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중국 후베이(湖北) 대법제자 진쯔(金子)
[밍후이왕] 내가 일체 교란을 물리치고 장쩌민 고소장을 발송한 후 현지 몇몇 노년 수련생들이 아직 고소장을 쓰지 못해 나에게 고소장 자료를 정리해 달라고 했다. 그들의 구술 기초에서 고소장을 작성하고 우체국에 데리고 가서 우편까지 발송했으며 마지막에 밍후이왕에 등록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큰 제고가 있으며 어떤 수련생은 울며 말했다. “이전에 잘 수련하지 못해 지금 다시 잘하려 합니다. 마지막 정법 노정에 따라 조사정법을 하려 합니다.”
우리 지역 수련생들이 대부분 장쩌민 기소에 동참한 후 나는 고향에 돌아가 농촌 수련생들을 장쩌민 고소 열풍에 참여하게 하려 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두 젊은 수련생에게 말했는데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자신이 하는 일과 장사를 내려놓고 나와 함께 농촌으로 가서 수련생들의 장쩌민 고소 참여를 돕기로 했다.
우리 셋은 작은 팀을 만들어 시골에 갔다. 7월 9일 아침 8시에 출발해 점심에 도착했다. 나는 즉시 두 수련생을 찾아 그들에게 현 소재지 인근 수련생들을 불러 저녁에 장쩌민 고소장에 대해 교류한다는 소식을 알리라고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그날 오후 우리 셋은 차를 타고 어느 편벽한 마을로 갔다. 왜냐하면, 그곳에 대법제자 5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수련생 4명(다른 한 분은 장애인인데 높은 산에 살고 있음)이 왔다. 그들은 밍후이왕과 NTD방송에서 장쩌민 고소 사실을 보았다며 우리가 장쩌민 고소장을 쓰는 것을 돕는다는 소식에 기뻐했다. 그들이 일일이 말하고 우리는 하나하나 기록했다. 그런 후 글로 정리한 후 형식에 따라 인쇄했다. 줄곧 저녁 7시까지 바쁘게 해서 4명은 완성했다. 이때 수련생이 저녁밥을 다 지어놓았다. 우리에게 식사하고 가라고 했지만 현 소재지 수련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고 밥도 먹지 않고 돌아왔다. 집에 오니 수련생 10명이 이미 1시간 정도 기다린 후였다.
두 번이나 일부 수련생과 장쩌민 고소에 관한 이야기를 교류했다. 고향에 대법제자 수련생이 적어서 모두 10명밖에 되지 않는다. 사악이 지켜보고 있고 박해가 심해 두려운 마음으로 장쩌민 고소를 이야기하자 태도를 밝히지 못했다. 또 노년 수련생이 많고 지식수준이 낮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니 고소장을 쓰는 것은 어림도 없었고 무척 힘들어했으며 우리가 가기 전에는 고소장을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는 다 함께 앉아 단체 발정념을 하고 밍후이왕의 장쩌민 고소문장을 그들에게 읽어주고 장쩌민 고소에 관한 현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듣고 감동했다. 나는 자신이 쓴 장쩌민 고소장을 그들에게 읽어주었다. 그들은 고소장을 들으면서 점차 두려운 물질을 제거했다. 어떤 노년 수련생은 말했다. “당신이 당한 그런 박해는 모두 진실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나는 매우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습니다. 10여 년 동안 장쩌민 집단과 중국공산당은 우리가 소리 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 기회가 있으니 저는 장쩌민을 고소할 겁니다.”
이어서 수련생은 잇따라 어떻게 장쩌민을 고소하는지 물었다. 함께 간 여자 수련생이 그들에게 형사고소장의 통용 부분과 개인 부분 및 기타 형식, 어떤 개인 내용이 언급되는지 알려줬다. 첫 번째는 자신의 진실한 상황을 반영해야 한다. 예를 들면 당신은 어떻게 대법 수련을 했는가? 수련 후 심신의 변화 및 7·20 박해 후 어떤 박해와 손실을 받았는지 쓰고 마지막에 당신의 요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도와 고소장을 쓰고 인쇄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개인마다 자신의 신분증 사본 3개를 준비하고 고소장에 서명하고 지장을 찍으며 우체국에 가서 EMS로 최고 검찰원과 최고 법원으로 발송하면 된다. 그들은 장쩌민 고소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잇따라 참여했다.
