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明慧법회| 예전의 ‘반혁명’, 지금의 대법제자

글/ 헤이룽장 조선족 대법제자(본인 구술 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조선족이고 올해 75세다.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했기 때문에 신체가 튼튼했고 다리에서 바람이 날릴 만큼 빨리 걸었으며 원기 왕성하다. 친척이든, 친구든, 거리에서 만난 인연 있는 사람이든 모두 나보고 매우 젊다고 했다. 이럴 때마다 그들에게 “파룬따파를 수련했기 때문이에요.”라고 알려줬다.

1996년 4월에 법을 얻었는데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된다. 이번에 처음으로 대륙 대법제자 인터넷 법회에 참가하게 돼 마음 속으로 매우 기쁘다.

26살에 ‘반혁명’이 되다

26살의 그 해,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은 ‘문화대혁명’을 발동했다. 주변 조선족 사람들은 ‘수정주의’란 모자를 뒤집어썼고 극소수 사람은 탄압도 받았다. 우리 집도 ‘조선 수정주의’로 됐고 반란파들은 나를 ‘조수(朝修)’라고 불렀다.

당시 우리 집의 벽에 오빠가 베이징 군관대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오빠가 입은 것은 분명히 중국 군복인데 반란파 두목들은 오빠는 조선군대의 두목이고 군대의 ‘사단장’이라고 우기면서 내가 그의 여동생이니 꼭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며 나보고 ‘특무’, ‘반혁명’이라고 했다.

남편도 재난을 모면하지 못했다. 수감 돼 매일 잔인하게 맞아 늘 상처투성이었다. 어떤 때 매질을 당해 의식을 잃으면 그들은 찬물을 끼얹어 깨우고 계속 폭행했다.

1967년 세 번째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반혁명 새끼’로 낙인 찍혀 멸시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를 남에게 줬다. 이 밖에 또 아들 둘이 있었는데 맏이가 5살, 둘째가 겨우 3살이었다. 그들도 남에게 보내고 나는 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이가 ‘반혁명’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히 가지겠다는 사람이 없어 아이를 데리고 어렵게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도 ‘반혁명 새끼’이기 때문에 늘 욕먹고 구타당해 항상 구석에 숨어서 감히 나오지 못했으며, 엄동설한에도 둘째는 개구멍바지를 입었고 날이 어두워져도 감히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내가 셋째 아이를 낳고 아직 산후 조리기간인데도 혼자서 물을 길으러 가지 않으면 안 됐다. 어떤 때 큰 아들은 나를 애석해하며 몰래 나를 도와서 물통을 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5살 아이라 무거워 비틀비틀 하였고 물통의 물이 쏟아져 나와 바지가 다 젖었기 때문에 집까지 오면 솜바지는 꽝꽝 얼었다. 이런 가슴 아픈 일은 늘 있었다.

또 중공의 반란파들이 늘 와서 가택 수색하면서 무슨 ‘범죄증거’-사진기와 발신기를 찾는다고 했다. 그러나 집에는 그들이 가지고 싶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내 눈 안에 사진기를 숨겼고 옷 단추에 발신기가 숨겨져 있다고 했다. 그들도 그 말이 너무나 터무니없었는지 발신기를 찾겠다고 집의 구들과 화벽을 뜯었다. 우리 세 모자는 추운 방에서 지냈고 차가운 방구들에서 잤다. 정말 추웠으며 마음은 더욱 추웠다!

생활의 고난, 거기에다 ‘문화대혁명’ 기간의 마음고생은 감당하기엔 그 고난이 너무나 컸고 온몸에는 병이 생겼다. 요추 중간 척추의 세 곳에 골질증식이 있어 늘 몹시 아프고 똑바로 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요추의 아픔이 신경을 압박해 다리를 들지 못해 걷기도 불편했다.

