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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진상자료를 형사대대까지, ‘9평’을 국가보안 숙소까지 배포

[밍후이왕]

사존님, 안녕하십니까!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96년에 법을 얻은 이후 지금까지 정진할 때도 있었고 게으를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존의 자비로운 보호로 오늘까지 걸어왔다. 큰 마난에 부딪히더라도 신사신법 하는 마음은 반석같이 견고했다. 사부님께서 뭘 하라고 하시면 뭘 했으며 많이 생각하지 않았다. 사부님께서는 “나한(羅漢) 그 층차에 도달하면 어떤 일과 마주쳐도 다 마음에 두지 않고, 속인 중의 모든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며, 언제나 싱글벙글하면서, 아무리 큰 손해를 보아도 싱글벙글하며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과위에 도달한 것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시시각각 이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했으므로 수련의 길에서 기적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대법과의 인연

어릴 적부터 수련에 관한 책을 보기 좋아했다. 20세기 80년대 기공열풍이 불 때 기공으로 신불을 연마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10여 가지의 기공을 배워봤지만 성과가 없어서 그 후부터는 어떤 기공학습반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부님께서 베이징 학습반을 개최하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것 역시 다른 기공들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이미 나를 지도해주셨다. 미혹 중에 있는 저를 끌어올리기 위해 꿈에 파룬 세계에서 날아나 온 흰색, 남색, 황금색으로 빛나는 큰 파룬(法輪)을 보게 하셨다. 2개월 후 사부님의 설법녹화의 10일 학습반에 참가하여 정식으로 수련을 시작했다. 매일 대법을 대조하며 수련을 하여 심성제고가 매우 빨랐다. 한번은 출장 갔다가 여관에 묵은 후 결제하고 영수증을 발급해 달라고 하자, 종업원이 실제 숙박비 보다 400위안이 더 많은 영수증을 끊어줬다. 예전에는 이런 걸 원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대법제자로서 속인의 떨어진 도덕 표준으로 더(德)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법리를 알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나는 파룬궁(法輪功)을 연마하는 사람이므로 작은 이익이라도 챙겨서는 안 됩니다. 실례지만 다시 실제 원 가격대로 발급해주세요”라고 요구했다. 그 종업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객을 위한 것인데 왜, 그럽니까? 다시 발급하게 되면 100위안의 벌금을 내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100위안을 벌금조로 더 지불하고 실제가격의 영수증을 받았다. 이것 또한 나의 심성고험이었다.

나는 정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평생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정말로 많은 신경을 썼다. 한 번은 꿈에서 쓰나미가 나를 따라 덮치려고 하는 순간 맘속으로 ‘날아라!’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날아오르게 되었는데 6세 된 외손녀가 길에 서있고 큰 물결이 외손녀 쪽으로 덮쳐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급히 날아 내려가서 단번에 외손녀를 안았다. 그런데 금방 날아올랐는데 아래를 다시 내려다보니 3세 된 외손자가 화원에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또 날아 내려가서 얼른 외손자를 안았다. 한쪽 팔에 하나씩 안았고 또 등에는 보자기도 있었다. 그런데 금방 날아오르기는 했는데 떨어졌으며 다시는 날 수가 없었다. 이때 홍수도 사라졌다. 그러나 이 꿈을 통해 정을 내려놓지 못하면 부처로 연마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법을 스승으로 하고, 주워들은 누구의 소식을 듣지 말자

1999년 ‘7.20’이후 나는 다른 도시로 갔다. 그때 보도원을 좀 숭배하는 생각으로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베이징에 가야 하는가?” 하고 물어봤다. 그들은, 베이징에 가면 대법을 파괴하는 것이므로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생각할수록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법에 재앙이 왔는데 어찌 대법제자로써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 후 며칠간 그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어떤 사람이 선전도구를 이용해 기공을 비평하기만 하면, 수련생 중에는 곧 동요되어 연마(煉)하지 않는 일부 사람이 있다. 마치 선전도구를 이용하는 사람이 불법(佛法)보다도 고명하다고 여기는 듯하며, 마치 다른 사람을 위해 연마하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은 압력 앞에서 두려워하며 연마하지 않는데, 이런 사람이 정과(正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처마저도 팔아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두려워하는 마음은 집착이 아닌가? 수련은 바로 큰 파도가 모래를 일 듯 남은 것이야말로 금(金)이다”[2]라고 말씀 하신 경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제자는 꼭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자 한 명이 남는다면 바로 저 일 것입니다’라고 다짐했다. 며칠 후 위층의 이웃 수련생이 나를 찾아왔는데 들어오자 이내 울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누구로부터 주워들은 소식을 듣지 말자고 했다. 우리는 걸어 나가 법을 실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2000년에 나가서 진상자료를 부착하다가 사악에게 미행당해 납치되었으며, 불법적으로 노동교양 3년 처분을 받았다. 석방된 후 이 수련생은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길에서 변함없이 정진했다.

