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 대법제자 차이샤(彩霞)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2기 사이트 법회를 빌려수련 과정을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한다. 법에 부합되지 않은 점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1. 운 좋게 대법을 만나 온 가족이 불은(佛恩)에 젖다
1996년 나는 병(유방을 제거해야 했음) 때문에 파룬따파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대법을 배운 후 일주일이 지나자 병이 호전됐고 20일 후 양쪽 유방의 종기가 모두 없어졌다. 후두염, 신경쇠약, 견관절주위염 등 질병이 모두 나아 신체는 가벼워졌다. 남편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의 나의 신체 변화를 보고 수련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되지 않아 술 담배를 끊었고 사람도 생기발랄해졌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폐결핵 등 여러 질병이 있어 힘든 일을 하지 못하셨는데 97년도에 수련한 후부터 여러 가지 질병이 가뭇없이 사라져 완전히 건강해지셨다. 큰 딸은 1997년에 간질병에 걸려 병이 발작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이었는데 아주 무서웠다. 법을 얻은 후 사부님께서 딸의 신체를 정화해주셨고 딸의 병을 뿌리째 뽑아주시어 지금까지 발작하지 않았으며 지금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돈 한 푼 달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 온 가족에게 건강한 신체를 주셨다. 더 중요한 것은 법공부를 통해 나는 인생의 목표, 생명의 의의를 알았다. 이런 대은대덕은 나의 모든 것을 다 해도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 어렵다.
2. 풍운 돌변, 처음 겪은 고난
1999년 7월 20일, 공포의 대마왕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나의 고난도 이때부터 시작됐다. 나는 원래 시골에서 살던 일반 농부였는데 생계를 위해 현소재지 사범학교에 매점을 꾸렸다. 7월 20일 오전, 나와 남편이 친척집에 갔는데 학교 관할구역 파출소장과 사범학교 교장 기사가 함께 내가 연 매점에 와 딸에게 나의 행방을 물었다. 그들은 차를 몰고 길 절반까지 쫓아와 나를 관광지 세뇌반에 끌고 가 세뇌 박해를 가했다. 일주일 후 도시로 이전해 박해하고 1360위안을 갈취하고 불법적으로 14일 감금한 후에야 집에 보냈다.
1999년 12월 현에서 세 사람을 가게에 파견해 나를 찾아와 수련을 포기하라고 했다. 내가 임대한 집은 사범학교 집이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사범학교에서 사람을 파견해 나를 감시했다. 그들은 늘 매점에 와 소란을 피웠고 야밤 중에 문을 두드려 우리 두 사람이 집에 있는지 보았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집에 돌아가 조문하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우리가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텔레비전, 신문 및 각종 언론에서 하늘을 뒤덮을 듯이 대법을 모함하고 날조해 대법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나는 집에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청원해 대법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사부님을 위해 공정한 도리를 밝히고 대법의 결백을 밝혀야 했다. 그래서 2000년 신년이 지난 후 나는 혼자 베이징에 갔다. 이튿날 아침 나는 거위 털 같은 큰 눈을 무릅쓰고 베이징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민원국을 찾았다. 나는 민원국에 도착하자마자 사복경찰에게 납치됐고 베이징주재 현지 사무처에 넘겨졌다. 현지 공안은 나를 현지로 끌고 가 보름동안 구류했다.
