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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한 곳을 구도한다

글/산둥 노년대법제자(구술 수련생 대필)

나는 농촌의 노년대법제자로 금년에 69세다. 사부님께서는 우리 매 대법제자를 위해 무량한심혈을 기울이시면서 무수한 죄업을 감당하셨지만, 제자에게는 단돈 한 푼도 바라지 않으셨다. 이는 하늘보다 더 높고 땅보다 더 두터운 은덕인데 나는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는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인바, 사부님의 말씀을 잘 듣고 정법 대도에서 끝까지 수련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전법륜(轉法輪)’을 통독

나는 1998년 음력 11월 19일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법을 얻기 전에는 글자도 모르는 평범한 농촌 여성이었다. 50여 세에 이미 온몸은 병이 들어 밭에 나가 일조차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특히 십여 년 동안은 두통이 심해서 하루 종일 고개를 들 수 없었는데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바람도 맞을 수 없었다. 그해 큰 며느리가 4~5kg 되는 손자를 낳았지만 안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 2, 3일 간격으로의사를 찾아야만 했다.

한번은 마을의 의사가 우리 집으로 왕진을 왔는데, 내가 십여 년간을 앓으면서 온갖 좋다는 약을 처방받고 침을 맞았어도 병이 낫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의사가 내게 말했다. “아주머니, 빨리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세요. 나의 시어머니는 파룬궁을 연마하는데 지금 몸이 아주 좋아졌어요. 약도 아주 적게 드셔요.” 그 당시 나는 의사가 “파룬궁을 연마해보라”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는데 어찌 파룬궁을 연마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동안 마을사람들이 이 공 저 공 등을 연마하는 걸 보았지만 모두 배우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좋은 선생님을 찾고, 좋은 공법을 찾아보겠다. 만약 좋은 공법을 찾기만 하면 끝까지 수련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그런데 우리 마을의 한 파룬궁수련자가 내가 늘 몸이 안 좋아 무기력한 몸으로 걸을 때는 벽을 짚으며, 농사일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게 말했다. “나는 파룬궁 연공을 하고 나서 신체가 좋아졌어요. 식사도 아주 잘해요. 당신도 연마하세요.” 내가 ”돈을 받아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돈을 받지 않아요”라고 했다. 나는 이 수련생을 따라 마을의 한 연공장으로 갔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서는 30여 명이 파룬궁을 연마하고 있었으며 매일 아침 5장의 공법을 연마하고 있었다.나도 그들을 따라 연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연공을 하는 중에 몇 번을 쉬어야 했다. 그 중에도 제 2장공법은 잠시 하다가 한참을 쉬어야 했다.

저녁에는 마을의 보도원 집에 가서 ‘전법륜(轉法輪)’을 배웠다. ‘전법륜(轉法輪)을 구한 후비단보로 싸서 상자에 넣어 집에서 가장 높은 곳에 공경스럽게 모셨다. 나는 비록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단체 법 학습장에 갈 때는 언제나 ’전법륜(轉法輪)‘을 안고 갔다. 다른 사람들이 ‘전법륜(轉法輪)’을 읽을 때 나는 벽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진지하게 읽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머리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바로 이렇게 2개월이 지나자, 차츰 법 공부할 때 벽에 기대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게 되었다. 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프던 두통도 없어졌다. 매일 그랬는데 그 시기에는 사부님께서 나의 신체를 정화해 주셨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이 대법 책을 아주 소중히 여겼는데 매일 법 학습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역시 비단으로 책을 싸서 상자에 모셨다. 가족들은 내가 글도 읽을 줄 모르면서 법 학습 때마다 ‘전법륜(轉法輪)’을 안고 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책을 빨리 남에게 주어요.” 그래도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나는 배울 거야. 배울 뿐만 아니라 또 외울 거야!’ 라고 했다.