2000년 말,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을 떠난 영감을 안장하다가 수련생을 만나게 되어 가져간 진상 녹음테이프를 그들에게 주어 그들이 나가서 배포하게 했다. 고향에 한 달 정도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땐 기차역에서 대법제자를 잡는 사복경찰관들이 매우 많았다. 내가 갔던 역은 종점이었는데 사복경찰관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공간으로 갈 수 있도록 사부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것을 지금 깨달았다. 한 수련생을 만나기 위해 새벽 2시 중도에서 내렸다. 낯선 도시이기 때문에 날이 밝을 때까지 역 광장에서 대기하려고 했는데 택시 한 대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아주머니, 어디로 가십니까? 겨울이고 추운 새벽인데 연세도 많아 보이니 6위안만 받고 여관까지 모시겠습니다. 여긴 복잡한 곳이라 광장에는 경찰차 밖에 없어요”라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택시를 탔다. 택시기사는 나를 한 작은 여관으로 데려갔는데 숙박부에 투숙기재도 하지 않았으며, 숙박비도 10위안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옷을 입은 채로 날이 밝을 때까지 잤다. 여관에서 나오기 전에 매개 침대에 진상 테이프를 놔뒀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 가방에 반이 넘게 담아온 진상테이프를 오가는 중의 버스와 기차에서 그대로 배포했는데 마지막에 한 개가 남았을 때는 아까워 배포하지 않고 남겨뒀다.

성 소재지라 도시가 큰데다가 길을 잘 몰라 택시를 잡아타고 수련생이 일하는 공장으로 찾아갔다. 서로 만난 그 순간 정말 말로는 표현 할 수 없이 기뻤다. 그는 청과와 만두를 넉넉하게 사서 대학교수 수련생 집을 거쳐 또 다른 두 수련생 집으로 갔는데 오후 내내 교류를 통해 호법하려는 신심이 확고함을 보았다. 교수수련생이 베이징 민원실에 가겠다고 하여, 나는 가지고 있던 마지막 테이프를 그에게 줬다. 그들은 매우 기뻐했고 즉시 고성능 확성기를 만들어 교도소 벽에 걸어놓겠다고 했다. 나는 저녁에 또 기차를 타고 그곳을 떠나 아침에 집에 도착했다.

수련생 집 전화가 감시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내게 전화를 하는 바람에 나는 삼일 후 악경(사악한 경찰)에게 납치됐다. 내가 아무것도 승인하지 않자, 불법적으로 16일 동안 수감됐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구치소에서 나온 후 나도 사악이 감시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므로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매일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걸어 나온 수련생들은 천천히 연락하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정체를 형성했다. 젊은 수련생들은 진상자료를 만들고 복사했으며 대면적으로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스티커를 붙였다. 어떤 경찰관은 “당신들, 정말 힘차게 했다. 온 거리에 가득하다”라고 했다. 2001년 연말 수련생이 잡혀갔는데 심성을 지키지 못해 18명이 연이어 잡혔으며, 그 중 4명이 불법적인 재판을 받았으며, 8명이 불법적인 노동교양처분을 받는 등 전면적인 사악의 박해를 받았다. 나도 1년 반의 노동교양처분을 받았다.