2000년 음력 정월, 사범학교는 임대 계약을 어기고 매점 문을 잠그고 우리를 내쫓았다. 남편은 베이징에 가서 대법의 억울함을 호소한 이유로 납치되어 구치소에 감금됐다. 작은딸을 친척 집에 보냈지만 나와 큰딸은 갈 길이 없었고 갈 곳이 없었다. 큰딸이 나에게 물었다. “어머니, 오늘밤 우리는 거리에서 자야해요? 내일 난 학교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아요?” 나도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칠흑 같은 밤, 나는 자전거에 이불과 아이 학용품을 싣고 딸과 눈바람을 맞으면서 사범학교에서 시내로 걸어갔다. 길은 아주 미끄러웠고 날씨도 추웠다. 딸이 나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나는 앞으로 먼저 가자고 말했지만 속으론 어디로 갈지 생각했다. 이때 나는 아이 얼굴에 눈과 눈물이 한데 녹아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내 마음은 씁쓸했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의 시를 외웠다. “고비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데 곳곳마다 마(魔)로다 백 가지 고생 한꺼번에 내리거니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겠노라 세상 고생 겪을 대로 겪나니 세간 벗어나면 부처로다”[1] 시내로 가는 큰 다리를 지나갈 때 수련생 한 분을 만났다. 나의 상황을 안 후 우리를 그녀 집으로 데려갔다.
이튿날 나는 집에 돌아가 우리 박해 때문에 걱정하다가 병이 난 시어머니를 돌보러 갔다. 시어머니는 혼자 집에서 링거를 맞고 계셨다. 그런데 집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진(鎭)에 있는 사람이 고향에 와 나를 납치해진 파출소로 데리고 갔다. 강제로 나를 3박3일 쇠의자에 앉게 했다. 그들은 나에게 모두 수갑 5개를 채우고 쇠의자에 다리를 한데 붙이고 등 뒤로 두 손을 채워놓았다. 우리 집 식구 다섯 명은 박해 받아 제각기 딴 곳에 있었다.
사범학교는 나에게 방을 임대해주지 않아 나는 난관(南關)촌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난관 파출소는 아이를 미행해 나의 거처를 찾아내고 집주인에게 압력을 가해집을 임대해주지 못하게 했다. 내가 사전에 임시거주증을 냈기 때문에 그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방해를 늦추지 않았다. 늘 야밤중에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피웠고 얼마 되지 않아 또 나를 구치소에 납치했다. 나는 단식으로 항의했는데 9일 감금한 후 나를 돌려보냈다.
3. 마귀소굴과 같은 진(鎭) 정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2000년 7월 9일 오후 4시경, 진(鎭)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는 30여 명을 거느리고 우리 집에 뛰어들어 나와 남편을 납치해 계획생육위원회 울 안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어떤 사람은 내 머리를 들었고 어떤 사람은 팔을 들었으며 어떤 사람은 다리를 들어 마치 마대를 버리듯 나를 차에서 던진 후 두 사람이 내 팔을 끼고 한 사람이 내 머리를 들고 땅에서 끌고 갔다.(남편도 같은 방식으로 대했다.) 나와 남편의 발꿈치는 땅에 끌려 살이 보였고 피가 줄줄 흘렀다. 이때 날이 막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리 두 사람을 쇠의자에 앉히고 두 손을 뒤로 수갑을 채운 후 우리 두 사람의 다리를 평형으로 뻗게 한 후 밑에 의자를 받치고 다리에 물을 가득 담은 대야를 올려놓고 끈으로 다리와 목을 한데 묶어 머리를 들 수 없게 했다. 머리는 거의 대야 물에 닿을 정도였다. 한참 지나 대야 물을 우리 머리에 붓고 또 물 한 대야를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나를 방으로 끌고 가 땅에 앉게 하고 다리를 곧게 펴고 두 팔을 들어 평형으로 뻗게 한 다음 5, 6명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 두 시간 동안 그들은 미친 듯이 끊임없이 죽도록 때렸다. 어떤 사람은 내 신바닥으로 뺨을 때렸고 어떤 사람은 빗자루로 마구 때렸으며 어떤 사람은 나일론 끈을 접어 나를 후려쳤고 어떤 사람은 구둣발로 마구 찼으며 어떤 사람은 내 다리를 짓밟아 자주색으로 변하게 했다. 마지막에 나는 아픈 줄을 몰랐으며 오히려 좀 가렵고 저린 감각을 느꼈으며 자고 싶었다. 그 다음 기절해 그들이 언제 구타를 중지했는지 몰랐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낮에는 우리를 혹독한 태양 아래에서 강한 햇볕에 오래 쪼이게 했다. 그날 그들은 뜰 안 느릅나무 껍질을 벗긴 후 내 머리를 뒤로 잡아 접혀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느릅나무 가지로 내 뺨을 후려쳤다. 나와 남편의 얼굴은 맞아 변형됐고 온 얼굴이 모두 검자주색으로 됐으며 눈은 부어 가는 틈만 남았다. 며칠 간 나와 남편의 옷은 맞아 다 찢어졌고 남편의 옷은 어깨에 피와 살과 한데 엉겨 붙어 벗길 수 없었다.
