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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 고향의 시편

[밍후이왕] 허난 탕인현, 악비 고향은 역사에 휘황을 남겨놓았고, 오늘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이 비범한 땅은 또 장엄하고 심금을 울리는 편장을 적어놓았다.

정법 반박해 15년에 즈음하여 파룬따파(法輪大法) 창시인 리훙쯔(李洪志) 대사의 안양행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여, 대법제자가 악비 고향에서 사부님을 따라 정법한 빛나는 여정을 펼쳐 보이려고 한다.

1. 사존께서 악비 고향을 방문하셔 진귀한 글귀를 남기시다

이는 특수한 의의가 있는 날이다. 1997년 9월 10일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존께서 옛 도시 허난성 안양시에 오셨다. 11일, 탕인현 악비 묘에 들렀고 또 악비의 고향에 다녀오셨다. 사존께서는 이번 발걸음에서 진귀한 시편 ‘악비(岳飛) 묘를 거닐며’와 ‘옛 고향을 찾아’(홍음)를 남기셨다.

오후 3시경, 사존께서 흰색 상타나 승용차를 타고 허난성 탕인현(湯陰縣) 라이위안진(菜園鎮) 청강촌(程崗村)―악비 고향에 오셨다. 웅장한 체격의 사존께서는 두 명의 제자를 거느리시고 악비 사당에 들어섰다. 앞 정원, 뒤 울안, 집 안팎을 자세히 둘러보시고 울안 가운데 있는 향로에 향을 올리셨다. 사존께서 향을 올리시는 모습은 타인과 달라 매우 특별하게 보였다. 악비 사당의 70여 세 되는 직원은, 사부님께서 향을 올리는 것을 도와드렸다. 향대가 붙어 있어서 한 가닥씩 뜯어내야 했고, 그런 후 큰 향로 주변을 에돌며 한 대씩 빼곡히 꽂고 가운데에 또 큰 향을 꽂았다. 사존께서 향을 올리신 후 특별히 옆에 있는 나이든 직원에게 부탁하셨다. (대체적인 뜻은) “향이 타는 것을 지켜주세요. 향이 다 탈 때까지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세요.”

삽시간에 악비 고향에는 향연이 피어올랐으며, 장엄하고 엄숙해졌다. 사람 지혜의 제한으로 우리가 단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때 사존의 생각과 소원은 시공을 꿰뚫어 8백 년 전으로 가셔서 다시 성연을 계속하셨을 것이다. 사존께서 안양에서 수련생들과 만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체적인 뜻) “나와 안양은 인연이 있어요. 송나라 때 안양의 탕인에서 지낸 적이 있어요.” 사존의 말씀과 시편은 우리가 이 머나먼 세상의 기이한 연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셨고, 역사의 비밀을 열어주셨다.

옛 고향을 찾아

가을비 줄줄 눈물인 듯

방울방울 서글프게 폐부를 적시네

마을엔 옛사람 찾을 길 없고

장원은 몇 번이나 폐해졌던가

오고 감이 팔백 추(秋)로고

내가 또 뉘인지 누가 알리요

머리 숙여 향 몇 대 사르나니

연기는 옛사람 향해 날아가누나

돌아와 소원을 풀었나니

다시 와 중생 제도하여 돌아가노라

명나라 중기에 건축된 이 건물은 이미 낡고 오래돼 퇴락해졌다. 사존께서는 뒤 울안에 보수하려고 쌓아둔 건축자재를 보시고 후원금을 내셨고, 동행했던 제자도 후원금을 냈다. 관리직원은 사존께 성함을 남기시라고 했다. 규정에 따라 헌금이 일정한 액수에 달하면 기념비를 세울 때 이름을 남길 수 있으며, 더 많으면 단독으로 기념비를 세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때 사존께서는 성함을 남기지 않으셨고, 사존께서 차에 오르실 때 관리직원이 문밖까지 배웅하면서 다시 성함을 남길 것을 제안했다. 사존께서는 잠시 멈추시더니 노트에서 종이 한 장을 찢어 그에게 주었다. 종이에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바로 사존께서 나중에 ‘홍음’에서 발표하신 시편 ‘악비(岳飛) 묘를 거닐며’이다. 관리직원은 사존께서 떠나신 후 장인을 청해 비석에 그 시를 새겼다. 글자 크기가 크지 않았고, 또 사존께서 남기신 글자체대로 새기지 않았다(장인이 새긴 글은 해서체였다).

