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여러 해 동안 윈난(雲南) 각 지역의 수련생들이 납치당하고 가택수색을 당했으며 또 불법으로 형을 선고 받았다. 잇달아 발생하는 이 사건들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수련생들의 수련상태가 반영된 일들이라 이 글을 써내어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
수련생이 납치당할 때마다 그 가족은 속수무책이다. 가족수련생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평소에는 사부님께서 수련의 길을 배치하셨다는 것을 법 중에서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관건적인 시각에 직면하면 길을 찾지 못한다. 경찰 역시 한번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들이 이 상황을 인정 못하면 이렇게 하든지 또는 어디를 찾아 가시오.”라고 알려준다. 수련생들은 그 속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수련생이 협조하여 변호사를 선임하면 변호사와 법률에 의존하는 경향이 큰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어떤 가족수련생은 여러 차례 변호사를 만나려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자 울며불며 불평을 털어 놓는다. 또 어떤 이는 정의로운 변호사에게 감동되어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이것저것 일을 거든다. 법정에서 변호사의 무죄변론과 당사자 수련생의 자기변론은 이치에 맞고 사람들을 납득시키며 방청석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결과는 가중한 형벌이 선고됐다. 가족은 곧바로 태도를 완전히 달리하며 수련생들을 원망하고 변호사를 질책하는데 태도변화가 크다. 그래서 가족들과 다시 소통하고 교류해야 겨우 상소할 수 있는데 (2심) 결과가 원심을 유지하는 판결이라면 원망이 크다.
가족수련생이 일반인의 상태가 되는 바람에 사건이 복잡해지고 결국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으며 수련생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수련상태도 체현되지 못했다. 그때 수련인 자신의 신분, 역할, 목표는 모두 중요하지 않고 문제를 보는 방식과 기점이 모두 변한다. 마치 큰 난이라도 닥친 것처럼 사람마음만이 촉박하게 대응하고 있다. 수련생 사이, 가족 사이, 심지어 일반인과의 사이에서 불필요한 머리를 굴리며 불필요한 말을 하면서 사건의 옳고 그름 속에 국한되어 이것저것을 의심한다. 일체 번거로움을 모두 밖으로 밀어 내고 안을 향해 마음을 닦는 요소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수련생에게 의존하고 친구, 경찰, 변호사에게 의존하면서 마음은 한시도 조용해지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모두 일반인의 위치로 되돌아가 일체 방법을 써서라도 사람을 꺼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한다.
설사 표면상으로는 공안, 검찰, 법원 사람을 찾아 갔어도 마음속에는 사람을 풀어달라는 생각뿐이다. 완전히 사람이 사람을 박해하는 것으로 보면서 자신의 사명은 잊어 버렸다. 대립하는 심태로 사람을 달라고 하는 것이지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법공부, 연공은 충격을 받았고 정신이 전부 무너진 것 같았다. 수련인의 정신적 지주(기둥)는 무엇인가? 사부님이시고 대법이다! 사부님께서 아직 계시고 대법 책을 매일 손에 받들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전부 무너져 내렸다. 신사신법(信師信法)에서 뭘 믿었단 말인가? 대법이 병을 치료할 수 있어서인가? 신체가 건강하고 심성이 제고되고 심태가 좋아져 가족이 화목해서인가? 함께 연공하고, 함께 법공부하고, 함께 세 가지 일을 하고 또 사부님의 보호를 받고 온 가족이 평안하며 수련이란 정말 행복해서인가? 이러한 점이 오히려 기점이 되었고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가 일단 곤란이 닥치면 가정은 충격을 받아 흩어지고 곧 수련하지 않게 된다.