한 수련생의 남편이 수련생을 보러 왔다가 나의 남편과 내가 이 모양으로 고문 받은 것을 보고 울면서 집에 돌아가아들 옷을 가져다 남편에게 바꿔 입혔다. 바꿀 때 먼저 찬물로 옷을 적셔야 했다.
이후에 수련생이 물을 떠 가지고 와 나에게 마시게 했다. 내 입은 부어서 벌릴 수 없어 그녀는 작은 술로 한 술 한 술 나에게 먹였는데 물을 전혀 먹을 수 없어 도로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이런 모습을 보고 수련생은 줄곧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니면 수련하지 않겠다고 말하세요.”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속으로 나를 때려죽여도 난 수련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하루 저녁 걸러 한 번씩 나를 때리면서 고문으로 내 수련을 포기하게 했다. 나는 끝까지 수련하기로 마음을 다짐했다. 한 번은 그들이 5번 고문을 가했다. 화장실에 갈 때 어떤 사람이 내 등을 보았는데 온 등이 모두 검자주색이었다고 말했다. 다리 몇 군데도 검자주색이었다. 위에서 사람이 올 때마다 그들은 우리가 맞은 것을 볼까 두려워 우리를 다른 곳에 이전시켰다. 나와 남편은 동시에 고문을 당했다. 우리 두 사람은 쇠의자에 묶였는데 두 사람 거리는 3미터도 되지 않았다. 한 번은 그가 나에게 “당신 얼굴이 맞아 변형됐네”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 얼굴도 부어서 원래 당신 같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우리를 굴복시키기 위해 저녁에 정법위 사람은 우리 두 사람을 돼지우리에 가두고 두 손은 등으로 수갑 채우고 철의자에 앉게 했다. 모기가 너무 많아 얼굴에 닿을 정도였다. 그들은 수련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여기에서 모기 밥이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손을 움직일 수 없어 모기를 쫓을 수 없었기에 온몸이 모기에게 물려한 데로 연결됐다.
며칠 후 현(縣) 공안분국의 파룬궁 박해를 관리하는 부국장 뤼OO가 왔다. 그들은 우리에게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라고 했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말했고 사부님과 대법은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결국 또 고문을 당했다. 이번에 나는 맞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바지에 쌌다. 그들은 고소해하며 나에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렇게 큰 사람이 바지에 똥을 쌌다고 놀렸다.
이번 박해는 20여일 지속됐다. 마지막에 그들은 강도처럼 차 한 대에 사람을 싣고 남편에게 집에 가서 1만 위안을 내놓으라고 핍박하면서 ‘벌금’이라고 말했다.
내가 집에 돌아간 후에야 안 사실인데 나의 여동생, 매부, 어머니도 모두 그들에게 잡혀가 맞았으며 벌금을 냈다. 여동생은 맞아 죽을 뻔했고 또 그들은 여동생에게 냉수를 붓기도 했다.
4. 자식이 효도하려 할 때 부모님은 이미 떠나
2001년 음력 11월 초이레, 현 ‘610’사무실 주임 류OO와 현공안국 부국장 뤼OO는 또 한 차례 나를 세뇌반에 납치해 사오(邪悟)한 사람에게 나를 둘러싸고 사오한 이론으로 권고하고 위협하게 했다. 나는 그런 것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뤼OO는 내가 수련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바로 집에 돌려보내지만 전향하지 않으면 노동교양을 시키겠다고 말했다. 나는 당연히 ‘전향’하지 않았고 노동교양 3년을 받았다.