밤에 수련생이 떠날 때 나는 말했다. “장쩌민을 고소하는 것은 수련 과정입니다. 모두 돌아가 법공부를 많이 하고 발정념을 많이 하세요. 장쩌민 고소는 천상의 변화이고 정법 노정의 일부분입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고 있어요! 신사신법하고 정념 정행하면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만약 우리에게 자료 정리 도움이 필요하면 내일 혹은 모레 우리 집에 오세요.” 모두 가능하다며 내일 각자 오겠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우리 세 명은 단체 연공을 한 후 한 강의를 배웠다. 두 노년 여자 수련생이 왔다. 그들의 이야기는 성실하고 소박하며 감동적이었다. 한 수련생은 말했다. “저는 질병으로 10여 년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련생이 찾아와 법을 읽어주고 연공을 가르쳐 반년 후 온몸의 병이 나아졌습니다. 지금 20여 년이 지났는데 병에 걸린 적도 없고 약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수련 과정에서 많은 신기한 일을 목격했습니다. 친척, 친구, 이웃은 모두 제 신체 변화를 보고 파룬따파는 좋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 수련생은 말했다. “저는 안후이(安徽)성에 가서 사부님 학습반에 참가했습니다. 당시 딸과 사위가 아파서 누워있는 저를 들고 갔습니다. 학습반을 마친 후 걸어 나왔습니다. 남편도 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대법이 아주 신기하다며 대법을 믿게 됐습니다. 지금 70세인데 여전히 질병이 없는 가벼운 몸입니다. 사부님께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순조롭게 고소장을 완성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EMS 송장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발송하며 어떤 문서가 필요한지 알려줬다. 그들은 그날 오후 우편 발송을 했다. 오후에 몇몇 수련생이 왔다. 우리 셋은 함께 기록하고 자료를 쓰며 타자하고 하나로 연결돼 작업해 줄곧 밤 11시까지 진행했다. 그날 7명의 장쩌민 고소장을 완성했다.
세 번째 날 아침 2008년 진상자료를 보고 법을 얻은 신수련생이 장쩌민 고소자료를 정리하러 왔다. 그가 장쩌민을 고소한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장쩌민이 파룬궁수련생의 장기를 적출한 사실이다. 이것은 아주 잔혹한 범죄다. 그는 당시 생체장기적출 자료를 보고 아내와 고통스러워 밤새 울었다고 한다. 한동안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장쩌민을 고소해 이런 박해가 중지될 것을 바란다고 했다.
이어 수련생은 다른 현 소재지의 어느 시골 수련생을 찾아갔다. 나는 그가 정신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그와 교류했다. 사실 이 수련생은 본래 아주 정진했는데 대법이 탄압을 받은 후 그는 우리 현에서 첫 번째로 불법 감금 박해를 당했다. 이후에 그는 홀로 시골에서 수련하고 세 가지 일도 잘하지 못했다. 지금 몸이 좋지 않고 밥도 먹지 못하며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배에 뱀 두 마리와 두꺼비 한 마리가 보인다고 한다. 나는 말했다. “법을 많이 배우고 발정념을 많이 해 그것을 청리해야 합니다. 그것은 공산 사령의 낮은 부패물질이고 다른 사람이 발정념 할 때 당신이 발정념 하지 않으면 그것은 당신의 몸과 공간장에 들어와 숨고 위험을 주고 해칩니다.” 그는 말했다. “그런가요! 누가 나에게 알려준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모르고 있었어요.” 그는 장쩌민 고소장을 완성한 후 스스로 자신이 잘하지 못했고 사부님께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는 500위안(9만 원 정도)을 나에게 주며 대법자료를 만드는 데 쓰라고 했다. 남자 수련생은 그를 데리고 우체국에 가서 우편을 발송한 후 집에 데려다주었다. 길에서 줄곧 그에게 발정념을 해주어 청리했다. 이후에 현 소재지 수련생에게 단체로 그에게 발정념을 해주라고 했다. 나도 발정념해 그의 나쁜 물질을 제거해 주었다. 이번 장쩌민 고소에 그가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사존께서 자비롭게 그에게 구도될 기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한 수련생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 세 번째 날 오후 우리는 또 오지 못하는 두 수련생의 집에 찾아가 그들을 도와 장쩌민 고소장을 정리해 주었다. 한 분은 작년에 법을 얻은 신수련생이다. 대퇴골두 괴사로 반신불수가 됐다. 법을 얻은 후 지금 많이 나아졌고 이미 집안일도 할 수 있었지만 멀리 떠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장쩌민 고소 사실을 알렸고, 그녀는 말했다. “장쩌민이 집권할 때 탐오 부패했습니다. 수련 전 공장에서 일했는데 우리 노동자는 힘든 일만 하고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찍부터 장쩌민을 고소하려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좋은 공법이 장쩌민에게 탄압당해 우리는 정정당당하게 수련할 수 없으며 차별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고소해야 하고 하루빨리 박해를 중단시켜야 합니다.”
