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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향해 찾아 마난에서 광명으로 나가다

글/ 대륙 대법제자 칭허(清荷)

[밍후이왕] 그날 수련생과 교류했는데 수련생은 정에 끌려 가정의 마난을 줄곧 잘 처리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들어보니 남편에 대해 원망이 좀 있는 것 같았다. 남편도 수련생인데 왜 수련생답지 않은 일을 했는가? 등.

수련생은 마난에 처해 있어 묻지 않아도 괴로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련생도 될수록 법리로 자신을 단속하려 하는 것 같고 남편과의 교류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반드시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수련생은 ‘내가 남편을 그렇게 많이 참아줬고 사부님의 법도 몇 년 동안 배웠는데 왜 아직 집착하고 깨닫지 못하는가?’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동시에 “그는 내 남편이므로 꼭 되돌아오게 해야 한다.”라는 등을 강조했다.

사실 언제든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법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어떤 정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는 설득한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개변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되돌아오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진짜로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법으로 자신을 바로 잡고 수련생의 교류와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지만 법만 받들고 마음속으로부터 개변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를 어떻게 수련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그에게 어떤 문제가 나타나든 매우 정상적인 것이 아닌가?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정을 가지고 수련생이 되돌아오게 하는 것은 이기적인 일면도 있고 또한 투쟁심과 밖으로 보는 요소가 있는 것이며 많은 경우에는 대법을 이용하여 자신을 개변하지 않으려는 사람의 마음을 덮어 감추려하는 것뿐이다. 마난 중에 있는 수련생은 이미 사실의 근원을 보기 힘들다. 오늘 특별히 자신의 일부 깨달음을 써내서 수련생과 교류하고자 하며 아직도 정의 마난 중에 있는 수련생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 중에서 “그러므로 앞으로 모순과 마주쳤을 때, 당신은 그것을 우연한 것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모순이 생길 때 갑자기 나타나지만,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것은 당신의 心性(씬씽) 제고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오직 자신을 연공인(煉功人)으로 여기기만 하면 당신은 그것을 잘 처리할 수 있다.” [1]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수련인이 부딪힌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닌 이상 우리가 가정의 마난과 마주친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며, 그것은 꼭 우리의 무슨 마음을 향해 온 것이고 우리가 반드시 제고할 요소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가 속인 속에서 수련하고 있기 때문에 부딪힌 일의 표현 형식은 속인 사회에서 발생한 일과 똑같은 것이다.

그럼, 같은 수련인인 남편에게서 제삼자의 가상이 나타났을 때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우선 자신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왜 이런 문제가 나타났을까? 이 일은 도대체 자신의 어떤 마음들을 향해 온 것인가? 왜 이런 일에 부딪히게 하는가? 우리는 자신에게 ‘왜’라고 더 물어봐야 하고 자신의 심성에서 많이 찾아봐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발생한 일이지만 사실 자신에게 문제가 이미 너무 많이 쌓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전에 한동안 나도 비슷한 문제에 부딪힌 적이 있다. 속인의 각도와 눈으로 보면 나와 남편은 어느 방면으로 비교해 봐도 차이가 너무 크고 갈라진다 해도 내가 먼저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남편은일을 오랫동안 내게 속였고 오직 나만이 오리무중 속에 빠져있었다. 어느 날 진상이 밝혀지자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렸고 정신도 거의 붕괴됐으며어떤 구실로 자신을 설득해야 할 줄 몰랐다. 머리에는 다만 이혼이란 두 글자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리 해도 이혼하려 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감각은 ‘수치와 분노로 참을 수 없다! (羞憤難當)’라고 형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날마다 갖은 방법을 다 써서 이혼하려고 발악했다. 사설탐정을 고용한 적이 있고 스스로 많은 시간을 이용하여 미행하고 증거를 찾아내 이혼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애를 썼다. 이혼함으로써 자신의 온몸의 억울함과 분노를 씻으려고만 했고 자신이 수련인이라는 것은 벌써 잊었으며 자신이 부딪힌 관과 난을 속인 중의 일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완전히 그 속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다.