나는 위로 팔순 되는 시어머니가 계셨고 아래로는 열 몇 살 되는 딸 둘이 있었다. 내가 불법적으로 노동교양을 받은 후 집은 절반이 무너진 것 같았다. 내가 간 후 남편은 열 몇 살 되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게를 돌봐야 했기에 도무지 지탱하기 어려워 마지막에 친척의 도움으로 유지해나갔다.
시어머니는 늘 길가에 앉아 나를 기다리면서 사람을 만나면 물었다. “우리 연(娟)이 엄마가 돌아올 때가 됐지요?” 이렇게 기다리면서 눈이 빠지도록 내가 집에 돌아오길 기다리셨다. 마침내 내가 집에 돌아가는 날이 되어 남편과 두 딸이 노동교양소에 와 나를 데리러 왔는데 중도에 집에서 남편에게 전화로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려주었다. 남편은 즉시 돌아갔고(‘610’ 사람이 같이 갔음) 두 아이가 검은 소굴에 와서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시어머니의 텅 빈 방을 보며 요 몇 해 나의 박해로 노인이 마음을 조마조마하며 정신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눈이 빠지도록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을 하니 3년 노동교양소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나는 그 시각 눈물이 샘솟듯 했다. 내가 노인을 돌봐야 할 때 노인은 떠나가셨다. 크나큰 기대와 근심을 안고 가셨다.
5. 풍상고초를 겪으면서도 동요하지 않다
2007년 7월 4일 내가 매점에서 일하는데 현 공안국에서 한 무리 사람이 와 직접 나를 노동교양소로 붙잡아갔다. 내가 그들에게 왜 나를 노동교양 시키느냐고 물었더니 그 중 한 사람이 내년에 올림픽을 열기 때문에 일찌감치 당신들을 붙잡아야 시름을 놓는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노동교양소에 있던 2년 동안 나는 더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한 번은 화장실에 열흘 밤낮을 서 있게 했고 또 한 번은 9일 밤낮을 서있게 했다. 교양소의 악독한 경찰은 마약 중독자들을 조종해 나에게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했다. 내가 전향하지 않자 그들은 마약 중독자를 자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대법제자를 모두 적대시했다. 어떤 때는 고의로 밥을 화장실에 부어넣어 나를 먹지 못하게 했다. 그녀 두 사람은 한 조가 되어 밤 낮 번갈아 가며 당직을 서면서 나를 자지 못하게 했다. 어떤 때는 장시간 잠을 자지 못해 서서도 잤으며 머리가 벽에 부딪칠 때 있었다. 하지만 1, 2분 사이에 그녀들이 본 후 한 바탕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다. 그녀들은 볼펜으로 내 머리를 찌르고 맞아 혹이 났고 피가 흘렀으며 두 발등은 그녀들이 밟아 시퍼렇게 됐다. 난 서 있다가 혼수상태로 넘어져 앞니 두 대가 다 움직였다. 장시간 벌서 나는 발에서부터 허리까지 부어 바지도 벗을 수 없었고 오장육부가 모두 아픈 것 같았다.
한 겨울에 그녀들은 늘 물 한 대야를 내 정수리에 붓고 창문을 열고 나를 얼게 하여 옷이 다 얼어 얼음이 꼈다. 9일 밤낮으로 벌을 서야 했던 그 때 나는 도저히 서 있지 못하고 화장실 땅에 앉았다. 그녀들이 아무리 끌어도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그녀들이 땅바닥에 냉수를 부어 나는 또 물속에 7일 밤낮을 앉아 있었다. 한 달 넘게 나를 옷을 벗지 못하게 해 내가 솜바지를 벗었을때는 솜 신에 모두 물이었고 발바닥이 물에 잠겨 허옇게 됐다.
