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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한 깨달음으로 정(情)을 대하다

글/대륙대법제자

[밍후이왕]수련생이 교류문장에서 말한 것이 기억나는데, 정은 일종 물질이라고 했다. 사실 정은 물질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신(神)이며 삼계내 저층차의 신(神)이다.

작년 연말 다른 성(省)의 한 수련생이 전화를 걸어와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 수련생이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고 했다. 그녀는 대성통곡하며 집을 팔아버릴 거라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나와 함께 외국으로 가서 이런 현실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그런 구세력의 정의 신(神)에게 통제당해 이지를 상실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방의 한 큰 자료점의 주요 책임자였는데 그녀가 가버리면 그곳의 대법자원과 정법형세에 분명 손실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되며 더구나 구세력이 힘을 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사부님께 가지(加持)를 청하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기 전에 약속을 했다: 11시에 함께 발정념을 해 그녀를 박해하는 구세력의 정의 신을 해체하자고 했다. 전화를 끊고 시간을 보니 그녀는 뜻밖에도 1시간 가까이나 울고 있었다. 11시 발정념을 할 때 나에게도 교란도 컸다. 5분간 자신을 청리했는데도 졸음을 이길 수 없을 정도였고, 일어서서 발정념을 하는데도 졸음이 쏟아졌다. 이튿날, 나의 사상 중에는 남녀의 정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는데 이것은 그녀 쪽에서 온 정(情)의 신이 나에 대해 복수하는 것임을 알았다. 나는 부단히 정념을 강화하였다. 그녀는 연속 며칠이나 전화를 걸어 나에게 출국하는 연줄을 찾아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와 시간을 약속하여 함께 반시간 동안 발정념하자고 했다. 4일 후 그녀는 전화를 걸어 내가 자신을 비난할 것이냐고 물었다. 마침내 그녀가 청성해 진 것을 알고 그녀에게 그래도 외국으로 가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터전을 굳게 지키겠다고 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문제를 볼 때는 단지 개인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방면에서만 보지 말고 정법과 연결해야만 이치에서 철저히 깨달을 수 있고 발정념을 해도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방면에서 자신의 느낌과 체험을 더 말해 보려고 한다. 사람 중에서 좋고 편안한 느낌은 모두 업력이 구성한 “나”의 감수이고 가공(虛幻)의 것이지 나의 신의 일면의 감수가 아니다. “진풍(真瘋)”하는 그런 사람은 왜 수련이 그처럼 빠르고 제고도 그렇게 빠르냐면 그에게는 이런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왠선이 수련하는데 우리는 명명백백하게 그런 감수를 버려야 하고 그런 것을 감수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수련이 빠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이란 바로 사람 속의 이른바 행복한 느낌이 아닌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 대해주면 나는 느낌이 좋고 그와 가깝게 지내는데 이것은 정이며 바로 이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늘 자신이 분별심이 있는가를 보며 자신에게 정이 있는가를 점검한다.

2001년 나는 꿈에서 색욕관을 넘겼다. 처음에 잘 넘기지 못했는데 당시 나는 매우 괴로웠다. 그 후부터 매일 발정념을 할 때 일념을 더하여 자신의 공간장의 일체 색욕의 요소를 청리했다. 자신의 공간장에 색욕의 요소가 있든 없든 간에 나는 이렇게 1년 넘게 발정념을 했다. 그리하여 그 후 몇 년간 이런 꿈과 고험은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전에 미녀그림을 즐겨 보았는데 역시 하나의 색욕심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 집착심에 줄곧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도 여자 몸이고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마다 다 있다는 구실 때문이었다) 그림 배후의 그 생명의 진실한 상태와 업력의 대소 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분별력이 없이 그런 그림들을 보았다. 그러나, 평소 자신에게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으면 관건시기에 문제가 생기고 게다가 큰 문제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진지하게 안으로 찾았는데 일이 발생하기 전날에 인터넷에서 미녀그림을 본 일이 생각났다. 여태 이렇게 이끌린 적이 없었는데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어 눈을 뗄 수 없었다. 후에 수련생이 말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두 수련생이 길을 걷다가 미녀를 보고 한 수련생이 심성을 지키지 못하고 그녀가 참 아름답다는 말을 했다. 옆의 수련생은 다른 공간에서 그 미녀 몸의 업력이 그 수련생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사부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은 업력이 있다. 당신들은 대법제자로서 모두 알고 있는바, 사람들이 그린 일체는 모두 작자 본인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예술가의 작품 중, 그 개인의 일체 정황과 모델의 일체 정황이 모두 그 그림에 실리게 된다. 보통 한 속인이 한 필을 그리면, 나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에게 어떤 병이 있고, 얼마나 큰 업력이 있으며, 사상정황·가정정황 등을 바로 알 수 있다. 아울러 모델이 된 사람도 역시 그림 속에서 그 본인의 일체 사상과 그 신체가 지닌 일체 요소, 업력의 대소(大小)를 포함하여 충분하게 체현되어 나온다. 누가 그려진 이 인물화를 집에 걸면, 그러면 그림 속의 인물의 업력도 그림 속에서 발산(散發)되어 나온다. 이러한 물건을 집에 걸어놓으면 그 사람에게 이득이 있겠는가? 아니면 피해를 보겠는가? 업력이 발산되어 그는 그 사람과 연대를 갖게 되는데, 끊임없이 그림을 건 사람의 집 속으로 발산된다. 사람들은 물체의 연대관계를 보지 못하는데, 사실 사람들은 모두 불편한 감을 느끼게 된다.”[1]

