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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지 마라’를 바르게 사용할 것을 논하다

글/ 랴오판(了凡)

[밍후이왕] 줄곧 수련생 중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한마디 말은 바로 “마음을 움직이지 마라”이다. 하지만 많고 많은 집착심도 “마음을 움직이지 마라”는 이 한 마디에 덮여 자신을 수련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1. 하루는 한 수련생을 만났다. 어머니는 그녀와 최근 밍후이왕에서 게재한 헤이룽장성 대법제자가 핸드폰 앱으로 연락하고 법공부 하는 폐단을 얘기했다. 그 수련생은 시답잖아 하며 말했다. “마음을 움직이지 마요. 밍후이왕에서 게재한 것은 다만 수련생의 인식일 뿐이지 법은 아니에요.” 그리고 말할 때 아주 귀찮아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련생의 인식이라 해도 자신을 가늠해야 한다. 그리고 박해당하지 않았다 해서 누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부님께서 또 언급하셨다. “물론 서로 도와주는 것은 잘못이 없지만,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 [1]

사부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바로 누락 아닌가?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타인과 정체에 책임지지 않는 일종 표현이다. 이 사람들 눈에는 일반 수련생이 얕잡아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중시하는 것은 기세의 드높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인터넷 봉쇄돌파CD를 얼마나 배포하고, 전단을 얼마나 돌렸는가 등등에 관심하지 착실하게 사람을 얼마나 구했는가는 관심하지 않는다. 나는 형식상 기세가 드높은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기세가 드높고도 야무지게 사람을 많이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은 것이다. 하지만 기세만 드높고 사람을 구하는 효과가 흐지부지하다면 이지적으로 사람을 구하는 효과가 좋은 쪽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

많은 수련생은 묵묵히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는데 몇 년을 하루와 같이 안정적으로 하면서 한 번도 허세를 부리거나 자랑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한 사람에게 알리면 그 사람이 명백히 안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전혀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 집 복도에 수시로 수련생이 진상자료를 배포하러 오는데 벽에 붙이는 것이 아니다.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면 땅바닥에 지저분하게 던져 놓는다. 매번 우리가 한 장 한 장씩 주워온다. 한번은 일부러 벽에 붙은 전단을 가져가지 않았다. 가져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수련생이 더 배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 수련생은 새로운 전단을 직접 이미 붙은 전단 위에 붙여 겹쳐 놓았다. 방법이 없어서 나는 또 가져왔다.

우리에게 믿음직한 방법이 있는데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는 것이다. 보기 좋아하거나 관심이 있거나 의의를 느끼는 사람에게 소책자나 전단을 준다. 왜냐하면, 더욱 전면적으로 쓰여 있어 설득력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대량으로 전단을 배포하는 것은 외진 지역 중생에게 더욱 적합하다. 시내에는 스티커가 더 적합하다. 예를 들면 대법 홍전, 삼퇴 인원, 장쩌민 고발 등.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이 일에 대한 인상이 있게 한다. 왜냐하면, 시내에서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이 상대적으로 좀 많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개인적인 견해다,)

2. 한 수련생은 공원에서 진상 달력을 배포하다가 납치됐다. 수련생들은 서로 알리면서 마지막에 “마음을 움직이지 마라”고 한마디 덧붙인다. 사실 우리는 마음을 움직여 어떻게 하면 이지적으로 중생을 더욱 잘 구도할 수 있겠는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공원에 장기적으로 붉은 노래를 부르고 사당의 공덕을 칭송하는 일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있다. 게다가 공원 내에 경비소가 설치되어 있고 출입구에 무장경찰의 순찰 망루가 있다. 나도 공원에 가서 진상을 알린다. 내 방법은, 공원 안에 자주 둘 혹은 셋씩 산책하거나 조깅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산책하면서 한담한다. 지금의 사회문제는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공감을 찾기 아주 쉽다. 만약 특별히 이지적이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그와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공원은 본래 단련하는 곳인지라 우리는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떠나면 그만이다. 대법은 지혜를 열어 준다.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동시에 만약 직접 진상을 알릴 수 있다면 효과는 더 좋은 것이 아닌가? 더욱 이지적이고 지혜로운 방법은 아직도 많을 것이다.

3. 어떤 수련생은 모든 정력을 기세가 드높게 일하는 데에 쏟아 부었는데 개인 행위는 아주 좋지 않다. 그리하여 다른 수련생이 참다못해 그에게 화를 낸다. 그러나 그의 표현은 소위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이 수련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견식이 같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길을 간다.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법에 부합되는가? 무엇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핍박했는지 왜 마음을 움직여 찾지 않는가? 내가 아는 한 수련생은 할머니인데 진상을 알리는 방법은 사람을 만나면 봉쇄돌파 프로그램을 준다. 버리는지 마는지는 상관하지 않고 배포할 수 있는 데까지 배포한다. 대화 중에는 전부 속인의 말이고 며느리와 지혜와 용기를 겨룬다. 이것은 누락이 아닌가?

나 개인적인 이해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마난 앞에서 신사신법 하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고험 앞에서 대법을 수련하는 마음이 확고해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박해 앞에서 중생을 구도하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고, 안일한 환경에서 처음과 같이 수련하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개인 수련에서 안을 향해 찾는데 마음을 좀 많이 움직이길 바란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우리 일부 수련생은 병업관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큰 부분에서 생각하지 마라. 당신은 나는 그렇게 큰 잘못이 없으며, 법에 대해 매우 확고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작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마라. 사악이 틈을 탈 것인데, 많은 수련생은 작은 일 때문에 심지어 가버렸다. 정말로 아주 작은 일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수련은 엄숙한 것이고, 누락이 없는 것인데, 당신이 그런 일을 장기간 닦아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작지만, 당신이 장기간 중시하지 않았기에 곧 문제가 됐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때문에 갔다.” [1], 나는 아직도 그 한 마디 말이다. 박해를 받지 않은 수련생은 누락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만회할 수 없는 지경까지 쌓아 놓지 말고 지금부터, 작은 일에서부터 착실하게 수련하고 이지적으로 중생을 구도해 두뇌가 명석하고 이지적인 대법제자가 되자.

개인적인 인식으로 층차에 한계가 있다. 수련생 여러분께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5년 12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정법수련마당> 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2/5/3200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