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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위(歸位)와 보은의 심태로 집착의 뿌리를 끊다

글/ 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내 곁에서 수련하는 수련생들이 비록 모두 세 가지 일을 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볼 때, 법을 얻은 행복감에 평온하고 안정적으로 수련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많은 수련생을 보았다! 심지어 어떤 노수련생은 오랜 기간 고생으로 인해 소극적이고 무감각한 상태를 보이고 있다. 나는 그런 상태를 원하는 수련생은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각자의 잘못된 인식이 그런 것들을 초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고민 하다가 그동안 내가 수련을 통해 깨달아 얻은 내용을 이곳에 써 내게 된 것이니, 수련생 여러분과 함께 정진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대법제자가 세간에서 수련할 때 우리의 집착은 모두 위사(爲私) 중에서 갈라져 나온 관념에서 나오는데, 관념 안에는 자아의식, 사유방식, 습관과 절차 등이 포함된다. 수련인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현실생활 중에서 초탈하기란 정말 어렵다. 자신이 뻔히 보고 있는데서 손해를 보게 되고, 자존심이 상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야 함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렇게 우리들은 모두 속인상태에서 출발하여 십여 년 동안 간난신고를 겪으며 걸어왔기 때문에 마음은 갈수록 성숙되고 이지적으로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뼛속까지 마음을 파고드는 아픔으로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정관(情關)과 색욕관중에서, 반복적으로 자아를 담담하게 보고내려놓는 것으로 모두 여러 번 단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여전히 생활 중의 작은 일이 마음의 파동을 일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왜, 나는 아직도 완전히 사(私)에서 걸어 나와 자아를 내려놓고 오로지 중생을 위하지 못하는가? 또 무엇이 구우주의 이치를 초월하려는 나를 속박하는가?’ 나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한 가지 인식을 깨달았다. 그것은 귀위(歸位)와 보은의 심태로 사심(私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법학습 중에서, 대법제자는 미래의 새로운 우주 중에서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사부님께서 1999년 7.20 전에 노 제자 모두를 제 위치에 올려놓으셨다. 다시 말해서 진아(真我)가 이미 귀위(歸位)했다는 의미다. 정념이 강대한 상황에서 신통을 발휘할 수 있는데,우리는 왜, 아직도 완전하게 내려놓을 수 없는가? 그런 명리정(名情利)을 아직도 뿌리째 뽑지 못하는가? 그건 바로 수련이 잘 되지 않은 우리의 그 한 면이 자신을 느슨하게 만들어생각을 또 사람위에 놓기 때문이다. 마음이 사람 중에 있으면 삼계이치의 제약을 받게 되므로 반드시 심리적 파동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의 아버지는 수련하지 않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전통적인 인류도덕의 관념이지만 우리 집은 그렇지 않다. 여름에 수박을 먹을 때나는 늘 수박 속은 부모에게 제공하고 나는 언제나 좋지 않은 속껍질 부분만을 먹었다. 어떤 땐 아버지가 직접 수박을 자르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수박 속 맛 있는 부분을 혼자 다 먹고 나에게는 속껍질만 남겨준다. 만약 내가 속인이라면 틀림없이 억울해서 울 것이라는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은 채 그저 멍한 상태에서 다만 마음의 파동이 일었을 뿐이다. 나는 혈육 간의 정도 전부 넘지 못한 것을 한탄한 후 ‘수련인은 우연한 일이 없다’는 것을 생각했다. 빚 갚음이 아니고, 지불한 대가로 존중을 받으려는 그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도 아주 빨리 지나갔다.

