简体 | 正體 | 대법서적

구(舊)우주 속에서 뿌리를 뽑아내다(1)

글/ 중국 대법제자 회귀(回歸)

[밍후이왕] 수련은 이미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다. 이번 서부 법회에서 사존께서는 매우 엄숙하게 말씀하셨기에 매우 많은 수련생은 설법을 본 후 마음이 당황하고 속을 끓였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뛰어도 따라가지 못하고 연마해내지 못한다는 말씀을 듣자 수련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수련의 목적이 불순하고 대법에서 얻고자 하며 자아의 표현을 성취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자신이 원만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자아를 내려놓고 모든 것을 순리에 따르며 사부님 말씀을 따르고 심성을 제고하며 마음 평온하게 사부님의 배치에 순종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하기만 하면 개인이 원만하고 안 하고 하는 문제는 전혀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자신이 본 상황과 깨달은 바를 아는 대로 쓰려고 하는데 여러분에게 도움이 좀 되길 바란다.

1. 낮은 표준으로 은폐하지 말고 뿌리를 구우주 속에서 뽑아야

사존께서는 “부동(不同)한 층차 중에는 부동한 층차 중의 법이 있다. 법은 부동한 층차 중에서 부동한 지도 작용이 있기 때문에”[1], “매 층차에는 모두 법이 있지만, 모두 우주 중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발견했다. 한 층 높은 층차의 법은 한 층 낮은 층차의 법에 비해 우주의 특성에 더 접근했기 때문에”[1], “수련과정 중에 있는 사람을, 어느 한 층차를 가늠하는 표준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2]라고 알려주셨다.

수련 중 사람을 아주 미혹시키는 함정이 있다. 즉 어느 한 층의 표준을 절대적인 표준으로 삼고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무정법(法無定法)’[1]의 법리를 잊는 것이다. 그리하여 매우 완고한 한 가지 장벽을 형성함으로써 깊이 숨겨진 집착을 은폐하게 되고 깊이 있게 안을 향해 찾을 수 없게 되며 자신을 어느 한 층차에 고정해놓아 장기적으로 돌파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모든 집착과 욕망의 근원은 ‘사(私)’고 모두 ‘사(私)’의 기초로 수립된 것이지만 ‘사’는 층차에 따라 표현이 다르고 표준이 다르다.

예를 들어 삼계와 가까운 우주 층차 중에서 ‘사(私)’의 표현은 명예와 이익, 각종 욕망 등을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수련생은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할 때 엄동설한·혹서를 무릅쓰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돈을 들여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지불하기만 하는데 온힘을 다하며 확실히 매우 잘한다. 그러나 어떤 수련생은 크게 지불하거나 명리를 추구하지 않는 등을 표준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사심이 없으며 표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데 곧 스스로 만족해하며 한 가지 커다란 은폐를 형성해 더욱 깊은 층차의 집착을 감추게 되고 더욱 높은 층차로 돌파해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만약 이 은폐를 없애서 자아를 끝까지 전부 내려놓으면 비록 크게 지불하고 진상을 알리면서 명리도 추구하지 않더라도 또 더욱 깊은 층차에서는 개인의 원만을 추구하고 개인 위덕에 집착하며 자신이 원만하는 층차의 과위(果位)와 세계범위 등에 집착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더욱 높은 층차에서의 ‘사(私)’의 표현이다.

낮은 층차에서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더욱 높은 층차에서 이것은 매우 큰 누락이고 큰 집착이며 매우 더럽고 변이된 것으로 이 집착을 없애지 못한다면 더욱 높은 층차로 돌파할 수 없고 줄곧 어느 한 층차에서 맴돌게 될 것이다.

같은 이치로 어떤 수련생이 진상을 알릴 때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원만과위와 층차도 추구하지 않는 이 각도에서 보면 정말로 무사(無私)에 도달한 것 같지만 만약 더욱 깊은 단계로 끝까지 파 보면 또 아마 더더욱 깊은 층차에 또 하나의 마음, 즉 지금 진상을 잘 알리는 것을 통해 자신의 세계의 미래가 더욱 아름답고 중생도 더욱 아름다우며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저층차에서 보면 이것은 전혀 ‘사(私)’가 아니지만 더더욱 높은 층차에서 보면 여전히 변이된 더러운 ‘사(私)’로 자신의 개인세계를 위한 것이고 중생을 대하는데 여전히 구별이 있고 범위가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범위가 더 커졌고 이 ‘사(私)’의 표현이 더 순정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범위가 아무리 커도 결국 경계가 있는 것이고 아무리 순정하게 표현해도 결국 여전히 변이된 것이다. 진일보로 ‘사(私)’를 내려놓고 자신을 끝까지 내려놓으며 자아를 몽땅 버려 남겨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경계가 없으면 더욱 높은 경지의 무사(無私)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마음속의 ‘자아’는 바로 우리가 구우주 속에 박은 뿌리다. 무사(無私)에 도달해야만 구우주 속에서 뿌리를 뽑아낼 수 있고 이때야 완전히 구우주의 배치 속에서 뛰쳐나와 사부님께서 배치한 길에서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면 이 ‘뿌리’는 구우주 속에서 뽑아낼 수 없다. 표면적으로 어떻게 잘했든 어떻게 빛나든 여전히 구세력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구세력의 통제 하에 빙빙 돌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후에는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게 된다. 수련은 가장 엄숙한 일이므로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된다.

기타 집착심도 같은 것이다. 모든 집착심은 생명의 최고 근원과 최고 본질 중에 한 가지 뿌리가 거기 박혀있다. 이 뿌리는 구우주 속에 박혀있는 뿌리로서 바로 구세력에 의해 통제당하는 꼬투리가 된다.

(계속)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따파의해-창춘(長春)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을 위한 설법’

문장발표: 2015년 11월 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1/9/318873.html

ⓒ 2024 명혜망.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