자비하신 사부님의 거듭된 점화가 있는 다음에야 비로소 점차 이지를 회복했다. 원래 자신의 모든 나약함과 고난은 속인을 고민하게 하고 즐겁게 하는 ‘정’ 때문이라는 것을 점차 똑똑하게 알게 되었다. 쟁투심, 질투심, 원망심, 이기적인 마음, 소유욕, 화냄 등은 예외 없이 모두 ‘정’에서 파생된 물질이고 또한 우리가 제거해야 할 ‘마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깨달음과 깨달은 것을연마하여 없애는 것은 아직 매우 큰 거리가 있는 것이기에 ‘참음(忍)’은 첫 수업이 되었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 [2]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던 최초의 참음으로부터 완전히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없으며 억울함이 느껴지지 않게 됐다. 이 과정 중 괴로웠고 속으로 한번 또 한 번 발악했으며 정말로 한 걸음마다 뼈에 사무치는 아픔이었다.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그 ‘정’을 내려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참고 양보하며 선하게 대하는 동시에 반드시 자신이 없애버려야 할 그 마음들을 찾아내야 한다. 예를 들면 남편에 대한 원망심, 제삼자에 대한 질투심 등. 아니면 어찌 수련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일에 부딪히면 안을 향해 찾아야 함을 가르쳐주신 것은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 법보(法寶)이며 끊임없이 안을 향해 찾아야 만이 곤경에서 걸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갈수록 명백하게 깨달았다.

한번은 너무나 참을 수 없어 남편과 다퉜지만 다툰 후에 바로 후회해 눈물을 흘렸다. 안을 향해 찾아보니 여전히 남편에 대한 정을 내려놓지 못해 질투심과 원망심이 방해하는 것이고 평소 남편의 생활에 관심이 비교적 적었다. 이후로 다투지 않았지만 온종일 엎치락뒤치락했고 불평하며 계속 안을 향해 찾아보니 질투심이 아직 존재하고 체면을 차리는 마음과 쟁투심이 있었다. 또 이후에 집에서 그 여자를 만났을 때도 매우 편안하게 대면할 수 있었지만, 안을 향해 찾아보니 여전히 남편을 양해할 수 없었고 원망심이 있었으며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남편에 대한 선심은 아직 연마해내지 못했다. 이렇게 끊임없이 안을 향해 찾았다. 어느 날 갑자기 돌이켜 보니 원래 이런 마음들이 나를 잘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했다. 뜻밖에 마음이 그토록 가벼웠고 그렇게 투명하고 밝게 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이 정에 너무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 길을 너무 길게 걸었다.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는 이미 3년이나 지나간 뒤였다.