다른 퇴직한 80여 세 노년 수련생은 법을 얻기 전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다. 자주 죽음의 위기를 맞아 그는 유서까지 썼다. 법을 얻은 후 몇 번 병업관을 넘겼지만 사존의 가호로 넘어갔다. 아내는 그보다 나이가 많이 적다. 평소 그를 도와 자료를 배포하고 진상을 알렸으며 그의 수련을 아주 지지했다. 하지만 이번에 장쩌민을 고소하려 하자 아내는 동의하지 않았다. 남편이 나이가 많은데 박해당하면 잘못될까 봐 두려워했다. 내가 고소장을 가지러 갔을 때 그는 집안에 갇혀 있었다.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노년 수련생은 창문을 열고 말했다. “나는 장쩌민을 고소하려 하지만 아내가 문을 밖으로 잠그고 인주도 가져갔어요.” 나는 말했다. “당신의 생명은 사부님께서 연장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당신이 따라가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하려 합니까? 장쩌민 고소는 당신 한 사람이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개인으로 말하면 따라올 수 있는가, 제고할 수 있는가는 아주 관건적인 일입니다!” 그는 말했다. “알았습니다. 저를 도와 쓴 고소장은 아주 좋습니다. 지금 제 실제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 당신 인주 하나를 얻어주세요. 내가 서명하고 지장을 찍을게요. 저를 도와 우편을 발송해 주고 돈도 내주세요. 이후에 제가 드릴게요.” 그가 아주 확고한 것을 보고 그의 말대로 우편을 발송했다.
네 번째 날 우리 셋은 다시 시골에 가서 높은 산에 있는 장애인 수련생을 도와 장쩌민 고소장을 작성하려 했다. 나는 아주 큰 마음을 먹고 갔다. 현 소재지에서 차를 몰고 몇십 리 길을 가야 그 마을에 도착한다. 그런 후 마을에서 걸어서 산에 올라가야 하며 왕복 1시간 넘게 걸린다. 젊은 두 수련생은 아주 적극적으로 산을 올랐지만 나는 좀 두려웠다. 60여 세이고 체중은 80kg여서 등산이 좀 힘들었다. 좀 오르고 더는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생각했다. ‘그 수련생은 장애인이고 생활도 어렵다. 수련을 오래 했는데 그를 빠뜨리면 안 된다!’ 나는 이를 악물고 한 걸음씩 산을 올랐다.
산에 오른 후 수련생을 만나자 그는 감동했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89년 관절염에 걸려 두 발이 마비됐고 걷지도 못하며 일도 하지 못해 논밭도 모두 묵혔습니다. 생활은 아주 곤란하고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정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도처에 가 청원했습니다. 청원의 고수가 됐습니다. 1998년 조카의 소개로 다행히 대법을 수련해 몸이 건강해지고 산을 자유로이 오르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더는 청원하러 가지 않고 논밭을 잘 가꾸고(지금까지 그때 심은 양식을 먹는다) 생활도 넉넉해졌습니다.”
