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 제목을 쓰니 마음이 감개무량함을 느끼는데, 비바람 속에서 정법수련의 13년을 걸어오면서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보호로, 곤혹과 미혹에서 넘어지고 일어나며 나 자신을 바로잡았다. 수련의 길에서 매 한 걸음, 매 하나의 관, 매 하나의 일념이 움직일 때 모두 선택에 직면하여 마난에서 내가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고험이었는데, 철저히 사람의 관념을 전변하여 생사를 내려놓고 엄혹한 환경에서 경험을 쌓아 사람에게서 벗어나 정법수련의 길을 바르게 걸어 자신의 사전홍원을 실행했다.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다
1999년 7월 20일, 박해가 시작될 때 나는 수련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때 나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천지를 뒤덮는 박해선전을 시작할 때 나의 첫 일념은 ‘이는 모두 가짜이고 거짓말이다! 나는 가서 청원해야 한다!’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금방 시험을 마쳤고 여름방학에 들어갈 무렵이었는데 학교 선생님은 걸상으로 학교 교문을 막아서고 나에게 어디에 가는지를 물었고, 나는 시 정부에 간다고 했다. 그는 한사코 나를 가지 못하게 하면서 또 보위처 학급책임 교원을 불러와 나를 학교 교원사무실에 가두고 문 입구를 막았다. 나는 뚫고 나가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가지 말라 했고 어느 한 선생님은 나에게 애걸복걸하면서 애가 집에서 열이 나도, 나 때문에 모두 집에 가지 못하고 애도 돌보지 못해…… 선생님은 한 차례 한 차례의 사당 운동에서 모두 겁을 먹어 내심에서 비할 바 없이 몹시 두려움을 느꼈지만, 나는 텔레비전에서 파룬궁에 대해 모함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매우 아팠다. 대법에서 친히 좋은 점을 얻은 한 사람으로서, 가서 공정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튿날 아침, 나는 학교를 떠나면서 신청서를 썼는데 학교를 떠난 이후의 일체는 학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고, 이렇게 해서 나는 시 정부로 가게 되었다. 학교 서기는 나를 돌아오게 한 후 직접 내 집으로 데려다 주었으며 내가 한 일을 집에 알려 이때부터 나의 생활은 더는 평온할 수 없었다.
박해 초기 사악이 온 천지를 뒤덮었는데, 우리 집은 수차례 가족회의를 하고 어떻게 나의 수련을 포기하도록 하겠는가를 연구했다. 고모와 고모부 모두 동원되었는데 고모는 울면서 머리로 나를 박으며 나에게 보증서를 쓰라 했고, 할머니는 땅에서 뒹굴며 야단법석을 피웠으며, 고모부는 나를 무릎 꿇게 하고 가죽 구두로 힘껏 나를 찼다. 비록 나의 부모도 수련하나 그들은 몹시 겁나 놀라서 말도 감히 못 했다. 할아버지는 울고만 있었다. 할아버지는 이전에 우파로 몰려 사당의 여러 차례 정치운동을 거쳤기에 처참하게 혼이 나, 이런 정치운동은 전 가족이 두려워하며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는 유연한 태도를 보이고 형세의 변화를 보아 가며 태도를 바꾸는 성격인데 이번에도 또 사당이 운동을 일으킨다고 여겨, 한 여자 몸으로서 어찌 사당의 국가기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비밀리에 상의하는 것을 들었다. – 나에게 다시는 절대 수련하지 못하게 하고 반드시 학업을 유지하게 하겠다. 내가 배우는 전공분야는 인기가 있고 일가족의 희망이기 때문에 집에서는 여태껏 이런 직업에 종사한 사람이 없었기에 장래 온 가족은 모두 나에게 기대하므로 그들은 심지어 이미 나에게 졸업 후의 직장을 배치했는데, 그것은 석사 이상 학위의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직장이며 또 큰 도시이고 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지금껏 없었던 압력과 고통, 무력감을 느껴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 이는 무엇 때문인가? 이것을 운동이라 부르는가? 파룬궁은 사람에게 선(善)을 향하는 것을 가르치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잔혹한 방식으로 사람에게 수련을 포기하게 하는가? 당시 비록 수련한 지 일 년 남짓 되었지만, 대법은 이미 나의 마음에 뿌리 박혀있었기에 나는 조용히 마음으로 정과 사, 선과 악을 분별하여 최후에 나는 수련의 길을 선택했다.
