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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싫어하는 것에서부터 근본적인 집착을 찾아내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한동안 나는 복잡하고 부정적인 정서에 시달렸다. 심할 때는 세상이 싫었다. 어떤 때는 한 덩이 검고 무거운 물건이 마음을 누르는 것처럼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줄곧 이런 상태를 없애려고 법을 외우고 발정념을 하면 한동안 좋아졌지만, 얼마 지나면 또다시 나타났다. 나의 이런 고통은, 배후의 깊은 뿌리부터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받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도 주먹으로 솜을 치는 것처럼 힘을 쓸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 여러 차례 점화해 주셔서 나는 대법에 대조하여 답안을 찾았고, 반복하여 안으로 찾아 세상을 싫어하는 배후 집착심과 연계된 실마리를 찾으면서 마침내 세상을 싫어하는 근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 나는 ‘세상을 싫어’하는 정서에 따라 왜 소극적인지, 왜 원한이 있는지 찾았다. 나를 소극적이고 원망을 하게 한 것은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들이었다. 사부님의 법에서 나는 정법이 끝나지 않는 주요 원인이 대법제자의 수련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사람을 구한 수가 모자라서임을 알게 되었다. 주요 원인은 대법제자가 정진하지 않아서 구원한 사람의 수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부님께서는 부득불 정법시기를 다시 한 번 연장하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접촉하는 일부 수련생을 보면 확실히 그러했다. 그들은 명리와 정을 세 가지 일보다 위에 놓았고, 심지어 자기 인생을 잘 누리는 것을 수련의 조건과 사람을 구하는 전제로 한다. 그들은 명리와 정이 많은 기쁨을 누리고 있는 한편 물욕(物欲)을 추구하는데 자신의 사람 마음을 추가한다. 또 그에게 일깨워주어도 ‘속인의 상태에 부합’되고 ‘극단으로 가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을 얼버무리며 자신에게 있는 그렇게 많은 사람마음을 똑바로 보지 않는다. 그런 수련생을 보면서 느끼는 고통이 구세력에 확대 강화되어 더 많은 원망과 소극적인 상태를 파생하여 나의 정진의 의지를 동요시켰다.

이어서 나는 소극과 원망, 이 두 선을 따라 심층에 있는 집착을 찾았다. 소극적이었던 것은 정법이 무기한 아득하고 가망이 없어 보여서였다. 나는 일과 결혼을 포함한 속인의 물건에 대해 거의 흥취가 없다. 수련원만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인생이다. 그런데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지지부진하게 도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생이 묘연하고 재미없게 느껴졌고,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게 영향을 준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이는 시간과 원만에 대한 집착이다.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들에 대한 원망은 그들이 정법과정을 지연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런 원망은 겉으로는 그럴듯하여 마치 중생을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질은 그들이 나의 시간을 지연했다고 생각하며 나의 가장 좋은 청춘을 희생했지만, 아직도 얼마나 더 기다려야 결속될지 알지 못한다. 이것도 시간과 원만에 대한 집착이 체현된 것이다.

이 선을 따라 진일보 분석하니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들이 나의 시간을 지연했다고 생각하는 것을 세분해보니 하나는 내가 그 수련생에 비해 많이 강하다는 생각과 시간을 지연시키는데 나를 포함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아주 정진한다고 생각했고, 세속에 대한 추구가 없으며 자신을 아주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은 가볍게 말하면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이고 중하게 말하면 자심생마로 아주 위험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도 아주 주요한데 바로 내가 다른 수련생보다 대가를 많이 치렀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나와 같은 청년 대법제자들이 그렇다.

