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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은 하늘로 돌아가는 길을 깔아 놓았고 서약을 실천하여 사람 구하기에 바쁘네

글/ 허베이 대법제자

[밍후이왕] 1996년은 내가 공청단 간부에 임명된 지 12년이 되던 해였다. 하지만 나는 취미가 다양하여 불교 서적도 보았고 기타 기공도 연마해 보았다. “전법륜” 책을 들었을 때 비로소 무엇이 진정한 수련인지 알았고, 또한 이 수련이 주왠선(主元神)을 수련하는 것이며 천년동안 수도한 사람도 그것을 얻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밤낮으로 책을 보았고, 출장을 가거나 정류장에서도 보았다. 단숨에 다 보고 나서 또 보고 싶었다. 볼수록 내용이 많았고 볼수록 손에서 놓기 싫었다. 그래서 매번 월급을 타면 제일 먼저 “전법륜”을 샀다. 한 묶음에 12권인데 몇 권을 샀는지 기억이 안 난다. 동창, 선생님, 상사, 동료, 친척, 친구들에게 선물을 했고, 가족들에게는 가장 먼저 주었다.

20년 비바람 시련 속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있었다. 비록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험난함과 마난이 있었지만 위대하고 자비로우신 사존님의 가지 하에 시련을 겪으며 오늘까지 걸어 왔다.

1. 대법을 얻어 용맹정진하다

나는 점오 상태에서 수련한 것에 속한다. 갓 법을 얻어 제3장 공법을 배울 때 천목이 열렸다. 눈앞에 순수한 커다란 눈을 보았고, 이튿날 제4장 공법을 배울 때 두 눈을 보았다. 반년 사이에 점오상태에 도달했다. 정말로 가부좌할 때 위로 뜨고 누워서 이불을 덮으면 이불과 함께 떴다.

그때 나는 매일 아침 영화관 문 앞에서 진행된 단체연공에 참가했다. 한번은 추운 겨울인데 눈이 내린 후 바람이 불어 영하 16도나 되었다. 포륜할 때 많은 사람이 견지하지 못하고 손을 내려놓았다. 어떤 사람은 장갑을 꺼내 꼈지만 여전히 견지하지 못했다. 오직 우리 두 사람만 음악이 끝날 때까지 견지했다. 보도소 소장이 내 앞에 다가와서 기쁘하며 “춥지 않아요?”하고 물었다. “안 추워요” 라고 대답하며 내가 손을 내밀자 그가 만져 보았다. 왼손은 따뜻하고 오른손은 차가웠다.

1997년 가을 베이징에서 법회가 열렸다. 국가계획위원회 강당에서 나는 친히 수련한 체험을 발표하여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고 또 많은 행정 관원을 진감시켰다. 문화대혁명을 겪어본 사람은 모두 특별히 민감했다. 여러 사람이 나에게 ‘공무원의 직위’에 영향이 미치지 않도록 하라고 귀띔해 주었지만 나는 담담히 웃었다.

1999년 “4.25” 당일 나는 민원 부서에 전근되어 온지 얼마 안 됐지만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전국 각 지역에서 온 대법제자와 함께 길 오른쪽 옆에 섰다. 오후에 어떤 수련생은 이튿날 출근에 영향이 있을까봐 자신의 직장에 전화하여 양해를 구했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아마 나 혼자 민원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일 것이다. 정말로 일과 “공무원의 직위”에 영향 주는 건 아니겠지? 설사 정말로 해임되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서 있겠다고 결심했다. 수련생들이 중난하이에서 연락을 받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 왔다. 이튿날 나는 정말로 심사를 받았다.

2. 걸어 나가 법을 실증하고 마귀 소굴에서 일념을 지키다

1999년 “7.20” 후 대법은 모함 당하고 나는 교도소에 갇혀 ‘명예에서 실추’당했다. 여러 차례 행정 구류와 형사 구류를 당하고 보석된 후 또 감금당했다. 지방 관원과 공안 경찰에게 금품을 갈취당하고 혹형에 시달렸다.

2000년 나는 직접 민원서를 들고 세 번째로 베이징에 갔다. 민원 내용은 세 가지로 (1) 파룬궁은 사회에 백가지 좋은 점만 있을 뿐 한 가지 나쁜 점도 없다. (2) 1999년 7월 이래 현지의 파룬궁 수련생이 박해를 받은 상황 (3) 각급 정부 및 직능부문에 파룬궁 수련생 박해를 멈출 것을 호소하였다. 톈안먼 광장에서 가부좌하고 연공하여 5년 불법 판결을 받았다.

