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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껏 ‘병’이 낫지 않을까?

글/중국대륙 탕산대법제자

[밍후이왕]

제자: 저희는 대만 제자이며 법을 얻은 지 여러 해 되었습니다. 남편 동수와 함께 신사신법(信師信法) 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있으며, 대법은 병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수련인의 세포는 모두 고에너지 물질로 전화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을 얻기 전의 통풍이 줄곧 낫지 않고, 최근에는 관절이 여전히 몹시 아픕니다. (뭇 사람 웃음)

사부: (웃으심) 수련인은 모두 알고 있는데, 당신이 오직 정진하기만 하면, 당신의 신체는 곧 변화가 발생하는바, 사부 역시 당신을 조정해줄 것이다. 사부 이 사람 신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부의 법신이 하고 있다. 당신이 수련해서부터 현재까지도 낫지 않았다면, 당신은 정말로 씬씽(心性)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 집착하는지, 어디를 마땅히 잘 수련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라. 이것은 정말 개인 수련문제이다. (박수)[1]

이 문답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웃었다. 나는 수련생이 이런 질문을 한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에 나도 이 문제로 계속 곤혹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질문을 할 때 사용했던 단어도 지극히 비슷했다. 이 문제에 대한 나 개인의 옅은 인식을 말함으로써 수련생을 도와 마음의 매듭을 풀고자 한다. 이 문제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는 수련생이 적지 않을 것이다.

편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글에서 “당신”이란 2인칭을 아주 많이 쓸 것인데, 아마도 아주 부담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수련생들이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당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사상 속에서 사람의 관념으로 문제를 생각하는 ‘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인식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 자신이 놓인 상황은 반드시 우리 수련 상태를 진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아주 많은 때에 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표면만 수련하여 명백해진 이치 역시 너무나 옅기 때문이다. 우리가 입으로는, 대법은 병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안다고 하지만 정말로 알고 있는가? 사실 정말로 아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말씀하셨고 책에서도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씌어있어, 마치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의 표면은 이렇게 알고 있다. 마치 한 수련생이 말한 것처럼, 사부님께서는 모두 명백히 말씀하시어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없고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짜로 믿지 않아서 비로소 이런 문제가 나타났고 또 문제가 나타났어도 정념정행으로 대하지 못하고 있다.

법회문장에서 한 수련생은 파룬궁(法輪功)의 건강증진 상황에 대해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자신도 이 조사에 참여했다고 적었다. 그 당시 절대다수의 병세가 모두 나아졌지만 일부 병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사표에 100% 나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적고 난 후 정말로 모든 증상이 전부 사라졌다. 왜 이럴까? 나는 이것이 바로 사람 표면이 알고 있는 것과 수련인 내심에서 법에 대한 단호한 믿음은 구별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00%로 쾌유된 원인은 그 조사표 때문이 아니고 법을 얻고 이득을 얻은 모든 이들은 자신이 이미 병이 없다고 100%로 믿어서가 아닐까.

사부님께서는, 수련인에게는 병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우리가 표면적으로는 모두 이렇게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정말로 믿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또 당신에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진짜로 믿는지, 아니면 정말로 아픈 그 느낌을 진짜로 여기는지를 묻고 싶다. 만약 정말로 사부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왜 이 환상을 진짜라고 말하고 또 그것이 아픈지 아프지 않는지를 느끼게 되는가?

가끔 나는, 내가 그때 조사에 참여했다면 단연코 100%라고 적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일면은 우리로 하여금 진(眞)을 수련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여기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비록 대부분 증상은 모두 나아졌지만 가장 집요한 그 요추추간판은 여전히 ‘진짜로 아프다’! 지금에야 비로소 사람의 표면에서 문제를 보았고, 사람의 관념으로 문제를 생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근본에서 속인의 관념을 개변하라고 알려주셨다. 법리가 얼마나 명백한가 한번 보면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행하기까지는 여전히 천리의 차이가 있다!