매일 화를 내 신경은 쇠약해졌고 밤새 잠을 잘 수가 없었는데 그런 느낌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웠으며 이 병에 몇 년 동안이나 시달렸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위 안에 또 단단한 물건이 자랐는데 밥을 먹기만 하면 딸꾹질하고 위가 아팠으며 정말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산후조리기에 찬바람을 쐐 신장부종에 걸렸는데 몸이 엄청나게 부었고 사람들은 나를 ‘뚱보’라고 불렀다. 매일 약을 달여서 몇 년 동안이나 한약을 먹었는데도 나아지지 않았다. 또 늘 어지럽고 매스껍고 빈혈과 저혈압 등 질병이 있었다.

여러 가지 병에 시달려 장기간 온몸에 힘이 없고 얼굴색은 노랬다. 이 병들 외에도 또 심한 인두염에 걸려 말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물음에 대답할 때도 손짓으로 해야 할 정도까지 됐다. 현지의 의술이 뛰어난 의사는 나를 치료해 주기 위해 수많은 민간처방을 조제해줬지만 반년이 됐는데도 전혀 효과가 없었다. 후에 그는 치료해주지 않겠다고 했고 베이징 큰 병원에 가서 확진하라고 권했다. 그는 내가 걸린 것은 인두염이 아니고 틀림없이 무슨 좋지 않은 병이라고 했다. 베이징에 갈 돈도 없어 억지로 참고 견뎌야 했다.

대법을 연마하면 용맹 정진해야 한다.

속담에 ‘이랑이 고랑 되고 고랑이 이랑 된다.’는 말이 있다. 내가 몸소 겪은 경험도 이 속담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반혁명’으로부터 시작해 30년 후 나의 운명은 큰 변화가 생겼다.

1996년 3월, 그 해 나는 56살이었는데 이미 퇴직했다. 어느 날, 직장에 퇴직금을 타러 갔는데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는 한 동료가 파룬궁을 연마하면 내 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전혀 믿지 않았다. 한 달 후에 또 퇴직금을 타러 갔는데 또 그 동료를 만났고 그녀는 또 나에게 권했다. 당시 그녀는 얇은 옷을 입었는데 춥지 않아했고, 나는 두꺼운 다운재킷을 입고도 추워서 벌벌 떨었다. 그녀는 파룬궁을 연마해 신체가 이렇게 좋아졌다고 했다. 그녀의 이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바로 그녀와 함께 연공하러 갔다.

뜻밖에도 막 연마한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온몸 어디도 괴롭지 않았다. 이전의 모든 질병은 어느덧 온데간데 없어졌다. 병이 없고 온몸이 가벼울 뿐만 아니라 다리가 바람이 날릴 만큼 빨리 걸었다. 그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랐다.

직접 대법의 신기함을 겪은 나는 당연히 대법을 확고하게 믿게 됐다. 3개월 연마한 후 원기가 왕성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보다 1년 일찍 법을 얻은 수련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 ‘그렇다면 남에게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따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산해 봤는데 그들은 모두 직장인이라 다만 아침에 연공하고 저녁에 법공부하지만 난 퇴직하고 집에 있어 그들보다 시간이 충분함으로 매일 연공을 한 번 더 하고 낮에 법공부도 더 많이 하면 된다. 이렇게 1년 견지하면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행동으로 옮겼다.

열심히 연공하는 외에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외운 것은 ‘논어(論語)’였고 다음은 ‘정진요지(精進要旨)’였는데 98년 여름에 이 책을 한 권 다 외었다. 후에 또 사부님의 기타 경문을 외웠고 법을 외우는 기간에 외손녀를 돌봐주기도 했는데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내가 돌봤다. 매일 경문 한 편을 베껴 쓰고 외웠는데 걸을 때, 차에 앉아 있을 때, 밥을 할 때 외웠고 아이를 돌볼 때도 외웠다. 매일 이렇게 했고 줄곧 견지하며 외웠다. 사부님의 신경문이 나오기만 하면 반드시 외워야 한다고 자신에게 요구했다.

