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밍후이왕]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나는 여러분과 다년간의 수련경험을 함께 나눔으로써 공동 제고를 추진하고 공동으로 사람을 구도하는 역사적 사명을 완성하려 한다.
내가 착실히 수련[實修]하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넘어야 할 가장 큰 관문은 바로 정(情) 관문이었다. 나는 먼저 남녀 간의 정을 말하겠다. 남성과 여성은 인류 이 공간에서 감정 표현이 서로 다르다. 남성은 대부분 비교적 독립적인데 가장 큰 관문은 색욕이다. 수련을 파괴하는 색욕 배후의 마성 물질을 간파하는 것이 아주 관건인데 이것은 반드시 법공부 중에서 인식해 제고해야 한다. 반면 여성에 대해 말하면, 색정은 감정에 더욱 치우친다. 여성은 일반적으로 감정을 의지할 곳을 찾으려고 하는데 정신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하다. 정에 이끌리지 않고 견제되지 않으려면 애정이 가상임을 근본적으로 간파해야 한다. 세간의 애정은 왜 사람을 해치는가? 그것은 본질적으로 정이란 이 물건은 자기를 위하고 가장 믿을 수 없고 가장 예측 불허하기 때문인데 배후에는 모두 업력 윤보가 있다. 빚을 졌으면 빚을 갚고,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갚는데 인연이 끝나면 바로 헤어진다. 그러면 수련인을 놓고 말하면 우리는 아무리 어렵더라도 법을 표준으로 삼고 법에 서서 확고한 의지로 그것을 배척하면 사부님께서 다른 공간에서 우리를 도와 이런 물질을 제거해 주실 것이다.
옛사람들의 수련 첫걸음은 출가해 속세의 인연을 단절하는 것인데 바로 정을 끊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색욕을 단절하는 것인데 단절하지 않으면 수련해 올라갈 수 없고 당신은 고층차의 법을 전혀 볼 수 없다. 세 번째는 바로 자신에 대한 집착을 단절하는 것이다.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쉽게 자심생마(自心生魔)해 철저히 망치며 전혀 수련할 수 없게 된다. 대법제자의 수련방식은 속세에서 수련하는 형식이지만 표준은 더욱 높다. 이 때문에 수련의 엄숙성은 또 다음과 같은 데서도 표현된다. 수련자가 마음과 정을 움직이면 곧 집착하는 것으로, 순식간에 삼계 내의 업력 윤보에 떨어져 삼계 법리의 제약을 받아 심신이 고통 속에 처해있게 된다. 많은 경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사상업과 마의 교란 외,또 하나의 관건적인 문제는 바로 자신의 위치를 낮추는 것인데 속인으로 간주하면서 자신이 대법제자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또 하나 넘기 어려운 정의 관문은 가족 정이다. 태어나서는 따뜻한 가족 정 속에서 성장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모와의 인과 업보도 끊임없이 나타난다. 하지만 사랑이든 미움이든 모두 정의 작용 하에서 서로 업을 갚는다. 중생은 모두 법을 위해 왔지만 모두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적지 않은 사람은 부정적인 작용을 일으켜 우리가 법에 대해 확고한지 시험한다. 수련하지 않는 우리의 부모 자녀의 역할은 일찍이 배치됐다. 어떻게 가족 정의 교란을 돌파하고 그들을 구도할 것인지는 매 한 대법제자가 반드시 직면해야 할 문제다. 내 마음속에 사부님은 내 부친이자 스승이시고 가장 친한 사람이시다. 수련하지 않는 내 가족은 모두 나와 연분이 가장 큰 중생이고 수련하는 사람들은 동수(同修)다. 상호 간의 위치를 바르게 놓으면 넘기 어려워 보이는 관문도 모두 넘을 수 있다.
내 결혼 문제에서 가족들은 내가 왜 결혼하려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그들은 사회적인 압력을 느껴 처음에 자주 이 일로 논쟁이 벌어졌는데 각자 자기의 주장을 쏟아냈다. 마지막에 나는 이성적이고 평화롭게 이 일의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부모님께 “불교 수련은 출가해서 속세의 인연을 끊기 때문에 부모님을 신변에서 돌보고, 돌아가실 때까지 효도를 다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이 법문은 속세에서 수련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할 책임을 미루지 않습니다. 그러니 두 분은 대법의 복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지요. 부모들은 모두 자녀가 행복하기를 바라잖습니까. 그런데 저의 가장 큰 행복은 대법을 수련하는 것이고 법공부는 저의 가장 큰 낙입니다.” 속인들은 곤란에 부딪히면 부모님을 찾지만 나는 사부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법공부를 한다. 대법은 만능이기 때문에 법에서 사부님의 가지가 있으면 관을 넘을 수 있다. 그 후부터 부모님은 나를 이해하고 더는 혼인 문제를 묻지 않으셨다.
