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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 속에 있는 각종 망념에 대한 분석

[밍후이왕] 법에서 우리는 삼계내의 생명은 정(情)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애초에 수련으로 삼계를 벗어나려 했던 뜻있는 수련자 중에 나이가 지긋한 사람도 여전히 정 속에서 배회하며 자신의 정진의 발걸음을 느슨히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은 자아도취에 빠져 있고 자기 스스로를 고결하다고 여기며 만족해한다. 즉 스스로 어떤 경지에 도취돼 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선의 가장 큰 표현은 자비이다.”[1] 이러한 자비로 타인을 도울 때는 자신의 의도와 무엇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 그러나 정은 다른바 사사로운 정이 포함되는데, 정에는 선(善)도 있고 사사로움의 성분도 있어 이런 마음으로 타인을 도울 때는 선의적으로 한다 해도 얻어내려 함과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일단 자신이 어떤 대가를 지불했으나 거기에 마땅한 보답이 없다고 느껴지면 내심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에서 원망과 원한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육친정과 남녀지정은 모두 이러한바 속인은 정감으로 누군가를 좋게 하려 할 때 목적성은 모두 매우 강렬하다. 천만년 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원망해온 말들은 대부분 비슷하다. “내가 그(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었는데, 그(그녀)는 오히려 이렇게 나를 대하다니.”

우리가 느끼는 정 중에는 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연히 ‘구해낸 행복감’과 ‘얻지 못함으로 인한 고통’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구하는 마음이 나타나기만 하면 누락인데 필경 “잃지 않으면 얻지 못함이라”[2]는 법리가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함이 있는 생명은 경지의 제한을 받으며 구해온 것이 부처인지 아니면 마(魔)인지, 또 군자인지, 아니면 소인배인지는 구하는 자 스스로가 정 속에 있기에 똑똑히 분간해내지 못한다.

습관적으로 타인에게서 좋은 점을 얻으려 하다

무절제하게 타인이 자신에게 잘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이지적이지 못하다. 예를 들면 부모가 아이에 대해 얼마나 잘 대하든지 아이는 마땅한 것이라 생각하며 아울러 일단 자신의 감정을 잘 돌봐주지 못하면 사랑에서 원망으로 감정이 바뀌게 된다.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잘 대해줌은 마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그에게 수십 년 잘해주다가 한번만 잘해주지 못하면 부모를 원망하게 된다.

남녀지정도 역시 이러하다. 아내의 생일이라 남편은 선물을 사서 그녀를 기쁘게 해주려 했다. 스스로는 기분이 좋았으나 아내는 일찍 남편에게 뭘 사달라고 말한 적이 있어, 만일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물건을 사게 되면 남편과 싸우게 된다. 같은 일이나 결과는 판이할 수 있다. 사람의 구하는 마음으로 인해 아내는 행복과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며, 구하는 이 집착이 끊임없이 강화되면 그건 바로 탐욕으로 변한다.

때문에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감사와 은혜를 모른다. 그가 내심에서 모자람을 느끼기에 그에게 무엇을 주어도 적다고 생각하니 어찌 감사와 은혜를 알 수 있겠는가. 육친정과 남녀지정에서 감사와 은혜의 표현은 대다수 이러하다. 수련인도 이러한 사람 마음이 있다. 사부님께 조건을 내걸며 사부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제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행복에 대한 환상

사람 생명 경지에서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통제할 수 없으면 정에게 통제를 당한다. 남녀친구를 찾지 못한 속인은 속으로 장래에 사랑하는 배우자를 찾기를 흐뭇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그녀)를 어떻게 사랑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혼한 남녀커플을 보면 구절마다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어떻게 나쁘다고 원망하며, 특히 자녀가 있는 여성이 더 그러하다.

상대방을 너무나 이상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세상의 실생활은 모두 평범하며 심지어는 대부분 고난으로 가득하다. 많은 고난 중에서 사람들은 행복감을 풍부히 하려고 감정적인 문자와 영상으로 아름다운 일면을 부각시키려 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한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고 되새긴다. 상처받은 감정은 또 과거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회상하거나, 슬픈 애정가요를 듣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하기도 한다. 더욱 심한 자는 애욕으로 행복감을 느끼거나 환상적이거나 음탕한 영상물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 남녀는 이러한 애정소설과 애욕이 가득한 영화의 순간적인 다정다감함을 자신 미래의 애정관계에서 한 가지 표준으로 여긴다. 한 속인에게 무엇이 행복이냐고 묻게 되면 그는 꼭 영화에서의 어느 한 장면을 떠올린다.