개학 후 나는 가족의 속박에서 벗어나 학교로 돌아와 수련생 거기에서 모두 베이징에 가서 상방(청원)하고 국가 상부에 정황을 반영했다는 등을 들었다. 주위의 수련생들은 잇따라 모두 갔고, 그들 어떤 사람은 직장과 집에 편지를 남겼고 직장에 사직서를 내며 집에 상황을 알렸다. 직장과 가족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모두 베이징에 가서 이름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그 당시 걸어 나와 베이징에 갈 수 있는가는 정말 이익과 생사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 사람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가 하는 큰 고험이었다. 기억하건대 한 수련생이 직장에 쓴 편지에 이런 말이 있다. ‘바람은 쓸쓸히 불고 역수(易水)는 차가운데, 대장부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그런 비장한 장면은 오직 아직도 눈앞에 떠올라 당시 바로 박해가 결속되지 않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일념으로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이 반석 같다. 나도 가려 했으나 당시 학교에서 나를 매우 주시하여 나에게 숙소를 바꾸어 전문 선생이 나를 동행하여 모친도 학교에서 공부를 봐주고, 두려운 마음이 매우 중해 이번에 가면 생사를 예측할 수 없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눈앞에는 박해가 진일보로 승급하고 나는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어 그들의 엄한 감시에서도 나는 걸어 나와 택시를 타고 학교를 떠났다.
성 밖의 큰길에서 줄줄이 늘어선 장거리 버스가 내 앞을 지나는 것을 본 나는 어찌 일보를 내디딜 수 없는가 생각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담이 작고 일을 두려워했으며이른바 말을 잘 듣는 좋은 아이였기에 종래로 내가 살던 곳을 떠나 본 적이 없었고 부모를 떠나본 적이 없었는데, 내가 만약 대법이 박해받지 않고 사부님이 모함당하지 않는다면, 대법을 수련한 바른 믿음이 없다면 나는 정말 감히 집을 떠날 수 없었다. 내심의 공허함이 극에 이르러 장래 직면할 일체를 생각하니 다리도 말을 듣지 않아 천근 무게 같고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한 번 또 한 번 ‘위덕’ ‘조법’ ‘무존’ ‘뿌리를 파내다’ ‘집착을 다시 버리자’ 등 경문을 반복적으로 암기하였는데 얼마나 지났는지 나는 도시로 가는 차가 온 것을 보았다. 나는 자신에게 차에 오르라고 압박했는데 마침내 두 다리를 움직여 차에 올랐다. 첫 일보를 내 딛는 마음은 도리어 평정해졌으며 가는 길에서 법을 암기하여 순조롭게 성시에 도착해서는 거기 수련생과 연계하여 함께 길동무가 되어 베이징에 가 법을 실증했다.
1999년부터 2000년까지 나는 세 차례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였다. 제일 처음은 모두 매우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고 걸어 나왔으며 두 번째는 천안문에 가서 현수막을 펼쳤고 세 번째는 중난하이에 가서 청원서를 제출했다. 매번 모두 매우 큰 두려운 마음을 극복하고 걸어 나왔다. 비록 과정에서 두려운 마음을 전부 내려놓지 못해도 매우 많은 고문과 시달림을 받아 어떤 때 법리에서 아직 청성하지 못했고 또 사람 마음을 지녔으나 나는 이미 나는 대법이 만들어 낸 생명이며 만약 대법을 이탈하면 나의 생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베이징에 가서 청원하는 기간에 나는 핍박으로 휴학했고 외지에서 유리걸식했다. 한번은 노년 수련생이 한 부의 진상자료를 가지고 우리는 이런 자료를 마땅히 해야 하는가를 나와 상의했다. 내가 보니 ‘장쩌민은 미룰 수 없는 역사책임’이다. 금방 보니 아주 민감하여 머리에는 정치에 참여한 것이 아닌가 하는 당 문화의 것이 뒤섞였기에, 내가 자료를 다 본 후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정치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 진상을 알게 하여 대법에 대해 모함하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이성적인 사유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우리는 즉시 복사점에 가서 대량으로 복사했는데 수련생들도 매우 잘 협력하여 거리마다 널리 붙였다. 이번 경험을 거쳐 나는 수련과 정치의 관계를 분명히 하여 이후 수련의 길을 바르게 걷는데 기초를 닦았다.