2003년 봄, 노동교양소에서 풀려나 집에 들어서자, 아이가 내가 잡혀간 지 반년 만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엄마가 괴로워할까봐 면회할 때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뇌혈전에 걸려 혼자서는 스스로 생활을 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말도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눈과 귀는 밝아 보고 듣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고 했다. 그 날, 내가 중공에 납치되던 섣달 28일, 내가 어머니의 설빔으로 새 옷을 만들고 있던 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악경찰들에게 나는 끌려가고 말았다. 당시 어머니는 놀라 손만 저으며 울면서 말도 못한 채 악경에게 잡혀가는 내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군부대에서 일하는 딸과 사위가 섣달 그믐날에 설을 쇠러 왔다가, 아빠는 세상을 떠났고, 엄마는 악경에게 잡혀갔으며, 외할머니는 매일 울고만 있는 기막힌 정경을 보게 되었다. 그들이 설을 어떻게 지냈는지는 가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잡혀간 후 어머니는 매일 울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놀라고 사무치게 사슴 아픈 삶을 반년 가까이 살다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다가 재봉틀을 꺼내 그 때 완성하지 못했던 어머니 옷을 꺼내 눈물을 흘리며 마무리 지으면서 묵묵히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어머니가 사부님의 설법 녹화를 본 적이 있고, 대법을 위해 지불한 것이 있기 때문에 좋은 곳으로 가셨기를 바랐다.

진상자료를 형사 대대까지 배포하다

내가 노동교양소에 불법적으로 감금되어 있는 기간에 우리 작은 딸이 반년 간의 출산휴가를 내고 우리 집에 와서 아이를 낳았는데 이웃들이 모두 도와줬다. 내가 출소한 다음날 딸의 출산휴가가 끝났으므로, 나는 악경들의 소란을 피할 겸 삼일 째 되는 날 딸과 함께 다른 도시로 갔다. 다른 도시로 가서도 하루도 지체하지 않고 법을 실증하는 자신의 길을 걸었다. 후에 현지 수련생을 접촉하게 되어 그들로부터 진상자료를 제공받아 그 도시에서 또 하나의 대법입자가 됐다. ‘9평’이 나온 후 많은 수련생들은 정치에 참여한다고 생각하고 감히 배포하지 않는 바람에 한 동안 ‘9평’ 이 책이 많이 쌓여있었다. 나는 사존께서 주신 신통을 이용해 현지 시정부, 공안, 법원 등 각급 정부기관은 물론 평소 일반인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곳에도 배포했다.

2008년 중공사당(邪黨)은, 올림픽개최를 위해 광분했는데 온 도시는 무슨 강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현지 수련생들을 모두 감시했다. 그럼에도 나는 변함없이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어느 날은 한 건물 왼쪽의 측문으로 들어가서 3층까지 올라갔는데도 문이 없었다. ‘도대체 이 건물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하고 궁금해 하면서 4층까지 올라가셔야 알게 되었다. 매 층마다 4개의 주택형식의 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 7층까지 올라간 다음 아래로 내려오면서 한 집에 하나씩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다 배포하고 건물을 나와 마당에서 보니, 양쪽 3층 창문 안에는 모두 경찰관들이 있었다. 정문을 나와 보니 오른쪽에 ‘○○시 형사대대’란 현판이 걸려있었고 그곳에 경비초소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보지 못했다.

‘9평’을 국가보안 숙소까지 배포하다

이 몇 년 동안 진상자료를 배포했지만 시내의 개방된 주택 단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금방 걸어 나온 수련생에게 남겨주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난 두려움이 없다. 사악은 나에게 닿지 못 한다’고 하는 정념을 매일 생각했다. 한번은 어떤 한 건물이 있었는데 한참 돌아서야 출입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비원이 CCTV로 화면을 보고 있으면서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28층까지 올라가 보았다. 매 층에 두 집씩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가져간 ‘9평’을 한 집에 한 권씩 문고리에 걸어놓았다. 그렇게 몇 층을 배포하고 무심결에 머리를 들었는데 2개의 큰 CC TV가 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움찔하고 잠시 놀라기는 했지만 즉시 ‘나를 찍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여전히 한 층 한 층 아래로 내려오면서 배포했는데 중간층까지 내려왔을 때 ‘9평’은 이미 모두 배포됐다. 건물의 구조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아래층 버튼을 눌렀다. 1층 인줄 알았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나오고 보니 공교롭게도 지하 3층이었다. 주위는 캄캄했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세히 둘러보니 쓰레기 처리하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다시 내려오게 도와달라고 사부님께 청을 드렸다. 당시 주위가 캄캄해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볼 수가 없었다. 손으로 더듬으며 몇 번을 눌러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와서 2층으로 올라갔다. 건물에서 나올 때 경비실에는 사람이 없었다. 완전히 빠져 나온 후 물 두 병을 들고 돌아가는 경비원을 봤다. 나는 합장하며 사부님께 감사드렸다. 후에야 그 건물이 ‘국가보안숙소’라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지난 후 나는 또 진상자료를 한 가방 가득 넣어 메고 그때 못다 배부한 남은 아래층에 전부 배포했다.