나는 ‘전법륜(轉法輪)’을 따라 읽으면서 모르는 글자는 적어 수련생과 가족에게 물었다. 그러나 가끔 기억했던 글자를 잊어버려 다시 묻곤 했는데 한 글자를 여러 번씩 물어보아야 했다. 그렇게 4, 5년이 지나자 ‘전법륜(轉法輪)’을 천천히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전법륜(轉法輪)’ 중에서 다만 몇 개의 글자만 모를 뿐이다. 연공장에서 ‘전법륜(轉法輪)’을 배울 때 가끔 모든 사람들이 손에 침을 발라서 책장을 넘기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한 번도손에 침을 발라서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전법륜(轉法輪)’을 읽기 전에 언제나 손을 깨끗이 씻은 후 책을 비단보에 받쳐 가슴 앞까지 들어 올리고 읽으면서 되도록 대법 책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비록 1999년 ‘7.20’에 단체 법 학습과 단체 연공의 환경을 잃었지만, 나는 그 후에도 그치지 않고 매일 새벽 3시 50분에 일어나 연공하고, 사부님의 설법을 보았는데 매일 이렇게 견지했다.

2. 경찰 박해를 마주하고 대법을 실증

2000년 6월 향파출소 경찰관이 처음 나의 집에 와서 “대법 책을 내놓으라” 고 했다. 그리고 “연공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라고 했다. 나는 “서명하지 않겠어요. 나는 글자를 몰라요” 라고 말했다. 남편이 그들에게 “이 사람은 파룬궁을 연마한 후 신체가 건강해졌으며, 모든 농사일도 할 수 있어요. 이 법은 정말로 좋아요!” 하고 말해줬다. 그들은 남편이 그렇게 한말을 듣지도 않고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채 돌아갔다.

2002년 초, 향파출소 경찰관이 다시 나의 집을 찾아와 처음 왔을 때 말한 내용대로 서명하라고 핍박했다. 나는 “연공해서 온 몸의 병이 전부 나았는데 왜, 연마하지 못하게 해요?”하고 반문했다. 파출소장이 말했다. “당신이 서명하지 않으면 당신을 세뇌반에 보냅니다.”결국 나는 같은 지역의 몇몇 수련생들과 함께 불법적으로 향파출소에 감금되어 “‘전향서’에 서명하라”는 핍박을 받았지만 우리 모두 서명하지 않았다. 그날 밤 우리를 한 사무실에 감금했는데, 사무실은 온통 더러웠다. 사무실 책상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있었고,바닥에는 검은 오물이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경찰관들이 늘 바닥에 가래침을 뱉아 덕지덕지 붙은 가래침이 아주 누렇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침 겨울이라 밖에서는 물이 모두 꽁꽁 얼었으며 물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금방 어는 매섭게 추운 날씨였다. 방안의 세수 대야의 물까지 손가락 두께 깊이로 얼어 있었다. 우리는 먼저 더러운 사무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느라 하룻밤을 자지도 못했다. 사무실 책상을 깨끗이 닦아놓고, 언 세수 대야의 물에 걸레를 빨아 바닥에 눌러 붙은 가래침을 깨끗이 닦아냈다. 아침에 출근한 한 경찰관이 “이 사무실이 어찌 이렇게 깨끗한가요?” 하고 말했다. 다른 경찰관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우리를 보는 안색이 그렇게 흉악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전에 시내에서 8명의 사오자들을 데려다가 우리를 ‘전향’시키려고 했다. 우리에게 먼저 전향자료를 보게 한 후 “모함하고 사부님을 욕하게” 했다. 그 중 한 사오자가 대법을모함하는 자료를 주면서 읽으라고 했으나 나는 그걸 찢어버렸다. 그러자 몇 명이 달려들어주먹질과 발길질로 구타를 하며 전향서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내가 계속 서명을 거부하자, 2명의 젊은 경찰관이 나를 침대에서 끌어내려 차가운 시멘트바닥에 앉혀 다리를 뻗게 한 후 두 손에 수갑을 채워 침대 사이에 걸어 놓고, 나무 몽둥이로 발과 다리를 때리면서 “서명하겠는가!” 물으면서 듣지 않자 계속 때렸는데 금방 두 발과 다리는 검붉은 색으로 변했다. 파출소장은 다리가 이 지경이 되도록 구타를 당하면서도 서명하지 않는 나를 보고, 의자를 잡아당겨 내 옆에 놓고 걸터앉아 “당신이 전향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노동으로 개조시킬 것이며, 또 벌금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서명을 하면 집으로 돌려보내겠다”며 위협과 회유를 했다. 그 당시 나는 두려운 마음이 올라와서 마음을 어기고 할 수 없이 종이에 마구 그렸다. 그러나 마음속은 아주 괴로웠다. 집에 돌아온 후 수련생들과 교류한 후 ‘전향서’에 서명을 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마땅히 서명을 철회한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수련생의 도움으로 파출소장에게 서신 한통을 보냈다. 그 봉투 안에는 “전향서에 한 서명을 폐지한다”는 성명을 했고, “대법은 정확하다! 내가 대법을 연마하는 것도 정정당당한 것이다”라고 적어 넣었다. 며칠 뒤 향파출소 소장과 2명의 경찰관이 나의 집에 찾아와서 “누가 쓴 편지냐?”며 확인조사를 했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수련생을 배신하게 하려는 것임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스스로 적은 것입니다.” 그들은 나에게 “글을 모르면서 어떻게 편지를 썼냐고” 하면서 한번 “써보라고” 했다. 그들은 정말 내가 쓴 것임을 보고는 흐지부지하더니 그냥 돌아갔다.

