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사람은 고생 속에 있다. 나는 이 ‘고생’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고 본다. 물질 신체에 가져다 준 고생을 ‘물질적 고생’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인간 세상에서 형성된 관념이 가져다 준 고생으로 ‘정신적 고생’이라 한다. 신이 사람에게 ‘고생’을 만들어 줄 때는 흔히 이 두 가지 방면에서 체현된다.
먼저 ‘물질적 고생’에 대해 말해보자. 사람의 눈은 육체세포로 구성되어 있어 사람 층차보다 높은 우주의 진리를 보지 못하므로 사람은 ‘미혹’속에 있다. 이것이 바로 육체가 가져다 준 고생이다. 이 외에도 이 신체는 추운 것을 두려워하고, 더운 것을 두려워하고, 목마른 것을 두려워하고, 배고픈 것을 두려워하고, 질병을 두려워하고, 아픈 것을 두려워하는 등등으로 각종 ‘고생’이 있다. 이 모두 육체가 가져다 준 고생으로 ‘물질적 고생’에 속한다.
다른 방면은 ‘정신적 고생’이다. 사람은 인간 세상 속에 살면서 각종 ‘좋다’는 관념이 형성되는데 사실 인간 세상의 ‘명리정’에 대한 집착심이다. 자신이 ‘명, 이, 정’에서 얻으면 ‘좋다’고 인식하며, 심지어 다소 성취감이 있으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명, 이, 정’에서 다소 잃어버리거나 혹은 부족하면, 좋아하지 않으며 괴롭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 자신이 세간에서 형성된 관념이 조성한 일종 정신적 고통이다.
사람이 ‘명, 이, 정’을 위해 세간에서 추구할 때 다른 생명체에 상해를 주며 업을 짓는다. 높은 층차의 신은 사람에게 고생을 만들어 빚을 갚게 하는데, ‘물질적 고생’과 ‘정신적 고생’을 이용해 체현된다. 모든 ‘고생’은 이런 연원(緣由)과 인과윤회의 보응으로 인한 것이다.
대법을 수련하는 수련자로, 인간 세상에서의 수련 역시 이 두 가지 방식으로 고생을 하고 소업을 한다. 동시에 고생 속에서 대법으로 자신을 요구하고 자신의 심성과 층차를 제고한다. 그러면 수련자는 어떻게 ‘물질적 고생’과 ‘정신적 고생’을 대해야 하는가? 내가 이해하는 바를 말하고자 한다.
‘물질적 고생’을 말하면 그 자체는 신체가 가져다 준 고생으로, 역시 고생을 하여 소업 하는 것이다. 하지만 수련을 제고하려면 신체적으로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해도 제고는 제한되어 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心性(씬씽)이 얼마만큼 높으면 공도 그만큼 높은데, 이것은 절대적인 진리다.” 그러므로 대법 수련은 심성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주로 ‘정신적 고생’으로 체현된다.
‘정신적 고생’에 대해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우리 이 한 법문은 주로 이렇게 걷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일부분은 이 방면에서 작용을 일으킨다. 우리 대다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心性(씬씽) 마찰 중에서 업력을 전화하는데, 흔히 이 중에서 체현된다. 사람이 모순 중에서, 더욱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런 마찰 중에서는 그런 고통을 능가한다. 나는 신체적인 고통은 감당하기가 가장 쉬우며 이를 악물기만 하면 넘길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헐뜯고 싸울 때, 마음을 다스리기가 가장 어렵다.”
내가 인식하기론, 정신적 고생은 세간에서 형성된 자신의 관념, 형성된 ‘명, 이, 정’에 대한 집착심이 조성한 것이다. 사람은 세간의 ‘미혹’속에서 우주의 진상과 진리를 보지 못하기에 ‘명, 이, 정’이 인생의 정신적 기둥으로 생각하고는 없어서는 안 되고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잘못된 관념은 자신의 정신에게 끝없는 고생을 가져다주며, 일단 잃어버리면 정신적으로 철저히 무너진다.
사당은 왜 각종 운동에서 ‘명예를 더럽힌다’는 방식으로 중생을 박해하는가? 사악은 바로 사람이 이런 것에 집착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런 방식을 통해 사람을 박해한다. 예를 들면 ‘문화대혁명’때 류사오치(劉少奇)를 왜 3일 만에 사당이 쳐부술 수 있다고 했는가? 바로 그가 세간의 ‘명, 이, 정’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일단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납작하게 만들고 권리를 빼앗을 때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워 완전히 무너진다.
그러면 사당은 대법제자를 박해할 때 ‘명예를 더럽힌다.’는 방식으로 박해했다. 하지만 사당이 아무리 죄를 씌우고 먹칠하며 명예를 훼손하고, 하늘땅을 뒤엎을 정도로 박해해도 15년간 대법제자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왜? 대법제자는 우주 대법을 수련하고 있고, ‘명, 이, 정’을 세간에서 포기한 것이며 우주 ’진선인‘에 동화한 것이다. 대법제자는 세간의 ’명, 이, 정‘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당이 ’명, 이, 정‘으로 어떻게 죄를 씌우고 여탈(予奪-주었다 빼앗음)해도 대법제자를 움직이지 못한다.
반대로 수련자로서 그가 ‘명, 이, 정’에 집착하고 이런 것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면, 일단 다른 사람이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명예를 훼손하고, 철저히 그의 ‘명, 이, 정’을 가져갈 때 쉽게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사람 자신이 집착으로 조성된 것이다.
‘전법륜’중에서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의 전반 수련과정은 바로 끊임없이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사부님께서는 직접 우리에게 세간의 ‘명, 이, 정’에 대한 집착심을 포기하라고 알려 주셨다.
수련인으로 세간에서 집착하지 않으면 사악은 당연히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 ‘명’에 대한 고험은 바로 ‘명예를 훼손하는 것’으로 수련인을 단련시킨다. 역사에서 모든 정법 수련의 성과를 본 각자는 모두 ‘명, 이, 정’에서 마난과 고험을 수없이 당했다. 하지만 최후 모두 자신이 불법에서 최고의 위덕을 수립했고 자신의 과위를 성취했다.
오늘 대법제자에게 사당과 사악한 악마가 15년간 하늘땅을 뒤엎을 듯 죄를 씌우고, 명예를 훼손하는 고험 앞에서, 엄혹한 사악의 고험 앞에서 ‘명, 이, 정’에 대한 집착심을 내려놓은 대법제자는 태연하게 이 거대한 관과 난에서, 모두 어려운 이 수련환경을 이용해 뛰쳐나와 대법 중에서 무상(無上)의 위덕을 수립했다.
그러므로 무엇을 ‘고생’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사람 자신의 느낌이며 사람 마음에 대한 집착이 조성한 것이다. 수련생은 사람마음을 버리는 게 ‘고생’에서 벗어난 것이고, 오직 사람의 집착심을 버려야만 비로소 ‘고생’에서 벗어나고, 비로소 세간의 ‘고해(苦海)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문장발표: 2014년 6월 3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6/30/2941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