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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정진하기 아주 어렵다고 느끼는 수련생들과 교류

글/ 미국 서부 대법제자

[밍후이왕] 여기서 나는 최근의 법공부 체득을 여러분과 교류하려 하며 더욱이 ‘수련을 처음처럼’하는 것에 대해 곤란을 느끼며 정진하기 아주 어렵다고 생각하는 수련생들에게 계발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대법으로부터 이로움을 얻었으며 일찍이 수련 중에서 한 가지 돌파가 있었다. 자신이 점차 많은 문제에 대해 일목요연할 수 있었고 많은 문제를 단번에 분명하게 보아낼 수 있었으며 자신이 아주 지혜롭게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만만해 했다. 사람 일의 전문분야에서도 적지 않은 돌파가 있었다. 물론 법리를 통해 전문적 수준이 열리게 됐고 또 더욱 많은 것도 깨닫게 됐는데 대법이 션윈(예술단)을 도와서 많은 아이(단원)들로 하여금 단시간 내에 세계 수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절대로 가능한 것임을 확고히 믿게 됐다.

물론 이것은 내가 여기서 교류하려는 주요 화제가 아니다. 내가 교류하려는 것은 내가 이 과정 중에, 수련생과 어느 항목의 일을 하는 중에서, 언론 매체 일이든지 기타 환경이든지 간에 많은 문제를 내가 아주 분명히 보아 낼 수 있는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 수련생은 어떤 상태이고 저 수련생은 어디가 틀렸고 항목은 어떠어떠하게 해야 하는데 그들은 왜 이렇게 하지 않는지’하는 것들이었다. 이로 인해 이것을 깔보고 저것을 깔보았다. 자신은 또 수련 중에서 몇 가지 수련에 대한 ‘경험’이 점차로 형성됐는데 예를 들면, 문제에 부딪히면 스스로 대법에서 얻은 지혜를 써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나 스스로 대법 수련은 어떻게 수련하면 되는지 알고 있기나 한 듯이 생각했다.

속인 상태에 부합되게 수련해야 한다면서 나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법공부, 연공이 느슨하면서도 괜찮다고 여겼고 정념이 있으니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사이에 갈수록 심상치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문제를 생각는 것이 갈수록 속인처럼 됐고 교란에 부닥치면 자신의 수련 경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사고해 봐도 서서히 해결할 수 없게 됐고 많은 문제는 자신의 지혜를 다 해도 해결할 수 없었는데, 이럴 때 법공부를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런 상태에서는 법공부를 그다지 많이 하지 못했고 연공도 하기 싫었다. 어떤 때는 마음이 늘 모순에 빠져 있었는데 대법의 일면은 견지하려 하고 사람의 일면은 견딜 수 없어 했다. 사람의 이 면을 견지하면 곧 속인 같았다.

나는 마난에 부딪혔는데 자신의 방법에 따라 해결하려고 고집했다. 하지만 수련생이 애써 설득한 보람으로 나는 억지로 법공부를 했고 공부를 마치면 또 자신의 생각대로 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겨우 15분 정도 공부했는데 해결되지 않던 문제와 교란이 단번에 풀렸고 내 원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됐다. 그제야 나는 법공부를 해야 함을 의식하게 됐다.

이튿날 ‘전법륜’을 펼치고 신 ‘논어’ 중의 첫 구절을 읽었는데 “대법은 창세주의 지혜이다”라는 구절이 나를 점화해 주었다. 네가 본 것이 아무리 맞고, 너의 지혜가 아무리 커도 대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너의 일체는 모두 대법이 만든 것이다. 나는 또 깨달았다. 내가 자신이 본 것이 옳고, 분석한 것이 투철하다고 여기지만 많은 때 나는 사람 중의 관념으로 법을 인식한 것이며, 잠재의식 가운데는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남을 깔보는 것이 있고, 명리정(名利情)의 집착을 보호하면서 서서히 자기 인식이 옳고 남은 틀리다고 생각했으며, 게다가 갈수록 자신을 단속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부님 말씀이 사람 중에서 형성된 내 사유체계를 찔렀다. 명리정에 대한 나의 각종 집착심을 망라해서 모두 ‘신을 배척하는’ 사회 중에서 형성된 것이며, 진정으로 대법이 요구하는 신을 믿는 사회의 관념과는 완전히 융합되지 못한 것으로 점차 과대망상으로 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단지 ‘자아’라는 의식만 있을 뿐 문제를 사고함에 자신의 경지보다 더욱 높은 생명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은 것이며, 자신의 경지보다 높은 일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나는 단번에 알게 됐다. 내 자신이 본 것이 얼마나 맞고 얼마나 정확하든지를 막론하고 나는 모조리 내려놓아야 한다. 이때부터 이전의 일체의 관념을 비웠는바, 대법 수련인식에 대한 이른바 ‘경험’이라는 관념을 망라해서다. 그건 다만 그 한 시기 그 층차에서의 인식일 뿐이므로 장기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부터 나는 자신의 용기(容器)를 비우고 대법만을 담았으며 자신이 되도록 대법에 동화할 것을 요구했다. 정말로 법에 있다면 당신에게 아직도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인식이 있게 됐을 때, 예전에는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지조차 모르던 집착이 모두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이런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나는 대법을 나의 이 용기 속에 담을 수 없고, 낡은 관념, 집착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한 개의 궁전처럼 안에는 모두 낡은 물품이 아주 가득한데 낡은 물품을 옮겨가지 않으면 새 보물은 놓아둘 자리가 없는 것과 같다.