외손녀가 대략 1살 무렵 어느 날 아이는 바닥에 앉아서 놀고 나는 침대에 앉아 ‘전법륜(轉法輪)’을 읽고 있었다. “과거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침대에 묶어 놓고 그의 팔을 잡고는 그의 피를 뽑겠다고 했다. 그런 다음 그의 눈을 가리고 그의 손목을 한 번 긋고는(전혀 그의 피를 뽑지 않았음), 수도꼭지를 열어 그에게 똑똑똑 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했다.’[1]를 읽었을 때 외손녀는 갑자기 돌아서서 앳된 말투로 “그 사람 죽었어요?”라고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놀라 잠시 멍하니 그녀를 봤다. 외손녀는 매우 진지하게 “그 사람 죽었어요?”라고 또 물었다. 아이구, 아이가 너무 어려 놀기만 할 줄 알고 대법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법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 알아들었다. 후에 그녀가 좀 컸을 때 내가 연공하면 그녀도 따라 연공했다.

외손녀가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닐 때 어느 날 난 밥을 하고 있고 그녀는 ‘밍후이주간’을 보고 있었다. 보다가 그녀는 갑자기 “외할머니, 나가서 사람을 구하는 데 왜 저를 데리고 가지 않아요? 여기서 말했어요, 3가지 일을 하지 않으면 원만할 수 없다고요. 이후에 사람을 구하러 가면 저도 데려가요!”라고 질책했다. 그리하여 이후로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그녀와 함께 다녔는데 이 아이의 표현은 정말로 좋았다. 이후로 그녀도 정진했고 매일 법을 외우기 시작했다. 물론 난 더욱 게으를 수 없었다. 대법이 이렇게 좋은데 연마하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연마한다면 용맹 정진해야 한다.

대법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요구하기 위해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다

99년 중공의 탄압이 시작된 후부터 나도 대법을 위해 공정한 한 마디 하겠다고 베이징에 청원(민원신청)하러 갔다. 앞의 두 번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납치당해 돌아왔다.

1년이 지난 후, 즉 61살 되던 그 해에 또 한 번 갔다. 다섯 명의 수련생도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우리가 전날 기차표를 사놓고 모든 것이 다 준비됐을 때 전화가 왔는데 “신분증이 없으니 가지 마요. 지금 신분증을 특히 엄격하게 조사해 신분증이 없으면 전혀 갈 수 없어요. 우리 이 지역에 납치당해 돌아온 수련생이 벌써 다섯이에요.”라고 했다. 내 신분증은 두 번째 베이징에 갔을 때 경찰에게 압수당했다. ‘어떻게 할까? 그래도 가야지! 기차에 오를 때 신분증이 없다고 오르지 못하게 한다면 돌아오고 조사하지 않는다면 응당 가야 하는 것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표할 때 정말로 신분증을 조사하지 않았다.

이렇게 2001년 11월 10일 그 날, 우리 여섯은 베이징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러나 금방 기차에 올랐는데 신분증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 차 칸에서도 앞차 칸에서도 승무원이 승객보고 신분증을 꺼내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여섯은 전부 침대권을 샀으므로 수련생보고 발정념해 달라고 하고 나는 눈을 감고 누워서 묵묵히 발정념했다. 두 명의 경찰이 다가와 한 사람이 신분증을 꺼내라고 나를 흔들자 나는 일어나 앉고는 큰 소리로 “무슨 신분증을 봐요? 집을 나설 때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다가 잃어버리면 어쩔건가요? 신분증 번호를 부를테니 기록해요.”라고 생호령했다. 그 두 사람은 나를 몇 초 살펴보더니 기록하지도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이 고비는 이렇게 넘겼다.

우리는 베이징 역 앞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지하통로를 지나가야 역 앞에서 나올 수 있고 오직 하나의 통로 밖에 없는데, 통로 안의 곳곳에 경찰이 있었고 사람을 보기만 하면 잡아당겨 신분증을 조사했다. 앞뒤 사람들이 잡아당겨져 가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사부님이시여, 그들에게 잡아당겨져서는 안 됩니다. 나가야 해요.’라고 사부님께 빌었다. 그랬더니 사부님께서 정말로 나를 도와주셨고 나는 순조롭게 걸어 나갔다.

기차역 앞을 나오자 큰 길 양쪽에 경찰이 가득 서 있는 것을 봤다. 모두 무장경찰이었는데 모든 사람의 표정은 냉정했고 사람마다 칼날이 달린 기관단총을 메고 촘촘히 길게 줄을 섰다. 그 진세는 온통 엄숙한 살기였다! 오직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봤었던 것이다.