위에서 이른바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사유는 사람마음의 생각이 아닌가? 수련생은 자신이 병이 있는데 낫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다. 속인사회 이 환상을 진실로 여긴 것이다. 만약 이 통증을 진짜라고 생각하면 다리에 분쇄성 골절이 되도록 구타를 당했던 그 수련생은 어떻게 감히 가부좌를 틀고 연공했을까? 박해로 유방이 괴사되어 큰 구멍이 난 수련생은 움직일 수도 없는데 감히 팔을 펼 수 있었을까? 이러한 수련생들과 비교한다면, 나는 또 이것을 안다 저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당당하게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우리는 입으로, 이것을 안다 저것을 안다고 말하는데, 무엇을 진짜로 안다는 것인가? 가끔 우리 자신은 내심에서 진심으로 믿는다고 느끼어도 가능하게 또 그 ‘진짜로 아픈’ 가상이 나타날 것이다. 내가 볼 때, 그것은 마의 교란이거나 혹은 사부님께서 우리의 단호한 정도를 보시려고 배치하신 고험이다.

사실 명백히 말하면, 근본 상에서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신이 사부님을 믿었고 법을 믿었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더 깊게 한번 파보면 아마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단지 사람 표면에서 대법 법리에 대한 신복이지, 수련인 내면의 대법에 대한 단호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당신이 정말로 깨닫고 이 이치를 알았다면 또 원인 모를 그 통증을 위해 마음을 움직이겠는가?

믿지 않으면 우리 다시 자세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떻게 이 대법에 들어왔는가. 또 무슨 원인으로 자신은 여기에 남겨졌는가? 나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 후 발견했는데, 시초에 나는 한약 양약으로 치료를 했지만 요추 추간판탈출증을 치료하지 못해 기공을 접했다. 기공에서 자신의 병을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속인이 인식하는 높고 깊은 것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나는 진정으로 좋은 공법을 찾으려고 생각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의 많은 의혹을 풀어서 자신으로 하여금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당시 명확한 수련의 개념이 없었다. 96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만나 단번에 모든 것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병을 치료하겠다는 강렬한 마음을 덮어 감추었다. 왜냐하면, 사부님께서는 법속에서 병을 치료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배우면 안 된다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람 표면은 물론 “알고서” 더 이상 병을 치료하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법이 사람에게 수련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고 오로지 수련만 하면 사부님께서 나의 병을 치료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수련하려면 첫 일보가 바로 신체를 잘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련생들이 이런 생각을 본다면 무슨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겠는가? 이렇게 대조해보면 위에서 나의 그 생각의 문제점을 보아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련한 후 자신의 병을 해결할 수 있다는 집착을 숨기고 있어 수련목적이 불순했기 때문이다. 만약 “수련하려고 하면 그럼 수련하라.”[2] 이 말씀대로 한다면 그것이 진짜 통증인지 가짜 통증인지에 대해 신경을 쓰겠는가? “남편 동수와 함께 신사신법(信師信法) 하며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있으며”[1],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법시기가 대법제자에 대한 요구에 따라 수련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프고 아프지 않은 것이 우리 수련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우리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것이 모두 가장 좋은 것이라고 알고 있지 않는가! 만약 그것이 엄중하여 우리가 세 가지 일을 하는 것까지 교란한다면 안 된다. 우리는 엄숙하게 그것을 정념으로 제거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에서 나온다.”[2] 나는 이것은 일체 속에서 체현된다고 이해한다. 모두다 그 일념이 수련인의 속인 관념을 개변한 후의 정념인가를 본다. 수련생의 이 “통풍이 계속 낫지 않습니다.”와 같이, 당신의 첫 번째 일념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얼거나 뜨겁거나, 고질병이 도지거나 혹은 어찌하든 간에 여전히 법에서 좋은 일이라고 인식하였는가. 소업이든 사악의 교란이든 모두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제고하는 좋은 기회이다. 만약 당신이 사부님의 법에 따라 이렇게 문제를 보면, 아마도 그 통증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질문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관건은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수련인의 정념인가 아니면 사람의 관념인가.