또 한 가지가 있는데, 우리 많은 지식인들은 사람 가운데서 형성되고 과학 사회에서 만들어진 사물분석의 학술관념을 중히 보지 말아야 한다. 그건 모두 대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며, ‘신을 배척’하는 기초 위에서 형성된 관념이다. 우리 많은 수련생은,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론학습의 사유로 법을 공부하는데 아마 법리를 말하면 아주 그럴 듯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꼭 인정했거나 실천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단지 이론을 배웠을 뿐이다.

나는 ‘대법은 창세주의 지혜이다’라는 것과는 어떠한 다른 사유관념이든, 또 사람 중에서 집착하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법을 얻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과 대법의 위력이 많은 속인의 마음을 모두 억제하는 것을 느꼈고 ‘창세주의 지혜’를 배우려는 주관적인 강렬한 염원이 진정으로 대법을 배우는 감수를 깨닫게 했다. 이전에는 자신에게 아직 남겨놓은 것이 있었고, 속인의 마음을 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장이 깨끗하지 못했다. 이 한 동안 날마다 한 강, 두 강씩 법 공부해도 모두 부족하다고 여겨졌으며 게다가 에너지가 상당히 큰 것을 느꼈다. 자신이 속인의 마음을 억제하는 에너지도 강하게 변했다. 이로부터 나는 깨달았는바 만약 법공부를 통해 자신의 속인 마음을 억제할 수 있다면, 이 에너지를 체외에 내보낼 수 있다면 속인의 좋지 못한 사상을 억제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며 사람을 구하는 효과에도 아주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남들도 나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들이 너무나도 쉽게 수련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만한 난뿐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고만한 일뿐인데, 아직도 많은 마음을 여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혼란(惑亂) 중에서 당신의 대법(大法)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도 문제가 아닙니까!”[3] 나는 깨달았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너무 정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또 정진하자면 유달리 발악해야만 하는 것 같을 때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아야 한다. 아직도 무슨 문제를 내려놓지 못했는가, 아니면 아직도 대법은 무엇인지 정말로 의식하지 못하지 않았는가를.

법공부하면서 나는 사부님 말씀을 보았다. “내가 내보낸 에너지마당의 분포가 고르고 에너지는 겨냥성이 있다.”[4] 나는 주동적으로 이런 에너지를 접수할 염원을 명확히 하였다. 이로부터 예전에는 법공부를 잘 하지 않았고 연공하기 싫어했던 것에서 내가 법공부와 연공을 하기 좋아하기 시작했음을 발견하게 됐다. 무슨 발악하거나 과분하다는 것이 아예 없고 법을 얻으려는 마음이 나를 이끌었는데, 어서 빨리 창세주의 지혜를 생명 속에 넣어 사람 이 면의 많은 뒤엉킨 사유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때 나는 한 장면을 생각했다. 위에는 사부님이 계시고 아래는 우리들인데 우리 매 한 사람은 모두 용기(容器)다. 사부님께서는 그의 지혜를 우리에게 주신다. 만약 우리 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층차에 있다면, 자신의 원래의 일체 사유 방식을 모두 쏟아내야만 사부님께서 주신 지혜와 위력을 담을 수 있는데 그런 다음에야 우리는 비로소 대법입자가 될 수 있고 비로소 사부님과 협력할 수 있으며, 비로소 표준적인 조사정법에 부합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낡은 것 혹은 사람의 관념을 품고 대법의 일을 실증한다거나 자신이 이전에 총명하다고 여긴 사유방식으로 한다면 아마 비자각적으로 대법을 저촉하는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우리 여러 사람의 수련 자체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는데, 이를테면 “여러분이 모두 움직인다면 어떠어떠할 것이다.”(마치 사람이 많으면 역량이 큰 것 같다)라는 것인데, 내가 이해하기로는 우리 여러분은 수련에서 제고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걸어 나와 법을 실증하는 게 필요할 뿐이지 무슨 공식적인 것으로 변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사유방식을 말하자면 나는 예를 하나 들겠다. 과거에 수도하는 사람은 일을 함에 천상(天象)을 보고 했던 것 같다. 천상이 오면 하고 천상이 오지 않으면 그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을 믿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사적인 것을 위하는 본성에다 또 ‘신을 배척’하는 일체 관념을 부어넣어 우리가 하는 일이란 천상이 있든 없든 상관없고 일을 한다는 것이 모두 스스로가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여기면 어떻게 하는데 언제나 자신의 각도에서 문제를 보면서 이것이 사부님 요구에 부합되는지 안 되는지도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보기에는 조사정법을 하는 것 같지만 실은 아마 부딪혀 머리가 터지고 피가 흐를 것이다.