이 몇 년은 나 자신이 심부름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느꼈다. 사존께서는 “이처럼 큰 법이 있으며, 정념 중에서 대법과 당신들은 같이 있는바, 이는 거대한 보장이다. 정념이 부족해 법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법의 힘에서 이탈할 것인 즉, 고립되어 도움을 받지 못할 것 같이 보인다. 설령 대법의 일을 하더라도, 법에 부합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법의 힘이 없게 된다”[3]라고 말씀하셨다. 10여 년 동안 오후에 나가서 진상을 알리면서 모든 일은 오후에 했다. 아무리 바빠도 3강 설법을 봤고 어떤 때는 밤12시 발정념 시간까지 봤다.

호적을 등록하다

노동교양소에서 나온 후 3년 기간에 현지 ‘610’은 줄곧 나에게 호적을 등록하라고 했다. 아이가 인맥을 찾았는데도 안 된다면서 꼭 본인이 와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나도 두려움이있어 해마다 고향에 갔을 때도 피해 다녔다. 이번에 또 그들이 나를 찾자, 돌아가서 호적을정리해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누가 누구를 두려워한단 말인가?”[4]라고 말씀하셨다. 돌아가 대면하여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수련생들이 준비해준 진상자료를 가방에 가득 담고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다음 날 현지 파출소를 찾아갔는데 경찰관은 나보고 “‘보증서’를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파출소에 와야 하며, 매주 ‘사상보고’를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그런 말을 듣고 웃으며 “내가 남의 물건을 빼앗았거나 훔쳤거나 방화를 했거나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닌데, 당신이 와서 사람을 잡아왔는데 내가 왜, 그런 걸 써야 합니까! 호적을 등록해주지 않으면 가지지 않을 것이니 당신이 가지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돌아왔다.

파출소에서 나온 후 이웃을 만났는데, 공안국 분국이 주택단지 앞으로 이전해 왔고 하는 말을 듣고 직접 공안국으로 찾아갔다. 경비원이, 공무인가 사적인 일인가 라고 물었다. 나는 사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는 전화를 해보고 들어가라고 했다. 국장이 계단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바로 올라갔다. 내가 자청해서 들어온 것을 알게 된 국장은 비서보고 방문사유를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그 비서관에게, 내가 잡혀간 것부터 톈안먼 거짓분실자살사건과 ‘9평’ 등의 진상을 말했으며, 현지 악경들이 가한 나쁜 짓거리들을 전부 말하면서 대법제자의 돈을 사취한다는 것도 모두 말해줬다. 오후 내내 말을 했는데 비서가 끝까지 듣고 나서 마지막에 “오늘 온 목적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3년이 됐는데, 아직도 호적을 등록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국에서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호적을 등록해주지 않으면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파룬궁이 누명을 벗게 되면 당신들을 고소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다 알아 들었습니다. 내일 답변을 드리죠.”라고 했다.