자신의 사람관념이 아직 개변되지 않았음을 믿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또 이렇게 가상할 수 있다. 만약 사부님께서 법을 전하시던 시초에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한 신기한 효과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난치병환자가 완쾌한 기적이 없었다고 하자. 다시 말해서 사부님께서 시초에 만약 대법의 법리만 말씀하시고 손으로 누구의 병도 치료하지 않으셨다면, 시초에 배웠던 수련생들은 모두 이렇게 주저 없이 들어올 수 있었을까? 또 이렇게 단호하게 걸어 나갈 수 있었을까? 만약 그럴 수 없었다면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만 사실이다.’란 관념이 개변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근본에서 속인의 관념을 개변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나를 놓고 말하면, 속인의 관념이 아직 완전히 개변되지 못한, 아주 은밀하게 숨어있는 표현 하나가 있다. 바로 무슨 물건이든 모두 대비로 남겨두는 것이다. 이는 수련을 갓 시작할 때 좋은 습관이고 장점이라고 여겼고, 이 속에서 실리를 얻는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수련에 들어서서 대법책을 구입해도 나는 모두 2인분으로 구입했는데, 이후에 중국공산당(이하 중공) 사당이 박해를 하면(그 당시 늘 대법은 좋다고 여기지만 사당의 의식형태와 대립되어 사당이 언젠가는 가만두지 않고 박해할 것이라고 느꼈음) 그래서 책을 훼손할 때 나에게는 또 한 세트를 대비용으로 준비했던 것이다. 후에 정말로 박해가 발생했는데, 그때 나는 아주 득의양양했는데, ‘당신이 비록 전 세트의 서적을 몰수해도(당시 상황에 부응하려고 한 권과 그 외 몇 장만 제출함) 당신은 내게 또 한 세트가 있다는 것을 생각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었다. 지금에야 비로소 인식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자신이, 사부님과 대법을 백퍼센트 믿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는 사부님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따라 주저 없이 수련을 단호히하는 것에 최대의 장애였던 것이다.

만약 100% 사부님을 믿고 법을 믿는다면, 법의 고귀함을 알게 되어 생명으로 법을 수호할 것이다. 글자 한 개, 종이 반 장도 사악에게 바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의 관념으로 대법을 개인물품처럼 대했는가? 어찌하여 여지를 또 남겨두었는가? 만약 사부님과 대법을 100% 믿었다면, 시초에 수련생이 나에게 베이징에 들어가 정법하자는 연락을 했을 때 “나는 아직 명백히 깨닫지 못했으니 잘 생각해보고 다시 결정하겠다.”는 말로 구실을 대며 미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은, ‘만약 베이징에 들어가 정법이 안 된다면, 사람 속의 일체 역시 잃을 것이고, 자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런 관념이 없었다면 수련생과 같이 결사의 각오로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대법을 실증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이렇게 말하는데, 우리 자신에게 어떠한 상태가 표현되든지 그것은 반드시 수련상태의 진실한 반영이다. 당신이 사부님을 백퍼센트 믿는다면, 백퍼센트 대법제자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오늘 백퍼센트의 대법제자의 상태가 아니라면 당신이 사부님에 대해, 대법에 대해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설명한다. 때문에 당신은 반드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당신은 정말로 씬씽(心性)에서 문제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 집착하는지, 어디를 마땅히 잘 수련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라. 이것은 정말 개인 수련문제이다”[1]

물론 또 이러한 일종의 정황이 있을 것이다. 바로 수련 중에 잘못을 행했고, 심지어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서, 사람마음으로 사부님을 생각하고 사부님께서 나를 상관하지 않고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실 거라고 의심한다. 사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상관하시고 상관하지 않으시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정말로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겼는가의 문제이다. 당신이 정말로 지금부터 시작하여 일마다 모두 자신을 연공인으로 여길 수 있고, 일마다 모두 연공인의 표준으로 가서 행한다면, 당신은 또 사부님께서 나를 상관하실까 상관하지 않으실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겠는가?

조금 혼란스럽게 말했을 수도 있지만, 다만 이런 인식을 교류하여 수련의 초석으로 삼고자 한다. 법리가 청성한 수련생들의 심도 있는 교류를 끌어내어 이 부분에서 수련생들의 오랜 기간의 곤혹을 해결하고자 한다. (허스!)

주:

[1] 李洪志사부님 경문:‘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2] 李洪志사부님 저작:‘전법륜(轉法輪)’

문장발표:201년 2월 27일
문장분류 : 수련마당
원문위치 :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4/2/27/28812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