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대법 수련은 지극히 귀중한 보물

글/ 미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어릴 적부터 중산층 가정에서 행복한 생활을 했다. 부모님은 작은 읍에서 지위도 좀 있고 나와 남동생, 여동생은 모두 박사,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젊었을 때 친척들은 나를 예쁘고 마음씨 착하여 현모양처가 될 것이라고들 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학교를 졸업하고 시집가서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함께 인생을 개척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나는 인생을 너무 쉽게 보았고 책대로 하면 착오 없이 100점을 따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애할 때 남편은 사업을 했는데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아 예절 바르고 말주변이 좋았으며 의욕적으로 일했다. 또 친구들을 잘 도와주고 즐거움을 주기 좋아했다. 결혼 7년 후인 1999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공공기관 엔지니어 직을 그만두고 어린 자녀 셋을 데리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 갔다.

미국으로 이민

남편은 창업하려고 했으나 방향을 잡지 못한 것 같았다. 첫 1년을 나가서 일한 외 줄곧 집에서 한가하게 창업을 시도하면서 특허를 신청해 일자리를 얻으려고 했다. 우리는 자녀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생각이 일치했다. 저축도 좀 있었기에 나도 집에서 아이들에게 중국어를 가르쳤다. 그리하여 우리는 곶감 빼먹듯 몇 년을 보냈다.

나는 남편의 꿈이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그를 믿어주려 했고 생활에서 가급적 그를 존중해 주었다. 그러나 앞길이 안개 속인데다 일자리도 없어 사회적 위치가 없자 나는 자존감이 극도로 떨어졌다. 그리하여 진심으로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몸이 허약해졌고 돋보기 도수도 갑자기 올라갔다. 아이들은 점차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서인지 나는 그들의 마음속에 다른 욕구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민 오기 전에 나는 한 기공 단체에 가입했었고 불경에 관한 책을 적지 않게 읽었다. 미국에 온 후 기독교 성경 공부 반에 참가했고 초등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했으며 중문 학교에서 글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마음은 갈수록 불안해지고 초조해졌다.

법을 얻어 건강을 되찾다

2004년, 한 젊은 중국 부부가 우리의 이웃이 되었는데 성격이 활달한 부인은 아주 빨리 내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나는 봉사하는 삶을 소원했기 때문에 진선인(眞善忍)의 이치가 단번에 마음에 들었고 ‘우리는 미래에 알린다’ 9회 중의 첫 회, 파룬궁이 중국에서 전해진 이야기를 봤을 때 대법 사부님의 홍대한 자비가 온 중국(지금은 이것뿐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에 가득 찼음을 느끼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큰 부처를 만났다고 생각하니 아주 놀라웠다. 그동안 감히 믿지 못했던 것을 지금 정말 만났기 때문이다!

연공한지 일주일 되었을 때 신체는 각 방면에서 좋아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 않았던 발바닥과 귀의 작은 상처, 티눈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손가락 인대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또 나와 함께 법 공부하던 아이가 동그라미(법륜)가 자신의 팔뚝에서 돌고 있는 것이 느껴지고 ‘전법륜’에 나오는 천목 ‘큰 눈’을 보았다고 내게 말했다. 사실 그때 아이들은 전혀 파룬, 천목 등 단어를 들은 적이 없었다. 이렇게 나는 대법을 지금까지 수련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12년이 됐다.

당시 나는 고향에서 갑상선 약 한 보따리를 들고 미국으로 돌아와 지속적으로 복약하는 인생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연공한 후 뜻밖에 열이 나면서 손이 떨리고 허약한 증상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체력이 많이 좋아져 집안일을 하는 것이 수월해졌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목소리도 우렁찼다. 그리하여 약봉지를 던져버렸다. 그동안 파룬궁의 혜택을 받아 누렇고 주근깨가 났던 피부는 점차 뽀얗게 바뀌고 탄력이 생겼다. 희끗희끗하던 머리카락도 까맣게 되어 사람들은 염색할 필요 없어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작년 고향에 돌아갔을 때 보니 나보다 한참 어린 외사촌 동생들도 중년에 들어섰고 외삼촌, 외숙모, 이모들도 많이 늙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놀라워했다.

