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쉬페이옌(許裴晏)
[밍후이왕] 35세에 미국에서 교육박사 학위를 받고 대만으로 돌아와 교편을 잡은 후 나는 각종 종교법문 중에서 찾아 헤맸다. 생명의 진리를 찾고 사람을 구하며 생로병사를 초탈할 수 있는 진귀한 법을 찾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을 구하려는 강렬한 사명감이 있었으나 누구를 어떻게 구해야하는지 몰랐다. 생명을 구하려는 강렬한 심리는 나에게 교육의 길을 걷게 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때 교육이 사람을 구하는 사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곤혹 속에서 방법을 찾으며 한 법문을 배운 후 이어서 또 한 법문을 배웠다. 오래된 불교 중에서 파생돼 나온 각종 종교에서부터 서양종교, 신체, 심령 방면에 이르기까지, 또 도가의 술수치병(術數治病) 방법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 헛걸음을 모두 거쳤다. 어디에서 지명도가 아주 높은 대사가 개강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서둘러가서 들었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비록 금생에 그 진귀한 법을 찾을 수 있을지, 혹은 그 법이 도대체 존재하는지도 모르면서 꾸준히 사처에서 도를 구했다. 삶에서 유일하게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각종 사람을 구도하는 법문을 학습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에게 ‘미륵불은 정법 함에 이 세상에 머물러 창생을 구도한다(彌勒正法 住世普度蒼生)’고 말한 것도 어쩌면 금생이 아니라 몇 백 년, 몇 천 년, 혹은 억만 년 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0년을 찾아 헤매다가 45세가 되던 당시, 나는 밍후이왕(明慧網)에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만난 그 날 자신이 마침내 찾았음을 알았다! 나는 경탄했다.
‘장기간 박해를 당한 파룬궁이 뜻밖에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일 줄이야!’
2014년 2월 말 어느 날, 유즈넷뉴스 중에서 매우 작은 제목 ‘파룬궁(수련생)은 지속적으로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상관없이 타이베이(台北) 101빌딩의 유명한 관광명소에서 정좌해 중국공산당의 박해를 항의하다’가 스쳐지나갔다. 지금까지 이런 뉴스 제목은 순식간에 스쳐지나 가는 장면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어떤 단체가 해마다, 날마다 거리에서 정좌하며 항의할 수 있는가? 게다가 10여 년 동안이나?’라는 일념이 생겨났다.
나는 진상을 찾아내려고 결심했다. 인터넷 키워드 ‘파룬궁(法輪功)’을 검색하자마자 즉시 밍후이왕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내 인생은 개변됐다. 나는 정법(正法)을 찾았다! 나는 내가 정말 사람을 구하러 온 것임을 깨달았다!
학술연구에 종사하려면 반드시 대량의 학술 문헌을 읽고 대량의 학술 논문을 써야 했다. 그래서 내 지식수준은 일반 수준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밍후이왕을 보고 오히려 나는 수련생들이 쓴 문장이 천지를 진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게 함에 경탄했고, 그것과 비교하면 일반적인 학술논문, 특히 인문과학은 대부분이 작가의 명리심, 과시심 등의 작용으로 써낸 것임을 발견했다. 이미 무엇을 추구하는 문장이기에 당연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밍후이왕에서 지식수준이 한계가 있고 심지어 대단히 많은 문맹, 글자를 알지 못하는 연장자가 쓴 많은 체득(비록 다른 수련생이 대필했지만)을 보았다. 그 성실한 어조에서 발산해 낸 바른 에너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두 세 마디였지만 나는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개인생명의 대가로 진실하게 인류의 정법수련 역사의 찬란함을 기록하고 있는데 언어는 쉽고 통속적이었으나 내용은 오히려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그 속인 중의 정밀하고 세심하게 조각한 전문가나 학자의 논문은 오히려 사심 없는 경지에 이르지 못해 사람을 감동시키는 영향력이 부족해, 수시로 써내는 새로운 논문에 의해 파묻히기 마련이었다. 수련생은 과시할 필요가 없었으나 오히려 문장 중에서 사람의 마음을 제고시키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었다.
