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에 대한 개인적인 체득을 간단히 논함
글/ 지린 대법제자
[밍후이왕] 제자는 사부님의 고심한 제도(苦度)에 무어라고 감사드릴 말이 없다. 오직 자신이 한동안 법 공부하는 가운데서 느낀 결속시간에 대한 개인적인 체득을 사부님께 회보하고, 동시에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하는데 수련을 잘 하지 못했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도 불가피하게 있을 수 있으니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어제 밍후이왕에서 문장 한 편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한 노 수련생은 크게 한 숨을 쉬면서 “십 몇 년이다, 이 마난은 대체 언제가 끝인가”하고 말했다. 나는 자신이 결속시간에 대해 집착했던 과정이 생각났는데 아주 무섭고 위험했다. 사실 이 생각이 있으면 정말로 끝나는 그날이 와도 우리는 원만하지 못하고 다만 다른 사람들이 원만하는 것을 볼 뿐이다. 얼마나 슬픈가!
박해 초기, 국내 환경은 너무 공포스러웠는데 그런 분위기는 항상 나를 짓눌러 숨조차 쉬기 힘들게 만들었다. 매일 퇴근 후 항상 기진맥진했고, 법 공부 환경이 없어졌으며,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두려워서 감히 법 공부를 하지 못했다. 늘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고통 속에서 박해가 빨리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랬는데 이런 “간절함”이 바로 강렬한 큰 집착인지도 몰랐다. 정말 너무 강렬했다.
그때 많은 대법제자들이 모두 이렇게 생각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강렬한 집착을 인식하지 못했고 제거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는 큰 난관을 우리 스스로 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2002년 우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문제를 명시해 주셨다. “물론 십년이 더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긴 시간을 허용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수명 또한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다.”[1] 거참, 이번에는 끝이 보인다. 또한 정신이 난다. 기껏해야 십 년이 안 걸리는데, 하자! 끝까지 하자! 하지만 이 “끝까지”는 조건이 있는 것으로서, 이 조건이 바로 “십 년”이다. 만약 십 년을 초과하면 수련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이 마난을 견뎌낼 것인가 견뎌내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때는 그냥 “십 년”이면 반드시 결속되고 원만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개인적인 이해인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한 단락 설법의 핵심은 우리보고 결속시간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십 년”을 말씀하실 때, 앞에 하나의 전제 조건을 말씀하셨다. “시간이 길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1] 나는 시간이 길어질 까봐 두려워하는 집착을 제거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십 년”에 대해 다른 한 가지 집착이 형성되어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않았다. 이러면서도 자신은 견정하게 “신사신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안고 놓지 않으면서 “신사신법”하는 것은 사실 모두 거짓이고,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매번 구정과 “7.20”때면 나는 항상 기껏해야 십 년을 초과하지 않는데 이번 해는 박해한지 몇 해 째인가를 생각한다. 특히 “십 년”이 가까워 올 때, 나는 대기원 블로그에 진상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한 속인이 어느 수련인에게 묻는 것을 보았다. “큰 도태는 언제 시작합니까?” 그 수련생은 2012년에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때 나는 아주 놀라면서 그는 어떻게 이렇게 긍정적이지? 공능인가? 아니면 사부님께서 작은 범위에서 설법하실 때 말씀하신건가? 라고 생각했다. 후에 대기원에서 마야 예언에 관한 보도를 보았는데 무슨 수정 두개골(頭蓋骨)이 출현했다든가, 무슨 태양 기년(紀年)이 끝난 후인 2012년 몇 월 며칠에 대 재난이 나타난다든가… 수련생이 말한 근거는 아마도 마야의 예언에 근거한 것이라 추측했다. 그때는 이것이 법이 아니라는 생각을 못하고, 자신의 “십 년”에 대한 집착에 결합하여 손가락을 꼽아 헤어보았는데, 2002년부터 2012년까지 마침 십 년이었다. 그래서 수련생이 한 말을 굳게 확신했는데 이것은 이미 마야의 것을 한데 섞은 것이었다.
2012년의 몇 월 며칠은 무사히 지나갔다. 박해는 끝나지 않았고, 대 도태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종의 허전함을 느꼈고, 여전히 “십 년” 의 집착 속에 빠져 즉시 깨닫지 못했으며, 사부님의 “십 년” 설법에 대해서도 의혹이 생겼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것이 왜 들어맞지 않는가?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높으신 분인데, 이 한마디 말씀은 왜 그렇게 안 됐지? 그때는 안으로 자신을 찾을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법에서 이렇게 멀리 빗나갔음에도 자신한테서 찾지 않았다. 만약 진수(真修)하는 상태라면 밖으로 찾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사람한테서 찾아도 안 되는데 하물며 나는 사부님한테서 찾으려 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무서웠고, 너무 위험했다!
