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파룬따파학회 통지’를 최초로 보았을 때는 다만 자신에게 난법한 표현이 있었는지, 글에서 언급한 일부 현상이 자신에게 있었는지만 생각했을 뿐이다. 이후에는 이런 염두 배후에 여전히 ‘일을 벌이기 두려워하는’ 사심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아에서 뛰쳐나와 법에 서서 보았을 때 이 ‘통지’가 상당한 촉동성과 제시성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에게 대법에 책임지고 자신의 수련을 책임지며 앞으로 대법의 영원한 불변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사부님과 대법을 엄숙하게 대해야 한다, 이러자 과거 이 방면에서의 나의 누락과 인식상 차이를 대번에 보게 됐다. 이 ’통지‘는 수련인의 규범에 대해 매우 시기적절하며 아주 훌륭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전에 나는 속인 서예가 친구를 청해서 ‘대도무형’, ‘진선인’ 두 폭의 글을 써 달라고 해서 도배한 후 집안에 걸었다. 하지만 이 두 폭의 글에 사부님의 존함을 써 넣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의 형세는 험악해서 박해를 당할까 두려웠고 또 가족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도배를 한 서화를 벗겨내고는 속으로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제자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엄숙하지 못한 것이고 사부님과 법을 존경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부님 법신께서 떠나주십시오.” 그런 다음 깨끗한 곳을 찾아 태워버렸다. 동시에 주변 어떤 수련생은 이 몇 년 동안 사부님의 말씀을 한마디 혹은 한 단락씩 단장취의 해서 개인 블로그나 웨이보(중국의 SNS)에 붙여 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속인은 단지 뜻이 높고 깊다는 것을 느낄 뿐이지만 오직 대법제자만이 이는 사부님 말씀임을 알고 있다.
나는 또 한 가지 일을 생각했다. 몇 년 전 나는 한 수련생 식당에 간 적이 있다. 복도와 방안 벽에 많은 서화를 걸었는데 예를 들면, ‘대도무형’, ‘자연히 되어 감을 따르자’, ‘잃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한다’ 등등이었는데 서명은 오히려 ‘자연의 아들(自然之子)’이었다. 나는 당시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사부님 말씀을 자연의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 수련생이 말했다. “사부님의 이름을 감히 쓸 수 있습니까? 박해를 불러오려고요?” 당시 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저 타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는 사부님께 얼마나 불경한 것인가. 비록 수련생의 본의는 대법을 발양하려는 것이긴 하지만 이건 속인에게 인식상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 아닌가? 구세력의 박해에도 꼬리를 잡힌다. 듣자하니 이 수련생은 이후에 중형에 언도됐다고 한다.
조그마한 감상을 써내 교류하려 하니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5년 2월 1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2/18/3049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