금같이 반짝반짝 빛을 내는 이렇게 많은 수련마당의 문장을 보고 나는 정말 너무 흥분됐다! 마치 보물지도를 찾은 듯했다! 매일 잠에서 깨기만 하면 얼른 밍후이왕을 읽었는데 해질녘까지 10여 시간 동안 읽었다. 이번 달 문장을 다 읽은 다음 곧 지난달의 것을 읽었다. 나는 매일 많고 많은, 영화 스토리에 비해 몇 백배나 더욱더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하는 파룬따파 수련이야기를 보았다. 그 중 각 업종도 모두 있고 각 연령층도 모두 있었으며, 각종 사회계층도 모두 있었는데 대략적으로 추산하면 수천 명 파룬궁 수련생이 함께 나눈 이야기를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빙산의 일각으로 아직도 더욱 많고 많은 내용들은 발표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수련 중에서 마주친 각양각색의 신기한 경험과 시련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정말 너무 위대함을 깨달았다! 인간세상에서 더 이상 어떠한 단체도 비길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방대한, 전 세계 백여 개 국가에 널리 퍼지고, 현재 인원이 여전히 수 천만 명으로 남아있는 수련 단체는 서로 누군지 모르며 명단이 없고, 조직과 직위가 없다. 연령이 많고 적음, 지식수준, 국적, 오래되거나 새로 입문한 수련생을 막론하고 서로 수련의 층차를 비기지 않고 일률적으로 대법의 초범적인 표준 중에서 엄격하게 자신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련생들은 오히려 일치단결해 천지개벽 이래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진상을 알려 중국공산당의 거짓말에 해독을 입어 세상을 구도하는 불법(佛法, 파룬궁)을 비난하고도 스스로 모르는 세인을 깨우쳐주고 있다. 그들은 말없이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며, 곧 세상에 진리가 나타남을 앞두고, 우주의 정의가 나타남과 동시에 불법을 박해한 많은 악도에게 재앙이 떨어짐을 앞두고, 세인에게 정의와 선량함을 선택해야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있다. 더욱 소중한 것은, 그들은 사람을 구하는 과정 중에 마주친 각 방면의 시련을 모두 수련으로 간주해 고생스럽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심지어 ‘고생을 겪는 것을 보약을 먹는 것으로 여겼다.’(대만 속담)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수련생의 기개구나’
나를 더욱 경탄시킨 것은 이 사람들이 타인을 위해 개인의 안위를 포기할 수 있고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현재 본, 이 세계의 무수한 ‘수행인(修行人)’이라고 자칭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없는 넓은 마음이었다. 이렇게 위대한 수련생들을 양성해내신 그 사부님과 법문은 꼭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의 인류경지를 훨씬 초과한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오늘날 오탁악세(五濁惡世), 도덕이 상실되고 인심이 좋지 않은 현실에서 한 송이 한 송이 연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끝없이 감탄했고 사부님의 자비와 위대함에 대해, 이 수련생들의 용감함과 강인함에 대해 매우 깊은 인식이 있게 됐다. 비록 나는 속인 중에서 존경 받는 사회 고위 지식인이지만 이 수련생들과 비교하면 나는 전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매일 컴퓨터 모니터 중의 수련생 문장을 마주해 찬탄하고 머리를 흔들며 탄식했다.
지금 회상하면 내가 최초에 대법을 얻은 6개월 사이에 흘린 감동의 눈물은 태어난 후 가장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동의 과정도 내 심신을 맑게 정화하는 작용을 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다른 생명을 찬탄하는, 잠시 도달한 ‘무사무아(無私無我)’의 경지였다.
동시에 나는 차츰 무엇이 진정한 자비이고 자비의 여러 경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고위 학술계 중에서 보편적으로 보고, 또 나도 장기간 오염을 깊이 받아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마음’(질투심, 비교하는 마음과 과시심을 포함)은 자비심으로 대체됐으며, 사람의 학식이 높고 낮음으로 그 생명의 가치의 높고 낮음을 논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나는 세간의 각종 수련단체 중에서 오히려 보편적으로 보았는데, 많은 수행인 혹은 단체(출가하든지 집에 있든지 막론하고) 모두 매우 강한 질투심, 과시심이 있었다.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수련의 대 금기를 범하고도 스스로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그들 때문에 매우 비통했다.
나는 예전에 배웠던 각종 수행 법문을 마음속으로 철저히 던져버렸다. 왜냐하면 밍후이왕은 나로 하여금 무엇이 진정한 수련임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것은 착실하게 고생스러운 시련을 겪음으로 심성을 제고해 바꿔온 것으로, 더 많은 주문을 외우고 더 많은 돈을 써서 관정(灌頂)하고, 천목이 열리기를 구한다 해도 수련의 경지는 살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생명의 각성으로, 강철 같은 의지로 용감히 앞으로 나가 바꿔온 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나는 생명의 가치는 인간의 부귀와 빈천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며, 중생은 평등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지금은 밍후이왕을 읽고 나는 마침내 한 사람을 가늠하는 표준은 바로 그의 도덕 자질과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흉금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부처님과 가장 가까운 경지로, 그것이야말로 사람으로 태어난 자랑과 사명이기 때문이다.
(계속)
문장발표: 2016년 8월 1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신수련생마당>대법과의 연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8/12/33248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