가상적인 감정의 행복감을 자신의 진실한 실생활과 대비한다면 각종 불만이 있게 되며, 자신의 배우자는 어찌해도 이상적이지 못하게 보인다. 이렇게 유치한 생각을 갖고 있는 여성들은 적지 않으며 남자 친구를 찾을 때도 물질기초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돈 있는 상대를 찾았으나 나이가 많은 것은 싫고, 젊은이를 찾았으나 성숙되지 못한 것 같으며, 또 성숙되고 안정감이 있는 사람을 찾으면 자신을 즐겁게 해줄 수 없다고 여기고,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은 또 집안일을 하지 않는다. 여하튼 흠집을 끊임없이 찾아내며 나중에 고르고 골랐으나 결국은 여전히 가장 좋은 사람을 얻지 못했다고 여긴다.

정이라,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사람 자신도 아마 정확히 모를 것이다.

이상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이 정 중에서의 망념을 말했는데 실질은 삼계의 정을 간파해야 하며 반드시 정을 닦아버려야 똑똑히 보이게 된다.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 그 산속에 있기 때문이라네.’ 바로 그러한 것이다.

남녀지정을 내려놓지 못하며 마음속에는 이성에 대한 이상형이 있음에 대해

짧은 인간세상의 수십 년의 고독과 적막함마저 이겨내지 못하고 청심과욕(淸心寡欲)을 해내지 못한다면, 수련의 길에서 자신이 흠모하던 이성을 만나게 되면 사람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자신이 추구하던 진실한 사랑의 대상이라 여기게 된다. 사실은 모두 얻을 수 없는 이성친구이기에 마음속으로 환상으로 가공해 상대방을 자신의 이상 높이로 끌어올리게 된다. 그런 필력이 좀 괜찮은 남녀는 애모와 따뜻한 정이 담긴 문자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정말로 서로 마주하게 되면 깨지게 된다. 그리고 정말로 자신의 이상적인 이성친구라고 여겼으나 얻게 되면 그 신선함도 며칠 가지 못한다. 구하는 마음이 만족을 얻게 되어 신선감이 떨어지면 그냥 그저 그렇게 여겨지고 나중에 또 좋다고 생각되는 다른 이성을 만나면 계속해서 허튼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모두는 깨를 줍고 만족을 얻지 못해 수박을 주우려 함인데 달려가 수박을 얻었으나 수박의 ‘무게감’으로 다시 깨의 ‘가벼움’을 생각하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 마음을 포기하지 않은 정 속에서의 구하는 마음은 언제나 끊임없이 다음의 더욱 좋은 것을 환상하게 되며, 높은 표준과 환상으로 상대방을 요구하게 된다. 많은 이성 친구를 만나본 여자라면 경전 같은 한마디 말을 종합해내게 된다. “천하의 까마귀는 다 검더라, 하하” 수련의 경지에서 보면 속인이 아무리 이상주의라 해도 속인 그 경지에서의 그러한 좋음이며, 그 좋음이 아무리 좋더라도 사람의 경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남자 수련생의 중점은 욕망 끊기

남자 수련생은 진정으로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다. 왜냐하면 남자는 감정적으로 여자에 대한 의뢰심이 없기에 상처를 받아도 여자를 찾아 안위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남자가 결심을 내리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으며 이로부터 성(性) 이 방면의 기능을 사용하지 않을 때 자아존재는 매우 간단해지며 단지 살아가면서 수련하면 그뿐이다. 생활상 요구와 표준도 매우 낮아진다. 그런 무슨 명리에 대한 추구는 모두 사치로 생각되며 그런 허영심도 매우 약해지며 이성 앞에서 호감을 얻으려는 동력이나 생각이 없어진다. 수많은 사람 마음이 욕망을 끊어버림으로 인해 스스로 와해된다.

일부 친구를 찾으려거나 결혼하려는 사람, 자신의 내심에 물어보길 바란다. 사부님께서 이러한 길을 배치하셨는지? 친구를 찾으려거나 결혼하려는 것이 어떤 목적과 동기로 인한 것인지 물어보라. 결혼은 당신의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그러한 자신의 결혼에 불만족인 사람은 이혼하여 또 무슨 문제를 해결했는가?