이때로부터 우리는 스스로 자료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설비와 기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몰랐고 사악이 발광적으로 박해하여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몹시 어려웠는데 매일 모두 마음이 긴장되고 답답했다. 어느 한번 수련생이 교류문장을 인쇄하는데 앞뒤 면을 모두 같은 내용으로 인쇄했는데, 만약 내가 붙잡힌다면 어쨌든 모두 함께 붙잡혀 달아날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구세력의 박해를 부정하는 법리를 근본적으로 모르기에 단순히 소극적이고 피동적으로 감당했다. 유리걸식하며 일하기에 바빠 법 공부가 부족하여 2001년 봄 불법으로 노동교양을 당했다.
그때는 바로 노동교양소의 사악이 발광적으로 대법제자를 세뇌하여 ‘전화’시키는 고조 시기여서, 이전에 수련을 아주 좋게 했던 아주 많은 수련생이 전화되고 사오 되어 나의 마음은 매우 아팠다. 사악은 나를 ‘전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일체를 아끼지 않고 ‘방교단(帮教团)’을 배치하여 나를 찾아서 ‘마음을 말하고’ 아는 사람, 알지 못하는 교수, 대학생, 박사, 원래 보도소장…… 쓸모 있는 사람을 모두 썼으며 강건책과 유화책을 함께 쓰면서 나더러 반드시 보증서를 쓰라고 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내가 대법으로 판단하니 모두 누락이 있어, 나는 또 전화된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니며 말하는 것이 뒤죽박죽이고 이지가 맑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황당무계한 논리로 놀랍게도 대법제자를 ‘전화’시킨단 말인가? 당시 사부님의 발정념 설법이 아직 발표되지 않아 나는 ‘사악을 질식시키자’를 암기하는 것으로 이런 사악의 세뇌에 저항했다. 최후에 그들은 모두 버티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다. 사악은 끝내 위선적인 가면을 벗고는, 내게잠자지 못하게 하고 화장실에 가지 못하게 하며 양치질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적나라한 육체적 시달림을 가했다…… 장기간 밤을 새우며 괴롭혔기에 나는 정신이 흐리멍덩하여 어느 한 단계 기억을 잃었는데 그들은 내가 정신과 지혜가 확실치 않을 때 나를 속여 보증서를 쓰게 했다. 노동교양소에 나온 후 나는 즉시 엄정성명을 써서 사악이 나에게 강제로 가한 어떠한 박해도 승인하지 않는다고 했다.
작은 꽃이 피다
2003년 나는 노동교양소에서 집으로 돌아와 법 공부하며 한동안 조절한 후, 밍후이왕에서 자료점을 곳곳에서 꽃 피우게 하는 건의를 한데 따라 나도 작은 꽃을 피웠는데, 주위 수련생을 도와 밍후이왕 자료를 얻어 ‘밍후이주간’을 했다. 자료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끊임없이 성숙하여 일부 컴퓨터지식과 인쇄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수련생을 도와 자료점을 건립했다.