그해 정월, 한 젊은 부인이 청강촌에 있는 친정에 왔다가, 악비 고향에서 사존의 시비를 발견했고, 이 소식을 허비(鶴壁)에서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 뒤로 대법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다시 사존께서 남기신 글자체로 약 300배 확대하여, 3천 위안을 헌금하여 큰 시비를 새겨서, 공손하게, 단정하게 악비 사당의 정당 문 앞 동쪽에 세웠다. 정말로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고도 밝았다.’였다. ‘진선인(真善忍)’의 빛발은 편벽하고 적막했던 향촌을 비췄고, 이 신성한 시비는 오래된 악비 사당을 빛나게 했으며,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대법제자와 관광객이 끊이지 않았고, 진귀한 장면을 사진으로 남겼다. 많은 사람은, 놀랍게도 영상과 사진 속에서 오색찬란한 수많은 파룬(法輪)이 나타나 날아다니는 모습을 발견했다.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파룬따파(法輪大法)의 박대한 법리와 신기함 그리고 초상적인 것이, 악비 고향의 인연 있는 사람들이 대법수련으로 들어서게 했다. 대법은 악비 고향에서 신속하게 널리 홍양됐고, 아울러 이곳에 법공부장과 연공장이 성립됐다.

2. 7·20 박해 전 안양의 중공요원은 시비를 구실로 박해의 불길을 지폈다

1999년 ‘4·25’, 만 명 파룬궁수련생의 베이징 국무원 내신내방 사무실에 평화적인 청원이 있었던 후, 안양 중공관원은, 사당이 부어 넣은 무신론 투쟁철학과 소위 정치적 후각으로 사태를 판단하고 사당의 의도를 파악하여, 장 씨 깡패집단의 입맛에 맞게 상부의 뜻을 받아들여, ‘7·20’ 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이유를 만들어 고의적으로 사단을 일으켜, 기회를 타 박해에 구실을 찾으려 했고, 중원의 옛 도시 안양에서 솔선하여 불길을 지펴 박해의 서막을 열었다.

동년 6월 1일 중공 안양시위 서기 주톈바오(朱天寶)는, 전 시위서기 좌담회에서 압력을 하달했다. 사부님께서 악비 사당에 시를 남기고 헌금했으며, 그래서 많은 파룬궁수련생이 그곳에 가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헌금하고 있으니, 탕인현위, 현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최고도로 중시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동시에 ‘정치하는’ 높은 차원에서 기념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양시위 부서기 장진당, 시위 상무위원회, 정법위원회 서기 양웨이시(楊維璽)는, 공안을 거느리고 탕인으로 가서 전문적인 책략과 방안을 마련하고 비밀리에 계획을 수립했다. 탕인현위 서기 세안순(謝安順)은, 감히 태만할 수 없어서 여러 차례 상무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여 문물, 여행 등 공안부문에서 함께 참여하도록 명령했다. 시현 두목들은 오랜 심사숙고 끝에 마침내 기념비를 허물어버리기로 했다. 7월 3일 탕인현 문물국에서 명령을 내리고, 청강촌은 구실을 만들어, 악비 사당은 성급 중점문물보호 대상임으로 여행환경을 정화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제사당 내의 문물과 각종 비석을 정체적으로 규범화시켜야 한다는 등의 구실을 내세워, 사람을 동원하여 (무도하게) 강제로 비석을 허물었다.

상급기관의 이런 결정은, 촌의 간부와 촌민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그 비석이 세워지고 나서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어떤 희망과 행복감을 느꼈었다. 그리고 전국의 대법제자들도 아름다움과 축원을 이곳으로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공이) 왜, 이렇게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상황을 아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비석을 허물기 일주일 전 3, 4명의 신분이 불분명한 자가 제사당에서 사진을 찍고, 관찰했다고 한다. 말투는 베이징 표준어였는데, 단독으로 악비 사당의 관리 직원과 대담을 했으며, 말투가 매우 불량했고 동기가 불순해 보였다고 했다.

