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고등교육을 받은 대법제자다. 대법이 박해당하기 전 속인사회에서 남들이 흠모하는 직장과 일정한 사회적 지위가 있었다.(그때 나는 직장에서 가장 젊은 처장급 간부였다.) 그리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다.
그러나 1999년 7월 대법에 대한 사악의 박해가 시작된 후 나는 진상을 알리다가 노동교양소에 감금됐고 나중에 또 좋은 직장을 핍박을 받아 포기했으며 가족인 수련생이 사악에게 붙잡혀간 후 가정이 흩어져 나는 매우 어려운 상태에서 몇 년간 생활했다. 처음에 나는 줄곧 이런 상태를 나의 의지력에 대한 연마로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고생을 겪는 능력이 줄곧 매우 강하지 않았고, 수련 전에 명리에 대한 추구도 매우 강했기에 나에게 이것을 잃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며 또 내가 명리심을 철저히 내려놓는지 보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정이 너무 심해 가정이 흩어지는 과정을 통해 정을 닦아 버리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관념의 영향으로 나는 감히 사부님께 도움을 청할 수 없었고 사부님께 더욱 많은 재산과 지위, 혹은 가정의 재구성을 바라는 것이 너무나 큰 집착이라 여겼다.
끊임없이 자신의 이런 집착과 사람 마음을 깨끗이 제거하는 과정 중에 처음은 뼈를 깎는 아픔이었고 나중에는 “잘라버리는 것은 자신이 아니요 모두가 미혹 속의 어리석음이로다”[1]를 체험하게 됐으며 나중에는 갑자기 이런 것을 인식하게 됐다. 사실 사부님께서 일찍 하신 말씀인데 우리는 ‘잃음’이나 ‘고생을 겪는다’는 방식으로 수련하는 게 아니며 사실은 사람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고 또 집착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동한 층차의 수련자에 대해, 법은 그에 대해서도 부동한 층차의 요구가 존재한다. 버림은 속인의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의 체현이다. 만약 정말로 탄연(坦然)하게 버릴 수 있으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라면, 실은 이미 그 한 층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련은 곧 제고를 위한 것으로, 당신이 이미 이 집착을 버릴 수 있다면 왜 집착을 두려워하는 그 자체도 버리지 못하는가? 누락이 없이 버린다면 그것은 더욱 높은 버림이 아닌가? 하지만 수련자 또는 속인은 근본적인 버림마저도 하지 못하면서 역시 이 이치를 담론하는데, 그것은 집착심을 버리지 않기 위해 구실을 찾아 난법(亂法)함에 불과하다.”[2]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오직 내가 집착심을 내려놓지 않고 구실을 찾아 명리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완전히 사부님께 내가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전문 교육을 받은 적 있고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마땅히 있어야 할 지위와 재산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사람마다 자신의 운명이 있다’를 고려하더라도 박해 전에 나는 이미 매우 좋은 생활수준에 있지 않았는가? 바로 박해가 이 일체를 개변해놓았고 절대로 내가 마땅히 이렇게 가난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구세력이 경제적으로 끊어버리고 정신상에서 박해를 하는 것으로, 소위 개인 수련의 제고라는 명분으로 나에 대한 교란을 진행해 대법제자의 숭고함과 아름다운 일면을 펼쳐내지 못하게 했다. 내가 빈궁해지자 주변의 선량한 사람도 동정과 가련함을 표시했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피하거나 멀리했다. 비록 자신이 일찍 사람의 정으로 인한 따뜻함, 차가움에 이끌리지 않으나 이런 상황은 심하게 그들에 대한 구도를 교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내가 자신과 가족이 박해당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주변의 정념있는 사람을 삼퇴시켰으나 필경 일부 사람은 사악에게 중독됨이 비교적 깊거나 혹은 정념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구세력이 사악을 이용해 그들을 박해하려는 결과물이 아니겠는가? 사부님께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시며 때문에 대법제자도 이것을 인정할 수 없다!
구세력의 음모가 명백해진 후 나는 발정념으로 이런 교란을 깨끗이 제거했다. 아울러 사부님께 나의 수련의 길과 생활상의 일들을 주도하시고 배치하시기를 청했다.
매우 빨리 일들이 개변을 가져왔다. 몇 년 후 생활환경은 철저히 개선됐다. 우선 가족들과 연이어 함께 살 수 있었고 이어서 사부님께서는 매우 합당한 일자리를 우리에게 배치해주셨다. 가장 신기한 것은 사부님께서 매우 낮은 가격으로 조건이 매우 좋은 집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것도 새집을. 신기함이라 함은 나는 전혀 이런 기회가 생기리라 생각하지 못했고 완전히 사부님께서 한걸음씩 나를 인도하여 얻게 된 것이다. 최근 부모님(수련생)과도 함께 살 수 있게 됐고 아울러 모두가 법을 실증하고 진상을 알릴 수 있는 매우 좋은 환경이 마련돼 매일 중생구도의 기회가 있게 됐다. 매일 수련을 견지하면서 안정되게 법 실증의 길을 걷게 됐고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사명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대법제자 신체에 대한 구세력의 박해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지 나의 생각을 말해보련다. 최근 교류 글에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한 것 같다. 어려서부터 나는 몸이 건강하지 않아 크고 작은 병이 끊임없었으며 늘 주사를 맞고 약을 먹었다. 그리하여 어려서부터 신체의 불편함이 버릇처럼 돼버렸다. 수련 후 큰 병은 모두 사라졌으나 작은 병이 여전히 존재했고 그러나 생활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아 중시하지 않았다. 수련하면서 또 몇 차례 큰 병업 고비를 넘겼으며 모두 신사신법(信師信法)의 정념으로 지나왔다. 그러나 몇 년간 늘 소위 ‘소업’의 표현이 나타났고 나는 ‘수련인은 신체의 각종 반응에 대해 마땅히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는 일념을 품었다. 그러다가 사부님께서 올해 뉴욕 법회에서 이 문제를 명시해서야 나는 비로소 경각하게 됐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현재 소업이든, 사악한 요소가 교란하든, 모두 구세력이 한 것이고, 모두 같은 것이며, 부르는 방법이 다르다. 구세력이 한 일을 나는 모두 부정하고, 나는 모두 승인하지 않으며, 대법제자가 이런 고통을 감당하게 하는 일은 더욱 마땅히 있어서는 안 된다.”[3] 나는 깨달았다. 표면으로는 작은 일이고 내가 법을 실증하는 일에 큰 영향이 없으나 마땅히 인정하지 말아야 하며 이 역시 구세력의 일종 박해방식이며 단지 더욱 은폐적인 방식을 채용했을 뿐이다. 만일 내가 이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이런 교란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일 사악의 이용을 소홀히 하여 진일보 박해받게 된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손실을 입게 된다.
