과학 사유가 형성됐다. 무신론의 주입은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전부 거부하고 다른 공간의 현상에 대한 개념이 없으며 사상에 이러한 개념을 용납한다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으며 절대적인 사유습관을 형성했다. 때문에 시련을 만나면 눈앞에 보이는 사실을 특별히 중시했다.(예를 들면 감옥에서 경찰과 악당이 너무 강대해 대항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사실(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내 신변에 있다)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기에(평소 사부님께서 내 신변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해 시련이 올 때면 더욱 생각지 못하고 실증과학의 관념이 나의 사유를 주도했다.) 박해에 직면해 사부님이 생각나지 않고 법이 생각나지 않아 약간의 정념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 어찌 정념으로 박해와 반(反)박해를 저지할 수 있겠는가! 결국 법공부를 해도 법을 얻지 못했고 사유의 기점은 대법의 각도에서 이번 박해와 반(反)박해를 개변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념으로 대하려 생각해도 어찌 될 수 있겠는가?

법공부를 잘하고 수련의 길을 잘 걸으려면 반드시 실증과학이 나에게 씌운 실증되면 믿는 사유 습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상 중, 사람 중에서 양성한 “이렇게 심오한가, 도대체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특히 중국이란 이 특수한 사회 환경에서 사람들은 이미 어떤 사람도 완전히 믿지 못한다. 대법을 배울 때 반드시 자아보호의 관념을 내려놓고 자신을 사부님과 대법에 맡겨야 한다. 착실히 수련을 하는 중, 법에서 형성한 정념으로 고난 중에 나타나는 각종 고험을 대하면 지나지 못할 관이 없다! 설령 생사에 직면해도 우리는 어떠한 유감도 없다. 불법(佛法)을 얻었는데 내려놓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자신을 사부님과 대법에 완전히 맡기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자신이 손해보고 속을까 봐 두려워하고 속인 중의 명, 이, 정(名利情) 이런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실 수련은 바로 이런 것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는 것이고 두려움 자체는 바로 이런 것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신사신법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매 수련인은 사실 각종 신기한 일을 겪었으며 이런 일은 속인에게 나타나지 않는다. 수련을 했기에 불법(佛法)은 이러한 결과를 나타낸다. 우리는 이러한 결과를 우리 개인의 능력에 공로를 돌린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늘의 공적을 훔친 것이다! 우리가 불법(佛法)을 실증하는 것은 옳은가, 틀린가(이것은 실증과학의 태도다). 세인에게 증명하는 것은 바로 불법을 믿고 수련을 했기에 속인에게 있을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대법을 실증)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러면 다시 말해서 당신이 어느 영역에 있든지 간에 당신의 기능이 끊임없이 제고될 수 있는 그것은, 당신이 끊임없이 자신의 경지를 제고한 후의 반영이다. 표현상 당신이 좋은 사람이 되고 있고, 마음을 닦고 있는데 사람의 각도에 입각해서 말한다면 당신이 좋은 사람으로 변하고 있다. 법공부와 안으로 닦음으로써, 당신이 갈수록 잘하게 되면 신은 당신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지혜를 주고 당신에게 영감을 주며, 당신으로 하여금 학습 중에서 많은 것에 명백해지게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더욱더 좋은 것을 창조해내게 하며, 당신의 기술이 더욱 높아지게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초월하게 할 것이다.” “물론 더욱 높은 한 층의 신도 낮은 층에서 물건을 발명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어느 정도 창조해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그들 경지의 제고 중에 용해했다. 그의 경지가 제고될 수 있다면 그로 하여금 지혜가 열리게 하고, 그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성취·창조·상승이 있게 하는데, 상승한 후에 그는 자신은 자신의 도덕이 제고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얻은 것이며, 자신의 경지가 높아졌기 때문에 비로소 이런 제고가 있게 된 것임을 끊임없이 인식할 수 있다.”[2]

때문에 수련의 길에서 우리는 반드시 자신에게서 나타난 일체 초범적인 현상을 사부님과 대법에 공로를 돌려야 하며 팽창하는 자아를 철저히 내려놓아야 한다. 비록 우리는 삼계에서 살고 있지만 나타난 신기한 현상을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하고 또 저렇게도 해석한다. 마치 실증과학이 신기루를 해석하는 것처럼 억지로 갖다 붙여 경우에 어긋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의외로 이러한 해석을 믿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실증과학은 윤회를 해석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찌 이러한 실증과학의 관념을 믿겠는가? 또 그것으로 우리가 직면한, 실증과학으로 실증하지 못하는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악이 우리에게 실시하는 박해를 지도할 수 있겠는가? 또 실증과학으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악이 우리에게 가하는 박해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실증과학의 관념은 우리 수련의 길에서 하나의 거대한 장애다! 이 장애를 내려놓지 못하면 수련의 길에서 우리는 진정한 돌파와 승화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실증과학의 관념으로 중히 보는 것은 사실 보이는 물질이익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갈수록 물질화되고 정신의 승화를 중시하지 못한다. 이것은 실증과학이 사람에게 진정으로 해를 끼치는 점이다! 실증과학은 또 쉽게 수련인이 수련과 심성이 제고되어 나타난 초범적인 현상을 개인의 노력, 분투로 얻은 결과라고 조장하고 있다. 수련으로 놓고 말하면 이것은 하늘의 공적을 훔친 것이며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은 것이며 오성이 낮은 표현이다. 사람으로 말하면 팽창하는 자아를 크게 하고 자신을 파멸시키는 시작이다.

여러 해 동안의 수련에서 나의 가장 큰 감회는 신사신법은 바로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생각하고 실천 중에 자신을 수련하며, 사람 중에 형성된 관념을 시비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지 않는 것이다. 실증과학의 관념을 포기하지 않으면 사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특히 나와 같은 학자는 문제를 사고할 때 매우 쉽게 관성적인 사유를 한다. 실증과학의 틀과 관념으로 수련 중에 부딪힌 문제를 가늠하는 것은 사실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이 각도에서 말하면 과학지식을 공부하는 시간이 길수록 강렬한 실증과학의 관념이 형성되며 착실한 수련 중에서 사부님을 믿지 않고 법을 믿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내가 거의 20년 수련을 한 체득이다. 희망하건대 나와 똑같은 학자 수련생 혹은 과학에 종사하는 수련생에게 도움이 되어 이 완고한 장애를 타파하고 공동으로 제고하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6년 11월 3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1/3/3369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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