톈안먼(天安門) 광장으로 어떻게 가는가를 물어본 후 다섯 수련생에게 “흩어져 갑시다. 제가 앞에서 걷고 당신들은 뒤에서 각자 따라 와요. 발정념을 잊지 말아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앞에서 걸었고 때때로 뒤돌아보며 수련생이 따라 오는가를 확인했다. 거의 1시간 넘게 걸어서야 드디어 톈안먼 광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또 발정념을 좀 하고 함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기로 약속하고 갈라졌다. 속으로 ‘경찰들에게는 내가 보이지 않는다! 당신들을 정지시키겠다!’라고 발정념하면서 혼자서 인민대회당 앞에 가서 소매 안에 숨겨놓은 진상 현수막을 펼치고 머리 위로 높이 들고는 힘껏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정법이다!” “사부님의 청백을 돌려달라!”고 외쳤다. 이때 눈앞의 여행객과 여행객에게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버는 이미 중공의 ‘감시도구’가 된 노점상들은 그 시각 모두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60여세 노부인이 정정당당하게 톈안먼에서 마음속의 말을 외쳤는데 이것보다 더 기쁘고 위안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신속히 현수막을 접고 광장 앞에 있는 큰 나무 아래로 와서 현수막을 가까이에 있는 두 그루 나무에 붙여놓았다. 다 붙인 후 멀지 않은 곳에 오토바이 택시가 멈춰있는 것을 보고 기사보고 즉시 베이징 기차역으로 가자고 했다. 그는 직접 나를 기차역 매표소까지 데려다줬다.

매표소에는 예상 밖으로 나 혼자 뿐이었다. 매표원은 컴퓨터 검색을 해보고는 “침대표 한 장만 남았어요, 가장 좋은 위치 – 중간 침대에요.”라고 했다. 나는 매우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표를 샀다.

흥분하고 있는데 번거로움이 찾아왔다. 매표소에서 대합실까지 가는데 또 번거로움이 생겼다. 전에 들어왔던 매표소의 대문은 이미 통행금지이고 승객이 나가지 못하게 했다. 매표소 한 측면의 작은 방을 통해야 만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은 방에는 경찰들이 가득 서 있었고 책상 위에 컴퓨터 몇 대가 놓여있었다. 지나가는 승객마다 신분증을 보여줬고 경찰이 신분증 번호를 컴퓨터에 입력해 확인한 후에야 통과할 수 있었다. 작은 방 출구에 또 두 경찰이 이중으로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야 매표소에서 걸어 나가게 했다. 그 장면은 정말 파쇼와 같았다.

이런 장면을 보고 나도 숨이 막혔고 긴장했지만 먼저 마음을 조절하고 좀 진정했다. 돌아서서 ‘누구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을 모두 멈춰버린다’고 발정념하는 동시에 가지해달라고 사부님께 빌었으며 ‘꼭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줄도 서지 않고 직접 작은 방 출구로 향했고 몸을 기울이고 두 경찰 사이로 매표소에서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자 또 두 경찰이 사람을 따라 다니며 신분증을 조사하는 것을 봤다. 한 바퀴 둘러 대합실로 갔는데 거기에도 한 줄로 서서 신분증을 조사하는 경찰들이 있었다. 플랫폼으로 가는 출구에 두 경찰이 나란히 서서 신분증을 들고 승객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발정념하면서 조금 아래로 쪼그리고 두 경찰 사이로 빠져나왔다. 기차에 오른 후에는 순조로웠고 우리 시 기차역에 도착한 후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가자 며느리는 한숨을 내쉬며 놀래서 “아이구, 어머님, 돌아오셨군요!”라고 했다. 물어봐서야 내가 간 후 현지 경찰이 우리 집으로 전화했는데 내가 집에 있는가를 물었고 우리 주택 단지의 한 파룬궁 수련생이 베이징에 청원하러 갔다가 잡혀왔다며(그 분이 바로 나와 함께 베이징에 갔던 한 수련생이다) 나도 베이징에 갔을까봐 걱정했다고 했다. 며느리는 “아니에요. 고향 모임에 참가하러 갔어요. 이틀이면 돌아와요.”라고 대답했다. 내가 돌아오자 며느리는 내가 모임에 참가했다고 더욱 믿었다.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도 하다. 그렇지, 현지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는 것도 마을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 아닌가, 다만 좀 멀었을 뿐이다.