이튿날 분국에서, 파출소장에게 나의 호적을 등록하라고 지시했다. 내가 파출소에 갔을 때는 소장이 회의 중이었다. 내가 왔다는 전갈을 받은 소장은 회의 중에 즉시 나와서 나를 상대해주면서 직접 호적을 등록해줬다. 10분 만에 모두 끝났다. 이때 어제의 그 경찰관이 들어왔는데 나를 보더니 대뜸 눈을 부라리며 “오늘은 수속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소장이 호적을 다 등록해줬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즉시 소장에게 “제가 등록해줘도 괜찮은데 직접 소장님께서…”라고 했다. 소장은 “자네가 신분증을 발급해줘라, 한 번 더 다녀오지 않도록.” 하고 지시를 했다. 수속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그 경찰관이 “그냥 가서는 안 됩니다. 보증서는 쓰고 가야 합니다. 누구나 다 씁니다”라고 했다. 나는 필을 받아 쥐고 “법을 지킬 것을 보장하고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으로 무사무아, 선타후아 하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라고 쓰자 그는 버럭 화를 내며 눈을 부릅뜨고 “아직 진선인을 연마합니까!”라고 외쳤다. 나는 허허 웃으며 “교도소에서도 이렇게 썼는데 나오지 않았느냐! 받기 싫으면 찢을게요”라고 하자 그는 놀라며 “찢지 마세요. 줘요.”라고 빼앗아갔다. 후에 그 경찰관은 진상을 알고 삼퇴를 했는데 어떤 때는 수련생에게 직접 진상자료를 달라고도 했다.

동사무소 직원들이 단체로 진상을 듣다

이번에 돌아온 김에 아이의 직장에 찾아가서 쓸데없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환경을 바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파출소에서는 내가 돌아왔다고 동사무소에 통보했다. 삼일 째 되는 날 동사무소 주임이 나를 불렀다. 주임은, “제가 직무를 인계받고 아직 만난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다들 좋다고 해요. 고집이 세서 잡혀 들어갔다고 들었어요”라고 했다. 나는 “주임, 할 말이 있으면 에두르지 말고 직접 말해요. 파룬궁을 연마했기 때문이죠”라고 하자, 주임은 “아직도 연마합니까?”라고 물었다. “연마하죠! 연마하지 않았다면 2년 동안이나 그렇게 들어갔겠어요?”라고 했다. 주임은 “그녀들(현지 수련생)이 배포하는 물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9평공산당’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들은 아주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9평공산당’을 봤는데 제가 겪은 일이 그 책에 다 적혀 있고 틀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녀는 “그것은 당을 반대하는 것이니 돌아와서 그녀들과 엮이지 말아요” 했다. “우리는 같이 2년 동안 수감됐었는데 꼭 그녀들을 찾아서 밥을 먹어야죠. 당신들이 보기엔 불법적인 모임이 되겠죠. 사실 TV에서 방송된 것은 모두 거짓입니다. 무슨 훌륭한 교육으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번에 구치소와 노동교양소에 한 번 들어갔다가 왔더니, 그 영화 속의 국민당보다도 더 암흑하다는사실을 알았어요.”라고 했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노동교양소에서 어떻게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거짓을 꾸미고 파룬궁을 모함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사무실의 모든 사람이 다 들어와 들었다. 두 사람은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들이 옆에서 듣는 것을 보자 주임은 즉시 “아주머니, 연마하려면 집에 가서 연마해요. 파룬궁은 공산당을 뒤엎을 수 없어요”라고 했다. “파룬궁은 공산당을 뒤엎으려고 하지 않아요. 주임, 저 같은 사람은 공산당을 뒤엎을 수 없어요. 그러나 하늘은 그것을 소멸하려고 한다고 하면 꼭 소멸할 것인데 누구도 막을 수 없어요!”라고 했다.