수련의 제고에 따라 정을 담담하게 보자 나에게 두 번째 난관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자아였는데 즉 자아 실증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왜 무사무아(無私無我)를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앞에 놓으셨을까? 나의 이해로는, 사(私)와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첫 일념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매우 어렵다. 특히 자기를 느슨히 한 상태라면 첫 일념은 반드시 자아와 자아의 표준이다.
구세력은 왜 정법을 교란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큰 마난을 조성하는가? 자아에 집착한 모든 경지가 정법에 대한 인식 때문이 아닌가! 이 때문에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아무리 수련해도 구세력의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욱 엄숙한 것은 자아의 마장(魔障)이 저도 모르게 자신을 높게 배치해 마난에 봉착해서 넘어가지 못할 때 또 대법과 사부님의 능력을 의심할 수 있다. 그러면 믿는 근기도 동요되고 시끄러움도 커진다.
나는 주의식이 강하지만 또 자아도 아주 강하다, 이 때문에 자아란 이 관문에서 엎어져 기어간다고 말할 수 있다. 최근에 이르러 한 수련생과 교류한 후 관념상에서 오류가 있는 자신을 발견해 줄곧 자아를 제거하기 매우 어려웠다. 이 관념은 바로 강세(強勢)를 정념으로 착각한 것이다. 말할 때 기세가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당(黨)문화인데 그 기(氣)는 공(功)이 아니다! 수련인은 기가 없고 오직 공만 있다. 정념은 신념(神念)이고 자비이며 순수함이고 위력이 아주 뛰어나다. 자비심이 나오면 모든 공간 마당의 일체 사악은 순식간에 해체돼 완전히 사라진다. 보기엔 차분하고 자상한 말이 구구절절 모두 공력의 표현인 것 같지만 공격적인 강세는 질책과 비평이고 마성이고 악이다. 다른 수련생에게서 나는 격차를 보았는데 그 수련생은 다만 ‘선의로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수련했지만 의외로 어떤 마음은 아직도 악 중에 있다. 여기까지 인식하자 갑자기 잘난 척하는 마음이 해체되고 자아가 쓰러졌다.
많은 정관(情關)을 철저하게 넘지 못해 반복되고 인연이 계속됐는데 역시 이것은 자아가 명성을 추구해 교란한 것이기 때문에 근원에 관한 문제다. 착실하게 수련하는 과정 중에서 나는 내 감정의 동기를 반성했는데 감정의 추구에 대한 자신의 정복욕이 근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 정복욕은 바로 자신이 상대방에 대해 호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일단 이 욕망이 만족되면 이 사람에 대해 흥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어떤 특정한 관계에 대해 일단 본질의 위해성을 똑똑히 보면 매우 빨리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욕의 뿌리가 자아에 있기 때문에 자아를 수련해 버리지 않으면 색욕이 다시 불거진다. 또 감정이 좌절당할 때 만약 자존심이 상대방의 감정보다 더 크게 상처를 입었다면 그 뿌리는 여전히 자아에 있다. 다른 사람을 장악하려는 욕구도 자아를 만족하려는 안정감에서 비롯된다. 많은 경우 한 사람과 정이 드는 것은 상대방이 좋아서가 아니고 자신이 그때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일체 감정은 배후의 인과와 업의 빚을 제외하고 전부 모두 자아의 수요에서 시작되고 이 수요는 본인 마음의 변화에 따라 변화된다, 그럼 일체 문제의 근원이 자아의 욕망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어디서부터 착수해 돌파할지 알게 될 것이다.