이렇게 이번 베이징에 청원하러 갈 때 비록 곳곳에 위험이 있었지만 무사히 돌아왔다. 당시 중공이 파룬궁을 가장 미친 듯이 탄압한 시기였고 거의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정황 하에서 신분증도 없었던 내가 톈안먼에서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은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과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 덕택인 것이다. 헤아려보면 지금까지 벌써 14년이 지났지만 아들딸들은 내가 베이징에 갔다는 것을 아직도 모른다.

불법적인 한 달간의 수감 기간에 34명을 삼퇴 시켰다.

2002년 4월, 집에 있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현지 경찰과 ‘610’ 요원에게 불법 가택수색을 당했고 납치당했다. 후에 불법 1년 형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 불법 심문을 받을 때 기계 하나가 무엇을 프린트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저것은 앞에 몇 명 수련생이 법정 심문을 받을 때의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프린트할 수 없고 기계가 망가지라고 발정념했더니 1분도 안 되서 기계는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내가 법정에서 불법 심문을 받을 때도 프린트할 수 없었다.

2006년 66세 되던 그 해, 어느 날 수련생에게 ‘전법륜’을 보내주려고 갔다가 거기에서 잠복근무하고 있는 경찰에게 납치당했다. 구치소에서 불법으로 한 달 수감됐다. 이 한 달 기간에 34명을 삼퇴 시켰다. 내가 있는 감방은 16~17명을 수용할 수 있었는데 한 사람을 삼퇴 시키면 그 사람은 나갔고 잇따라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면 나는 또 그녀들을 삼퇴 시켰다.

한 달 기간이 만료된 후 수련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내게 불법적인 1년 노동교양을 선고했고 헤이룽장성 노동교양소로 보냈다. 들어가자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혈압을 측정할 때 여기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고 하루도 있어서는 안 되니 금방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혈압이 높이 올라가라, 좀 더 높게 좀 더라고 발정념했다. 그 결과 좀 지나 교도소 의사가 “이분은 혈압이 너무 높아요. 받아서는 안돼요!”라고 하자 교도관은 할 수 없이 조건 없이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최선을 다해 3가지 일을 잘하다

2000년부터 거의 매일 나가서 진상 스티커를 붙였고 진상자료를 배포했으며 소책자와 ‘밍후이주보’를 배포했다. 스티커를 붙일 때 일부러 밝은 곳을 찾아 붙였다. 거기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많고 모든 사람에게 다 보이기 때문이다.

2002년 설을 쉴 무렵에 주택단지에 진상 스티커를 좀 붙이려고 했다. 섣달 그믐날 혼자서 1,000개를 붙였고 낮부터 저녁까지 줄곧 붙였다. 4개 주택단지, 20동 가까이 되는 층집 한 가정도 빠뜨리지 않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의 스티커를 붙였다. 난방 파이프 및 거리의 전봇대에도 붙였다.

또 늘 수련생과 함께 시골에 가서 진상을 알리기도 했다. 매번 우리는 많은 진상자료와 족자를 가지고 갔는데 몇 번이나 큰 자루에 담았다. 우리는 털실(인조모와 양모를 혼합하여 만든 실)로 족자에 돌을 묶고 족자를 위로 던져 나무에 걸어놓았다. 새 털실바지를 몇 개나 풀어서 그 털실을 가지고 이렇게 족자를 매다는 데 다 썼다. 족자를 길가의 나무에 걸었는데 던질 때 힘을 쓰지 않은 것 같은데도 단번에 나무 꼭대기에 걸 수 있었다. 바람이 불면 빛나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다섯 글자가 바람에 나부꼈고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푸른색의 것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9평공산당’ 책이 나온 후 나도 박스째로 집으로 옮겨왔는데 어떤 때 두 박스도 가지고 나가 혼자서 배포했다. 보통 저녁 6시에 발정념한 후 ‘9평’을 배포했다. 나는 물건을 많이 넣을 수 있는 특별한 조끼를 만들었는데 어떤 때 20여권, 어떤 때 30권을 넣을 수 있다. 부근 복도에서 배포했고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단체 법공부하는 데 영향주지 않게 돌아왔는데 우리 집에 와서 법공부하는 수련생들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돌아왔다.