한 번은, 아버지가 오늘 먹을 반찬이 뭐가 좋으냐고 내게 상의했다. 그런데 막상 아버지가 사온 반찬은 전부 내가 싫어하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반찬만 사왔다. 그러자 갑자기 파동이일면서 마음의 변화가 발생했는데, 첫 일념은 여전히 파동이 일어난 것을 알았지만, 잠시 자아를 조정한 후 그냥 지나가버렸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는 무사 평온한 것처럼 지나갔지만 더 높은 층차의 법으로 볼 때, 나는 그 관을 넘지 못했으며,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진정한 참음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평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왜, 큰 이익은 내려놓을 수 있으면서 오히려 이런 사소한 일로 마음이 흔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결론은 귀위하는 심태로 문제를 대하지 않고, 여전히 하의식(下意識)으로 인간의 따사로운 정에서 찾은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그 부모의 따사로움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모두 내려놓을 때, 상대방도 다시는 그렇게 이기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고려할 줄 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어떤 일도 모두 우리 수련제고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정을 내려놓고 자비심을 수련해야만진정으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사람을 구도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법학습 중에서, 세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천상에서 내려온 왕이며,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안고 자기 세계의 중생을 구하기 위해 속세에 내려와, 미혹 중에서 대법과 대법제자의 구도를 얻으려고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험악하고 고통스러운 세간에서, 미혹된 환경과 중국공산당문화와 그것들의 무신론, 그것들의 세뇌 하에서는 다만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아버지와 내가 역할을 바꾼다면, 내가 처한 환경과 표현은 어떻게 될까?’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고, 투쟁철학과 무신론의 거짓말속에서 성장해온 사람이니 나날이 노쇠해지고 마음은 두렵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무난하고 즐거우면 그만이라고 여기므로, 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잡고야 만다. 나의 아버지도 틀림없이 ‘자신은 나이가 많아 젊은 사람보다 입맛도 없고, 앞으로 좋은 날도 젊은 사람보다 적다’고 생각하고 나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럼 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내가 아직 관용과 포용력이 부족해서 완전히 자아를 내려놓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마지못해 이끌려 간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 대법제자는 모두 전 우주 중생이 가장 부러워하는 생명이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체를 주셨는데 우리는 또 무엇에 집착한단 말인가?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이 수련하는 중에, 나는 모든 방법으로 당신들의 온갖 마음을 폭로하게 하며 뿌리부터 그것을 파낸다”[1]고 말씀하셨다. 따뜻한 인정을 찾는 것은 사실 인간의 이 층차 이치를 수호하는 것이고, 순수한 법리로 일체의 언행을 지도하는 것은 법을 수호하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오직 시시각각 자신을 새로운 우주의 신의 위치에 놓아야만 모순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을 움직이면 곧 타인을 위하고 사람을 구하는 정념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역사상 불교가 부딪힌 법난, 기독교가 삼백 년의 박해를 받는 중에서, 당신들은 그것이 모두 사악이 바른 것을 이긴 것이라 여기는가? 아니다. 그것은 신이 사악의 발광을 이용하여 그의 제자를 원만하게 하고 그의 사람을 원만하게 한 것이다”[2]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신불(神佛)이 누구를 제도하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를 고생하게 하고, 소업하게 하고, 또 각종 심성제고를 이용해 위덕을 세울 기회를 만들어 주어, 그를 더욱 좋게 하여 수련성취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보기엔 행복하지 않은 나의 가정생활은 나에게 수련을 부여해준 것이 아닌가? 이런 가정환경은 정진할 수 있는 토양으로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마음속에서부터 인간본성의 위사(爲私), 허황한 애정, 업력윤보를 꿰뚫어보게 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이 전부 법 중에 용해되어 세속의 일체를 담담히 보면서 힘껏 뿌리를 뽑아 집착을 제거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 아닌가? 만약 대법제자가 모두 이렇게 문제를 사고한다면 어찌 정법시간이 지연되는 중에서 소침해지고, 관을 넘는 중에서 장기적으로 고생을 겪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어디에서든지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3]면 수련할수록 가뿐하고, 수련할수록 평온하고 상서롭다. 신의 자비한 상태는 그가 있는 경지에서 자연적으로 펼쳐지는 것이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신에 대해 어떤 표현을 하든지 신은 여전히 자비할 뿐, 신은 낮은 층차로 내려가 교활한 인간의 마음을 체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은 영원히 그가 있는 층차에서 법의 표준에 따라 문제를 대하고 처리하는데, 그는 자신의 중생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법제자는 중생을 구도하는 역사적인 중임을 짊어졌기 때문에 더욱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나는 병업 중의 수련생을 도와줄 때 어떻게 집착심을 제거해야할 할 것인가를 체험했다. 한번은 2년이 넘도록 지속적으로 병업을 겪고 있는 노수련생을 도와준 적이 있다. 그의 문제는 성질이 사납고, 수구(修口)를 하지 않고, 당문화를 중히 여기며, 집안일에 빠져 법학습을 적게 하는 등등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공동작까지 틀리게 하고 있었다. 여러 수련생으로부터 지적을 받았지만 고치지 않았으며,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사부님의 연공비디오를 보고도 잠들어버렸다. 그의 그런 태도는 그가 마(魔)에게 심각하게 조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런 수련생을 돕기가 가장 어렵다. 내가 그의 집에서 칫솔질을 하다가 조심하지 못하고 컵을 세면대에 부딪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그러다가 컵이 깨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며 나에게 한바탕 심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어른인 내가 남의 집에서 그렇게 작은 일로 그런 대접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다행히 참아냈다. 그는 후일 자신이 과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나에게 사과했다. 나도 그 문제와 관련한 나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반성했다. 