그들의 대부분은 떨어져 내려갔다. 사부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기다리고 계신 것을 생각하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용기 내지 않고 기를 한곳으로 모으지 못했다. 또, 떨어지지 않았거나 다시 돌아온 수련생들도 대부분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많았다. 그들은 많은 재주와 능력을 갖추고 젊고 정력도 있지만 이런 것들을 명리와 정에 사용하며 사부님께서 연장해주신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어떤 수련생들은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명리와 정에 만족하면 자신이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있다. 내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대가에 비해 도리어 다른 사람의 정진하지 못한 후과를 책임져야 하니, 나는 심리 균형이 엄중하게 깨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나는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대가를 더 치르기 싫어하는가? 계속하여 찾아보니 이런 불평하는 심리는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마음, 지지 않으려는 허세, 질투심 등이었고 눈은 다른 사람을 보면서 밖으로 찾았고 수련생들에게 관대하지 못했으며 ‘절대 평균주의’의 당문화로 요구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법제자가 세상에 온 근원과 유일한 목적, 사부님께서 주신, 신마저 부러워하지만 얻지 못하는, 신성한 본직을 속인의 방식으로 ‘바쳤다.’

다시 찾아보니 나는 일부 것을 감히 믿지 못했다. 잘 살펴보니 ‘큰 국면을 본다’, ‘중생을 위해 걱정한다’는 화려한 포장으로 내심에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다. 바로 원래 내가 수련하고 사람을 구하는 기점은 나의 애호에 부합되었고 나의 요구를 전제로 했던 것이며 이렇게 해야만 마음이 평형을 느꼈다. ‘바치다’의 원뜻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마음의 평형을 잃고 원망하고 소극적이며 심지어 세상을 미워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건을 말하며 추구하는 수련이다.

이 판단을 검증하기 위해 나는 자신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 구함은 수련생들이 정진하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괴로워한다. 이런 기쁨과 괴로움은 질투심과 무사무아의 신성한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련생들이 정진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나 혼자 정진한다고 해도 그렇게 빨리 사람을 구하는 인원에 도달할 수 없지만, 수련생들이 정진한다면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최소한 나는고군분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하는 마음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이 수련하는 것을 보면서 대법의 표준으로 나를 수련하지 않은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진해야만 나도 정진하고 바치려 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정진이 내가 정진하는 원동력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정진하지 않으면 힘이 빠지고 수련의 흥미와 사람을 구하는 긴박함을 체험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중사’의 심태다.

심층의 생각은 또, 수련생들이 정진하면 사람을 구하는 힘이 증강되고 대법제자 전체의 수련과 사람을 구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나도 열정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희망이 보여야 시간과 정력을 감당하려 했는바, 사람을 구하는 아름다운 결과가 수련에 정진하는 조건이었으며, 구할 것이라는 조건을 말하는 그런 수련으로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는 한편으로는 대법을 얻은 기쁨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부님께서 소중한 시간을 연장해 주셨는데, 명리와 정을 추구하는 수련생들과 구분이 없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속인의 물건이고, 내가 추구하는 것은 수련의 결과와 보답이기에 수련의 기점이 순수하지 못했다.

나의 수련을 돌아보니 원만의 결과는 대가를 치르는 원동력이 될 수 없으며, 희망이 멀리 보인다고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구하지 않는다면 소위 말하는 대가의 개념도 없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든 일이든 나를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며 나의 정진의 의지를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법에서 정진하는 데 대해 조사정법 하는 진수제자로 말하면 인간세상에서나 하늘에서나 모두 자유로운 게 아니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법을 얻었고 사부님의 법상을 보고 수련을 결심하였으며 노년 수련생들과 어른 수련생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 집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체계적으로 안으로 찾으니 이런 마음이 아주 깊이 숨어 있었고, 여전히 ‘대국면관’과 ‘중생을 위해 생각’한다는 아름다운 배일에 싸여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진정한 집착이 ‘세상을 미워’하는 겉모습에 숨어 있을 때 구세력은 우리의 이런 집착을 부단히 확대한다. 원망, 소극적, 세상을 미워하는 정서가 늘어나는 것을 통해 나의 정진의 의지가 무너지는 것이다.

분석을 마친 뒤 다시 이런 명확하거나 깊이 숨어있는 집착을 보았더니 모두 내가 출발점이었고, 사적이고, 나를 위한 일체 집착과 나쁜 생각의 총 근원지였다. 그전에 나는 줄곧 이런 ‘세상을 미워’하여 파생된 고통을 위해 노력했는데 사실은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세 가지 일에 정진함을 추구했던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해도 다만 순간적이고 표면적인 것을 해결하는 데 불과했고, 사악이 끊임없이 에너지를 공급하는 그 근본적인 근원에 다가갈 수 없었다.