3. 전국의 파룬궁수련생이 악비 고향으로 청원하러 가다

파룬따파(法輪大法)는 불가상승(上乘) 수련대법이다. 사부님의 홍은은 호탕하여 홍진난세 속에 미혹된 사람들을 불러 깨우고, 제자에게 반본귀진의 길을 깔아놓으셨으며, 수많은 사람을 사경에서 구하여 심신이 건강하게 하셨다. 파룬따파는 인류에게 무한한 아름다움과 희망을 주었다! 사부님과 대법이 악의적인 훼방을 당했을 때, 제자들은 자연히 비할 바 없이 마음이 아팠고 걱정스러웠다. 내심에서 정부와 사람들이 파룬궁 진상을 알고, 파룬궁에게 공정하고 합법적인 수련, 신앙 환경을 주게 하려 생각했다. 하여 자연스럽게 집을 나서서 상급기관으로 차근차근 밟아 청원했으며, 그 행동과 자세, 언어의 구사는 시종일관 평화적이고 이성적이었다.

5일 뒤 허베이성 스쟈좡 파룬궁수련생은 사존의 시비가 철거된 것을 발견했고, 이 소식은 신속하게 전해졌다. 각 지역 파룬궁수련생들은 소식을 듣고 악비 고향과 탕인현 문물국을 찾아가, 자신들이 몸소 체험한 파룬따파의 신성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진심으로 이야기하면서 선의로 (철거된) 시비를 복원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9 ~11일에 정저우, 허비, 안양, 푸양, 신샹, 산먼샤아, 쟈오저우, 산둥, 산시, 허베이, 톈진, 안후이 등 성시의 파룬궁수련생들이 연이어 이곳으로 찾아왔는데 그 인원수는 수천 명에 달했다.

파룬궁수련생은 사존의 시비가 뒤 울안 담벼락 구석에 (처박혀)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괴로워했다. 10일 오후, 일부 파룬궁수련생은 밧줄과 원목 등으로 시비를 원위치에 복원시키려고 했으나, 사당서기 자오카이민이 강압으로 저지했다. 이때 악비 고향은 중공이 심어둔 요원들로 가득했다.

며칠 동안 파룬궁수련생들은 혹서와 배고픔 그리고 먼 길의 노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성심으로 하나의 요구를 했다. 그것은 정당하고 완전하며 합리적이었으나, 탕인현 문물국과 현위 내신내방 사무실 등 관련 기관이나 부서에서는 그 어떤 정면적인 또는 공식적인 답변이 없었다. 단지 상부의 뜻이라고만 밝혔다. 7월 12~13일 파룬궁수련생들은 안양 시정부로 청원을 하러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서 7월 15일 후 또 정저우 성정부로 청원하러 갔다. 전후 과정에서, 공안요원과 사복경찰관들은 암암리에 뒤따라 붙었으며, 그 배치는 삼엄하여 상부의 요구로 내신내방 사무실은 2시간에 한 번씩 상황보고를 했다. 일부 파룬궁수련생의 핸드폰과 집 전화는 이미 도청됐고, 박해를 위한 준비는 완전히 끝나서 바람 소리에도 놀랄 분위기였다.

청원을 간 수련생은 여전히 태도를 상화롭게 하여 각자가 몸소 겪은 수련의 결과를 전했는데, 대법이 인류도덕을 제고하고, 병을 제거하며 몸을 건강하게 하는 면에서의 기이한 효과 등등을 실증했다. 직접 접견을 했던 정부 각급 기관원과 관련 업무종사자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깊은 감동과 진감을 받았다. 어떤 사람은 그때 파룬궁수련생이 선물한 ‘전법륜(轉法輪)’ 책을 가져갔고, 파룬따파를 배울 것이라 밝혔다. 청원할 때 사람들은 모두 질서정연했다. 한 줄로 인도 옆에 섰는데, 지정된 맹인의 길도 피해 섰다. 청원이 끝나면 그들은 땅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갔으므로 지면은 깨끗했다. 많은 수련생은 정저우에서 청원할 때 거대한 파룬이 공중에서 회전하는 것을 보았으며 비할 바 없는 장관이었는데, 이런 광경이 며칠간 지속했다.