나는 이로부터 각종 부분에서 곤란에 부닥친 매체를 생각하게 됐다. 물론 내가 본 것이 어쩌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내가 본 바는 바로 우리 수련생들이 모두 서로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보려고 애쓰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다해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것인가를 밖으로 찾는데 부지불식간에 돈 속에 파묻힌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어떤 항목의 사업에서 명을 추구하고, 어떤 이는 남을 얕잡아 보며, 어떤 이는 자신의 방법이 옳다고 여기고, 어떤 이는 권력에 대한 집착이 생겼으며, 또 많은 사람은 책임자를 지켜보고, 사람과 사람 간에 믿지를 않는다. 사실 우리 모두 ‘신을 배척’하는 사회에서 형성한 관념으로 행사하면서 늘 자신에게 큰 재간이 있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임을 나는 느꼈다. 물론 문제는 존재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에 부딪혔을 때, 자신이 모두 무조건 법에 동화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생각해 보라. 넣은 것이 모두 법이고 창세주의 지혜일진대,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수련생을 도와야 하며, 어떻게 이 항목을 도와야 할지를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일은 우리와 다른 공간의 협력으로 가져온 것이지만 우리가 너무도 자신의 인식을 중히 보므로 사부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원용할 수 없게 된다. 위덕이 닦아져 올라오면 돈 문제는 자연히 갈수록 좋아질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온갖 방법을 다 한다면 오히려 반대로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익에 대한 집착 중에서 밖을 향해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님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속인은 나를 모르나니

나는 심오 속에 앉아 있도다

이익과 욕구 속에 나 없나니

백년 후에는 오로지 나로다[5]

사부님께서는 “이익과 욕구 속에 나 없나니”[5] 하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구절 말씀에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됐다. 우리가 이익과 욕망의 집착 속에서 사부님께 빈다면 소용없는데 왜냐하면 사부님은 아예 그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법에 동화해야하고, 우리 사유 중의 법에 동화된 부분이 사부님과 진정으로 협력의 관계를 형성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무슨 방법이 좋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꼭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러한 염원을 지니고 법 공부했더니 나는 정말 책을 한 번 보면 하나의 모습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첫 번에는 경건한 생각을 지니고 창세주의 지혜를 배우려는 생각으로 법 공부했더니 에너지가 유달리 큼을 느꼈고 속인의 마음이 다 억제됐다. 매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 마음이 산란할 때면 나는 곧 책을 펼치고 보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다만 이런 번거로움, 이런저런 생각들을 다 쏟아버리고 비운 다음 법을 담겠다는 염원만 가진다. 정말이지 사부님께서 하신 어느 말씀이 나의 문제를 해결했는지도 모를 지경으로 즉시 효과를 보게 된다.

이것을 교류하는 것은 여러분께서 모두 법공부를 중시하기 바라서이다. 무신론, 과학이 우리에게 형성시킨 관념을 타파하고. 사람 가운데서 형성한 관념과 사유를 품지 말아야 한다. 구세력은 우리 원래의 사유 방식 속에 숨어 있다, 왜냐하면 이 일체가 원래 바로 그들이 이렇게 배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죄다 쏟아내고 대법을 담으면 그 좋지 못한 관념은 곧 종료될 것이며, 구세력이 숨을 수 있는 곳이 없게 되고, 사람을 구하는 위력이 증강될 것이며, 사악을 깨끗이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은 개인 층차에서 깨달은 것으로서 부족한 곳은 수련생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논어’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 설법1-싱가포르불학회 설립식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시: ‘홍음-각자’

문장발표 : 2016년 1월 2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6/1/20/32247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