3. 사부님께서 나에게 이 한 곳을 구도하라고 배치하셨으니, 나는 이 한 곳을 구도한다

1999년 ‘7.20’ 박해가 시작되면서 중공사당(邪黨)의 파룬궁에 대한 요언 날조와 대법제자에 대한 잔혹한 박해로 인해, 우리 마을은 30여 명에 달했던 파룬궁수련생이 나 혼자만 남아서수련하게 되었다. 사당의 박해가 지속되면서 내가 파룬궁수련을 견지한다는 소문이 났다.그러자 그것들은 마을 사람 2명을 물색해서 매일 40위안의 돈을 지급하며 나를 감시하도록했다. 내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대법수련을 견지하고 있는 수련생들이 감히 나와 접촉하지 못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부님의 신경문과 진상자료를 전혀 얻을 수가 없게 되어 나는 무척 조급했다.

그러던 중 나의 한 친척으로부터 “그녀 친정집 쪽의 한 수련생이 온 가족과 함께 대법을 수련한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는 ‘세인들에게 하루빨리 대법진상을 알게 해야 한다’는 것과 또 ‘반드시 정말로 수련하는 수련생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음날 새벽 15리 밖에 있는 그 수련생 집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 수련생 가족은 나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그 해 4월, 5월, 6월 연속적으로 세 번을 찾아갔지만 수련생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들 가족이 나와 수련생을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한 부의 진상자료도 주지 않았다.

나는 추수가 끝난 다음 ‘이번에는 반드시 수련생을 만나겠다’고 생각하고, 사부님께 도움을청했다. 수련생 집에 찾아갔지만 수련생 어머니는 여전히 수련생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고그냥 자기 일만 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작심했다. ‘오늘 사람을 구도하는 진상자료를 반드시 얻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 그 수련생 어머니 일을 도와주며 점심때까지 일을 했다. 수련생어머니는, 내가 수련생을 만나겠다는 마음이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수련생이 있는 곳을 알려줘서 마침내 수련생을 만나게 되었다. 수련생은 나에게 아주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후부터 진상자료를 그의 집에 와서 가져가도 된다”고 허락했다. 이어서 수련생은 또 나에게 사부님의 신경문과 각종 진상자료를 가방에 가득 담아 줬다. 저녁 시간을 이용하여 진상자료를 인근 3개 마을에 배포했다.