하지만 1999년 장쩌민의 명령으로 파룬궁을 탄압한 후 향진 파출소 촌위원회는 집에 쳐들어와 재산을 몰수하고 대법 책을 몰수했다. 그가 진상을 알리자 흉악한 경찰은 그의 따귀를 때렸다. 이후 1년에 몇 번이나 집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고 위협하며 욕설을 퍼붓고 법공부 연공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는 병이 재발해 걷지도 못하게 됐다. 그는 말했다. “파룬궁은 나를 장애인에서 좋은 사람으로 변하게 했고 공산 사당, 장쩌민은 나를장애인으로 만들었고 지금 노동력까지 상실하게 됐습니다. 어떤 생활비도 없고 이렇게 어려운 환경이지만 수련을 견지하고 대법을 믿고 사부님을 믿습니다. 마음속은 정말로 슬프고 감동적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잘 왔구나. 그를 빠뜨리면 안 된다. 그의 천국의 무량 무계한 중생은 아직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두 형도 수련생이기에 우리는 법공부도 하고 연공도 하며 발정념도 하고 법공부 팀을 만들어 정체를 원융하고 서로 협력하도록 그들과 교류했다. 떠날 때 가져간 300위안(5만 원 정도)을 몰래 남겨 놓았다. 그는 발견 후 결연히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 돈을 나에게 돌려줬다. 나는 어떻게 그를 도우면 좋을지 몰랐다. 저녁 7시 무렵에 우리 세 사람은 16명 수련생의 장쩌민 고소장 발송 영수증과 시골 수련생에 대한 근심과 축복을 지니고 기뻐하고 피곤한 몸으로 도시로 돌아왔다.
이틀이 지난 후 인터넷에 접속해 검색해 보니 16명 중 9명의 고소장이 검찰원에 접수됐고 7명 고소장은 베이징 터미널센터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밍후이왕에 등록하고 동시에 발송된 그들의 두 가지 결과에서 깨달았는데 사악의 교란 외에 개인의 수련상태도 관계된다. 나는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결과를 알려줬다. 그들에게 법공부를 많이 하고 발정념을 많이 하며 자신을 제고하라고 말했다. 장애를 해체하니 7월 9일까지 또 4명의 고소장이 접수됐다.
걸어 나와 현, 시에 내려가 수련생을 도와 장쩌민 고소를 도우면서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체험이 있다.
1. 시골 수련생을 도와 장쩌민 고소장을 작성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다. 시골 수련생은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이 적고 소식은 상대적으로 폐쇄되고 장쩌민 고소에 대해 아주 큰 인식 차이가 있어 교류를 통해 추진해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돕지 않으면 우리 현의 장쩌민 고소는 언제 펼쳐질지 모른다.
2. 자발적으로 시골에 도우러 간 수련생에 대해 확실히 엄숙한 고험이 있다. 우선 아주 큰 자비심이 있어야 하고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아야 한다. 함께 간 한 수련생은 자신의 장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가용으로 시골에서 4일간 다녔고 다른 여자 수련생은 자신의 많은 일을 내려놓고 시골 수련생을 지원해 주었다.
3. 시골은 조건이 좋지 않고 교통이 불편하며 때로 산을 넘어야 하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잔다. 날씨는 덥고 힘들고 배도 고프다. 그러므로 우리 수련생은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또 무조건 협력해야 하고 서로 원융하고 인내심이 있고 주도면밀해야 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 사람이 적고 시간은 짧으며 일이 많은 상황에서 침착하게 해야 한다. 동시에 시간을 다그쳐 법공부를 해야 하고 연공과 발정념을 해야 하고 일체 교란을 제거하고 법이 마음에 있어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다.
어쨌든 시골에 가서 수련생을 도와 장쩌민 고소장을 작정한 것은 수련을 제고하는 과정이고 각종 집착심을 제거하는 좋은 기회다. 조건 있는 수련생은 되도록 걸어 나와 시골 수련생을 도와 장쩌민 고소를 도울 것을 건의한다. 조사정법,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노력을 다해 우리의 사전 서약을 지키기를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8월 1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진상을 알려 세인을 구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8/19/31436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