관념을 바꾸다

사실 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연공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 형편이 바뀌지 않으니 관념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세상에서 많은 관념을 양성했으며, 관념에 이끌려 동경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인연에 따라 인생의 길과 인생 중의 득실(得失)이 결정되는데, 어찌 사람의 관념으로 인생의 매 과정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이른바 아름다운 동경과 소원 역시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고통스럽게 집착하는 추구가 되었다.”[1]

수백 번 ‘전법륜’의 법리를 통독한 후 나는 점차 안을 향해 찾는 것을 배웠다. 다시 말해서 어떤 여의치 않는 일에 부딪히든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제거해야 할 관념과 내려놓아야 할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성에서 부족한 점을 찾아내 없애야 한다.

그리하여 온갖 고생 끝에 드디어 ‘남편은 반드시 돈을 벌어 가정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어릴 적부터 생긴 관념을 찾아냈다. 이 관념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시부모님을 잘 대했고 온 힘을 다해 자녀와 가정을 돌봤기 때문이다. 아마 보통 사람은 나를 동정하면서 남편이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동경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니 그것은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더는 남편이 돈을 벌어다 주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관념을 개변한 후 나는 홀가분해졌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아이들은 성적이 좋아 대학에 가면 무조건 정부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졸업하면 더욱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재무 계획을 어느 정도 세우고 큰 집착을 내려놓았다. 그 이후로 나의 심성도 제고되어 남편에 대한 원망을 없애고 그의 장점만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자신이 ‘남편을 신뢰하고 사소한 일에서도 가급적 존중해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가짜였다. 나는 초조했고 자신을 불쌍하게 여겼는데 어찌 남편을 연민할 수 있었겠는가? 그도 아내와 자녀를 돌봐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도 마음속으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남편은 내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나는 그 말뜻을 잘 모르고 한가한 사람이 무슨 소리냐고 생각했다.) 사실 타향에서 분투하면서 그는 나의 전력 지지를 바랐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하지 못했다.

2009년, 남편이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면서 드디어 난국이 타개되었고 우리 가정은 9년 만에 수입이 있게 되었다.

물론 이야기를 아직 다 하지 못했고 나의 심성도 여전히 시험을 받는 중에 있다. 그러나 이번에 관념을 개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안을 향해 찾는 법보를 더욱 잘 운용해 수련 과정의 도전을 맞이할 수 있고 자신의 층차를 제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심코 꽂은 버들이 녹음을 이루다

그동안 남편과 나는 비록 정식 일자리는 없었지만 가정생활에서 창의성은 줄지 않았다. 우리는 한가한 시간을 충분히 이용해 각종 떡과 전통 음식을 만들고 책장이나 탁자 같은 가구를 만들었으며 전기용품, 조명기구 등을 고치기도 했다. 또 매주 아이들을 데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찾아가 단란한 시간을 보내며 중국 전통문화를 누렸다. 가족들은 함께 물만두, 부추를 넣은 전병, 찐빵 등을 빚고 중국 매듭을 만들었으며 중국화를 감상했다…… 이밖에 친구들과 번갈아가며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고 가정 도서관, 박물관, 불고기 파티를 열었으며 해변에 가서 놀기도 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옆에서 지켜주는 가운데 강한 독립심을 키워 숙제, 집안일을 언제나 자발적으로 했고 서로 사랑하고 돕고 서로의 친구들과 우정을 나눴다. 그리고 중국어를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을 배웠고 검소하면서도 고품질 생활을 꾸려나가는 방법을 배워냈다. 이런 뜻밖의 수확은 사실 현대인들이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다.

사부님께서 “우리는 조직과 형식이 없는 한 갈래 대도무형(大道無形)의 길을 걸으며, 돈을 저금하지 않고 물건을 장만하지 않으며 관직을 주지 않고 직무(職務)가 없다.”[2]라고 말씀하셨다. 1999년 7월 이래 중국공산당의 불법 탄압과 박해가 시작되면서 수련생들은 자발적으로 대기원, 신당인, 밍후이왕 등 매체를 세우고 여러 가지 진상 알리는 항목과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대기원 항목에 참가했고 1년에 한 번씩 서방 지역사회에 션윈(神韵)을 홍보하여 그들이 극장에서 중국 전통문화의 오묘와 정수를 볼 수 있게 했다. 이런 실천을 통해 나는 영어로 지역사회 단체.학교와 연락하고 인터뷰하고 서방의 단체 활동에 참가하고 중.영문을 타자하고 편집하는 등을 배우게 되었다…… 일반인들은 내가 왜 돈도 벌 수 없는 그런 봉사활동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처음에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고 봉사를 좋아하는 천성을 발휘하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보니 나는 그야말로 많은 것을 수확한 ‘승리자’였다. 우선 이런 일들은 하면서 나는 자녀와 남편 주변을 신경질적으로 맴돌지 않고 그들에게 독립적이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을 줬다. 다음, 나는 영어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서방 사회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는데다 각종 활동에 참가하면서 미국의 지리환경, 인문역사를 더 잘 알게 되어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해외 대기원은 점차 성숙해져 이미 중국인과 서방 사회를 이어주는 교량이 되었다. 그리하여 사업가들도 광고를 내어 지지하기 시작했으며 우리 직원들도 월급을 받게 되었다.