나의 시아버지는 내가 5년 불법 판결을 받자 비분하여 세상을 떠났다. 나는 2001년 봄에 구치소에서 무장경찰 4명에게 들려 강제로 A감옥에 보내졌다. 1주일 후 B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장기적으로 등 뒤로 수갑을 차고 전기 충격, 독방 감금 및 약물 박해를 당해 2002년 봄에 나는 장애인이 되었다. 기억력이 없어졌고 두 손으로 빈 세숫대야를 들지 못했으며, 여름에 솜옷과 솜바지를 입고도 추워서 떨고 서있어야 했으며 걷는 것도 어려웠다. 어머니는 면회 왔다가 멀쩡하던 딸이 장애가 되자 정신적 충격으로 집에 돌아간 지 한 달이 지나자 치매에 걸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2003년 봄 공무원인 남편도 파룬궁을 수련하여 불법적으로 15년 중형을 판결 받고 11살 된 딸은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시골에 내려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생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로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 였다.[1] 나는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강제로 끌려 나가 일을 했다. 비오는 날 4명의 수감자가 잘 걷지 못하는 나를 빗물 구덩이에 던져 넣어 신체는 점점 장애가 심해졌다. 원래 확고하던 파룬궁수련생은 내가 이 모양이 된 걸 보고 놀라서 전화한 사람도 많았다. 어떤 사람은 일찌감치 나가기 위해 악경에게 협조하여 전화하지 않는 파룬궁수련생을 미친 듯이 박해했다. B교도소의 파룬궁수련생의 전화율이 크게 상승하자 경찰들도 ‘표창’을 받고 ‘진급’ 되었다.

바오자는 나에게 알려 주었다. “만약 당신이 죽으면 가족은 와서 유골함만 볼 수 있을 것이요.” 그때 나를 책임진 사람은 이미 군부대에 전근되어 간 의사였다. 수감자들이 나를 작은 차에 태워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다. 줄을 설 때 나는 설수 없어서 땅에 앉아버렸다. X레이를 찍을 때 불이 켜져 일어서자 눈앞이 캄캄해 졌다. 나는 살아서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어 생각했다. “사부님, 저를 구해 주세요!” 눈앞이 환해져 나는 다시 살아난 것을 알았다.

나는 절망도 했었다. 타월 담요에 비단실로 수놓아져 있는 나의 이름을 손톱깎이로 한 올 한 올 잘라내어 부스러기를 손바닥에 놓고 철창 밖으로 내밀어 단숨에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나는 안다. 불법은 끝이 없고 사부님께서는 방법이 아주 많아 죽어도 원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속으로 사부님께 요청했다. “사부님 저를 데려 가십시오” 사부님께서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목소리가 나에게 들려왔다. “그 일념을 지켜라!” 사부님이시다!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사부님의 시구(詩句)를 외웠다. “입장(立掌)하니 건곤이 진동하고 거대한 부처 하늘에 우뚝 섰노라” “홍음 – 大覺(대각)”. 그때 나는 발정념이라는 것이 있는지 몰랐다. 전에 교도소 밖의 병원에 끌려가서 신체검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후에 여러 정황을 분석한 후에야 이것이 생체장기적출 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지 관건적인 시각에 그것들과 협조하지 않아 손을 쓰기 어려웠던 것뿐이었다.

2003년 7월 12일 나는 아홉 번째 단식단수하고 일체를 사부님께 맡겼다! 이틀 후 원래 먹었던 독물을 거의 다 배출해내 신체가 많이 홀가분해 진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4일 후 신체는 단번에 홀가분해졌다. 수련하지 않는 일반인은 이걸 경험할 수 없고 이해하기 아주 어렵다. 고무호스가 다시 나의 코 안에 이리저리 꽂히고 석 달 넘게 주입했다. 어떤 바오자 수감인은 차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돌렸다. 그러면 다시 사람을 바꾸었다. 나는 오히려 서서히 사부님의 “홍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는데 한 수, 두 수, 72수, 순서에 따라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모두 생각났다! 신체는 단번에 홀가분해 졌고 달릴 수 있었다! 경찰은 나를 그녀의 사무실에 불러 무엇 때문에 먹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했다. “배고프지 않아요. 내가 구치소에 가서 9일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지만 행동이 자유롭지요. 아니면 내가 노래를 불러 볼까요?” “몇 번의 비바람에 몇 번의 춘추…….고난을 두루 다 겪어도 심취한 마음 고치지 않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말했다. “기력이 아직 매우 족하네요! 여기선 먹지 않으면 주입합니다!” 수감자들은 나를 들고 가서 코로 주입하려 했다. 복도 문이 열리자 나는 교도소의 단속과로 달려가 말했다. “나는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달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녀들에게 주입하라고 합니까?” 단속과 과장은 할 말이 없어 수감자들을 향해 내가 뛰어오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고 화를 냈다.