2004년 말, 대기원에서 ‘9평 공산당’을 발표하였다. 처음에 나는 여기에 마음을 두지 않았고 나의 수련과 관계가 없다고 느꼈는데, 비록 자신도 이전에 사당의 당원이었으나 나이가 어릴 때 속아서 가입했다고 여겨 박해 후 나는 자발적으로 당위 서기에게 탈당을 제출하여 탈당했고 늘 자신은 사당의 독해가 적고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나 당시 어느 한 수련생이 나에게 마땅히 ‘9평’을 중요시하라고 제기했다. 나는 즉시 안을 찾고 자신의 부정확한 관념을 바로잡아 참답게 ‘9평’을 보았다. 나는 다시는 ‘9평’이 자신과 관계없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마땅히 세인에게 공산당의 본질을 알게 하였다. 당시 ‘9평’을 제작할 때 교란이 매우 컸는데, 종이가 인쇄기가 걸리거나, 나도 교란을 당해 기침이 나고 목이 아팠다. 다른 자료를 제작할 때는 이런 현상이 없어졌다. 교란할수록 나는 마땅히 해야 한다고 여겼다. 당시 ‘9평’을 1평 1평씩 소책자로 만들어 순조롭게 나누어 주었는데, 효과가 아주 좋아기타 자료도 나 이곳에서 소책자로 만들었다. 사실 매번 정법 노정에서 새로운 형세가 나타날 때 우리 자신의 부정확한 관념을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며 자신의 의혹과 흐리멍덩함을 무조건 대법에 동화시켜 사부님의 법리를 정오하여 이렇게 해야 비로소 정법 진정을 따라갈 수 있으며 사람의 이치에서 초탈하여 나올 수 있다.
내가 노동교양을 당하는 기간에 나의 남자친구도 박해당해 감옥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간 후, 우리는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그 한동안 시간에 나 자신은 게으르게 속인 생활을 했으며 아이를 돌보는데 아주 많은 정력을 기울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우리 전 가족이 박해당하게 되었다. 바로 경찰차가 우리 집을 포위하고 악독한 경찰이 쇠망치로 우리 집 방범용 철문을 부수고 집으로 뛰어들어와 내 가족을 납치했지만, 우리 가족은 매우 빨리 마귀굴을 뛰쳐나와 현재의 이 도시로 왔다.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현지 수련생과 접촉하지 못하고 단지 집에서 법 공부하고 자료를 만들어 혼자 나가서 배포했다. 대략 반년이 지나서 이런 상태가 맞지 않다고 느껴, 마땅히 현지 수련생과 연계하여 정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편에게 나가서 수련생을 찾으라고 했는데, 남편은 아주 빨리 현지 수련생과 연계했으며 바로 우리 부근에 한 노 대법제자가 있어 우리는 법 공부 모임을 만들어 매일 저녁 단체로 법 공부했다. 수련생에게서 알았는데, 현지의 기술수련생은 납치됐고 가정 자료점의 설비는 운영할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 기술적인 면에서 성숙하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나와 남편은 자료점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자료점을 수호하며 설비를 사고 기술을 가르치는 임무를 감당했다. 매일 단체 법 공부하는 기초가 있기에 우리는 아주 평온하게 했다. 남편도 두려움을 극복하고 일부 어려움이 매우 큰 기술적 수리도 담당하였고, 그도 탐구하면서 늘 밤늦도록 연구했으며, 이튿날 세수하고 양치질하고는 출근했다.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된 이런 기술들을 그는 섬세하게 교과 과정으로 편성하여 인터넷에 올려놓아 사람들에게 활용할 수 있게 하였는데, 필요로 하는 수련생이 배워 인적 수요를 편리하게 하였고, 나는 노년 수련생과 함께 자료점의 일에 협조했다. 이렇게 우리 현지 자료점은 매우 빨리 복구되어, 일부 새 항목으로 바꾸고 자료를 제작하는 데 있어서 정상궤도에 들어섰다.
자료점 일과 협조과정에서 늘 일부 갖가지 심성을 지닌 수련생을 만날 수 있어 어떤 때 모순이 발생할 때 정말 정서적 충격이 발생하는데, 나는 시작할 때 마음이 조급하여 불공평한 것에 대해 매우 화나서 원망하고, 질투가 나서 수련생의 부족한 점을 찾는 등 심태가 나타났지만, 현재 안으로 찾고 자신을 보고 심리 심태가 평온하게 각기 다른 심성을 지닌 수련생들을 직면하는 것으로 전변시켜 다시는 구체적인 일에서 옳고 그름을 다투지 않고 마음을 닦는데 공력을 들였다.