예를 들면 최근 생리가 빈번해졌고 양도 전에 비해 많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일상생활에도 별 영향이 없었으므로 그냥 넘어갔다. 그러나 몇 번은 깊은 인상이 있었다. 바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생리가 왔고 그때에 왜 또 나타났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그것을 관계하지 말자고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했으면 무엇을 했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나에게 무슨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한 달에 두 번이나 생리가 나타나 그제야 나는 정상이 아님을 인식했다. 생리는 월경이라 하며 마땅히 한 달에 한번이어야 한다. 어찌 반달에 한 번씩이겠는가? 사부님께서 노년 부인들의 생리에 관련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생리가 오지만, 많지 않을 것이며, 지금 단계에서 쓸 수 있는, 고만한 정도면 되는데 이 역시 보편적인 현상이다.”[4] 이는 생리의 양도 마땅히 많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생리가 정상이 되도록, 구세력이 나의 몸에서 어떤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일념을 내보냈다. 결과 그 달의 생리는 정상으로 됐다.
다른 한 가지 일은 몇 년간 내 얼굴이 많이 노화됐다. 처음에는 자신이 용모에 대해 집착해서인가 혹은 색욕심을 깨끗이 버리지 않아 가져온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는 과정 중에 깨달았다. 개인 수련에 집착이 있더라도 오직 결심을 내리고 닦아내면 되는 것이며 절대 이런 교란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명쌍수의 공법이며 사람들이 우리가 동년배에 비해 많이 젊은 것을 보아내야 정상인 것이다. 하물며 정법수련시기의 목적과 의의는 일반 수련과 다르지 않는가. 우리가 하는 일은 마난 중에서 집착을 버리는 게 아니며 대법제자의 선량함, 건강함과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이 대법 수련과 대법의 신성함,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꼭 이 점을 명백히 인식해야 하며 구세력이 어느 면에서든지(신체, 경제, 정신, 명예) 우리의 틈을 타고 박해하거나 교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전 방위적으로 대법의 아름다움을 체현해야 하며 더욱 많은 중생이 구도되게 해야 한다.
아마 어떤 수련생은 생각할 것이다. 대법제자로서 각 방면에서 모두 우수하고 아름다워야 하는가? 나의 이해로는 “그렇다, 바로 그러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시 나는 표면의 신체를 전화(轉化)시켜 수련이 잘된 부분과 협조하게 하여 신체로 하여금 수련 중에서 사람의 상태를 이탈하게 하고, 수련 제자로 하여금 자신의 정념으로 사람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게 하려고 했다. 바로 이런 문제로 말미암아 그들과 1년이라는 시간을 맞섰다. 그때 나는 바로 이 일로 인해 나와서 전하지 않았으며 1년의 세월을 맞섰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것들이 견지하는 것을 승인할 수 없고 장래에도 나는 절대 승인할 수 없는데,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과 관련된 일체 생명은 모두 이 때문에 장차 빚을 갚는 중에 해체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설령 역사를 되돌려 다시 시작한다 해도 나의 일을 완성해야만 한다. 이것은 정법 중에 필수적인 내용과 과정이며 이것은 법정인간(法正人間)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5]
사부님께서는 수련 중에서 우리의 신체가 사람의 상태에서 이탈하게 요구하셨는데 그건 신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신의 상태라면 각 방면에서 모두 우수하고 모두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지 전제조건이라면 우리는 확실히 그런 속인이 아름다운 생활에 대해 지향하고 추구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구세력은 왜 사부님께서 우리에 대한 이 배치를 막아서는 것을 견지하겠는가? 확실히 우리가 아직 그것들이 인정하는 완전히 ‘명리정’을 내려놓은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닦는 중에서 더욱 잘한다면 반드시 더욱 큰 능력으로 구세력의 가로막음과 교란을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하지 못하더라도 절대 구세력의 이런 파괴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충족한 자원과 능력으로 심지어는 신통으로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하고 더욱 많은 중생을 구도할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련인은 반드시 자신의 일사일념이 순정한지를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개인의 집착으로 대법을 이용하여 얻으려함은 모두 ‘망념’이며 심지어는 난법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진수(眞修)제자는 그 중의 차이점에 대해 명백할 것이다.
개인의 깨달음이며 부적할한 곳은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사: ‘홍음 2-고집을 버려라’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무루(無漏)’
[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로스앤젤레스 시 법회 설법’
문장발표: 2013년 10월 15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0/15/2812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