이건 정말로 기적이었다! 나는 신체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파룬궁에 입문한 것이 아니다. 교도소에서는 무수히 많은 건강한 사람을 괴롭혀 불구가 되었지만 파룬궁은 무수한 환자가 건강을 회복하게 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프고, 졸리는 속박에서 벗어나 하늘을 나는 제비처럼 하늘하늘 가벼웠다.

2003년 10월 중순 나는 다시 2001년에 갔었던 A교도소로 이감되어 강제로 독방에 갇혔다. 대외로 ‘정신병자’라고 했다.

독방은 사면에 창문이 없고 겨울에 난방이 안 된다. 바로 옆이 화장실이고 음침하고 습하다. 복도로 통하는 나무문이 하나 있는데 매일 아침 4시 전에 반드시 일어나 정리를 끝내야 한다. 일반 수감자를 볼 수 없고 바오자 수감자가 수갑으로 나를 침대 모서리에 채워놓고 마음대로 구타했다. 어떤 때는 고통스러운 눈물이 본능적으로 흘렀지만 나는 한 번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바오자가 타온 밥은 먹으면 배탈이 나고 동공이 확대되고 머리카락이 한 줌씩 빠졌다. 나는 이것도 독을 탄 밥이라는 걸 안다. B교도소에 있을 때 장기적으로 약물 박해를 받았었기에 요만한 독은 나에게 그리 큰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한 바오자는 수감되기 전에 일본어 교수였다. 한번은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 노래 부를 줄 압니까?” 나는 안다고 했다. “중학교 다닐 때 나는 음악과 대표이고 고교시절에는 영문과 대표였지요.” 그녀는 말했다. “당신은 우리에게 노래 한곡 불러주면 안 될까요?” 나는 된다고 했다. 그 때 나는 대법제자의 노래가 있는 줄 몰랐다. 그래서 그녀들에게 ‘좋은 사람은 평생 평안하리’ 라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자 교수는 눈물을 흘렸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는 마치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신기하여 거듭 말했다. “그녀는 정신병이 아니야!” 그날 그녀가 무심결에 진실을 말했기에 후에 그녀는 바오자를 하지 못하게 됐다.

A교도소 복도에 화장실이 없고 공중 화장실이 마당에 하나만 있었다. 한번은 바람을 쐴 때 나는 수갑을 차고 있었고 교도소에 함께 있었던 수감자가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다른 수감자에게 말했다. “그녀는 정신병이 아니라 파룬궁이야!” 이때부터 나는 바람 쐬는 기회를 이용하여 수련생으로부터 사부님의 신경문을 얻을 수 있었다.

꿈속에서 나는 두 선녀가 생화를 나의 베개 옆에 놓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공중에서 채색구름으로 변하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없어졌다. 또 선녀 둘이 나타나더니 생화를 나의 베개 옆에 놓고 날아가 채색구름으로 변해 없어 졌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하심을 안다!

3. 사령을 숙청하고 중생에게 진상을 알리다

2005년 8월 형기가 차서야 나는 독방에서 수갑을 풀고 집으로 돌아가는 옷으로 바꿔 입었다. 큰 시누이 집에서 시어머니를 찾아뵈니 어머니는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는 소리쳤다. “어머님, 저예요!” 시어머니는 놀라서 우셨다. “드디어 돌아 왔구나, 돌아 왔어!”

집에 돌아와서 첫 번째 한일은 사당의 교재, 낫과 망치 수기(獸記)철인이 찍힌 중앙당교의 졸업증, 사당 휘장이 찍힌 상장을 깡그리 태워 버렸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철저한 청리를 진행했다.

