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선연(善緣)
[밍후이왕] 작가 머리말: 이 글은 수련생들에게 참고로 제공할 뿐 법을 스승으로 삼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법을 실증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우리는 거절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들이 대법제자의 부족함을 지적하면 우리는 마땅히 각 방면에서 법으로 대조하고 안으로 찾으며 자신을 바르게 수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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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문장에 이어) 앞에서 일부 대법제자가 감옥에서 나온 후 세상을 뜬 원인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도인과 교류해 보았다. “어떤 수련생은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도 감옥에서 아주 심하게 박해 받고 심지어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무 큰일을 하여 크게 감당하는 것일까요? 박해로 사망한 사람은 예외일까요?”
그는 말했다.(대체적인 뜻) “예외가 없습니다. 대법에서 그 누가 예외겠습니까? 감옥에 있는 많은 대법제자들은 장기간 맞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계속 자신을 깊이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밀레르빠의 수련 이야기를 헛되이 본 겁니다. 만약 그처럼 자비로울 수 있다면 정말 악인도 감동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박해한 사람들도 거의 모두 구도될 것이고요. 구제할 수 없는 악인은 그래도 소수입니다. 어떤 수련생들은 악인에게 선을 권할 때 표면뿐이고 속으로는 반감하고 멸시합니다. 그러면 장기간 고비를 넘지 못하게 되고 점차 의혹과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조금이라도 두려운 마음이 있으면 끝장입니다. 이런 것은 신의 눈을 속이지 못합니다. 어떤 대법제자는 정말 지극한 선(善)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박해가 아무리 커도 위험이 없습니다. 그를 해친 사람들도 남몰래 보호해 주고 신들도 감탄합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대법의 홍대(洪大)한 요소를 믿지 않은 것임을 발견했다. 아울러 바로 사부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현재 각지 소장의 일 처리 방법 문제를 좀 말해야겠다. 총회(總會)의 요구를 집행하는 것은 옳다. 하지만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나는 늘 말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큼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1]
나는 이전에 수련생들과 대화할 때 무사무아하고 자비로워야 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속인, 심지어 자신을 박해한 악인에 대해서도 그런 자비심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나의 관념이 이 단락 법에 대한 이해를 제한시켜 대법의 더 큰 범위의 위력을 체험하지 못했고 감옥에서 나를 박해한 일부 악인들도 구하지 못했다. 정말 유감이다. 나는 어떤 수련생의 심득체험이 생각났다. 큰 자비심이 있으면 ‘십악불사(十惡不赦)한 흉악한 경찰’도 정말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흉악한 경찰’은 나중에 정말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를 경감시켰는데 그의 구도된 일부분 생명의 표현일 수 있다. 이는 내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기적이었다. 우리가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한 만큼 신기함이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반대로 그런 ‘악인’에게 연민과 자비가 없이 분노와 원한을 가진다면 우리가 먼저 나쁘게 변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만약 당신들이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고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겨 안으로 찾지 않으면, 정말 수련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이번 박해 중에서 당신은 정념이 솟아나지 않아 도리어 무수한 원한을 증가시켰다.”[2] 사부님께서는 또 알려주셨다. “당신들은 무엇이 나쁜 사람이고 무엇이 좋은 사람인지 아는가? 당신의 마음속에 담아둔 것이 증오이고 악이면,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것이 어떤 생명이겠는가? 행위에서 표현될 것이며 심지어 얼굴에도 표현되어 나오는데, 사람이 당신을 보면 모두 악한 것이다. 나는 일부 대법제자가 수련을 잘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련이 잘 된 일면은 이미 격리되었다. 오직 사람 이쪽에 아직 당신 사람의 것이 존재하면 곧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이 있게 되고 곧 좋지 않은 사상이 있을 것인데, 표면으로 가면 갈수록 표현되는 것이 더욱 차하다.”[2]
우리가 마음속에 그런 ‘악인’에 대한 증오와 멸시를 담으면 닦아버려야 할 악한 염두가 먼저 자신을 오염시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가는데 어떻게 고비를 넘을 수 있겠는가?