남의 집 습관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의 심성이 아직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그와 나는 제법 소통이 잘 되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한 수련생을 나무라는 것을 보고, 나에게는 너무 과분하게 대해준 것이라는 걸 알았다. 수련생에게 불만을 품고 그와 논쟁을 하게 되면 그 결과는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 후 가슴이 답답하여 그 집을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수련생은 도와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꿈속에 사부님께서 나에게 “말이 무거워야 한다”는 점화를 주셨다. 나는 내가 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왜, 왔지?’ 하고 자신을 반성하게 됐다. ‘수련생을 도우러 온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성만 불러일으켰는데 이건 내가 더 번거롭게 만든 것이 아닌가? 또 내가 돌아가려고 하는데 이것은 또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닌가? 이 몇 년 동안 줄곧 사부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그 수련생은 누구인가? 사부님의 제자다! 난중의 수련생은 이미 매우 괴로운데 내가 어찌 이렇게 그를 대한단 말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사부님을 돕는 것인가?’ 나는 사부님께 죄송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사부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해주셨는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를 위해 업력을 감당하셨고, 끊임없는 점화로 나를 보호하셨고, 내가 다시 착오를 범했어도 사부님께서는 지금까지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으셨고, 내가 다시 바른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모두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내 일생에서 사부님께서는 영원히 나를 떠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걸 생각했다. 그 홍대(洪大)한 자비를 느낀 사람은 모두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나는 사부님의 제자인 그 수련생을 어떻게 대했는가? 인내심 없이, 나 자신만 옳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썼을 때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는 수련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안으로 찾은 위력은 즉시 수련생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우리 사이의 말투도 온화해졌고, 분위기도 화목해졌다. 그가 벗어놓은 내 속옷을 빨았을 때는 마음속으로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나는 그가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과오를 보충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대목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대법제자의 본질은 모두 선량하기 때문에, 표면의 마장(魔障)으로 서로간의 교류와 제고를 절대로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그 후 연공 중에서 그녀의 동작이 많이 틀린 부분을 작은 목소리로 다시 일깨워 주자 그는 받아들였다.

이 노수련생의 연공동작은 1999년 전까지는 표준에 맞게 잘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병업의마난 중에서 연공동작과 얼굴표정은 모두 말이 아니게 변했다. 보는 마음이 괴로울 정도였다. 그때 나는 자비심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발정념으로 그녀의 몸 뒤에 있는 사악을 제거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가 표준에 따라 연공을 잘 할 수 있도록 사부님께 가지를 청했다. 연공을 마친 후 저녁에 그와 함께 사부님의 연공비디오를 보았는데 그는 아주 열심히 보았다. 나의 심성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했으므로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주셨다는 걸 안다. 그 배후의 사악한 요소도 해체되었으므로 나는 돌아기로 했다. 나는 내가 돌아가도 그가 연공동작도 잘하고, 나의 교정과 일깨움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일이 별로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심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난중에 있는 수련생을 도와주려면 반드시 진실해야하며, 또 수시로 안을 향해 찾는 마음이 있어야 하다. 법의 기점과 상대의 각도에서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매 수련생은 층차가 같지 않기 때문에 인식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대로 다른 수련생을 부정해서는안 된다. 고층차 경지에서 저층차의 이치를 돌아보면 모두 틀리는데, 어찌 자기 층차의 표준으로 수련생에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많은 수련생 간에 간격이 생겨난 것도 자신만이법에 부합되어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방 경지의 인식도 그럴 수밖에 없으므로 서로 간에 효과적으로 협조할 수 없게 되고, 하는 일도 힘이 들고 성과도 적으며, 심지어 반작용을 일으키기도 한다. 원래 정진하는 수련생은 더욱 좋게 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더욱 높은 요구를 제기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압력을 느끼게 되고 부딪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기도 한다. 정진하지 않는 수련생이 떨어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채찍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와 유사한 문제에 봉착할 때는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간곡하게 타이르시고, 따뜻한 느낌을 주시며, 사람을 깊이 깨닫도록 거듭 격려해주시는 모습을 생각한다! 나도 사부님처럼 자신이 신으로 귀위하는 마음으로 문제를 대하고, 사부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사부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융하겠다고 다짐했다. 세인을 보면 모두 사부님의 친인이고, 수련생 여러분을 보면 모두 사부님의 자식이다.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중생을 선하게 대하고 집착심을 끊어야 한다. 표면정서의 가상에 이끌리지 말고, 외부형세 변화에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이 바라시는 것을 저버리지 말고 중생에 대해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이상은 수련중의 작은 깨달음이니 적절치 못한 곳은 수련생 여러분이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뿌리를 캐다’[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2015년 미국서부법회설법’[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경지’

문장발표: 2015년 11월 2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28/31974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