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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가 대법제자로

글/ 홍콩 서양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석가모니, 노자(老子), 예수의 출현은 비로소 사람들에게 오늘날 무엇이 바른 믿음(正信)이고, 수련(修煉)이며, 무엇이 불(佛), 도(道), 신(神)인지 이 일체를 진정하게 인식시켰다. 역사적으로는 오늘날 인류의 사상을 풍부하게 했고, 사람에게 법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게 했으며, 법을 얻을 수 있게 했다. 인류의 일체 역사과정에서 모두 이런 기초를 다졌다. 다시 말해서 대법을 전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의 문화를 육성했다.” [1], 사부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사실 종교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즉 하나는 진정으로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는 괜찮은 사람들이 도(道)를 얻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 사회의 도덕을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종교가 해야 할 두 가지 일이다.” [2]

나는 잉글랜드 중부의 50호 정도 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을은 교회를 중심으로 주택들이 들어섰는데,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기독교세례를 받았다.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은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등 특별한 명절이면 모두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렸고, 매년 여름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함께 마을의 명절을 준비했다. 그렇게 마을은 상호 정신적인 유대를 함께하는 총체적인 마을이었다.

할아버지는 작은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할머니는 평범한 농부의 아내였다. 할머니는 음식을 장만하는 등 집안일을 꾸려가면서 마을 부녀모임에 참여하였고, 그 외 시간은 전부 교회에서 풍금을 쳤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어릴 적부터 기독교도가 되었으므로 일요일마다 어머니, 누나 등 가족과 함께 교회로 가서 예배에 참여했다. 내가 조금 컸을 때는 할머니가 연주하는 구식 목제 풍금의 풀무질을 책임졌다. 그 후 교회당에 전자오르간 등 전자시스템이 설치되면서부터 나는 교회합창단에 가입했다. 그건 내가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교회와 친숙해져 계속 주일학교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기독교 지식을 습득하게 하려는 어린이에 대한 일종의 배려였다.

나는 어린 신자였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이고, 우리가 부지런히 선을 행하기만 하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천당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므로, 언제나 남을 도와주며 착하게 대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했고, 또 많은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농사일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가까운 읍내의 기계공장 견습생으로 일하게 되었다. 새로운 환경은 나에게 더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으므로 대부분의 남는 시간은 정력을 쏟아 학습하면서 체육 활동을 했다. 건강하고 부지런한 시골 아이로 모든 일을 열심히 했는데, 나는 크리켓(구기 종목으로 영국의 국기) 경기에 뛰어났다. 주말마다 두 차례씩 시합이 있었으므로 평일에는 저녁마다 훈련해야 했다. 바쁜 속에서 비록 교회에 갈 시간이 없긴 했어도, 나는 여전히 기독교 신앙을 견지하며, 기독교의 가르침에 부합되게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의 연수를 거쳐 마침내 전문 엔지니어 자격을 획득한 후, 1970년 영국 회사관리 고문공사에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나의 일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해 줄곧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그것들은 어떻게 생성됐고, 또 우리 이 우주 밖은 도대체 어떻게 생성되었으며, 무엇이 있을까?’를 알고 싶었다. 그런 문제로 사색에 빠졌지만 조금도 알 길이 없었다. 기독교가 주는 대답은 오직 천당, 세간, 지옥이 있다고 했을 뿐이고, 구체적인 해석이 없었다. 다만 지옥에 대한 답만은 ‘끓어오르는 불구덩이’라고 했을 뿐이었다.

1988년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변화가 발생했다. 어느 날 의사가 나에게 ‘과잉 적응증후군(적응에만 목적을 둬, 불안 초조 스트레스 유발)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너무 빠르고 너무 깊게 호흡하다가 30~45분 동안 졸도했고 깨어나서는 일부분 기억력을 잃었다. 증상이 그렇다 보니 상태는 매우 심각했고, 심지어 전문 엔지니어로서 전원 플러그 내의 전원을 연결하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내가 그 사건으로 2주일 동안 쉬고 출근하긴 했지만, 건강이 계속 여의치 못해 5년이란 기간을 거쳐서야 겨우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예수가 나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어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내 건강상태는 가정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전처와 헤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집을 떠났고, 나는 천당에 가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 후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고, 나는 한 다른 인생의 길로 인도되었다. 당시는 여전히 한 관리 고문공사에 근무하면서 국제 업무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고, 1994년 중국 톈진에 있는 한 세계은행의 일을 맡게 되어 3년 동안 전기사업분야의 일을 맡았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안 톈진의 한 여성을 만나게 됐고, 1998년 그녀는 아내가 되었다. 지금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내 생명의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두 연분과 운명의 안배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9년 톈진에서의 일이 끝나자, 다시 3년의 기한으로 랴오닝성의 선양, 안산과 다렌의 일을 맡게 되었고, 또다시 시안과 난창, 코소보까지 가게 되었다.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이 파룬궁(法輪功)을 박해하기 시작할 때 나는 중국에 있었는데, 박해가 가장 극심할 때는 랴오닝에서 일할 때였다. 그때 쓰촨 지사에서 일하는 한 동료로부터 파룬궁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그의 비서 남편이 파룬궁을 수련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그의 비서가 매우 걱정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다만 그런 정도로만 알 수 있을 뿐이었는데, 당시 사업상 중국에 체류했던 외국인은 누구나 정확한 진상을 알기가 매우 어려웠다.

