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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경건함을 논함

글/ 영정자비(寧靜慈悲)

[밍후이왕] 이전 수련 중에서 같은 법문 사이에 발생한 이야기를 보면 후기 수련의 각종 모순 중에서 늘 깊은 감수를 느낄 수 있다. 한 제자로서 역사상 여러 번 수련해 제자로 된 깨달음이 있고 사부님에 대한 오래고 먼 경건한 마음이 있다. 그럼 제자가 된 나의 일부 심득체험을 말해보겠다.

각 업종의 제자들이 그들의 풍채를 펼쳐 그 업종 혹은 종파의 깊은 능력을 발양한 것을 보면 나는 속으로 상대방이 잘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제자들이 정말 잘하고 있는 것을 보고 사부님의 제자로서 자신이 사부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깨달은 정도와 파악한 정도에서 사부님이 전한 법문에서의 가르침과 위덕을 발양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좋은 제자로 되어 고생을 참으며 정진하는 가에서 나도 이 한 문에서 어떻게 좋은 제자로 될 것인지 배우고 거울로 삼게 되며, 학도, 제자로 된 배역의 즐거움을 느끼고 사부님이 배치하신 일을 잘 하게 된다. 이것은 제자가 내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경건함이다.

수련하기 때문에 같은 법문 중의 선후배가 있다. 사제 사이나 같은 법문 사이에는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있으며 같지 않은 심성이 체현된다. 역사상 명리를 제거하게 된 것은 흔히 출가한 수불 수도한 사람으로서의 인연이 있다. 모두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아 사회가 어둡고 불공정한 것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에 명리를 담담하게 생각하고 해탈할 수 있는 법문을 찾게 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여러 해 수련한 후 이기적인 마음이 싹트고 어떤 사람은 수련에서 성과가 있으면 산에서 내려가 능력을 발휘기에 바쁘다. 자신이 수련한 성과를 마침내 ‘써먹을 수 있는’ 기회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수련에서 사치스럽고 안일함에 젖어 자신과의 능력을 비교하기 때문에 일단 자신보다 강한 사람을 만나면 흔히 내심이 평온하지 않다. 평소 많은 사람이 모두 자신을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었는데 갑자기 모두 다른 사람을 둘러싸면 내심 격차가 일어 평형을 잡지 못해 질투심이 생긴다. 이런 것은 모두 흔히 나타나는 사람마음인데 이런 사람이 꽤 많다.

봉신방(封神榜)의 강자아와 신공표의 예를 들면 원시천존은 강자아를 파견해 봉신하게 했다. 그런데 강자아는 자신의 근기가 천박하다고 가기 싫어하면서 평생 사부만 따르려 했다. 즉 사부가 그에게 봉신하러 가라고 해도 그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사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산에서 내려갔다. 그러나 신공표는 강자아보다 수련한 시간이 길고 자격도 더 있으며 신통력도 컸고 스스로도 머리가 떨어져도 절로 돌아와 붙을 수 있었다. 자신이 재능이 이렇게 큰데 무능한 늙은이인 강자아에게 봉신하라고 하자 재능과 포부를 반드시 크게 펼쳐보려던 마음이 단번에 물거품이 됐다. 특히 이런 일을 자신이 줄곧 얕잡아보던 강자아에게 하라고 하자 속으로 불평했다.

‘다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 마음도 쉽게 질투심으로 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능력이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만났을 때 상대방의 좋은 일면을 많이 보고 내가 배워야할 장점을 찾거나 상대방이 필요한 것에 자비로운 도움을 주어야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배척하면 안 된다. 내가 상대방을 도와 줄 수 없다면 나에게 자비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설명하며 내 지혜가 제한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 무력하다면 나의 자비, 지혜, 능력이 아직 제고해야 함을 설명한다.

생활 속에 많은 생생한 사례가 있다. 예를 들면 수련에서 좀 성과가 있다고 자신이 괜찮다고 여기면 따로 종파를 만들고 자아를 실증하게 된다. 진수하는 사람은 따로 종파를 만들어 기공사가 되려는 소원이 없으며 수련하고자 하는 소원밖에 없다. 하지만 제자가 심성에 주의하지 않으면 역시 자아를 실증하기 쉬우며 수련을 했어도 결국 법을 이용해 자아를 성취하고 법에서 얻은 좋은 점으로 자신의 인간세상 속의 행복한 생활을 만족시키려 하며 자아 소망이 각별히 강렬해 지게 된다. 때문에 수련 경지는 무아(無我)의 순정한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

무아는 정말 자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각도’에서만 입각해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과학자들이 유전자 조작식품을 만든 것은 그들 자신의 인식으로 볼 때는 농작물의 해충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주 물질구조 순환을 파괴하는 작용을 했다는 것을 모른다.

수련 중에서 연설로 난법하는 이런 심리는 그 자신이 좋은 동기로 일을 하고 다른 수련생을 도와 제고시키려 생각한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심성 경지가 완전히 무사무아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법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면 쉽게 자신을 실증하게 된다. 무사무아의 경지에서 분석하면 생명에게는 좋은 염두 혹은 좋은 소원이 나타는데 그것이 집착일 수 있다. 염을 움직이는 것이 모두 ‘내가 무엇을 좀 하겠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일하려는 목적은 ‘나’를 위해 한 것이다. 흔히 그런 좋은 일은 자아를 실증하려는 사업욕이 그 중에 있다.

어떤 수련생은 내가 수련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무슨 문제가 있으면 나에게 묻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 수련생을 도울 때 그의 어느 방면 심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귀띔하고 집착을 찾아주면서 가급적 수련생에게 사부님의 원문을 보라고 인도하고 자신의 법리 인식을 깨닫게 할 뿐 많은 교류를 해서 그에게 영향주지 않는다. 수련생의 제고는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것이지 나의 배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리심이 없다면 같은 법문 중의 사람들에게 배척과 억울함을 당해도 마음에 두지 않고, 한번 해석했는데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내버려 두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자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도록 강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독립적인 것이며 누가 반드시 나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없으며 본인이 다른 사람을 자비롭게 대하고 이해하면 된다.

고층차에서 일념이면 무엇이든 만든다. 의자를 만들면 의자이고 책상을 만들면 책상이다. 만들어 낸 의자가 스스로 의자가 되고 싶지 않으려는 생각을 가지는 자체가 모두 가소로운 일이다. 그것이 너무 흥분해 모든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사부님 앞에서 정말 경건한 제자로 되어야 한다. 특히 금생에 정법시기 사부님의 제자로 된 것은 자신의 크나큰 영광이며 시시각각 자신과 법과의 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

개인 인식임으로 정확하지 않은 점은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4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1/18/30039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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