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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신법은 작은 난관, 작은 어려움에서부터 시작해야

[밍후이왕] 신선에 대한 문장이 발표된 후 많은 수련생의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밍후이왕에도 상응하게 적지 않은 수련생의 체험이 있었다. 나도 자신과 주위 수련생들을 대조하면서 자세하게 이 문제를 사고했는데 약간의 깨달음을 수련생들과 토론하고 연구하려 한다.

많은 수련생들이 말한 신사신법(信師信法)은 주로 큰 병업이나 심성 고비를 넘을 때를 집중적으로 짚었다. 아주 힘들 때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고 사부님에게 가지해 달라고 빌면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처리해 주셔서 대법의 초범성이 나타났다. 나는 이런 이해가 전면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신사신법은 수련의 전체 과정에 연관되어 있으며 신사신법 정도도 수련하면서 점차 강화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개개인 상황에 근거해 우리에게 넘을 고비를 배치하셨다. 모두 우리의 초기 기초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면 평소 부부 싸움, 자녀와의 논쟁 등등 작은 모순에서나 불면, 치통, 독감 등 일부 생명 위험이 없는 작은 병업 등이다. 우리 일부 수련생은 억지로 버티거나 억지로 참고 넘어간다. 어떤 수련생은 남몰래 약을 먹거나 수련하지 않는 속인이 권하여 못 이기는 척하면서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고는 그럴듯하게 “속인들이 이해하도록 해야 하지 않나요?”라고 말하거나 사부님께서 치과에 가도 된다고 했다면서 사부님의 법에서 근거를 찾는다.

개인적으로 억지로 버티는 것을 포함해 이런 방법은 고비를 완전히 잘 넘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은 병업은 많은 속인들도 약을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소업은 소업해 고통을 겪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소업하면서 심성을 제고하는 것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난관을 대할 때 병업이든 심성관이든 모두 우리가 점차 고생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의심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수련은 바로 고생을 겪는 것이며 우리가 소업하면서 반드시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원래 산과 같은 이 업력을 사부님께서 제자를 대신해 대부분을 감당하셔서 우리는 요만한 것만 소업하는 데도 이렇게 괴롭다. 당신이 사부님을 믿는다면 사부님께 감격할 것이며 자신이 이전에 빚은 이렇게 큰 업력 때문에 부끄러워할 것이다. 시달림을 받는다는 심태를 가지고 마난이 하루 빨리 지나가길 절대로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좀 길어지면 원망하거나 의심하고 다음은 내가 지금 층차가 미달됐다거나 수련을 잘 하지 못했으니 먼저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면서 난을 뒤로 미룬다. 그러면 다음번엔 난이 더 커질 수 있고 넘으려면 심성이 더 높아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자신을 제고하지 못하면 뒤에 가면 더욱 어렵다. 뒤에 가서 아주 큰 난으로 누적되면 줄곧 심성 표준을 제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아주 어렵게 된다. 거기에 사부님과 대법을 의심하게 되면 대법제자로 간주할 수 없다. 그럼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소업해주실 수 없어 우리는 업을 갚아야 하는 상태에 처하게 된다. 바로 빚진 업력을 전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그럼 우리에게 목숨이 몇 가닥이 있어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에 고비를 넘기지 못하는 상황도 아주 정상이다.

물론 구세력이 우리에게 강제로 떠넘긴 마난이 있는 상황도 있지만 구세력이 강제로 떠넘긴 것인지 우린 어떤 때 판단하기 어렵다. 개인적으로 정법의 일에 영향 주지 않는 것은 소업으로 대하고 속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리며 소업을 기쁜 심태로 받아들인다. 심태가 바르면 소업을 다 하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분도 지나가게 되는 것이다. 심태가 바르지 않으면 사부님과 다른 생명이 우리를 도와 감당해줄 많은 부분이 계속 우리에게로 돌아와 우리가 계속 감당해야 한다. 당신이 속인 심태이기 때문에 속인에게 업력을 감당해 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마난을 통해 마지막에 우리 각종 속인 마음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또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홍음-마음고생)에 대해 어떤 수련생은 ‘고생을 참을 순 있지만 난 왜 고생하기 싫은가?’라고 하고 또 어떤 수련생은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고 했으면 ‘우리가 높은 경지까지 수련해 영원히 고생하지 않아선 뭐하는가?’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는 고생하기 좋아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생을 겪은 후 얻는 수확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생하면 소업할 수 있으며 우리가 이전에 빚진 업을 깨끗이 갚을 수 있고 동시에 그 중에서 우리의 경지가 제고될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우리의 생명은 반본귀진할 수 있고 높은 경지로 승화되어 영원히 고생을 겪지 않게 된다. 우리가 난에 봉착했을 때 이것을 우리가 높은 층차로 내딛는 계기이며 기회라고 생각하며 이 일 때문에 기뻐하고 사부님께 감격하신 것이다.

각종 작은 난 작은 고비를 잘 넘는 데서부터 시작해서 넘는 과정에 자신의 각종 사람마음을 찾아내고 그것을 닦아버리면 난을 넘는 과정에서 우리의 자신감도 점점 커지고 신사신법의 정도도 강해질 것이다. 우리 내심이 강대해지면 마난은 상대적으로 작아질 것이고 난도 수월해질 것이다.

사실 신사신법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며 결심을 보이고 선서해도 소용없다. 열심히 법공부하고 자신의 이해 정도에 따라 어려움이나 모순에 부딪쳤을 때 법에 따라 해야 하는 것이다. 법공부는 법공부대로 일은 일대로 해서는 안 된다. 법공부를 하는 목적은 우리의 행위와 생각을 지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진정한 신사신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작해야 속인이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존경에 불과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진정한 신사신법은 법에 동화되는 과정이고 법을 우리 수련에 결합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은 나의 약간의 인식임으로 옳지 않은 점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4월 2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4/25/30797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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