자아를 내려놓을 때마다 나는 또 많은 관념이 가로막는 것을 발견했다. 정은 자아를 포함하고 자아는 관념 중에 포함된다. 관념은 사람이 생존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형성된 사상이다. 옳고 그름은 모두 속인이 세간의 표면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다. 수련인이 만약 옳고 그름을 논쟁한다면 그것은 속인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고층차 수련은 무위를 말하고 세간의 일체는 모두 인과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은 상관하지 못한다. 속인의 일생은 모두 신이 배치했기에 우리가 마음을 움직이면 곧 집착이다. 상관하면 신의 배치를 교란하고 파괴할 가능성이 있어 업을 짓게 되고 층차가 떨어질 수 있다. 관을 넘는 중에서 만약 내가 집착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공격해도 마치 바람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몸과 마음이 훤하게 뚫린 것 같은 느낌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일체 공격은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관념, 자아, 정의 집착이 있으면 여러 정도로 불편하고 괴롭다. 그러나 반드시 명백해야 할 것은 집착심이 괴로워하는 것인데 그것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는 안을 향해 찾는 것이 법보(法寶)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특성을 연결하는 스위치처럼 하늘과 직통 되는데 불성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사부님께서는 ‘싱가포르 법회설법’ 중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늘 한 가지 이치를 말하는데 어떤 사람은 번거로움에 부딪히면 그는 그 번거로움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 어찌하여 안 되는 걸까? 사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알려주는데, 남이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법은 모두 아주 순리적이다. 만약 당신 자신이 틀어졌다면, 당신은 주위의 일체가 당신에 대해 모두 틀어져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원인을 찾아내어 순응하면, 당신은 그 일체가 또 잘 돌아가는 것을 발견할 것인데 흔히 이러하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수시로 ‘안을 향해 찾고’ 영원한 선한 마음을 요구하셨다. 우리가 꿋꿋하게 고통을 참으며 안을 향해 찾을 때 그것은 확실하게 우리의 마성을 소멸한다. 얼마나 괴롭던지 우리는 반드시 법보의 위력을 가지(加持) 해서 그가 철저히 사악을 제거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만약 힘에 부치면 반드시 사부님께 가지 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질투심’의 함의를 나는 원래 줄곧 명백히 알지 못했다. 사람의 지식 중에서 배운 질투심의 함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갑자기 우리보다 잘되면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정서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이 나보다 강하지 못해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마음이 없는데 왜 또 질투할까 생각한다. 이후에 착실하게 수련하는 중에서 나는 질투심 자체가 바로 악한 자의 경지 중 상태이기 때문에 악과 관련 있는 모든 상태는 기본상 모두 질투심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면상의 직업과 지위는 덕과 업이 많고 적음에 따라 표현되지 생명과 심성의 위치를 완전히 대표하지 못한다.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다. 그러면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용량이 적고 적재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그 배후의 요소는 자아의 표준과 잘난 체하는 마음이다. 자아의 표준이 우주의 표준으로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악이 아닌가! 마음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평온하지 못하는 중에 있으면 악이다. 일단 이 사람이 운명 중에 어떤 방면의 복이 우리를 초과했거나 혹은 그의 운명 속에 있는데 우리는 없어 질투심이 곧 나타난다. 사부님의 법은 영원히 다 깨닫지 못하고 다 배울 수 없다. 층층이 모두 법이 있어 심혈을 기울여 배우고 착실하게 수련해야 한다. 오직 착실하게 수련해야만 법을 얻을 수 있고 고층차의 법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나타난다.
수련은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법을 얻으면 사부님께서 지켜주신다. 진정으로 몸과 마음, 두뇌가 가벼워지려면 반드시 착실하게 수련하는 중에서 집착을 놓아야 한다. 속인이 나의 이익을 차지하고 이기심을 부릴 때 나는 그들이 미혹 중에서 마음속으로 괴롭기 때문에 생활 중에서 이익을 차지해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을 보상받아 위안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반면 대법제자는 표면적으로 얼마나 많이 고생하고 곤란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얻은 것은 우주대법이고 사부님의 자식이고 우주 중의 가장 행복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마음속으로는 풍성하고 풍만하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좋지 않게 대할 때 나는 안을 향해 찾아 자신이 존중을 받으려고 하는 명예심과 억울한 마음을 찾았다. 상대방은 나를 도와 업력 전화(轉化)와 공이 자라게 제고시키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그에게 감사했다.
