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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서양 수련생 “파룬따파는 불안한 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샐리 아퍼트(SallyAppert)

[밍후이왕] 나는 10여 살 때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에서 제일 높은 다리인 포레스트힐(Foresthill)대교를 보러 갔다. 나는 다리 아래 협곡을 따라 강변까지 걸어가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구간은 길고 가파로워 힘든 노정이었다. 여동생과 나는 젊고 혈기왕성하지만 어머니는 허약하셨다. 어머니는 장기간 당뇨병과 섬유근육통을 앓고 계셨다. 우리는 협곡을 따라 아주 짧은 길을 걸었다. 어머니는 더는 가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부득불 우리의 팔을 잡으셨고 우리는 어머니를 산 위까지 당기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느 한 여름, 우리는 함께 알래스카에 갔다. 나는 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어머니는 조금도 힘들어하시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도보로 거대한 빙하를 통과해 한 동굴을 탐색하고 또한 각종 관광지를 구경하셨다. 어머니는 피곤하다고 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평소에 꼭 지켜서 드시던 음식과 늘 드시던 보조식품을 드시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갑자기 젊어지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나에게 그 원인을 알려주셨다. 이번 여행 보름 전에 어머니는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배우셨다. 파룬따파는 중국에서 온 몸과 마음을 제고하는 일종 가부좌하는 공법이었다. 짧디 짧은 며칠사이에 어머니는 수혜를 받으셨다.

수개월 후 어머니와 우리 두 자매는 그 가장 높은 다리 협곡을 따라 강변까지 걸어간 후 또 기어올라 왔다. 이번에 우리는 어머니의 팔을 당기지 않아도 됐다.

파룬따파에 대해더 많이 알고 싶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나는 아주 빨리 혼자 연공할 수 있었고 전 세계에서이로움을 얻은 수천 만 명 중 한 사람이 됐다.

공포를 극복

나는 태어나서부터 담이 작았다. 부모 외에 누가 나를 안으면 울었다. 어렸을 때 나는 큰 소음을 매우 두려워했고 특히 물 흐르는 소리는 더했다. 나는 청년시절 각종 것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세균, 사람 무리, 날을 새는 것, 식품, 맡기 어려운 냄새, 자그마한 질병 증상, 심지어 장난감이 낡거나 혹은 해질까봐 두려워했다.(이 마지막 것은 아마 매우 이상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나는 밤에 침대에 누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며 낡은 장난감으로 인해 병이 생길까 봐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의사는 나에게 불안장애 약물을 복용하라고 했다. 처음에 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15살 때 나는 또 강박증이 생겼다. 가는 곳마다보이는 글자들을 읽어야 했다. 만약 이렇게 하지 않으면 두렵고 불안했고 마치 뜨거운 물이 내 배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 때문에 나는 대뇌를 통제하지 못했고 늘 두려웠다. 다행이 나는 당시 집에서 공부했다. 만약 내가 공립학교에 있었다면 나는 자신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을지 모른다. 집에서 나는 되도록 땅을 보고 글자를 보는 것을 피했다.

강박증을 통제하기 위해 나는 어쩔 수 없이 불안장애 약물을 두 배씩 복용했다. 그러나 여전히 완치하지 못했다. 나는 약의 화학성분이 신체에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이런 약물은 중독될 뿐만 아니라 끊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는 아마 더욱 많은 이런 약을 복용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약물을 끊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파룬따파를 언급하실 때 나는 이미 19살이 됐다. 20살 때 나는 파룬따파의 주요저서 ‘전법륜(轉法輪)’을 읽었다. 책에는 어떻게 진선인(眞善忍)의 원칙에 따라 심성을 제고하거나 도덕 수준을 향상시키는지 가르쳤다.

다만 ‘전법륜’을 읽고 파룬따파의 공법을 배웠는데 나의 강박증은 치료됐다.

수개월 후 나는 5장 공법을 배웠다. 나는 차츰차츰 불안장애 약물을 중단했다. 강박증도 재발하지 않았다. 법을 배우기 전 한번은 연속 이틀간 약을 먹지 않은 적이 있었다. 결국 나는 매우 쉽게 화를 내고 힘껏 내 여동생을 밀었다. 이번에 나는 초조하지 않았다. 나는 일부 짧은 금단증상을 느꼈다. 그러나 아주 빨리 지나갔다. 나는 더는 그런 불안장애 약물이 필요치 않았다.

