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1997년부터 대법을 수련한 노제자다. 이 ‘노(老)’에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법을 비교적 일찍 얻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이가 70여 세 정도로 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수련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노’란 글자를 마음속에서 없애지 못했고 무엇을 하든 온정하게, 걸을 땐 천천히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의 그런 패기가 없었고 약간 무거운 물건은 아들에게 들라고 했고 보통 일을 하지 않았다. 노티를 내며 거드름을 피웠다.
거리에서 늙어서 휘청휘청하는 사람 혹은 나보다 훨씬 젊은 사람이 중풍에 걸려 한 걸음 한 걸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우월감이 저절로 생겨 즉시 허리를 펴고 턱을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이웃들은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부러워하는 눈빛을 던졌다. 이것도 법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나 집에 들어오기만 하면 기세가 다 빠지고 ‘노’란 글자가 또 돌아왔다.
아내는 나와 동갑이었다. 같은 75세고 나보다 2년 늦게 법을 얻었다. 20여 일 연공했는데 사당은 박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는 내 결정을 따라야 했다. 내가 대법을 확고하게 연마하자 그녀도 따라서 연마했다. 집안의 큰일은 내가 결정했고(아쉽게도 집에 무슨 큰일이 있던 적이 없음) 사소한 일은 그녀가 했고 가사도 다 했다. 수련체득을 말해도 그녀는 아무것도 이야기해내지 못하고 내가 줄줄이 이야기하는 말만 들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그녀의 깨달음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의 이 입을 매우 부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매우 크고 높았다!
수련생이 우리 집에 오면 내가 접대했고 그녀는 말을 걸지 못했고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거의 몇 시간 동안 말해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내는 사람들이 간 후 언제나 “정말 잘 이야기했네요!”라고 칭찬했다. 아내가 채소를 사고 돌아올 때마다 10~15kg 무게의 물건을 지고 6층까지 올라오고 집에 들어서면 숨이 좀 차곤 했다. 나는 그 물건들을 들면 단번에 올라오고 숨이 차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사소한 일로 나를 번거롭게 한 적이 없다.
어떤 때 나도 궁금했다. 수련하기 전에 그녀는 이기적이고 고집이 세서 늘 웃지 않고 얼굴은 빚쟁이 같았다! 그런 폭발하지 않는 원망심은 숨쉬기 힘들 정도로 사람을 답답하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원망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아들과 며느리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좋은 것이 있으면 먹지 않고 언제나 나와 아들, 며느리에게 남겨줬다.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습관을 고쳤고 언제나 선타후아(先他後我)했다. 하루에 세 가지 일을 다 했으면 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 몇 년간 난 늙어졌지만, 아내는 매우 젊어졌다. 젊었을 때 멋지고 자신이 있던 나는 업신여김을 당했다. 낙담하는 동시에 나는 눈빛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나와 아내는 다 6년 공부했다. 내 지식은 그녀보다 훨씬 많았다. 모르는 글자는 그녀가 내게 물어봐야 했다. 법리가 똑똑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깨달았는지 들었다. 나는 그녀 앞에서 하나의 산 같고 그녀의 큰 의지할 곳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는 갑자기 나를 추월했다!
어떤 때 나도 생각했다. 그녀는 고대의 규방에서 현대에 온 사람같이 사회의 서로 헐뜯고 음모와 위계에 대해 전혀 몰랐고 사람을 대할 때는 가식이 없고 사람을 희롱하는 수단은 하나도 몰랐으며 단조롭게 웃으면서 인사할 줄밖에 몰랐다.
이 점에 대해 나는 그녀를 좀 질투했다. 그녀는 얼마나 수련하기 쉬운가. 내가 노력해 연마해 없애야 할 것은 그녀에게 하나도 없다. 그러기에 그녀가 나를 추월했구나. 또 생각해보면 다 그런 것도 아니다. 이전에 그녀가 나를 화내게 하는 나쁜 습관은 모르는 사이에 없어졌고 싸워서 나를 이기지 못하지만, 이전에 그런 조르는 재간은 정말로 나를 애먹였다. 답답하고 소리 없이 구는 것은 높은 데시벨 확성기보다 더욱 귀를 진동했다. 이런 것들은 그녀 온몸의 병과 함께 다 없어졌다. 그러기에 그녀가 젊어졌고 난 늙어졌다. 이 수련은 정말로 엄숙한 것이다!