맺는말

사부님께서는 꿈속에서 달걀 한 알로 나에게 점화해 주신 적이 있다. 사부님께서는 황색 가사를 입으시고 우리 전반 수련생들에게 강의를 준비하고 계셨다. 수업 전에 사부님께서 나에게 삼각형 모양의 케이크를 주시면서 수련생들에게 나눠 주라고 하시면서 케이크 일부분이 많이 상했으니 먼저 떼어내라고 하셨다. 내가 상한 부분을 찾지 못하자 사부님께서 상한 부분을 떼어내어 내 손에 놓으셨는데, 거의 절반을 떼어낸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상한 부분을 먼저 버리신 뒤 다른 반쪽으로 나눠주라고 했다. 한사람이 먹을 만한 케이크를 절반이나 잘라 버렸는데 어떻게 자리에 앉은 십여 명, 20명 수련생에게 나눠줄 수 있을지 의혹이 생겼다.

안으로 찾았더니 나는 그 케이크는 냉담하고 도도한 나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고, 그 마음은 비록 속인의 물욕 방면에는 집착하지 않지만, 수련생에 대한 세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데 대해 너그럽지 못하고 수련에서 열매를 맺겠다는 구하고자 하는 집착을 포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나에게 수련생들이 정진하지 못한 데 대해 소침해하지 말고 만약 수련생에게 확실히 부족한 점이 있으면 반드시 자신을 강대하게 하여 그들을 도와야 함을 점화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수련생들의 부족한 점을 감히 지적하지 못하고 수련생의 강세에 맞서려하지 않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의 당 문화이고, 수련생들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선량하지 못한 것이며 동시에 마음속의 원한과 질책을 암시하는 것이며 허위적이고 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사자아(自私自我) 하여 생기는 마음, 바로 그 버려버린 그 절반의 ‘상한 케이크’다. 좋지 못한 것을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부님께서는 나를 도와 이미 나쁜 부분을 제거해서 나의 손에 쥐여주셨고 나는 버리는 이 동작을 완성하면 된다.

맨 처음, 한 사람에게 몇 ㎜도 채 안 되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아주 좋지만 나누기에는 모자란 그 절반의 케이크에 대해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나눌 필요가 있을까? 그때 어머니 수련생이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어머니는 밀레르빠가 원만에 이른 후 한 조각의 천과 보기에 아주 작아 보이는 사탕 한 조각을 남겼지만, 여러 사람은 밀레르빠의 분부대로 사탕을 자르고 천을 잘랐는데 아무리 잘라도 그 사탕을 다 자르지 못했고 천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내가 깨닫기로는 사부님께서 내가 대법에서 얻은 아름다움을 매 수련생에게 가져다주라는 것이었다. 보기에 자신의 힘이 얼마나 적든 모두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수련생들을 도와 정체적으로 제고하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펼쳐 보여야 사람을 구하는데 효과가 더 있고, 그것은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라는 것이다. 만약 무사의 각도에 서고, 사부님 정법의 각도에 선다면 그 능력은 반드시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반드시 수련생들을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며 수련생들을 걱정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수련생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수련생을 돕는 게 자신이 얼마나 잘 수련했는지 선전하라는 게 아니고, 이해하기 싫어서 질책할 것이 아니며, 겉과 안이 다르거나 혹은 결론을 내리듯 강압적이지 말아야 한다. 나는 대법이 만든 것이기에 반드시 그의 생명을 위해서 해야 한다.

세상이 싫고, 소극적인 것, 원망하는 고통은 뿌리가 끊어진 것과 같다. 원래 사부님과 수련생들이 기다리는 것은 바로 자신을 제고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 감사드리고 수련생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층차의 한계로 부당한 곳은 지적해주기 바란다. 허스!

문장발표: 2016년 5월 3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정법수련마당> 수련체험> 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5/30/32933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