심성 제고

과거 집안일을 할 때 나는 늘 불평했다. 비록 일이 많지 않아도 말이다. ‘전법륜’을 읽은 후 나는 ‘참음’을 배웠다. 나는 기쁜 심정으로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대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버지와 계모는 내가 깜박하고 저녁에 문을 잠그지 않은 일로 매우 언짢아하셨다. 그들은 “이 문제를 피하기 위해 너는 반드시 일찍 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하면 저녁에 시간이 없어 글짓기를 못한다는 것을 의식했다. 이것은 나의 취미다. 나는 화가 나 말하지 못했고 그 후무례하게 아버지께 수면 규정을 지킬 수 없다고 말씀드렸다.

그 후 나는 ‘진선인(眞善忍)’이 생각났다. ‘전법륜’을 통해 마땅히 나에 대한 고험이라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관을 넘지 못했다.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이튿날, 나는 아버지께 사과드렸다. 나는 아버지께 나는 매우 거칠고 우둔하다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웃더니 나를 포옹해 주셨다. 이렇게 갈등은 소실되었다. 나는 침대 곁에 쪽지를 남겨 문을 잠그라고 자신을 일깨워주었고 문제는 해결됐다.

그 후부터 모순이 발생할 때면 나는 늘 되도록 대법 법리에 따랐다. 과거에 나와 계모는 늘 다투었고 평화롭게 지내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우리 사이는 매우 좋아졌다.

22살 되는 해, 나와 여동생은 집에서 나와 독립하여 따로 아파트에 살게 됐다. 나와 여동생은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나는 매우 두려웠고 집 생각이 많이 났다. 사실 당시 나는 몇 개월 간 매우 걱정했다. 나는 갓 성년이 됐기에 많은 책임이 있었는데 내 첫 번째 남자친구 문제나 미래에 대한 걱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집을 떠난 것은 나에게 자신의 휴식시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충분한 시간으로 법공부를 하고 연공하며 정진했다. 몇 주 후 더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대법이 나를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 나는 25세다. 더는 당초 침대에 누워 동물 장난감을 걱정하던 어린이가 아니다. 만약 침대에 누워 있다가 두려우면 일어나 연공했다. 아주 빨리 나는 차분해졌다.

나는 일찍부터 사회장애인 수당을 받았다. 나는 일부 자폐증 증세가 있고 계모는 내가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돈을 받으셨다. 파룬따파를 배운 후 나는 사회보험 직원에게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기 때문에 더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편지를 썼다. 그들은 나에게 돈을 주는 것을 중단했다.

지금 나는 한 전자회사에서 일하며 간혹 출장을 간다. 한 번은 혼자서 플로리다 주에 출장을 갔다. 집에 멀리 떨어져 두려움을 느낄 때 나는 속으로 ‘전법륜’의 ‘논어’를 외우면 느낌이 좋았다. 만약 내가 대법제자가 아니라면 매우 두려워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남자친구는 지금내 남편이다. 그도 파룬따파를 수련한다. 우리는 모두 진선인을 준수하며 매우 화목하게 살고 있다. 거의 다툰 적이 없다.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행복한 결혼생활과 평온한 심령을 소유하게 한 대법에 감사를 드린다.

파룬따파의 창시자이자 ‘전법륜(轉法輪)’의 작가이신 리훙쯔(李洪志) 선생님은 1992년에 공개적으로 법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나는 자신이 대법이 널리 전해지는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 아주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1999년, 중국공산당의 두목은 대법의 명성에 두려움과 질투를 느껴 잔혹한 박해를 개시해 파룬따파 수련인에게 소란을 피우고 못살게 굴며 심지어 살육까지 했다. 나는 다른 수천 만 수련생처럼 대법을 통해 이로움을 얻었다. 나는 진심으로 세상 사람들이 이 한 차례 박해를 알기 바란다.

나는 이 문장이 더욱 많은 사람이 ‘진선인(眞善忍)’의 아름다움을 아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문장발표: 2016년 5월 1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신수련생마당>대법과의 연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5/14/3286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