어떤 때는 견디지 못해 이 육신을 포기할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바로 의식했다. 이는 진아(진정한 나)가 생각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부님을 따라 집에 돌아가야 한다. 어쨌든 나는 살아서 노동교양소를 나가야 한다. 사부님이 계신 한 나는 인간 세상에서 대법제자로 되어야 한다. 극에 이를 때마다 나는 속으로 반복해서 “대각자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의지는 금강으로 만들었구나 생사에 집착이 없나니 정법의 길은 탄탄하여라”[2]를 외웠다.
또 한 번은 나에게 사상 도덕수양과를 가르치려했는데 내가 협조하지 않아 그녀들은 나를 사무실 문 뒤에 데려가 나를 서있게 했다. 내가 복종하지 않자 마지막에 나를 문 뒤에 눌러 앉히고 나의 신도 버렸다. 그녀들은 말했다. “당신이 수련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당신을 씻지 못하게 할 거야.” 나는 2년간 나를씻지 못하게 해도 나는 수련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나는 문 뒤에서 72일 있었다. 이 72일 동안 나는 손과 얼굴 한 번 씻지 못해 머리카락은 미친 사람처럼 더러웠다. 그 후 흉악한 경찰은 또 그녀들을 시켜 나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밥을 가져다주게 했다.
그녀들이 어떻게 나를 대하든 나는 자비롭게 그녀들을 대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그녀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생활에서 가급적 그녀들을 도왔다. 나는 한 마약범에게 진상을 알리고 그녀에게 60위안짜리 상품권을 주었다. 그녀가 이불을 뜯어 빤 후 할 줄 몰라 내가 도와주었더니 그녀는 내가 그녀를 잘대해준 걸 기억하고 대장과 수련생들이 모두 생산라인에 일하러 간 후 매일 남몰래 나에게 물 반 병을 얻어 주었다. 마지막 며칠은 마약범이 나를 지키면서 먹는 물도 끊었다. 나는 어찌됐든 절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경찰들은 내가 죽으면 책임질까 두려워 나에게 밥과 물을 주었다. 나는 28일 동안 소변만 보고 대변은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며 몸은 말라서 뼈만 앙상하게 남았다. 하루 24시간 동안 화장실에 한 번밖에 가지 못하게 했으며 저녁 12시면 요강을 내가 있는 곳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놓았지만 잘 걸어갈 수 없어 벽을 짚고 천천히 걸어가야 했다.
나는 강인한 의지와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구세력이 나에게 억지로 떠넘긴 시련을 부정했다. 경찰과 나를 지키던 죄수들은 감동했다. 그녀들은 적대, 고문하던 데에서 탄복으로 변했고 내가 노동교양소를 떠날 때 대장은 나에게 연공하지 않겠다는 무슨 ‘보증’을 쓰라는 말을 더는 하지 않았다.
2년이 됐는데도 내가 아무 것도 쓰지 않자 그녀들은 또 나에게 1개월을 연장했다. 이 2년 1개월 동안 나는 어떤 가족도 만나지 못했다. 가족이 몇 번이나 보러 왔지만 모두 내가 전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면회를 시키지 않았다.
구사일생의 고난을 겪었지만 조금도 나의 수련의 의지와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대법제자가 창작한 노래 ‘옥중음(獄中吟)’에서 부른 것처럼 “생명은 산보다 중요하고 대법은 하늘보다 크다 마음에 진선인(眞善忍)을 담으니 수련의 의지 더 강해지도다. 금생에 행운이 있어 법을 얻었으니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지어라.”
노동교양소에서 나온 후 나는 신속하게 세 가지 일을 잘하는데 투입했다. 전후 5년 동안의 노동교양 때문에 구세력이 나에게 중생구도 시간을 지체한 것을 나는 배로 보완할 것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 ‘홍음-마음고생’
[2] 리훙쯔 사부님의 시: ‘홍음2-정념정행(正念正行)’
(밍후이왕 제12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5년 11월 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밍후이대륙법회>제12회(2015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7/3185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