수련생을 구조하다
작년 봄 우리 지역에 몇 명의 수련생이 납치되어 구치소에 감금됐다.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가 모두 상의하여 마땅히 즉시 인원을 조직해 수련생을 구출하기로 했다. 우리는 임무를 나누어 행동했는데, 수련생 가족을 찾아 파출소 공안국에 가서 사람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그중 한 가족은 매우 협조가 잘되었고 다른 가족은 협조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 가족과 함께 공안국에 가서 보니 국보대대의 한 악독한 경찰이 사납게 계단을 내려와 우리를 향해 고함을 질렀는데 손에는 또 몇 권의 진상 소책자가 들려 있었다. 처음에는 어느 수련생이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이 출근하기 전에 진상 소책자를 공안국에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고함을 지른다고만 보지 마라. 우리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그에게 진상을 알렸다. 그 가족은 공안국 문 앞에서 팻말을 들고 가족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공안국 사람들은 앉아 있을 수 없어 좀 있다 와서는 가족을 향해 사진을 찍고 잠시 후 가족을 위협하면서 그중 한 사람이 허겁지겁 다가와 가족에게 말했다. “어서 빨리 그 팻말을 없애라. 너무 보기 싫다.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들은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이때 길에는 사람들이 에워쌌지만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몰랐다. 한 수련생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그들에게 말해주세요.” 내가 걸어가니 한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물었다. 내가 그녀에게 말해주었는데, 그녀는 전에 어떤 사람이 파룬궁을 말해주었고 또 3퇴를 권했다고 했는데 그녀는 파룬궁이 정치에 참여한다고 여겨 탈퇴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파룬궁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며 사람을 구한다고 말했다…… 갑자기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번에 철저히 알게 되었으니 나를 탈당시켜 주세요.” 그녀가 구원된 것을 보고 나는 눈물을 머금고 갑자기 뜨거운 열기가 정수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당시 정신이 맑고 기분이 상쾌하다고 느꼈고, 신체가 말할 수 없이 느슨해졌는데 나는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나에게 관정해 주시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베이징에서 정의로운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국보대대에서 변호사가 수련생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고 또 변호사를 위협까지 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공개 고발장을 써서 국보대대가 저지른 위법행위를 폭로하고 그것을 스티커로 만들고 전단을 곳곳에 붙이며 배포했다. 어느 한번 가족과 함께 국보대대장을 보러 갔다. 그는 위층에서 내려와 손에는 찢어진 스티커를 쥐고 우리를 향해 고함쳤다. “모두 내 집 문 앞에 붙여놓아 내가 찢었다.” 우리는 곧 그에게 진상을 알렸고, 당시 그의 친구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온 거리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보았다고 했기에 그는 화나서 말했다. “현재 나는 세상에 이름을 날렸다.” 우리는 모두 웃었다. 그는 힘껏 자신은 어떻게 청렴하고 어떻게 좋으며 또 그의 격언은 ‘국가에 충성하다’이다. 나는 그에게 국가에 충성한 것이 아니라 당에 충성했다고 말했다. 그는 폭로된 것 때문에 우리와 말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총망히 걸어갔다. 공안국에서 나오자 나는 또 사부님께서 나에게 관정해 주셨다고 느꼈다. 갈 때에는 마음이 그래도 안정하지 못했지만 나올 때에는 내심이 매우 평정해져 파도가 쳐도 당황하지 않고 매우 미묘했다.
우리는 여러 차례 가족과 함께 파출소에 가서 이 일을 처리하는 경찰을 찾았다. 매우 많은 수련생이 주위에서 협력하여 발정념 하였고 그 경찰은 줄곧 우리를 피했다. 어느 한번 그의 차가 파출소 뜰 안에 있었는데, 안에는 또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걸어가니 차 안에 있던 경찰이 놀라면서 다그쳐 말했다. “우리가 아니다. 이 차가 그의 것인 것만 보지 마라. 사람은 아니다.” 말이 끝나자 곧바로 차를 몰고 줄행랑을 쳤다.
사실 대법제자가 잘 협력하면 내보낸 정념은 사악을 제거하는데, 그들은 오직 숨고 벗어날 뿐 어디 또 감히 대법제자를 박해하겠는가!