한 번은 추운 겨울 저녁 7, 8시에 수련생이 보내준 15킬로가 넘는 진상자료를 가방에 넣어메고 또 다른 마을에 가서 배포하려고 했다. 지름길로 빨리 가려고 2미터가 넘는 큰 도랑을 건너게 되었다. 도랑물은 위만 살짝 얼어서 밑은 그대로 냇물이 흘렀다. 나의 솜바지는 반정도 젖었고 솜 신발에는 물이 가득 찼다. 당시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급하여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솜 신발 안의 물을 대충 빼낸 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등 진상용어 접착테이프를 길가 전신주나 마을의 벽에 부착했으며, 또 ‘하늘이 홍복을 주다’, ‘진언’ 등 진상 소책자를 집집마다 배포했다. 그날 밤 나는 단숨에 그 주위 십여 리 밖의 5개 마을에 배포했는데 새벽 5시가 넘어서 끝났다. 온 몸은 땀으로 김이 났다. 집에 돌아와 보니 솜 신발이 전부 말라 있었다. 나는 스스로 아주 놀랐다. 60여 세나 되는 이 할머니가 15킬로가 넘는 진상자료가 든 가방을 메고 온 밤을 새며 몇십 리나 되는 마을을 도보로 돌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정상인의 능력을 초월한 것으로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사람을 구도하려는 제자의 마음이 절박한 것을 보시고 수련인 몸에 대법의 신기함과 초상적인 힘을 체현해주신 것이었다’는 것을,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대법의 위력이었던 것이다.

2005년 정법노정이 끊임없이 추진되면서 사부님께서 제자에게 세 가지 일을 잘 하라고 요구하셨다. 사부님의 말씀대로 얼굴을 마주대하며 진상을 알리고 3퇴를 권하기 시작했다. 나는 늘 시장에 가서 얼굴을 마주하며 ‘9평’과 션윈 동영상 그리고 기타 진상자료 등을 배포했다. 몇 해 동안에 시장의 크고 작은 상가 모두에게 3퇴를 시켰다. 그중 이발사는 나를 도와 2명에게 탈퇴시켜주기도 했다. 인근 마을의 내가 3퇴를 시켜준 사람들은 나를만나기만 하면 아주 반갑게 인사를 한다. 이는 세인들이 진상을 명백히 알고 대법의 아름다움이 세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 몇 해 동안 나의 진상 알림을 통해 3퇴한 사람 수는 이미 몇 천 명이 된다.

4. 대법이 나의 목숨을 구했으니, 내 돈은 사람을 구하는 데 쓴다

자료점에서 수련생들이 각종 진상자료제작을 위해 각자 자신의 돈을 내놓는 것을 보았다.나는 남편과 둘만 살기 때문에 일정한 수입이 없다. 다만 남편이 수시로 시간제 일을 하여번 돈으로 집안 살림을 하는 형편이다. 나는 비록 이렇게 생활하더라도 언제나 다른 수련생에게 손을 내밀어 진상자료를 그냥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법을 얻어 신체가 좋아졌으니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서 돈을 쓸 일도 없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작은 아들을 도와 손자도 봐줄 수 있고, 큰 아들을 도와 농사일도 할 수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 내가 만약 대법을 얻지 못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의 이 목숨은 대법이 준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방법을 모색하여 자료점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집 주변에 각종 야채를 심어 좋은 것은 시장에 내다 팔고 남은 것을 먹었으며, 봄이면 산과 들에서 나물을 캐서 시장에 나가 팔아 돈을 모았다. 밀의 추구가 끝나면 이삭을 주었고, 가을추수가 끝나면 콩밭에 나가 낱알을 주어 시장에 팔았다. 이렇게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1백 위안까지 모은 다음 그 돈을 진상자료 만드는 수련생에게 보냈다. 지금까지 그렇게 보낸 돈이 7~8천 위안이 된다.