나의 층차에서 이해한 선(善)은 바로 헌신, 담당과 책임이다. 만약 수련생들이 정신상 고통을 참는 상태가 나타나면 반드시 근원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수련 중의 근본 집착과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는 두 가지 큰 문제와 연루되기 때문이다. 근본 집착은 바로 사람 중에서 무슨 관념을 품고 대법 문에 들어서는 것이다.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는 것은 바로 자아를 고수하고 가장 본질적인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표면상 세 가지 일을 모두 하지만 마음이 법에 있지 않거나 혹은 아주 적게 법에 있다. 습관적으로 법리를 이용해 타인을 대조하고 지도하며 수련을 도와주지만, 자신은 착실하게 수련하지 못한다. 그럼 마음이 사람 중에 많이 있을 때 당연히 괴롭고 압력도 커서 고통을 참고 견디는 소침한 상태가 나타나고 스스로 평범한 속된 일의 교란에서 벗어나지 못해 마음이 피곤하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직접 수련의 실질 문제―법에서 법을 인식할 수 있는가에 관계되는데 수련에 정진하는 것은 바로 일사일념 중에서 표현된다.
사상 상, 정신상에서 자신의 대법제자 신분과 구도의 사명을 마음속 깊이 새길 수 있는지. 구체적인 일에서, 관을 넘는 중에서 법으로 사고하고 구별할 수 있는지는 법 중에서 수련해낸 지혜로 문제를 처리하고 생활을 지도해야 한다.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않으면 착실하게 수련하고 정진할 수 없다.
또 두 가지 관념상 문제가 있다. 하나는 바람이 불면 감기에 걸릴 수 있고 무엇을 먹으면 몸보신 되며 무엇을 마시면 건강해지고 무슨 열성 체질, 냉성 체질 등등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비록 작지만, 매우 완고하다. 그러나 또 한 가지 큰 문제를 반영했는데 자신을 수련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모두 속인의 생활 관념으로 판단한다. 우리의 공(功) 중에 우주 중의 모든 물질 원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또 무엇이 부족한가? 그 심성이 올라가지 못한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대법제자를 놓고 말하면 우리는 영원히 이 일이 법에 부합되는지, 되지 않는지 사고해야 한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바로 마음에 드는 말을 듣기 좋아하는 것이다. 인정해주기를 갈망하고 인정받기 위해 수련생 간에 서로 옳고 그름을 논쟁하는 이것도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다. 나의 명예심은 매우 강해 줄곧 제거하고 있다. 나는 오직 관념이 변화해야만 이 문제에서 진정으로 제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속인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말한 말이 그들의 관념에 부합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인정한 것은 사실 우리가 아니고 관념이다. 수련생들이 우리를 인정하는 그것은 우리가 말한 말이 법에 부합되고 본질상에서 법에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를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 물질 운반체가 중요할까? 우리가 인간 세상 속에 온 것은 사명을 완수해 돌아가는 것에 불과한데 이런 헛된 명성을 요구해서 무슨 쓸모가 있는가? 마치 소능소술(小能小術)과 같은데 사람 중에서 명성을 날리고 또 사람의 집착심을 부추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속세에서 수련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고생스럽고 힘들지만 우리는 사부님이 계시고 법이 있다. 이것은 우리 생명이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영광이다! 고험 중에서, 관을 넘는 중에서, 마난 중에서, 왜 우리의 의지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굴복시키지 못하는가, 그것은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감당하신 것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기 때문인데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세간의 일체 부귀영화도 비할 수 없는 은혜이고 그것은 우주 중의 일체 사악이 바른 믿음을 뒤흔들 수 없고 제자들이 사부님과 사명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마음이다.
정법수련은 사부님의 수요와 표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정법 노정에 뒤따라가야 사부님의 수요를 이해할 수 있는데 지금 장쩌민 고소 열풍이 바로 이러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정법 중에는 하나의 이치가 있는바, 내가 어떻게 처리하든지 모두 바른 것이다. 당신들은 사부가 한 이 한마디 말을 기억하라. 즉 내가 어떻게 처리하든지 모두 바른 것이며 처리된 것들은 모두 그릇된 것이다.(박수) 왜냐하면 그것은 우주의 선택이며 미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수련생들은 모두 이 단락의 법을 외워 난관 중에서 법을 생각하고 사부님께 가지 해줄 것을 부탁해 용기를 잃지 말기를 바라는데 이것도 신사신법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대법제자와 사부님, 정법은 같이 있기 때문에 신사신법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사명이고 복귀이며 대원만 하는 근본적인 보증이다.
이상은 개인이 깨달은 것인바 부족한 곳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로 지적해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10월 14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0/14/31755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