여러분은 가장 관건적인 하나를 잊었는바 우리를 구하신 분은 사부님이시다. 사부님께서 이미 우리를 구하시고 지옥 속에서 건져내어 깨끗이 씻어 주셨고 우리를 집으로 보내 주신다. 이것은 우리의 소원이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금과 같은 염원이 있기에 비로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이 일체를 주신 것이다. 평소에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를 구하셨다고 말하지만 관건적인 시각에는 변한다. 사람에게 의존하고 법률에 의존하며 교도소와 구치소는 우리가 갈 곳이 아니라고 구실을 댄다. 어디에서든 모두 정념이 있어야 하고 어디에서든지 모두 반박해 해야 하며 어디에도 모두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경찰과 수감자도 생명이고 역시 구도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대법제자의 소중함은 바로 마난 속에서도 중생구도를 잊지 않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는 시공(時空)의 제한이 없는 것이다. 수련인은 이에 집착할 수 없으며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든 모두 수련할 수 있고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며 법을 실증할 수 있어야 한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박해가 발생했으므로 그럼 나는 그것을 이용하여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가운데서 박해를 부정함으로써 대법제자의 위덕을 세우게끔 하였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두려운 마음, 안일을 구하는 마음, 당신의 각종 소원에 부합되어야만 비로소 대법제자의 수련의 길이라고 여기는가?”[1] 사부님께서는 이번 박해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이번 박해의 존재를 부정하신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장계취계하여 이번 박해를 이용해 대법제자가 위덕을 쌓게 하셨다. 그럼 우리도 맞서야 한다. 어떻게 맞서야할 것인가? 사부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우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도 이번 박해를 이용하여 자신을 보고 자신을 한번 점검하여 반박해 중에서 서서히 자신을 바르게 해야 한다. 만약 진정으로 할 수 있다면 박해는 우리에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 피동에서 주동으로,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박해를 구도로 바꿀 수 있다. 진정하게 박해를 부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사부님은 제자를 다르게 대하지 않으신다. 다른 수련생들이 법의 지도하에 박해를 부정하고 지나올 수 있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안다. 구세력은 사부님을 대단히 숭배하며 감히 사부님께 의도적으로 무엇을 하지 못한다. 텔레비전에서 표면적으로 사부님을 겨냥한 거짓말도 모두 제자의 집착심을 겨냥하여 제자를 고험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행동이 사부님의 제자답다면 그것이 감히 박해할 수 있겠는가? 바로 우리의 언행 및 내심이 제자에 대한 요구와 멀기 때문에 빈틈을 내어준 것이다.
물론 잘한 가족수련생도 있다. 일이 생겼을 때 처음에는 막막하여 사람의 마음으로 대처하기도 한다. 후에 명백해지면 기회를 붙잡아 재빨리 자신의 길을 바르게 걷는다. 공안, 검찰, 법원에 찾아가 사람을 풀어주라고 하는 과정에서 진상을 알리고 법공부와 연공을 모두 다그친다.
어떤 수련생은 과거에 수련에 그다지 주동적이지 못했다. 하는 둥 마는 둥 소위 집에서 ‘내조’하며 바깥의 대법 일에는 별로 참견하지 않고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집에서 법공부와 연공을 할 뿐이다. 자신을 협력하며 수련하는 부차적인 위치에 놓았다. 가족이 갑자기 납치당하자 조급해졌다. 주동적으로 수련생과 상의하여 드디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고 자신이 걸어야할 길을 찾았다. 두려운 마음 등의 집착을 제거하고 공안, 검찰, 사법 직원들을 찾아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했다. ‘내조’의 조연에서 서서히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주인공으로 바뀌어 매우 정진하였다. 법으로 자신을 바르게 하여 정신면모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사건은 다른 사람에게 발생했지만 우리 몸에 발생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 옆의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모두 이 사건과 연결돼 있는데 사부님께서 그 속에 배치해 놓으신 것이다. 우리의 일사일념, 일언일행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도 그 속에 있는바 각종 상태가 모두 (그 속에) 있다. 자신과 무관하다며 무감각한 사람, 평소 수련생의 부족한 점을 찾는 사람, 분개하며 불평하는 사람 등이 모두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잘한 수련생도 있다. 묵묵히 악인과 그 가족의 전화, 주소를 포함하여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진상편지를 써서 부치는 사람, 안을 향해 자신을 찾고 자신을 닦는 사람, 시기를 포착하여 가족과 함께 사람을 풀어주라고 하는 과정에서 진상을 알리는 사람, 변호사를 찾고 가족과 협조·협력하는 사람 등등이다.