그러나 ‘죄를 뒤집어씌우려면 무슨 이유인들 못 만들어 내겠는가?’ 중공의 못난이 장쩌민은 질투로 대법에 대한 박해의 음모를 꾸민지 오래됐는데, 1999년 7·20에 중공은 전면적으로 박해를 시작했다. 안양 사당 악도들은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큰 성세를 만들어갔다. 인원을 모집하여 탕인에서 현장회의를 소집하고, 민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시비를 부숴버렸다.

4. 14년 동안 생명과 선혈로 반박해의 편장을 써가다

안양의 관원, 610, 국보경찰은 파룬궁을 박해하여 정치적인 자본을 건져 올리려는 망상을 꾀했다. 전국적으로 소위 ‘전화율’을 높이기 위해 양심을 어기고 수치와 등급을 나열하면서, 수련자들에 대한 잔혹한 탄압에 박차를 가했다. 박해는 전국적으로 진행되어, 각계각층에 있는 파룬궁수련생에게 파급됐는데, 안양, 악비 고향은 전국에서 박해의 중점 재해구로 됐다.

각 지역에서 청원하러 온 파룬궁수련생은 안양 중공요원에게 불법적으로 체포되고 감금되어 혹독한 구타를 당했으며, 노동교양처분을 받았으며, 거금을 갈취당하거나 심지어는 젊은 생명을 잃었다.

(1) 산둥성 랴오청시(聊城市) 썬현(莘縣) 파룬궁수련생 장진중(張震中)은, 산둥 공업대학 관리학원에서 품성과 학업이 모두 우수한 본과생으로, 선량하고 총명하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뛰어난 인재여서 뭇사람의 칭찬을 들었다. 그는, 왕펑웨이(王鳳偉) 등 4명의 대법제자와 함께 2001년 5월 탕인에서 사람들에게 파룬궁 진상을 알리다가 악경(사악한 경찰)에게 납치돼 탕인현 간수소로 납치되어 갔다. 부소장 리아이민(李爱民) 등 악경은 주먹으로 발로, 전기 몽둥이로 혹독하게 구타하고 혹형으로 그들을 심문하여 장진중이 끌려나갈 때 이미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완전히 달라졌고 매우 초췌해졌다. 악경은 그를 걸상에 수갑으로 채워놓고 잔인하게 수도 호스를 (목구멍에 ) 삽입했다. 앞서 네 번을 시도하여 삽입하지 못하다가, 다섯 번째 강제로 삽입할 때 장진중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매우 빨리 호흡을 멈췄다. 22세밖에 안 된 그는 이렇게 음식물 강제주입 중에서 사망했다.

당국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사망한 사람이 불행하게 강에 빠져 죽었다는 가짜 정보를 만들어 신문에 실었다. 그리고 주인 없는 시체로 처리했다. 천도(天道)는 큰 그물 같아서, 비록 그물눈이 성긴 것 같지만, 악인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베이징에 있는 장진중의 친척이 신문에서 이 가짜 소식의 기사를 읽게 되었고, 사진을 보니 바로 장진중이었다. 그러나 장진중의 부친은 도저히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탕인 간수소로 사람을 찾으러 갔을 때 경찰은 감히 인정하지 못했다. 장진중의 부친은 아들에게 공정함을 찾아주기 위해 탕인에서 소송을 진행하려 했는데, 법관이 이렇게 말했다. “파룬궁의 원한적인 사안임은 분명하나, 그건 장쩌민이 내린 명령이다.” 누가 감히 소송을 받아들이겠는가? 누구도 감히 사건을 접수하거나 수리하지 않았다. 장진중의 부친은 1만여 위안을 빌려 정황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아들이 간수소에서 박해로 사망한 후의 시체 사진을 얻었다. 그리고 증인 왕펑웨이 등도 확보했다. 탕인 간수소와 공안국은 이러한 사실 앞에서야 비로소 인정했다.