시어머니는 유일한 아들을 그리워했고 매일 같이 중얼거렸다. “나의 아들은 나쁜 일을 한 적이 없고 좋은 사람이야! 아들을 또 볼 수 있으려나?” 임종 때 시어머니는 줄곧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2009년 봄 절망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14년 반신불수로 사신 시어머니를 보내고 아이는 대학교에 가게 되었다. 나는 어떠한 경제적인 재력이 없었기 때문에 친척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 종자를 사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렸다. 비료를 살 돈도 없고 농약을 칠 줄도 몰랐기에 맨손으로 풀을 뽑는 수밖에 없었다. 가을에 옥수수를 수확할 때 처음으로 옥수수 잎에 우담바라 아홉 송이를 발견했다. 우담바라, 불경에 기재된 부처의 꽃, 우담바라가 필 때면 전륜성왕이 하세하여 세인을 구도할 때라고 했다. 다만 사람은 미혹 속에서 중국 공산사당의 거짓말에 속아 진정한 불법을 보고도 함부로 비방하여 자신의 앞날과 생명을 스스로 훼멸시켰다. 첫해에 바로 대풍년이 되었다.

이듬해 이웃 아주머니가 말했다. “자네 농사지으면서 비료를 주지 않으면 시간이 오래되면 곡식이 자라지 않는다네. 금년에 내가 실험을 해 보일 터니 어느 것이 잘 자라는가 보게” 하면서 그녀는 한 뙈기에 있는 옥수수 두 고랑에 비료를 주었다. 날씨가 크게 가물어서 가을이 되자 비료를 준 두 고랑 옥수수는 작고도 훌쭉했다. 비료를 주지 않은 것들은 이삭이 크고도 알이 가득 찼다. 땅콩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내년에 우리도 시험해 봐야지. 비료를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나는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法輪大法(파룬따파)는 좋습니다! 眞.善.忍(쩐.싼.런)은 좋습니다!”를 자주 외우세요.

나는 지금 7년째 농사를 짓고 있지만 여전히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곡식은 신기할 만큼 좋다. 마을사람들은 모두 부러워한다. “무공해식품, A급도 화학비료 함량이 있고 AA급은 화학비료는 없지만 퇴비는 있다. 그런데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화학비료,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맑은 물만 주어도 마냥 곡식이 자라네! 이담에 우리도 파룬궁을 연마 할까봐.” 사람들은 늘 심사하는 눈빛으로 마치 나에게서 신적(神跡)을 찾듯이 보면서 끊임없이 신기하다 했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 풀을 뽑으면 살생문제가 관련되기에 좀 의혹스러웠다. 사부님의 “홍음 3″이 발표된 후 “학교 다니고 농사짓고 직장에 다니네”[3]를 보고 순간에 깨닫게 되었다. “경작” 이런 수련형식도 대법 속에 있다. 이건 정말로 천지개벽에도 없던 일이다! 나는 내가 걷는 길이 틀림없다는 것을 안다. 반본귀진하는 길이다. 사람은 마땅히 이런 천연적인 음식을 먹어야 한다. 대법제자는 미래를 열고 있다. 백년 후 사람들이 신화로 여겨 전할 때 우리가 지금에 한 일체는 바로 대법을 실증하는 길이다.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허베이 “610”은 국보대대 경찰에게 지시하여 도처에서 나를 수색했다. 친척 친구의 전화는 도청당하고 나의 집, 이모네 집, 남편 이모네 집, 큰 시누이네 집도 모두 국보경찰이 직접 와서 교란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핍박했다. 경찰이 계속 업을 짓고 갚지 못할 엄청난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혼자 유리걸식했다.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고 옥수수 밭에서 한주일 지냈다. 매일 아침 6시부터 12시까지 발정념했다. 밭에 큰 모기가 아주 많다. 내가 금방 가부좌를 하자 모기 한마리가 나의 이마에 앉았다. 나는 그것에게 알려 주었다. “대법이 홍전하는 지금, 나는 대법제자로서 발정념하여 사악을 해체하려 한다. 네가 만약 나를 교란하고 박해한다면 너는 형신전멸 당할 것이다. 네가 만약 교란하지 않는다면 한 대법제자네 집에서 태어나 대법제자로 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모기는 알아들은 것처럼 신속히 떠났다.