이따금 이 수련의 노정을 돌이켜볼 때 뜻밖에 내가 얻은 것은 내가 여태껏 얻으려고 해도 얻지 못했던 것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충실함과 가벼움, 태연함이었다. 다시는 ‘정’ 때문에 뒤죽박죽되지 않았고 다시는 ‘정’ 때문에 즐겁고 우울하지 않았으며, 감정의 속박이 없어지자 더욱 넓은 온화함, 이성,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너그럽고 도량이 큰마음을 가지게 됐으며 얼굴은 시종 자신감과 유쾌한 표정이었다. 이것은 황금으로도 바꿔올 수 없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분과 상서로움이다. 이것은 지금 세상 사람이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영원히 얻을 수 없다! 이제야 비로소 무엇이 ‘바다는 넓고 하늘은 가없다(海闊天空)’라는 것인지를 깊게 체득할 수 있었고 사부님께서 ‘전법륜’ 중에서 말씀하신 일거사득(一擧四得)이란 법리를 이해하게 됐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오직 대법 수련 속에서만이 얻을 수 있다! 이런 법리에 명백해진 후에도 계속 그 남편이란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미워할 수 없다, 진짜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이 그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은바로 자신이 걸어온 길, 얻은 교훈과 깨달음으로 수련생과 교류하려는 것이다. ‘정’에 대해 우리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집착해(아마 천 년, 만 년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신체의 매개 세포에 가득 채워져 있어서 비록 여러 해 법 공부를 통해 정(情)과 정(情)에서 파생된 물질에 대해 우리 모두 알고는 있지만, 지금까지 수련하며 제거하고 있다. 관건은 구체적인 일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그 속에 빠지지 않고 구체적인 일을 통해 자신의 부족을 찾아내 철저히 그것을 제거하는가 하는 것인데 이는 관건 중의 관건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물론, 난(難)이나 모순이 오기 전에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모두 당신에게 알려 준다면 당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그것은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흔히 갑자기 나타나는데, 이래야만 비로소 사람의 心性(씬씽)을 고험(考驗)할 수 있으며, 비로소 사람의 心性(씬씽)을 진정으로 제고하게 할 수 있다. 心性(씬씽)을 지킬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려면, 이렇게 해야 비로소 보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모순이 오는 것은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1] 개인의 이해인데 생활 중 나타난 모든 문제는 정말로 우리의 마음을 향해 온 것이다. 물론 사전에 누가 우리에게 “준비를 잘하라, 어떠어떠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어떠어떠한 마음을 없애야 한다.” 등을 말해줄 수는 없다! 우리는 수련인이기 때문이다. “바른 깨달음은 상사(上士)의 슬기에 의해서라” [3] 우리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복잡하고 진실치 못한 수수께끼 같은 현실 생활 속에서 깨닫고 해내야 한다. “일마다 대조하여 해내어야 수련이로다” [4] 사실 사부님은 법을 이미 매우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자신이 ‘진짜로 수련’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가 하지 않는가, 진짜로 일마다 ‘안을 향해 찾고’ 싶은가 싶지 않은가는 자신에게 달렸다.

오늘까지 걸어왔는데 우리는 누구도 다시 ‘정’에 속박당해 동요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구 우주의 위사위아(爲私爲我) 속성 중의 가장 더러운 물건이고 수련인의 사상경지와 거리가 매우 먼 것이다. 비록 내려놓을 때 매우 고통스럽지만 이런 고통은 속인 중의 할 수 없이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매우 큰 구별이 있는 것이다. 속인은 억울함과 고통, 달가워하지 않은 마음, 원망 심지어 평생 잊지 않겠다는 증오를 하고 내려놓는 것이지만 우리 수련인은 대선(大善)과 대인(大忍)으로 모든 좋지 않은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려놓은 것은 이기적이고 더러운 심리와 더러운 사상이지만 동시에 대법은 우리에게 무사하고 더욱 아름다운 모든 것을 주었으므로 같은 내려놓음이라도 정말 천양지간이다. 다른 것을 위함이 아니라 이점을 돌파하려는 것인데 우리가 내려놓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수련의 길에 고생 있음이 아니라 생생세세 업력이 가로막음이로다 마음 굳혀 소업하고 心性(씬씽) 수련하리니 영원한 사람 몸 얻어야 부처로다” [5] 우리가 사부님을 따라가고 싶어 하고 진짜로 수련하는 제자가 되고 싶기만 하다면 모든 관과 난은 다만 우리가 자신의 심성을 연마하는 시금석일 뿐으로서 이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대법은 우리가 고난을 겪고 천 년 윤회해 간신히 기다린, 생명을 구하고 구도 되는 법이지만 ‘정’은 우리가 ‘진선인(眞善忍)’에 동화하는 것을 방해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는 밧줄이다. 여기에 푹 빠져있도록 하게 하는 천 년의 이 부패물질을 버리고 대법의 법리로 착실하게 자신을 씻고 그 더러운 사람의 마음을 없애버려 깨끗하게 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것을 위해 이미 천 년, 만 년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홍음-대법공부’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홍음-착실한 수련’

[5]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인과(因果)’

문장발표: 2013년 9월 2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9/2/2789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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