이번에 수련생을 구출한 후부터 나는 걸어 나와 진정으로 수련생의 일을 자기의 일로 여겨 파출소와 공안국에도 정정당당하게 가서 사람을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사실 그때는 알지 못했는데, 자신이 수련생을 구출한다고 여겼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한 것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사람으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일을 자기의 일로 삼았기 때문이며, 대법이 바로 선타후아의 각자를 성취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납치된 후
기억하건대 수련생이 심득체험담을 쓴 것을 본 후 전국적인 박해 납치에 직면하여 사실은 구세력이 배치한 한 차례의 고험이 바로 – 안을 찾는 것이다. 이번에 나도 심각한 체득이 있다. – 자신이 오직 안을 향해 집착심을 찾을 뿐이고, 게다가 결심을 내려 그것을 버리고 뛰쳐나왔다.
집에 돌아온 후, 집안이 모두 약탈당하여 아무것도 없었으며 컴퓨터와 타자기를 다 가져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것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또 몸을 돌려 파출소에 가서 못살겠다고 말했다. 당신들이 일전도 남기지 않고 모두 강탈해 가서 집에 노인도 놀라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들은 다그쳐 친척한테 전화를 걸라고 했다. 나는 큰 소리로 “전화마저 모두 당신들이 가져갔다.”고 말하니 그들은 즉시 위층에 올라가 나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돌려주며 나더러 빨리 가라고 하면서 여기에 있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그들에게 떠밀려 나왔다.
돌아온 후 마음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또 정에 대한 집착이 나와 남편을 생각하면서,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랜 데다 지금까지 떨어져 있지 않았고 남편이 나에 대한 보호… 정마를 생각할수록 틈을 타, 나는 도리어 집착에 빠져, 빠져나올 수 없어 최후에는 먹으려고도 하지 않고 자려고도 하지 않아 무엇도 하려고 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어느 날 나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고통에 처해 저절로 헤어나올 수 없어 세 가지 일을 안심하고 잘할 수 없는데 이는 사악이 발광적으로 나를 박해한 것이 아닌가. 구세력이 안배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닌가? 안 된다. 나는 이런 정을 요구할 수 없고 이 정은 내가 아니며 주원신(主元神)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휙’ 하고 단번에 정마가 보이지 않았고 온몸이 가벼워졌다. 원래 사람 마음을 버리는 것은 이렇게 미묘하다고 느껴 나 자신도 모르게 생명 깊은 곳에서 ‘수련은 정말 좋다’는 감개무량함이 나왔다!
비록 정마는 사부님께서 제거하셨으나 어떤 때 또 반영되어 나올 수 있는데, 자신도 이런 집착은 이미 뿌리가 없어져 다만 나의 일념이면 인식할 수 있고 제거할 수 있다. 매번 머릿속에 남편의 웃는 얼굴과 목소리가 반영되어 나올 때, 나는 그것을 가려내고 제거하며 자신에게 마가 또 왔다고 환기했다. 그러나 어떤 때 또 반영되어 나와 그와 함께 뜻이 맞고 부창부수 하며 상호 존중하는 이런 감수는 정말 좋았다. 나는 이것은 사람의 생각임을 알고 사람 마음이지만 늘 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사부님의 ‘원만을 향해 걸어가다’는 경문이 생각나자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갈망, 이는 나의 근본 집착임을 의식하여단번에 이 집착을 붙잡고, 이전에 줄곧내게 근본 집착이 없다고 여겨 그래도 잘 수련 했다고 느낀 이 근본 집착은, 아직도 나를 붙잡고 놓지 않으며 인간의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내게 찾아내게 했다.
이 기간에 나는 법 공부를 강화하여 집착심을 착실하게 버렸는데, 사부님께서 나에게 사람 마음을 버리게 하시는 배치가 빈틈없어, 하나의 마음을 버리면 즉시 또 하나의 마음이 들어와 도중에 중지하지 않았고 나도 느슨히 할 생각이 없었다. 사부님의 ‘20년 설법’을 본 후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는 중요성을 더욱 알게 되었는데, 자신을 잘 수련해야 비로소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자신의 수련이 따라가지 못하면 법의 위력이 없게 되는데, 그럼 사람을 구하는 것은 일하는 데로 흘러 또 사람을 망칠지도 모른다. 사람을 구하는 신성한 사명을 사람의 일로 여기면 시간을 낭비하고 기연을 놓친다.