또 사부님의 법을 보자. “속인 사회에서의 일체는 모두 당신의 수련형식으로 되었다.”[3] 나는 또 한 가지 알게 됐다. 그런 악인들은 구세력이 대법제자를 성취하기 위해 금생에 악인으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런 악인들의 최초의 소망은 이런 박해 방식을 통해 구도되는 것이었지만 구세력은 그들을 속여 없애버리려 했다. 어떤 수련생은 아주 잘했는데 자비로 그들을 구함으로써 대법에서 구세력의 배치를 타파했다. 또 정말 기쁜 것은 ‘악인’들이 잘못을 고치고 되돌아서서 대법을 실증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무 희망도 없는 생명은 악한 짓이란 악한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4] 때문에 내 생각에 그런 악인들을 ‘구제할 수 없다’고 여긴다면 본성의 명백한 일면은 아마 철저히 절망할 것이며 정말로 대법제자에게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을 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연 있는 사람들을 반대편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대법제자를 폭행하는 것은 구세력이 그들을 이용해 대법제자의 정념과 선념을 나오게 하려는 것인데 이는 정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으며 파괴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들은 수련생들로 하여금 표준에 도달하게 하고, 그것들의 요구에 도달하게끔 하기 위해, 그런 사악한 세력을 이용하여 수련생을 지독하게 때리고 극도로 사악한 방법을 모두 썼지만 여전히 목적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무척 화가 나서 수련생들을 더욱더 사악하게 대했다. 최후에 그것들은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음에도 자신들이 전력을 다했다고 한다. 얼마나 사악한가! 그러나 발생한 이 일체 사악을 방대한 우주 중의 층층 생명인 그들로서도 감지하지 못했다.”[5]
이런 낡은 사악의 배치를 타파해야 하는데 속인들에 대한 원한과 멸시는 반대로 되게 할 뿐이고 그런 심태로 발정념하면 전혀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반드시 마음속에 대법에 대한 100%의 믿음과 홍대한 자비가 있어야 한다.
나는 그 도인과 또 지금 직면한 정체 협력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체적인 뜻) “대법의 홍대함을 믿지 않고 수련의 엄숙함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그렇게 중하게 봅니다. 어떤 협조인들은 자신들조차 서로 협조하지 않으며 서로 비기면서 공을 놓고 다툽니다. 특히 일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성사한 일들은 자신이 총명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대법이 준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더욱이 사부님께서 원용하라고 준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데 사실 자신을 실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부님께서 직접 지도하신 적이 있다고 속으로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염두는 사악한 신이 다 보기 때문에 번거로움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가르침을 받아서 수련 성취했다는 것은 그렇지 않고도 원만할 수 있는 더 많은 사람들에 비해 격차가 크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격차가 클수록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고 대법이 지혜를 열어준다는 것을 더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법공부가 싫어지고 갈수록 굽은 길을 걷고 손실도 더 커집니다. 그런데 대법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서 또 사람의 방법으로 만회하려 합니다.”
“물론 협력을 잘하는 사람도 확실히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사람들은 자만하고 득의양양해 하는데 자아의 마음이 나오기만 하면 번거로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부님의 한 단락 법이 생각났다. “만약 당신들이 협조(協調)를 잘하지 못할 때는 사악이 바로 틈을 타고 번거로움을 조성할 것이다. 법을 실증하는 아주 많은 일이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당신들이 걸을 길은 있다. 비록 그 길이 비교적 좁을지라도 반드시 바르게 걸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거나, 바르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당신들은 길이 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그것을 바르게 걸을 필요가 있다. 만약 바르게 걷지 못하면 바로 지금의 그런 사악들이 틈을 타고 파괴하는 데 이용당하게 된다. 사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은 바로 여러분이 어떤 일을 협력하고 협조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실증하고 있는지, 아니면 법을 실증하고 있는지, 바로 이 문제이다.”[6]
나중에 이 단락을 배우면서 나는 자신이 ‘자아’ 때문에 대법의 더 큰 내포 밖에 가로막혀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아를 내려놓았는지 안으로 찾아야 한다. “더욱 많이 자신을 내려놓았을 적에 법을 실증하는 지혜는 절로 나오기 마련이다.”[7]라고 하신 사부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해낼 수 있는가? 이는 여전히 신사신법(信師信法) 문제다. (계속)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청성’
[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10-맨해튼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도항(導航)-미국서부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도항(導航)-북미 대호수지구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
[7]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6-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문장발표: 2015년 4월 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4/6/30716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