5. 신사신법 하여 6일 만에 정념으로 병업관을 넘다

2014년 4월 어느 날, 나는 아들을 도와 밭에서 일을 하고 삼륜차로 옥수수 대를 옮겼다.마당에서 삼륜차의 옥수수 대를 부릴 대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서 30분 넘게 정신을 잃었다.정신이 돌아온 후 일어나려고 했으나 오른쪽 반신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바닥에 앉아서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그 후 한 시간 반 넘게 정념을 내보냈지만 효과가 없었으므로 다시 한 시간 동안 발정념을 했다. 오후 1시가 넘어서야 겨우 한 걸음 한 걸음씩 옮겨방으로 들어가서 앉은 다음 사부님의 설법을 읽었다. 그렇지만 연속 3일 동안은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는데 온 몸이 괴롭고 얼굴색이 창백했으며, 사지가 무력하여 연공을 할 수도 없었다. 이 며칠 동안 남편은 아주 바빴다. 낮에는 밖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 또 집에 돌아와서 밥을 지어야 했고, 나의 시중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쓰러지기 며칠 전 누가 나의 귀에 대고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정점에 도달했다.” 내가 쓰러진 후 5일째 되는 날 또 누군가가 나의 귀가 대고 “아무 일 없다.” 5일째 되는 날 나는 일념을 내보냈다. ‘나는 이 방에 머물 수 없다. 나는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해야 한다.’ 나는 자신이 수련자라는 걸 잊지 않고 서서 연공할 수 없으면 바닥에 앉아 연마했다. 몸은 천천히 호전되었다.

나는 법 학습에서부터 발정념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증가시켰다. 6일째 되는 날 많이 나아진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에서 동공을 했다. 갓 시작할 때 오른 쪽 다리가 나의 다리 같지 않았다. 마치 나의 발이 바닥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은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비록 이런 상황이었지만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말씀 “참기 어려워도 참을 수 있고, 행하기 어려워도 행할 수 있다.”[1]를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5장 공법을 전부 연마했다. 결국 땅을 밟을 수 있었으며 얼마 안가서 ‘남편의 시중은 이제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의자를옮겨 밧줄로 변기통에 고정시킨 후 밧줄로 변기통을 앞으로 끌어당겼고, 의자를 한걸음씩 옮겨 천천히 마당 중앙까지 걸어 나갈 수 있었다. 다리가 더 좋아진 느낌이 들어 의자에 의지하지 않고도 혼자 화장실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저녁에 남편이 밖에서 돌아와 내가 저녁밥 짓는 것을 보더니 급히 방으로 들어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온 몸을 훑어보며 반신반의하는 기색으로 말했다.“나았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았어요! 대법사부님께서 치료해 주셨어요.” 그는 가볍게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 그럼 됐네. 좋아. 방에 들어가서 쉬어요. 내가 밥을 할게요.”

7일째 되는 날 아침 나는 삼륜차를 타고 수련생 그 쪽에 가서 진상자료를 가져오려고 했다. 그러나 가는 길에 삼륜차가 이상이 생겨 더 이상 삼륜차를 탈 수가 없게 되었다. 천천히 삼륜차를 끌고 7~8리 길을 걸어서 수련생 집에 도착했다. 수련생은 내가 온 얼굴에 땀범벅이 된 것을 “보고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병업관을 겪은 과정을 말해주었다. 수련생은 “며칠 동안은 진상자료를 배포하러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부님께서 나에게 이 한곳 중생을 구도하라고 배치하셨습니다. 나는 이 한 곳 중생을 구도할 것입니다.” 그날 자료를 많이 배포하지는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 두 명에게 3퇴를 시켜줬다. 비록 그날은 평소의 두 배 되는 시간동안 했는데도 그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다.

이번 병업관은 신사신법으로 6일 만에 넘었다. 가족들은 내 몸에서 대법의 신기함과 초상적인 힘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닦지 못한 많고 많은 집착심들을 인식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체면치례, 과시심 등이 병업관으로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었다. 발정념을 30분에서 2시간으로 늘렸다. 사부님의 자비와 보호로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완전히 병업관을 넘을 수 있었다. 나는 한 가지 이치를 깨달았다. 자신이 고비나 난에 부딪쳤을 때 수련생들의 발정념에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 신사신법 하며 장기간 발정념을 해야 하며, 시간을 다그쳐법 학습을 해야 하며, 특히 자신의 심성 제고를 느슨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여기서 사부님께 절을 올리며 사부님 은혜에 감사드리려고 한다. “사부님, 자비하신 구도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난 속에서 나를 도와주었던 수련생들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주: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전법륜(轉法輪’)

문장발표 : 2015년 1월 20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5/1/20/3033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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