张震中

장진중(張震中)

(2) 왕펑웨이(王鳳偉. 女)는, 랴오청시 씬현 청관진 안좡촌 대법제자이다. 그녀도 탕인 간수소에서 악인에게 여러 차례 구타와 전기 몽둥이 찜질 등 박해당했는데, 두 손을 끈으로 등에 단단히 묶였고, 호랑이 의자에 앉히는 등의 혹독한 고문으로 여러 번 혼절했다. 그랬어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면 늘 주변 사람에게 홍법했다. 그녀는 수련 전에 간 경화로 복수가 차는 말기증세로 병원에서도 치료할 수 없다고 했었다. 그때가 1997년으로 운 좋게 대법을 만나 건강을 되찾은 그런 경력이 있다. 왕펑웨이는, 18일 동안 단식했고, 씬현 간수소로 이송됐는데, 그는 이미 피골이 상접하여 마지막 목숨만 남아 있었다.

2002년 정월, 왕펑웨이는 진상 현수막을 걸다가 다시 붙잡혔다. 그녀는 이번에 7번째로 감옥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녀가 매번 (납치되어) 박해당한 것은 단지 사람에게 진실한 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2002년 11월 30일 간수소에서 고문 박해로 사망했다. 향년 40세였다.

王凤伟

왕펑웨이(王鳳偉)

(3) 장진중 그리고 왕펑웨이와 함께 악비 고향에서 대법을 실증한 다른 한 여자 대법제자(박해로 그녀의 이름을 밝히기 어렵다)는, 탕인 간수소에서 부소장 리아이민의 뾰족구두로 연속해서 머리와 늑골을 구타당했다. 그녀의 얼굴 모습은 완전히 변형됐는데, 얼굴 반쪽이 검은색으로 변하여 살인지 핏자국인지 분간키 어려운 지경이었으며, 한쪽 눈은 잘 볼 수 없었고, 늑골은 계란크기의 뼈가 튀어나왔다. 악한 승냥이 같은 십여 명의 무장경찰관들은 미친 듯이 전기 몽둥이로 전기 찜질을 하고 혹독하게 구타했다. 이들이 구타한 4명의 파룬궁수련생의 몸과 얼굴은 전부 피였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신발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악경은 그들의 등을 밟고 그들의 얼굴을 땅으로 향하게 하고, 두 손을 반대방향으로 등을 향하게 한 후, 매우 가는 비닐 끈으로 살이 파이도록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당긴 후 다시 발로 찼다. 그리고 그 상태로 감방으로 끌고 갔는데, 한 수련생의 무릎에선 뼈가 드러났다.

         

演示图:细塑料绳紧勒捆绑

시연사진- 가는 비닐 끈으로 단단히 묶다

(4) 푸훙샤아(付紅霞. 女)는, 대학전문문화, 허난 푸양시 열전공장 직공이다. ‘4·25’ 후 그녀와 많은 수련생은 자발적으로 탕인현, 안양시, 허난성의 내신내방 사무실로 청원하러 갔다. 그녀는 2001년 봄 납치되어 비밀리에 3년의 노동교양처분을 받고, 정저우 스바리허 노동교양소에 감금됐다. 감금된 후 자신의 숭고한 신앙을 견지하기 위해, 무수한 구타와 욕을 먹었고, 수차례 단식으로 박해에 항의했다. 그녀는 두 차례에 걸쳐 야만적인 음식물 강제주입을 당하기도 했으며, 긴긴 2년의 세월 동안 잔혹한 고문 박해로 인해 병원에서 심한 흉부복수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자 노동교양소 측은 책임질 것이 두려워 푸훙샤아를 이른바 보석형식으로 출옥시켰다. 그러나 노동교양소 측은 보살핀다는 구실로 시 610과 결탁하여 여러 번 집에 찾아가 괴롭히며 압력을 강화했다. 2010년 3월 3일 중공의 잔혹한 박해를 수차례 당한 푸훙샤아는 억울하게 인간세상과 하직했다. 향년 45세였다.