원래 나의 업력은 바로 자신의 이 집착심이 초래한 것이다. 그런 엄숙한 교훈을 통해 나는 비로소 색욕에 대한 집착심의 마음이 얼마나 중한 지를 인식하게 되고 동시에 나는 또 다시 진지하게 사부님이 말씀한 법리를 인식하게 됐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로 현대 사람들이 부추기는 이른바 ‘애정 지상주의’인데 사당은 이 점을 이용하여 중국인을 파괴한다. 사실 인류 천 백년 오랜 전통문화 속의 혼인관과 현대의 파괴된 관념은 같지 않은 문제이다. 이전에 동방이든 서방 각 민족이든 혼인에 대해 반드시 엄격한 예절과 의식에 따라야 했고 혼인의 주요 목적은 역시 후대를 번성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애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이 없었다.

이외에도 가정을 이루는 문제에 대한 교류에서 이런 경향도 있었다. 어떤 수련생은 결혼 문제를 제기하면 색욕심과 연결하며, 결혼만 하면 틀림없이 층차가 떨어진다고 인식하는데 이런 생각은 역시 관념을 고수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대법제자가 초탈해 나올 수 없겠는가? 내가 알고 있기로는 지금 다수의 결혼하여 가정이 있는 대법제자들이 모두 부부생활이 없고 속인과 결혼한 그런 노수련생의 배우자도 이런 일을 개의치 않는다.

어떻게 수련인과 친인 가정의 두 방면의 관계를 바로 잡고 마음이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가? 친인 가정과 수련의 관계에서 사부님은 말씀하시기를 “다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려 하는데, 사람은 제각기 운명이 있다!”[3]고 하셨다. 만약 내가 확고하게 대법을 수련한다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한 사람이 수련하면 전 가족이 이익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노동교양소에 불법으로 감금되고 오랫 동안 신앙을 포기하지 않자, 사악한 나쁜 사람은 친정(親情)을 이용하여 나를 겨냥해 전화(轉化)의 모델로 삼으려 생각했다. 그들이 나에게 아이를 만날 생각이 있냐고 묻자 나는 꼭 만난다고 말했다. 사실 나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내가 아이를 만나는 것은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본래 나의 권리이며 아이를 만나 그를 위안해 주는 것도 사람 이 층차의 친인과 가정의 이치를 지키고 원용하는 것이다. 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것은 이번 박해가 조성한 것이다. 나는 아이를 만나게 해준다 하여 사악한 나쁜 사람에게 절대 감지덕지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만난 후 나는 아이의 학습과 생활방면의 일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내가 아이에게 아주 관심이 많은 것을 보고 전화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후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이번 만남을 마련해 줘서 감사하지만 원칙적인 일, 대법을 나는 확고하게 수련하겠다고 말했다. 전화(轉化)에 성공하지 못하자 그들은 난처해하면서도 또 내게 무슨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것을 잘 평형시켜 그들에게 틈을 주지 않았고 부득이 약간의 거짓말로 남편이 공안국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인력을 동원해 아이를 만나게 해주었다. 대법에 견정하고 정을 내려놓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극단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속의 정을 내려놓지 못하고 또 남편을 무시하며 거들떠보지 않는 모습을 내보인다면 반대로 속인의 이치에도 부합되지 않으며 사악은 바로 틈을 타고 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움직이지 말아야 하며 이 일체를 잘 평형시켜야 한다. 비록 육친정과 남녀의 정이 다르다고 하지만 관계를 바로 잡는 방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

[1]리홍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 “음악과 미술창작회 설법-미술창작연구회설법”

[2]리홍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전법륜”

[3]리홍쯔(李洪志)사부님의 저작:“전법륜법해-제남 설법에서의 문답풀이”

문장발표: 2013년 6월 17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 >이성인식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6/17/2754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