세상에서 결혼할 조건이 구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 많은 생각은 다 헛된 생각일 뿐이다. 이 시기에 법리의 요구를 알기에 감히 쉽게 남녀문제로 착오를 범하려 하지 않으나, 완전히 색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해 쉽게 색욕심의 통제를 받게 된다. 장래에 결혼하려는 마음이 생기기만 하면 즉시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하려는 욕망을 내리 누를 수 없다. 이 사람 마음이 나오면 그런 색정적인 것을 보려는 이유를 찾은 것으로 인위적으로 색욕 이 방면에서 사상적인 물질이 강화된다. ‘색욕지심’은 사람이 색정적인 사진이나 영상을 보려는 색욕이란 이 생명 물질이 강화되게 통제한다. 그리하여 이 색욕지심을 끊어버리지 못해 여전히 그것이 더욱 크게 배양하고 있다.

남자의 생식기는 사실 완전히 자신 원신의 통제를 받는 게 아니다. 욕망을 끊어버리는 과정에서 스스로 느낄 수 있는데 많은 경우의 생리적인 반응은 자신의 원신의 지휘를 듣지 않는다. 착실히 수련하며 욕망을 끊어버리는 과정에서 마땅히 이 점을 알아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병이 아닌 ‘남성 병’이라 여길 수 있다.

나도 이러한 사람 마음에 봉착했다. 남자 수련생이 여자 수련생인 이성을 찾으려 하는데 필경은 수련이라 속인보다 좀 순결하리라 생각하며, 또 여자 수련생은 남자 수련생인 이성을 찾으려 하는데, 그가 수련을 잘해 남녀 색욕에 마음을 두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 사실 수련인의 사람 마음은 일부 경우에 속인과 마찬가지다.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순수한 여자, 순진한 아가씨를 찾고자 해도 아주 어렵다”[3] 중국의 전체적인 환경은 이미 이러하다. 여자가 모두 이러하니 남자는 더욱 저급적이다. 현재 색정적인 물건이 매우 많으며 속인 남편의 색욕지심이 중하다면 정말로 여자 수련인을 아래로 끌어내리게 된다. 그런 속인이 연구해낸 음란한 기교는 수련인이 조금의 신성함도 찾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현재 여전히 속인을 찾아 결혼하려는 여자 수련생은 정말로 깨어나야 하며 자신의 수련환경에 책임져야 한다. 남자 친구를 사귐은 손만 잡는 그러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이 없고 오직 자비라면 또 어떤 느낌일까?

욕망이 없고 구함이 없다면 가장 자유로우며 밖에서 어떤 사람이나 일에 봉착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반대로 일단 정에 물들면 곳곳마다 그를 잘 보살펴야 할 책임이 생긴 것으로 사회적, 가정적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사심 없이 타인을 위하는 높이에 도달하지 못하면 여자는 남편이나 아들을 대단한 인물로 만들려는 이상을 실현하려 하며, 이런 사람 마음의 관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곳곳마다 투정을 부리며 원망과 불만으로 중얼거리는 말을 잠자리에서부터 이튿날 눈도 뜨지 않을 때부터 또 시작한다. 같은 집안에서 생활하기에 이런 사람마음의 사상 물질은 피할 방법이 없다. 이런 가정문제는 독신일 때처럼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해결할 수 있듯이 대할 문제가 아니다. 그건 더욱 큰 심성 용량을 요구하며 법리에서 자비롭게 인내심 있게 인도하여 알게 해야 한다. 사실을 증명하는데 자비는 그때에 일정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나 지나면 여전히 그러한데, 필경 사람 마음은 자신의 착실한 수련을 통해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을 제거하지 않았기에 사부님께서 폭로시켜주시나 또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그리하여 반복적으로 용서하고 반복되며 순환된다.

사람은 물고기와 같고 정은 물과 같다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됐으나 속마음은 여전히 허튼 생각들이다. 물질 에너지에서 말할 때 사람의 육체 세포 입자의 미세함은 모두 정의 입자에 들어있으며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과 같다. 물고기가 물이 없는 육지 상태에 적응하기란 정말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조금씩 법으로 자신의 일사일념, 일언일행을 바르게 함이 필요하다.

가부좌 중에서 사상이 조용하지 않고 정으로 허튼 생각을 하는 것은 정의 입자 에너지가 자신의 사유를 좌우지하기 때문이다. 마치 물이 흘러가는 힘으로 물고기가 헤엄치는 데 충격을 주고 이끌어가는 것과 같다. 보기에는 물고기 스스로 헤엄치는 것 같으나 사실은 물의 흐름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진정으로 자신이 주재한 적이 없으며, 진정으로 마음에 잡념이 없다면 하나의 조용함이 만 가지 움직임을 제약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순정해지면 어떤 요소도 움직일 수 없다.