지금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 너는 제자다웠는가? 사부님을 믿지 않고 어떻게 수련하지?” 개인적 경험인데 우리에게 결속 시간에 대한 한 가지 집착만 남아도 정말 결속될 때가 왔을 때 당신은 원만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아직도 많은 집착들을 제거하지 못했으니.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자신한테서 찾아보니 색욕심을 줄곧 제거하지 못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아주 강렬했고 이번 해부터 담담해지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아직 철저하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예쁜 여자나 노출한 여자들을 보면 늘 습관적으로 두어 번 엿보았는데 예전에는 더구나 형편없이 그야말로 음란한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는데 눈에 보이기만 하면 바로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거나 자신을 일깨워 주지만 아직도 보고도 보지 않은 것 같은 정도에 도달하지 못했다. 색욕, 수련 시작의 첫 번째 큰 관을 나는 아직 넘지 못했는데 어떤 때는 자신의 수련이 너무 형편없다고 생각되었고 대법제자라 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는 더욱이 자격이 없고 사부님의 고심한 제도에 너무 미안했다. 만약 “십 년”에 정말로 결속됐다면 다른 수련생은 몰라도 나는 틀림없이 원만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것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는데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당신들을 위한 것이고, 중생을 위한 것이다.”[2] 사부님께서 시간을 연장하신 목적 가운데에는 작디작은 나도 포함되어 있는데, 나의 층차가 높아 사부님의 요구에 도달했고 자신의 서약을 실행했기에 원만하기만을 기다리는 제자로서, 사부님께서 시간을 연장하여 구도하려는 생명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때 밍후이왕에도 수련생들의 교류가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시간을 연장해주신 목적을 인식하였다. 하지만 나는 아주 나쁜 생각이 떠올랐는데 ‘내가 원만하지 못한다면 나도 받아들이겠다. 원만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땅한 것으로 누가 당신더러 잘 수련하지 말라고 했는가? 하지만 사부님께서 설법하신 것은 변할 수가 없지. 우리가 도태된다 하더라도 사부님의 말씀에 따라 정법 해야지.’ 겉으로 보기에 스스로도 도량이 커서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정법의 노정을 가로막지 않겠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으로 화풀이를 하는 것이고 사부님께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십 년”이 되었으면 결속해야지.
지금은 법 공부한 후 심성이 제고되어 절대로 이런 인식이 아니다. 사부님께서 정법하러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정법하고, 우리를 구도하며,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도되지 못하고, 중생이 구원되지 못하면 이것이 어찌 사부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겠는가? 아니다. “십 년”에 결속되지 않은 것은 “다만 제자들의 사람마음이 가로막고 있네”[3], 만약 우리가 모두 정념으로 이 박해를 대했다면 박해는 벌써 끝났을 것이다. 어떻게 시간을 연장했는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사존님께서 거대한 감당으로 바꾸어 온 것이다. 우리와 중생을 위해서이다. 다시 이전의 문화대혁명 형식의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를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부끄러워 몸을 둘 곳이 없었다. 오직 속인의 한 마디 말로 자신에게 해 주고 싶었는데 너는 너무 파렴치하다! 개인적으로 “안으로 찾는”것에 대해 나는 새로운 인식이 생겼는데 “다른 사람한테서 찾으려면” 길이 통하지 않고,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주신 사부님께 찾는” 것은 더욱 절대적으로 막다른 골목이다.
나는 결속시간에 집착하는 것은 실제로 원만에 집착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자신은 “일반 사람이 아니고”, 층차가 높으며, 자유로움을 탐내면서 고통을 참아내지 못했고, 고생을 낙으로 삼지 못했으며, 자신도 적지 않게 했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되었으니 중생의 생사를 상관할 것이 있겠냐고 생각했다.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며 자비롭지 못한 표현이다. 이렇게 많은 집착과 사심을 제거하지 않고 어떻게 원만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인식으로는 세 가지 일을 잘 하면 기필코 원만할 수 있지만 원만에 집착하면서 세 가지 일을 한다면 틀림없이 원만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속인의 마음을 갖고 하는 것이고, 속인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얻는 것은 속인의 분복에 불과할 뿐이다.
기독교는 삼백 년 후에야 비로소 박해가 결속되었는데 우리 우주대법을 수련하는 이들이 소도, 소법을 수련하는 이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물며 지금은 이미 마지막의 마지막에 왔는데, 사악은 그때에 비하면 훨씬 공포스럽지 않고, 압력도 아주 많이 작아졌기에 정말로 결속시간에 대한 집착을 내려 놓아야 한다. 박해가 결속되지 않았으면 바로 우리가 수련하고 중생을 구할 수 있는 기회로서 우리는 정말로 사부님께서 거대한 감당으로 연장해오신 모든 시간을 아끼고 또 아껴야 한다.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고, 사부님의 요구대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 하면서 사부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용해야 하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무엇 때문에 구세력을 철저히 제거하려 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이 요구하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찌 자신이 요구하는 원만에 집착하면서 내려놓지 못하는가? 확고한 믿음,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모두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확고히 믿어야 한다. 마지막에, 사부님의 한 단락 말씀으로 나의 개인 경험 교류를 마치고자 한다. “시간을 연장하는 것은 당신들을 위한 것이고, 중생을 위한 것이다.”[2]
주 :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북미 순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13년 미국서부국제 법회’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홍음 3 – 번거로움’
문장발표: 2014년 6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6/6/29303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