付红霞

푸훙샤아(付紅霞)

(5) 양중겅(楊中耿, 이명은 장양)은, 저장성 루이안시 마위진 파룬궁수련생이다. 허난성 산먼샤아시에서 법을 얻었으며, 산먼샤아 보도소장이었다. 1999년 7월 3일 ‘허난일보’에 대법을 공격하는 글 한 편이 실리자, 그와 기타 몇 명의 소장과 보도원은 허난성 내신내방사무실로 찾아가서 청원하며 사실의 진상을 똑똑히 밝혔다. 7월 6일, 안양 악비 고향에서 파룬궁 창시인 리훙쯔 (李洪志) 사부님께서 악비 사당에 남긴 시비가 훼손됐다는 말을 듣고, 양중겅과 여러 명의 파룬궁수련생이 안양시 내신내방 사무실로 청원하러 갔다.

양중겅은, 2013년 6월 24일 허난 정저우에서 다시 한 번 중공 경찰에게 붙잡혔으며, 단 4일 만에 고문 구타로 사망했다. 향년 38세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참혹한 박해를 당하게 되자, 정신적인 타격의 놀라움과 비통한 심정으로 혼절했다. 현재까지 언어기능을 상실한 상태로 있다.

杨中耿

양중겅(楊中耿 )

맺는말

사악의 무리는 무리하게 사존의 시비를 훼손했고, 잔혹하게 수련인의 육체를 해쳤다. 그러나 대법도의 사부와 대법에 대한 반석같이 견고한 마음과, 금강부동의 바른 믿음은 움직일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바른 믿음에 대한 박해는 종래로 성공한 적이 없었다.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발동한 장쩌민과 중공의 악당도 반드시 역사의 치욕으로 기둥에 못 박힐 것이다.

우수한 인재인 장진중 등 무수한 대법제자가 이 신성한 땅 – 탕인에서 행한 법 실증의 거동은 세상 사람들을 진감시켰다. 역사는, 그들이 청춘과 생명으로 써놓은 휘황의 편장을 기재할 것이다. 뜨거운 피와 붉은 마음은 우주를 투명하게 비추며, 호방한 기개와 영웅적 혼백은 음매(陰霾-어두침침한 흙먼지)를 깨끗이 씻어냈다. 만고의 기연은 사존과 악비의 고향을 이어놓았고, 사존께서 악비 고향에 남기신 영한의 시편의 글과 행에는 빛발이 사방으로 뿌려지며 천기를 품고 천추로 읊어질 것이며, 천추만대에 길이 남을 것이다…

악비(岳飛) 묘를 거닐며

비장한 역사는 유수처럼 흘러가고

호기 충혼만 세상에 남겼구나

천고의 옛 묘 마음 쓰린 곳

오로지 단심(丹心)만이 후세 사람 비추네

악비 고향의 사진 자료:

原立在岳祠正堂门前东侧用师尊手迹刻下的诗碑

원래 악비 사당 정당 문 앞 동쪽에 사존의 친필로 새겨진 시비.

迫害前岳飞故里岳祠的学法点

박해 전 악비 고향 악비 사당의 법공부장.

修建后的岳飞故里大门

다시 시공 후의 악비 고향의 대문.

修建后的岳飞故里大门

다시 시공 후의 악비 고향 대문.

修建后的岳飞故里忠魂祠

다시 시공 후의 악비 고향의 충혼 사당.

忠魂祠内岳飞塑像岳飞正在书写气吞山河的《满江红》詞

충혼 사당 내의 악비 조각상, 악비가 산하를 삼킬 듯한 기세로 ‘만강홍’ 사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孝母祠塑像:岳飞和夫人为病中老母侍奉汤药]

모친에게 효도하는 사당의 조각상 – 악비와 부인이 병환 중에 있는 모친에게 탕약을 올리고 있다.

문장발표 : 2014년 2월 11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신수련생마당>온고명금(溫故明今)>사부님의 은혜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2/11/287534.html
영문위치 :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4/2/22/1455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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