사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폭로이다. 그것의 추악한 행동을 폭로하여 숨을 곳이 없게 하고 그것을 해체해버리는 데는 수련생들의 협력이 아주 중요하다. 역사의 맨 마지막 연극 중에서 자신의 ‘대본’을 잘 읽고 자신의 역할을 정확하게 찾아 그 속에 뛰어들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보지 말고 의존하지 말자. 수련은 자신의 일로서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기회는 평등한 것으로 붙잡을 수 있으면 수련할 수 있고, 만약 지나쳐 버리면 늘 후회뿐이다!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한마디 말은 자신이 평소에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법리를 나는 똑똑히 알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관건적인 시각에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잊어버리는가? 아니면 알아도 쓸 줄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라 마지막에는 여전히 사람의 방법으로 대처하는가? 정법수련에는 본보기가 없고 앞사람의 것을 참조할 만한 것도 없다. 대법제자는 개척자이다. 다양한 업종 내지 전반 인류사회는 우리가 수련하는 사당(廟宇)이며 그 속에는 모두 수련하는 요소가 들어 있다.
우리 수련인은 어렵게 신이 되는 길에서 걷게 되었다. 하지만 관건적인 시각에 또는 위험할 때는 여전히 사람의 길로, 사람의 방법으로 돌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의 잠재의식(潛意識)중에는 뼛속깊이 형성된 관념, 경험, 방법만이 가장 바람직하고 가장 실용적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안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神)은 다만 일종의 정신적인 지향일 뿐이며 관건적인 시각에 떠오르기엔 마음이 불안하고 안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법공부를 깊이 하고 이성적으로 법을 인식한 사람, 법에 동화한 사람, 사람의 마음을 버린 사람만이 관념에 좌우되지 않고 얼마나 큰 위험에 부딪혀도 자연히 법에서, 신의 층면에서 문제를 대하고 해결한다. 때문에 우리는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에 동화하여 사람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 수련의 길은 생화로 깔아놓은 평탄대로가 아니다. 길은 아주 좁고 모순이 있으며 곤란과 고험이 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고생을 겪고 난을 당하는 것은 업력을 제거하고 죄를 없애 버리며 인체를 정화(淨化)하고 사상경지를 제고하며 층차를 승화시키는 아주 좋은 기회로서, 이는 대단히 좋은 일이며 이것이 바른 법리(正法理)이다.”라고. [2]
윈난의 수련생들이여!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신다. 구세력은 우리를 주시하고 우주의 중생도 눈 깜빡하지 않고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다. 오늘의 환경은 진상을 알리는 플랫폼이고 사람을 구하는 기회이며 우리가 승화하는 계단이기도 하다. 잘 파악하여 스쳐 지나치지 말자. 우리는 대법수련자로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세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비록 수련에는 본보기가 없지만 대법제자는 후세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남겨주어야 한다. 언행거지는 대법제자의 풍모가 있어야 한다. 잊지 말라. 사부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구하셨다. 더는 밖으로 사람에게 부탁하여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달라고 하지 말자. 지금 우리는 자신을 잘 수련하여 다른 사람을 구도하고 원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주 :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저작 : “정진요지 3 – 역시 방할하노라(也棒喝)“
[2] 리훙쯔사부님저작 : “정진요지 3 – 최후일수록 더욱 정진해야 한다”
문장발표 : 2016년 9월 9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정법수련마당 >이성인식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9/9/33419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