정말로 잘 생각해 봐야겠다. 스스로 깨달음이 그녀보다 좋다고 생각했으나 깨달은 이치는 마음속에서 일었다가 즉시 입으로 가고 마음에 닿지 못했으며 깨달은 이치를 수련에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듣고 계발을 받았다. 며칠 지나면 스스로 무엇을 말했는지도 다 잊었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난 꽤 정진하는 것 같았다. 나의 ‘교활함’이 자신의 신체 밖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빛나는 고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첨하는 말을 듣기 좋아했고 나를 존중하고 웃어주는 얼굴을 좋아했다. 이런 무료의 선물은 늘 나를 흥분시켰다! 이런 ‘교묘한 수단이나 힘으로 빼앗는 교활함’은 묵묵히 수련하는 아내에게 뺨을 맞은 것처럼 됐고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게 했다.
이번에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진정으로 안을 향해 잘 찾겠다고 생각했다. 법공부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이전에 단체 법공부할 때 다른 사람이 법을 읽을 때 글자를 틀리게 읽는가에 집중했다. 글을 틀리게 읽는가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법공부를 마음에 닿게 하지 못했고 언제나 자신이 읽는 문장의 길고 짧고에만 신경 썼다. 많이 읽으면 손해를 보는 것처럼. 법을 읽을 때 자신의 사유- 몇 개의 ‘내(부원신 혹은 사상업 일 것이다)’가 옆에서 소란스럽게 지껄이고 무엇에 전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의 주의식은 때때로 그들에게 끌려가 다른 사람이 틀리게 읽었다고 주의를 주는데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어떤 때 가끔 법에서 무엇을 좀 깨달으면 흥분되어 속이 간지러웠고 법을 다 읽고 수련생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언어에 대한 수식과 과장은 매우 훌륭했지만 좋은 효과를 얻지 못했다. 바르지 않는 마음은 수련생을 편안하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자신을 잘 수련하려면 자신을 위장한 물건을 다 벗기고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지금은 알게 됐다. 연마하는 것은 자신이기 때문이다!
법공부하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렇다! 먼저 마음을 닦아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여러 번 우리에게 법공부를 많이 하라고 일깨워주셨다.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보고 빨리 제고하라는 것이 아닌가?! 법에 부합되지 않는 수련인의 행위는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법공부하는 동시에 주동적으로 법에 용해해야 한다. 자신의 주의식이 책임이고 일사일념을 확인하게 해야 한다. 일념이 나오면 법으로 가늠해보고 법에 부합되지 않는 생각이라면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찾아내고 뿌리째로 뽑아버렸다.
이렇게 견지하자 점차 자신을 순정하게 했다. 법공부를 많이 하고 진정으로 마음에 닿게 법공부 했기 때문에 마음이 변하고 신체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을 느꼈다. 검버섯이 연해졌고 얼굴 혈색이 좋고 윤기가 흘렀으며 정진 상태도 변화가 생겼다. 사람이 좋아하는 것,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고 도취되어 있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게 됐고 명리를 다투는 쟁투심도 점차 적어졌다. 물론 이것은 입으로 말만 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한고비 한고비를 넘기고 고험을 거친 후에야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갑자기 누가 뼈에 사무치게 신랄한 언어로 나를 난처하게 할 때, 그를 말문이 막히고 화나게 하고 원한을 해결할 수 있는 말은 많았지만, 입가까지 왔다가도 삼키면 강렬한 그 자존심(제거하기 어려움 마음)을 사부님께서 제거해 주셨다! 몸에서 검은 물건이 없어진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부님께서 제거해 주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경문에서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 [1]라고 말씀하셨다. 표면상에서 봐서 난 참음을 해냈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건드린 그 부분에 대해 화내지 않고 원망함을 생기지 않게는 못했다! 아마 사부님께서 내가 제거해야 할 그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배치하셨을 것이다.
좋은 시작이 있게 되자 다시 비슷한 일에 부딪혀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수련은 천편일률이 아니고 다음 고험은 예측하기 힘든 것이다. 이어서 아들이 싸움질해 2만 위안(350만 원)을 배상하는 것으로 나의 이익심을 제거했고 몇 번 병업의 큰 고비는 사부님께 신사신법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고험했다. 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험, 큰 재난을 대면하고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고험…… 어떤 고비는 잘 넘겼지만 어떤 것은 질질 끌었다.
본인 층차에서 체득이므로 만약 편파적이면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문장발표: 2015년 2월 1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2/12/3043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