마음씨 고운 한 농민 아주머니가 밭에서 풀을 뽑다가 나를 발견했다. 또 풀을 뽑으러 올 때 나에게 먹을 것과 마실 물을 광주리에 담아 옷으로 덮어 나에게 가져다주었다. 집으로 돌아갈 때 풀을 한 광주리 뽑아 갔다.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는 새로 지은 자기네 집에 가라고 했다. 새로 지은 집은 금방 벽을 쌓고 문과 창문이 없었다. 비가 오면 젖을 염려는 없었다. 이때부터 나는 먹고 마시는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고, ‘올림픽’이 끝나자 평안하게 집으로 돌아 왔다. 강제로 받지 말아야 할 박해도 돌파할 수 있었다.

4. 대법은 위엄이 있어 나쁜 짓을 한 자 악보가 끊이지 않다

2000년 베이징에 민원을 갔다가 납치된 후 그 경찰은 기록을 과장하여 ‘죄행’을 크게 했다. 3년 후 그는 한 여인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차고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2009년, 내가 처음으로 농사를 지을 때 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다. 마을의 한 대장은 고의적으로 남은 농약을 나의 땅콩 밭에 쳤고 모종 한 뙈기가 시들어 버렸다. 이듬해 그는 또 나의 옥수수 밭에 대량으로 농약을 분사했고 또 모종 한 뙈기가 시들었다. 이 사람은 54세 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11년 10월 경찰은 경비원을 시켜 ‘수도 계량기’를 검사한다고 속이고 문을 열었다. 나를 또 납치하여 실신해 쓰러질 때까지 박해했다. 밤낮으로 꼬박 4일간 박해한 후 “610”은 책임이 두려워 무조건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줄곧 진상을 거절하고 탈당하지 않고 중국 공산당을 따라 나쁜 일을 하던 경찰은 반년 후 분문암(賁門癌)으로 사망했다.

5. 정념으로 사람을 구하여 책임을 피하지 않다

건강한 생명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정말 안타깝다. 대법이 홍전할 때 직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박해를 하는 사람들을 도태시킬 수 없다. 자신의 책임이 큰 것을 깊이 느꼈다. 사당의 가짜, 악, 투쟁, 거짓말의 주입으로 일부 사람들은 진상을 모른다. 내심 나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가 표준에 도달하지 못해 박해를 받을 때가 많다.

2013년에야 나는 주동적으로 국보대대장 및 경찰을 찾아 진상을 알리고 진지하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내 자신이 수련을 잘 못해서 당신들이 그렇게 큰 업을 짓게 했습니다.” 국보대대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누가 수련을 잘 했습니까?” 국보대대장은 직접 나의 호적, 신분증 등 수속을 해 주고 진심으로 정치법률위원회 서기를 찾아가 나의 월급문제를 도와주었다.

2015년 나는 정교한 진상CD를 가지고 “610” 사무실에 가서 주임을 찾아 주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잠깐 망설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가져 오시오. 내가 분질러 버릴 테니! 내가 당신을 괴롭히는 일을 만들기는 아주 쉽지요.” 손을 내밀어 CD를 빼앗으려 했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믿습니다. 당신이 지금 경찰에게 전화를 걸면 그들은 아마도 건너와서 나를 붙잡겠지요. 당신은 확실히 이 권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잘되게 하기 위해,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대하는가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나는 믿지요.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후회할 것임을, 왜냐하면 610은 본래 불법적인 조직이고 당신은 평생 610 주임을 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후에 또 만날 기회가 있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한다면 금후 우리의 연분은 끊기는 것입니다.”

그는 또 물었다. “당신은 최고인민법원과 최고인민검찰원에 편지를 썼지요?” 나는 말했다. “장 고발 입니다. 6월 달에 배송했지요.” 강대한 정념은 그들의 범죄를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인터넷 돌파 프로그램을 건네주었고 그는 받았다.

후에 내가 다시 610에 가서 그들을 찾으니 “610” 주임은 회계에게 생계유지보조금 500위안(한화 약 10만원)을 나에게 주라고 했다. 비록 돈은 많지 않지만 나는 무엇이 자비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 그것은 매 대법제자가 반드시 구비해야할 항구 불변의 자비이다!

주 :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 “洪吟(홍음) – 苦其心誌(마음고생)”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 “洪吟(홍음) – 大覺(대각)”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 “洪吟 三(홍음 3) – 修煉形式(수련형식)”

문장발표: 2016년 9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정법수련마당 >수련체험 >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
문장위치: http://search.minghui.org/mh/articles/2016/9/9/33405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