신기한 경험

남편은 나의 파룬따파 수련을 반대한 적이 있었다. 가장 치열하게 반대했던 3일간이 있었는데 내게 손을 대기까지 했다. 당시 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를 연민하고 참고 용서했다. 그는 매우 좋은 사람인데 곤경에 빠져 잠시 사악에게 통제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보호해달라고 빌었는데 하루 사이에 대반전이 일어나 남편은 대법을 믿게 되었다. 그는 “사부님의 법상을 보면 울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그의 나쁜 행동이 가져 오는 결과를 보게 했는데 나의 생명이 위급하여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가정이 파탄 나는 결과였다.

그 후부터 남편은 자신을 대법제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중국에서 사업할 때 진선인(眞善忍)의 원칙을 지켰고 심지어 “속인의 이익 중에서 명명백백하게 손해를 볼 때”[3]도 심성을 지켜냈다. 많은 친척과 친구들은 남편이 중국에서 바람을 피우지나 않을지 나를 위해 걱정했다. 하지만 7년이 지난 지금 모두들 남편은 정말 보기 드문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아이들을 교육할 때 나는 중국 전통 문화와 미국 문화 사이에서 균형 잡기 매우 힘들었다. 전통을 고수해 극단적으로 나오다 보면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했고, 그렇다고 과도하게 신뢰하다보면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줄 수 없었다. 하지만 법을 얻은 후 신기한 일들을 체험했다. 사부님께서는 뜻밖에 아이들을 돌봐주셨다. 한번은 사부님께서 꿈으로 점화를 주셨다. 나는 과격한 동작과 표정으로 격하게 아이를 훈계하고 있었다. 깨어난 후 나는 그런 행위가 무섭다는 것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가급적 감정을 통제하고 그렇게 아이들을 대하지 않으려고 했다.

또 한 번은 학교 오케스트라에 참가한 딸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타악기를 교실에서 운동장으로 옮길 때였다. 딸아이는 친구들과 함께 악기를 잡고 트레일러에 서있었는데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옆으로 떨어졌고 무거운 트레일러는 딸의 한쪽 다리를 깔고 지나갔다. 친구들은 모두 놀랐는데 뜻밖에 딸아이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운동장으로 따라갔고 연주도 정상적으로 했다. 딸이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는 바지를 입고 무대에 오르자 선생님은 확성기에 대고 학생들에게 박수로 격려하게 했다.

딸은 나중에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별 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깔려서 매우 아팠지만 활동에 참가하려는 마음 밖에 없어서 온 힘을 다해 일어나 따라갔어요.” 사부님께서는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 이 일념의 차이가 부동(不同)한 후과(後果)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한다.”[3]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당시 딸의 일념이 올발랐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신의 힘으로 보호해주셨을 것이다. 아니면 얼마나 고생하고 얼마나 많은 수업을 지체했을지 모른다.

사실 그동안 겪은 신기한 일은 매우 많다. 한 번은 공원에서 아침 연공할 때 4살 쯤 되는 아이를 만났는데 그 아이는 나의 목폴라 니트 속 파룬 도형 목걸이를 보았다. 또 한 번은 분명 고장 난 프린트기였는데 내가 급히 필요할 때 뜻밖에 컬러 전단지를 프린트할 수 있었다. 구멍 나고 찢어진 종이가 신기하게 원상 복원된 적도 있었다…… 나의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잇따라 법을 얻었는데 각자 신기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확고하게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다. 각각 80세, 82세인 두 노인은 정력이 왕성하고 생활이 행복할 뿐만 아니라 진선인을 따르며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전해주고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북경 노 수련생에게’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문장발표: 2016년 4월 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신수련생마당>대법과의 연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4/8/32634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