나는 코소보로 가기 전, 운동하다가 대퇴골을 다치게 되어 병원에 갔는데, 의사 말로는 “연골이 지나치게 마모되었기 때문이니 고관절 교체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수술받기로 하고 준비하던 중에 코소보의 일이 촉박해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수술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코소보에서 여가를 이용해 줄기세포를 이용한 관절치료요법을 검토하게 되었는데, 아내도 인터넷을 통해 수술 없이 관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찾았다. 아내는 그곳에서 나의 2년간의 일이 끝나갈 무렵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찾았고, 영문판 ‘전법륜(轉法輪)’을 복사해 내게 주었다. 나는 매주 일요일 오후 대법 사부님의 설법 한 강을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읽기는 했지만 깨달음이 없었다. 아내에게 말했다. “이 책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인데, 기독교와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아내와 함께 계속 파룬궁을 담론하게 되자, 맘속 깊은 곳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인생에 바야흐로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지금 알게 됐는데, 아내가 내 관절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지만 나는 그 기회를 틀어잡지 못했다.

우리는 2008년 홍콩으로 돌아와서 즉시 수술받았다. 아내는 홍콩 현지의 파룬궁수련생과 연락이 닿은 후, 파룬궁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나는 ‘파룬궁은 중국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여전히 운동에만 열중했으며, 날마다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잡담하는 생활을 영위했는데, 코소보로 돌아갈 때까지 계속 그런 생활이었다. 우리가 2009년 코소보로 돌아오고 나서 아내는 코소보 인근 동유럽 국가에서 온 수련생과 연락이 닿아 휴가 때면 항상 그 수련생을 만나러 갔는데, 내가 운전할 때는 언제나 아내가 사부님 설법녹음과 대법제자의 노래를 틀었다.

2009년 가을, 퇴근 후 언제나 나와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영국 동료가 영국으로 귀국하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 지금은 저녁에 시간이 있으니, 나와 함께 연공해요.” 날마다 운동하기를 즐겼던 나로서는 그런 간단한 공법을 연마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파룬궁 공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교공 비디오를 보면서 될수록 표준 동작으로 배웠다.

그때 나에게는 건강상 문제가 좀 있었다. 왼쪽 귀에서 소리가 나서 심각할 땐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였고, 경추에 통증을 일으키는 문제가 있었는데 전문의 말로는 평생 진통제를 복용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또 위산이 역류했고, 목에는 작은 종양까지 있었다. 그 전에 두 번에 걸쳐 절개수술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재발했다. 또 오른쪽 어깨의 통증에다 또 다른 여러 가지 난치성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연공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되자, 그동안 문제되었던 건강상의 문제들이 하나하나 사라졌다.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가운데서 특히 나에게 감흥을 주는 것은 연공할 때 두 손 사이에 흐르는 오묘한 에너지의 감각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연공할 때 두 번 발생했다. 내가 막 공법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오른 팔을 들면 어깨가 몹시 아팠다. 어느 날 연공할 때 오른쪽 어깨 뼛속에서 아주 큰 소리가 나면서 마치 근육이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오른쪽 어깨의 고질적 통증이 사라졌다. 또 한 번은 2장 공법 네 번째 포룬을 하고 있을 때 오른쪽 귀가 갑자기 전기에 감전된 듯 극심한 통증이 왔는데, 연속으로 며칠에 몇 번씩 그랬다. 그동안 오른쪽 귀의 청력이 좋지 않아 지금까지 오른쪽 귀로는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로 나빴는데, 그런 통증이 있고 나서부터 청력이 좋아졌고 또 시력도 좋아졌다. 연공할 때 에너지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런 진실한 현상들은 나에게 ‘파룬궁의 에너지 마당은 확실히 아주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으며, 파룬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라게 했다. 그 후부터 대법수련에 정진하게 되었고, 사부님의 설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주에 관한 답과 그 외 많고 많은 의문의 답을 찾게 됐다. 대법은 나에게 참신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2009년에서 2011년까지는, 우리로 말하면 학습과 탐색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여러 유럽 국가를 다니면서 현지 수련생들을 만났으며, 또 그 과정에서 많고 많은 민중에게 홍법하고 진상을 알렸다. 우리는 또 여러 국가에서 션윈공연을 관람했다. 영국, 아테네,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 수도) 등지에서 관람했는데, 참으로 행운이었다.

2010년 11월 로마에서 거행된 유럽 법회는 나에게는 하나의 각성이었다. 수련생의 교류가 나를 감동케 해 법회 기간 내내 울었다. 중공의 혹형으로 박해받은 수련생, 치명적인 질병 속에서 건강을 찾은 수련생, 펼쳐 보인 자비로운 힘 등등 ‘세상에는 이렇게 신기한 사람도 다 있구나!’ 하고 나는 감동했다. 나는 내 생명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방법을 다해 그들을 도울 것이다. 2010년 12월 이스라엘 법회에 참가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매 한 글자를 모두 믿는다. 파룬따파(法輪大法)가 내게 준 광범하고 또 심오한 계시는 형용하기 어렵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북미순회설법’

[2]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 ‘전법륜(轉法輪)2-따위산(大嶼山) 설법‘

문장발표 : 2016년 1월 3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신수련생원지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31/3229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