69세 되는 그 해 우리 집에 작은 자료점을 건립했다. 그 해 션윈CD가 나왔으나 우리 동네 수련생들이 다 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컴퓨터, CD굽는 기계를 사서 배우고 혼자서 만들었다. 후에 또 프린터를 사서 진상자료를 만들고 수련생에게 제공해줬다. 평소 복사용지, CD, CD케이스, 비닐 지퍼 등 모든 소모품은 직접 가서 샀다. 상점이 우리 집과 멀리 떨어져 있어 택시를 타고 가야 했고, 한 번 갔다 오려면 차를 타는 데만 2시간이어서 한 번 나가면 적어도 3시간 넘게 걸렸다.

최근 몇 년에 10여 명 수련생들에게 수요 되는 진상자료를 책임졌다. CD굽는 기계를 3대 샀고 컴퓨터를 2대 샀다. 처음에 수련생에게 필요한 것을 다운로드해 줬고 내가 출력을 책임졌다. 후에 수련생에게서 밍후이왕에 접속하는 것을 배워 스스로 다운할 수 있었다. 매주 100여 개 션윈CD와 50여 장 진상 CD를 구웠고, 200여 개 진상 전단지를 프린트했으며, 100여개 진상소책자를 프린트하여 제본했고 100여 장 진상 스티커도 프린트했다.

지금까지 이 작은 자료점은 평온하게 6년을 지나왔다. 비록 좀 바쁘긴 하지만 힘들거나 고생인 줄을 몰랐다. 자료를 만드는 외에 늘 나가서 션윈 CD와 진상자료도 배포했다. 몇 년 동안 줄곧 이렇게 했다.

어떤 때 이웃 도시에 가서도 발정념했다.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사악한 소굴 부근에 가서 근거리 발정념하고 세뇌반을 해체했다. 거기에 가면 숙박하면서 일주일 발정념하고서야 돌아왔다.

몇 년 동안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일을 했다. 지금 75살이지만 자전거를 타도 꽤 수월했다. 만약 본 시, 본 지역에서 정체에 협조할 일이 있으면 어디든 빠지지 않았고 자전거에 올라타기만 하면 떠났다. 근거리 발정념하고 사악을 해체하기 위해 본 시 공안국, 교도소, 세뇌반 부근 어디든 다 간적이 있다. 대법의 일이 날 필요로 한다면 꼭 갔다! 특히 대법을 박해하는 매우 사악한 곳에는 더욱 가려고 했고 사악한 곳이라고 생각할수록 더욱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상을 알리고 대법을 실증하는 방면에서 정념이 신의 위력을 보여주는 일이 매우 많이 내 몸에서 발생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맺음말

문장을 완성하고 19년래의 자신의 수련과정을 돌이켜 보니 감개무량하다. 대법을 수련하는 이 길에서 60여세인 나는 여러 차례 납치당하고 수감 당했으나 사부님이 있고 법이 있어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대법을 실증하는 일에서 내가 뭘 했든지 사실은 모두 사부님께서 돕고 해주신 것이다. 만약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가 없었다면 내가 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온갖 굴욕을 겪은 ‘반혁명’에서부터 생기가 넘치는 대법제자가 됐고 기쁘게 자신의 신성한 사명을 실행하고 있다. 그 중 얼마나 많은 경이로움, 얼마나 많은 불가사의가 대법의 비할 바 없는 법력 중에서 펼쳐졌겠는가!

그러므로 가장 말하고 싶은 것은 “파룬따파, 감사합니다! 제일 위대하신 사존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이다. 허스(合十)

(밍후이왕 제12회 중국대륙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5년 11월 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밍후이대륙법회>제12회(2015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7/318564.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