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전편에 이어)
11. 법공부가 단지 책을 읽고 법을 듣고 법을 외우는 형식에 그칠 뿐, 자신을 대조하지 않고 안으로 찾아보지 않으며 법에 동화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법공부하는 시간이 아주 길다, 하지만 법공부 할 때 그냥 책을 읽기만하고 듣거나 외우기만 한다. 어떤 사람은 ‘전법륜’ 전체를 외울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여러 권의 ‘각지 설법’을 외울 수 있어 수련생들의 부러움을 자아낸다. 모두들 그가 법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수련생 여럿을 만나 보았는데 몇 사람은 장기적으로 병업 중에 있었고 그들 자신도 문제가 어디에 걸려있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그들이 총체적으로 공부는 해도 깨닫지 못하는데 있음을 보았다. 엄격하게 말해서 바로 법공부가 형식에 흐르고 마음이 법에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나는 책을 읽을 땐 늘 일심불란(一心不亂)한데 어찌 마음이 법에 있지 않다고 하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석가모니는 정념(正念)을 말했는데,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경을 읽어 진정하게 그가 수련하는 그 한 법문의 세계를 진동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각자(覺者)를 불러 올 수 있다.” 이렇게 책을 읽을 수 있으면 법을 외우는 것이 아주 좋고 또한 마땅히 할 수 있다. 일심불란하게 책을 읽으면 신체 내외, 수련하는 세계의 일체가 모두 아주 현묘한 변화를 발생하며, 마음과 염두가 순정할수록 변화가 더 크다. 하지만 일반 사람은 모두 보지 못하며 법공부의 재미도 느끼지 못한다. 이렇게 그냥 법공부를 견지해 나가는 것 역시 아주 대단하며 깨달음에 따라 원만한다. 그러나 만약 편파적으로 ‘전법륜’ 중에 말씀하신 “염불함에 일심불란(一心不亂)으로 염(念)해야 하는데,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대뇌의 기타 부분이 모두 염(念)해 마비됨으로써 아무것도 모르며, 일념(一念)이 만념(萬念)을 대체”하는 것만 중시하고 극단으로 이해한다면 법공부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자신을 대조하는 마음이 없고, 보거나 외우지만 오히려 법의 내포를 깨닫지 못하며, 마음은 시간을 다그쳐 책을 읽는데 있고, 책을 외우는 것이 형식에 흘러 아주 빨리 책을 읽고 묵념은 더욱 빠른데 마치 스캐너처럼 단숨에 외우기를 해치운다. ‘다 외우고 나서 얼른 다른 일을 해야지.’ 이렇게 법공부 하면 신체 내외에도 변화가 발생하고 세계도 부단히 발전하겠지만 다만 본래 경지에서만 완벽해질 뿐 층차의 제고는 없다. 장기적으로 이렇게 나간다면 역시 한 층차에서 지체하게 된다. 만약 극단적으로, 습관적으로 이렇게 나가면서 자신을 대조하지 않고 안으로 찾지 않는다면 법공부는 스님이 경을 읽는 것처럼 석가모니 그 법문의 방향으로 빗나간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당신은 대법에서 말씀하신 석가모니 그 법문의 형식으로 걸어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련생에게 건의하는 바, 책을 읽고 외우는 것을 천천히 하라. 한 단락을 다 읽고 나서 자신의 평소 언행, 일하는 심태, 모순에 부딪혔을 때의 심태, 특히 첫 일념이 대법에 부합되는가, 어떤 것이 더욱 좋은 방법인가, 더욱 높은 표준이 있는지 대조를 좀 해보라. 이렇게 안으로 찾을 수 있다면, 모 한 단락 법리에 대해 더욱 새롭고 더욱 깊은 깨달음이 있을 것인데 그게 바로 경지의 승화이고 이와 동반하는 것은 심신의 변화로서 깨닫지 못하면서 법공부를 하느라 읽고 외우는 것과는 절대 비교할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홍음-착실한 수련(實修)’에서 말씀하셨다.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고 해 내어야 수련이로다”. 어떤 사람은 단지 다른 수련생과 비교하고는 자신이 그래도 괜찮다면서 왜 이렇게 법공부해도 병업이 장기적으로 없어지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실은 다른 한 층의 내포를 홀시한 것이다. 법공부할 때 법에 대조하면서 공부해야 하며, 대법에 대비하면서 자신을 수정해야 하고, 법공부 중에 수시로 안으로 자신을 찾아보고 대조하면서 자신을 개조하고, 언행을 개선하며, 심태를 승화하면서 반드시 더욱 높은 층의 표준에 부합되게 해야만 비로소 끊임없이 고층차에서 증오한 법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진실하게 법공부 중에서 자신을 대조해 보는 심태를 품고 배우는 한편 조용히 법의 내포를 깨달을 수 있다면 정법의 일을 하는 것도 갈수록 잘할 것이다. 이렇게 양성순환을 할 수 있고 습관적으로 이렇게 법공부를 한다면 한 가지 상태가 있을 것인데 바로 일부러 깨닫기 위해 내포를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이 법공부가 어느 단락에 이르면 자동적으로 멈추어지면서 이 단락 법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이 있게 되는데 아무리 민감하지 못한 사람이라 해도 몸이 뜨거워지거나 진동하거나 홀연 분발하게 되고 마음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법에서 정진 승화한 즐거움을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큰 층차의 돌파로서 본성적인 일면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이다
공부는 하지만 깨닫지 못하거나 깨달았지만 해내지 못하는 수련생은 이런 상태가 있기가 아주 어렵다. 문제가 쌓이면 장기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실 만약 그들이 하기 시작했다면 그들의 병업은 진작 말끔히 없어졌을 것이고 지금까지 쌓여있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법해’에서 말씀하셨다. “사실 우리 이 법은 모두 이미 아주 명료하게 말했는데 당신이 맞추어 대조하려고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달렸다.”
(계속)
문장발표: 2014년 10월 16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10/16/2990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