반대로 마음에 둘수록 자연히 어느 날엔가 잃을까 두려워하며, 또 많은 사람 마음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좋은 가정과 결혼이라 스스로 매우 아낄수록, 지나치게 마음에 둘수록 마음에서 더욱 내려놓을 수 없다. 가부좌 중에서 최근에 남편 혹은 아내가 어느 이성과 무슨 말을 했고 누구와 가까이하며 누군가를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 각종 근심과 의심인데 이러한 생각으로 연공하여 어찌 수련해낼 수 있겠는가?

자신은 이치상에서 명백해야 한다. 생명의 의지는 자유이며 마음을 무엇에 두고 좋아하는지, 오늘은 무엇을 좋아하고, 내일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모두 그의 자유이며 또한 그 혹은 그녀의 심성 경지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치상에서 상대방에게 윤리와 혼인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권고할 수 있으나 그것을 받아 들이냐는 상대방의 심성문제이며, 상대방의 심성문제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로서 걱정하고 조급해도 쓸모가 없으며, 아예 철저히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그렇다면 어떤 형식이든지 자신 수련의 결심을 동요할 수 없다.

구세력은 혼인가정 문제에서 손을 써서 누구를 해치려고 하면 정말로 손쉽다. 수련을 매우 착실히 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전반 환경을 자신의 심성으로 끌어올릴 수 있으며, 능히 자신의 공간장의 일체 바르지 않은 상태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비로소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2]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수련이 착실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쉽게 환경과 가정에 이끌려가거나 좌우지당할 수 있다. 수련기초가 그다지 좋지 않고 게다가 법공부 환경이 파괴되기만 하면 직선으로 아래로 떨어지게 된다.

‘동정심’을 남발하지 말자

오늘날 사회에서 첩이나 내연녀, 업소 여성 이런 류의 여자는 돈벌이를 다한 후 좋은 남자를 찾아 시집을 간다. 수련인은 절대 색욕지심으로 사람 마음의 선한 생각을 섞어 이런 사람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 자신은 자비심을 움직여 접촉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타인이 보기에는 색욕지심으로 인한 정신이 명백하지 못한 선택이며, 내심으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감사와 은혜로 대해주길 바라며, 또 상대방이 이후에 자신과 잘 생활해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같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함께 살면 가정에 모순과 마찰이 생기는 일은 피하기 어렵다.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여자는 가정에 모순이 발생하면 억울함 등을 자신의 친척 친구에게 말하며 친구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도록 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각종 남자와 접촉한 여자는 일단 가정에 모순이 생기면 다른 남자에게서 소위 심리적인 안위를 얻으려 한다. 아울러 장기적으로 쉽게 돈을 벌고 돈을 마구 쓰는 환경에 젖어 누군가와 고생을 함께 하며 생활을 하는데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

사람 마음을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은 환각이다

사람 마음을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으로 미래가 어떻게 좋을 것이라 상상함은 모두 환각이며 제멋대로인 생각으로서 실제와 맞지 않는다. 인간세상의 고난은 스스로 버려야 하며 꿰뚫어봐야 한다.

사부님의 설법 한 단락으로 여러분과 함께 고무격려하려 한다. “그럼 사람으로 말한다면 삶의 의의는 무엇인가? 바로 이익에 집착하고 정(情) 속에 잠겨 인생 과정의 느낌을 향수하는 것이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얼마나 가련한가? 어떤 느낌인가? 어떤 것을 얻으면 기뻐하고, 얻지 못하면 고통스러워한다. 고기를 먹으면 맛있다고 느끼고 사탕을 먹으면 달다고 느낀다. 그러나 인간세상 또한 쓴 것이 있고, 매운 것이 있으며, 신 것이 있다. 또한, 젊은이들은 감정상의 집착으로 조성된 느낌이 있으며 또 같지 않은 계층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의 길에서의 추구, 득실(得失)에 대한 느낌이 있다. 이런 득실 또한 자신이 정말로 노력한다고 해서 그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러하다. 사람이란 얼마나 가련한가! 그러나 사람은 오히려 이른바 현실 속에서 꿰뚫어 보지 못하며 또한 꿰뚫어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4]

이치는 한 무더기이나 사실 일체는 착실한 수련에서 나오며 그러하다면 모든 것에 명백해진다. 자신의 일생을 착실한 수련에 사용하길 바라며 실제와 부합되지 않는 정의 환상 중에서 자신의 시간을 소모하며 정지해있지 말기 바란다.

개인의 깨달음이며 층차의 제한이 있기에 바르지 못한 곳은 자비로 지적하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경문 ‘2009년 워싱턴DC 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경문 ‘2007년 뉴욕법회설법’

[4] 리훙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 ‘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설법’

문장발표: 2013년 6월 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6/7/27500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