동사무소의 직원들이 단체로 진상을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 수확은 매우 컸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한 달간 있다가 떠나기 전 동소무소를 찾아갔다. 마침 그 주임이 문 앞에 서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있으면 여기서 말하고 들어가지 말아요”라고 했다. ‘내가 들어가서 또 진상을 말할까봐 걱정하구나’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가기 전에 인사하러 왔어요. 우리는 인연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 후에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 아이를 찾지 말고 직접 나를찾아요. 아이들을 찾아도 소용없어요. 그들도 나를 어쩌지 못해요”라고 했다. 후에 동사무소의 사람들은 다시는 아이들을 감시하지 않았다고 수련생들이 알려줬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법리가 승화됨에 따라 세 가지 일을 하는 것에서 매우 뚜렷하게 법의 힘을 느꼈고, 여러 가지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 중에서 더 한층 깊은 깨달음이 있게 됐다. 돌아온 후 세인을 대면하며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수량을 추구하지 않고 삼퇴하는 진정한 의의를 매 사람에게 말해줬다. 자신도 매일 대법 속에 용해되었고 사부님의 호탕한 은혜 속에 잠겨 있었다. 이 기간은 또한 사부님께서 다른 공간에서 정법하는 혼을 흔드는 정사대전의시각이었다. 어떤 땐 저녁이면 왠선(元神)이 나가서 조사정법했는데 돌아와서 육신이 침대에 누워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육신이 사망하지 않도록 빨리 몸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꿈에서 입장하고 발정념하면서 조사정법했는데 힘이 들어 꿈에서 가지해 주실 것을 사존께 청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사부님께서 ‘세간 문을 열다’란 신경문을 발표하신 후 꿈에서 천문이 갑자기 열리고 빛이사방으로 빛나고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의 왕과 호법신이 상서로운 구름을 타고 지면으로내려오는 것을 봤다. 그들은 다 지었으니 한 번 올라와보라고 했다. 나는 한 산길을 따라 앞으로 갔는데 양쪽에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있었는데 인간세상의 것과는 달랐다. 산 정상에 도착한 후 정상에 어떻게 지반을 닦고 집을 지었는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머리를 들고 보니 절간 같은 큰 집이 눈앞에 있었다. 화려한 모습은 아니고 그런 원시적인 회색 기와와 벽이었는데 대문은 흰색으로 칠해져있었다. 지금 대륙에서는 이런 절간을 볼 수가 없다. 문 앞에 한 쌍의 돌사자가 놓여있었는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매우 장엄했다. 새집이어서 흑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맘속으로 뒷산으로 내려가자고 생각하자 깨어났다. 흑 냄새는 이틀 동안이나 없어지지 않았다. 수련생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그들에게 내 꿈을 이야기해주고 사부님을 따라 원만할 때까지 큰 파도에 도태되지 말자고 서로 격려했다.

내가 외지에서 왔기 때문에 혼자서 수련했다. 어떤 수련생이 말하기를 법공부 팀에서 외지 사람을 받아들이기 싫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한 수련생에게 매주 ‘명혜주간’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는데 역시 법공부 팀에서 주지 못하게 한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세 가지 일을 잘하면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후에 자료를 만드는 한 수련생이 ‘명혜주간’을 제공해줬다. 나는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명혜주간’에서 수련생들의 교류와 외국에서의 대법정황을 보면서 안을 향해 찾고 정법노정을 따라갔다. ‘명혜주간’은 오늘까지 나와 함께 걸어왔고 내 생활 중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몇 년 전에 꿈에서, 우주처럼 큰 톱니바퀴 옆에 흰색의 큰 창파오(중국전통의상)를 입으신 불(佛)의 모습인 사부님을 봤다. 15, 16세 정도로 돼 보이는데 말할 수 없이 장엄하고 신성했다. 그곳에 나와 함께 20세 된 젊은 두 청년이 있었는데 나 자신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걸레를 주시며 큰 톱니바퀴를 닦으라고 하셔서 우리 셋은 몇 번에 큰 톱니바퀴를 깨끗이 빛나게 닦아놓았다. 사부님께서는 또 중간의 축을 뽑아서 닦으라고 하셨다(사유전감). 그 두 청년은 받들고 내가 축을 뽑아 몇 번 만에 다 닦았다. 사부님께서 다시 끼어 넣으시자 즉시 반짝반짝 빛났다. 사부님께서는 “됐다, 가자!”라고 하셨는데 꿈에서 깨어났다. 그때가 밤 12시였다. 아마 사부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세력의 기제인데 사부님께서 바꾸시자 이내 바로 잡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 후 사존의 새로운 설법이 나왔는데 사부님께서 다른 공간을 다 바로 잡으시고 삼계까지 바로 잡으시려는데 우리가 아직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구한 사람의 인원수도 아직 모자라고, 많은 제자가 아직 걸어 나오지 못했다는 것을 보셨다고 하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17년의 수련 과정을 뒤돌아보면 한순간이다. 얼마 남지 않는 시간에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사람을 많이 구하여, 사존께 위로가 되시는 일은 많게, 노고가 되시는 일은 적게 해 드리도록 노력하여 사존께 보답해야 한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轉法輪)’[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정진요지-누구를 위해 수련하는가(爲誰而修)’[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각지설법10-맨해튼 설법’[4]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밍후이왕 제10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3년 11월 18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10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18/28158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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