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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두목을 고소하는 중 두려운 마음을 버리다

글/ 랴오닝 대법제자

[밍후이왕] 5월에 어머니께서 장쩌민 고소 소식을 들으시고 소송을 준비하셨다. 그때 나는 몹시 걱정되고 두려웠다. 10여 년 전, 어머니는 밖에서 연공하고 또 베이징에 청원을 갔다는 이유로 두 번 구류 당하셨다. 게다가 경찰은 사흘이 멀다 하고 밤낮없이 찾아와서 문을 두드리면서 어머니에게 세뇌반에 가자고 하거나 보증서 따위를 쓰라고 했다. 이번에 장쩌민 소송 소식을 들으니 이전의 그런 느낌이 또 되살아났다. 나는 어머니가 또다시 잡혀가실까 봐 몹시 걱정됐다. 왜냐하면, 나는 사당(邪黨)의 수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인데 어머니도 내 말에 좀 위축이 되셨다. 왜냐하면, 당시 장쩌민 소송은 막 제출됐고 현지에서도 고소한 수련생이 별로 많지 않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더 기다려 보기로 하셨다. 그 후 밍후이왕에서도 점차 우체국에서 가로막고 경찰이 가로막는다는 소식이 나타났다. 어머니와 나는 장쩌민 소송은 이제 참여할 방법이 거의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후에 나는 이메일로 현지의 수십 명이 장쩌민을 고소했다는 것을 보고 고소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장쩌민을 고소했다는 사실을 어머니께 알려야 할지 좀 망설였다. 대법제자로서 어머니가 고소하려는 것을 제지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나에게는 아직 딸이라는 사람 마음이 존재했다. 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또 현지 젊은 수련생 두 명이 장쩌민을 고소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그들은 비록 지금껏 낯선 사람에게 대면 진상을 알리지 않았고 또 몹시 두려워했지만 끝내는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고소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전반 과정이 아주 순조로웠다. 어머니께서 또 다른 수련생에게 물어보니 이젠 많은 수련생이 고소했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도 드디어 장쩌민을 고소하기로 하셨다.

짧은 보름 사이에 시작에는 겨우 몇 명 수련생이 장쩌민을 고소했던 데로부터 지금은 들으니 몇십 명이 했다고 하는데 나는 와야 할 것은 오고야 만다는 것을 알았다. 기왕 왔으니 함께 직면해야 한다. 당일 오후부터 시작해 우리는 발정념으로 장쩌민 고소를 교란하는 사악을 청리했다. 내 머릿속에는 서서히 고소장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그리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구상이 떠올랐다. 한편으로 이런 구상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또 나의 사업, 고객, 속인이 나에 대한 말에 직면해야 했다. 그날 내 머리는 텅 비어 있었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서야 비로소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이 하룻밤에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무슨 내용을 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온몸은 나른해 포륜조차 겨우 했다. 어머니도 힘이 없는 것 같으셨다.

이튿날 이른 아침. 어머니는 박해 내용을 다 써 놓고는 나에게 정리해 달라면서 당일로 장쩌민을 고소하자고 하셨다. 오래 끌수록 두려운 마음이 더 심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진상을 알리러 나가셨다.

수련생이 제공해 준 형식에 따라 고소장을 순조롭게 정리했다. 그 후에 또 우체국에 가서 특급우편 영수증과 큰 봉투 두 개를 사서 어머니에게 집에서 안심하고 주소를 쓰시게 했다. 물론 특급우편 영수증을 살 때 몹시 두려웠다. 왜냐하면 어떤 우체국에서는 이미 장쩌민 고소장 발송을 거절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찰이 안에서 감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존의 가지(加持)로 일체는 모두 준비가 순조로웠다. 점심에 어머니께서 돌아오시자 우리는 준비했던 모든 서류를 갖추어 놓고서 큰 봉투에 넣었다. 넣을 때 내 손은 줄곧 떨렸다. 나는 또 그해 어머니가 베이징에 가시려 할 때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생사 이별의 심정이 떠올랐다.

서류를 밀봉한 후 우리는 반 시간 발정념 했다. 이때 내 몸은 이미 더는 떨리지 않고 오히려 온몸이 더우면서 에너지로 넘쳤다. 게다가 나는 이번 장쩌민 고소가 아주 순조로움을 예감했다. 원래 당시 다른 수련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우체국으로 가길 바랐으나 그 수련생은 집에서 발정념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다른 수련생에게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10여 년 전, 어머니께서 베이징에 가실 때 나는 집에서 크게 울기만 했을 뿐 함께 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에게 사존의 가지가 있고 또 발정념을 할 수 있으므로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우체국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고 우리는 앞뒤로 서서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걸었다. 어머니는 아주 태연하셨다. 베이징에 가 봤고 또 날마다 진상을 알리고 있으므로 두려운 마음도 여러 차례 단련 중에서 적어지셨다. 나는 그렇듯 태연한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이분이야말로 나의 진정한 어머니, 정법 시기의 제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더욱 바라는 것은 이렇게 확고한 어머니이지 얼마 전 위축됐던 어머니가 아니다.

우체국 계단을 밟았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 제자가 도착을 보고드립니다.’ 우체국에 들어선 후 우편물을 부치는데 일부 세부 항목을 써넣어야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안에서 몇 분 동안 처리하셨다. 이 몇 분은 밖에 있는 나에게는 아주 길게 느껴졌다. 나는 끊임없이 발정념을 하면서 어머니와 협력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우체국에서 나오셨고 우리의 장쩌민 고소 첫 일보가 성공했음을 알았다. 이튿날 인터넷에 우편물 수령 정보가 나타났다.

물론 고소장을 베이징에 제출하는 것은 단지 첫걸음에 불과하고 뒤에는 아직도 발정념으로 검찰원, 법원이 입건하게 하고, 대법과 사존의 결백함을 회복시켜야 하며, 더욱 많은 세인이 진상을 알고 구원받게 해야 한다, 또한 아직 장쩌민을 고소하지 않은 수련생을 도와 발정념을 해야 한다.

이번에 어머니와 협조해 장쩌민 고소를 하는 중에서 나는 자신의 몸이 또 청리됨을 느꼈다. 사존께서는 제자에게 많은 좋지 못한 물질을 청리해주셨고, 내 두려운 마음도 적지 않게 줄어들었으며, 정념도 갈수록 강해졌다. 물론 유일한 유감이라면 내가 어머니와 함께 장쩌민을 고소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꼭 장쩌민을 고소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가지(加持)에 감사드리며 수련생들의 도움에 감사드린다.

개인적인 체득으로서 맞지 않은 곳이 있다면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6월 3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6/30/3116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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