남편이 구치소에 납치되었을 때, 나는 수차례 파출소에 가 그들이 빼앗아 간 돈과 물건 그리고 사람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매번 나는 웃으면서 그들의 앞에 나타나 이지적으로 그들과 말하고 나의 마음에 증오와 두려움이 없었는데, 그들도 구도될 일원이고 사악이 아니기에 그들 배후 다른 공간의 사악이 그들에게 나쁜 일을 하라고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법제자의 감당은 정말 고통을 초월했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나에게 악을 행할 수 없었고 어떤 사람은 나에 대해 그래도 매우 겸손했는데, 말할 수 있을 때 그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과도하지 않게 그들과 연대를 취했다. 그들은 나에게 국보대대를 찾아가라고 알려주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국보에서 이 일을 착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공안국에 가서 국보대대를 찾았는데, 그들은 상부에서 지시한 사항이라고 하며 그들의 책임을 밀었다. 그들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워 전화로 예약하면 어떤 때 회의하고 출장 가며 어쨌든 좀 일이 있으면 대강 나에게 얼버무린다.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들에게 편지를 쓰자고 생각하였기에 나는 펜을 들고 그들에게 파룬궁 진상과 대법을 박해하면 자신에게 재난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리고, 파룬궁 수련생은 줄곧 이지적으로 반(反)박해할 것이란 등등을 알렸으며 그의 선념(善念)이 나오게 했다. 나는 사부님의 ‘홍음 3’에는 ‘인연이 있네’의 가사 “망망한 인해(人海)에 만나기 어려운데 우연히 만나 한 번 웃으니 인연이 닿았네 마음을 조용히 하고 진상을 듣나니 그대는 이 말을 들으려 천 년을 기다렸네”. 내가 이 시를 다 쓰고 나서, 이는 우리의 사부님 말씀이며 우리더러 사람을 구할 때 내심은 자비로 충만하여 사부님의 불은호탕에 대해 새로운 이해가 있었다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편지를 친히 그에게 주었다. 그는 좀 두려워했으나(그는 항소하는 편지로 여겼다.) 꺼내보니 손으로 쓴 것이기에 받았다.
이번에 납치된 수련생은 모두 자료점의 수련생이기에, 어떤 사람은 기타 자료점을 수호하는데 참여해서 우리 지역 자료점의 설비보호와 재료를 구매하는것에 있어서곤경에 처하게 됐다. 어떤 수련생은 나를 찾아와 해결하라 하여 나는 마음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수련생을 구출할 때(사실은 나의 남편이다.) 당신들은 모두 나를 돕지 않고, 현재 또 내가 이렇게 곤란하며, 가정마저 모두 폭로되었는데 아직도 내가 당신들을 도와야 하는가 하는마음으로 좀 위축됐다. 그러나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하니 이것은 사심이 아닌가? 자료점을 수호하면 남편을 구출하는 데 지체되는 것이 두렵고 또 자신이 즐기는 일만 골라 한다. 나는 파출소에서 사부님께 도움을 구할 때 파출소에서 나온 후 사부님께 세 가지 일을 잘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어찌 에누리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원망하는 마음과 사심을 버리고 그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료점 일에 협력했다.
어떤 때 자신이 압력이 매우 크다고 느껴 또 끊임없이 안에 수련생이 나를 팔아 사악이 나를 박해하려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리걸식하겠는가? 나는 선택에 직면했다. 나는 10여 년의 박해는 비록 엄혹하나 대법제자의 정정당당하고 광명정대하며 이전에 유리걸식한 생활 그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고생과는 대법의 ‘바름’이 그래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최종에 나는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에서 수련하는 것을 선택했다.
가족이 납치된 지 몇 개월 동안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하여 법리를 바르게 깨달았고 무조건 집착심을 버리며 걸어 나와, 수련생을 구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여제고가 정말 돌비맹진이라고 느꼈으나, 즉시 이전에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고 인식하여 사부님의 자비로운 고도에 뵐 면목이 없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그러므로 당신이 부딪힌 좋은 일과 나쁜 일은 당신이 오직 대법을 수련하기만 하면 모두 좋은 일인데, 틀림없다.” [1] 사실 납치되어 박해받은 그 자체는 좋은 일이 아니나 우리는 거기로부터 좋은 일로 변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마난은 우리의 수련을 위하여 길을 닦아준 것이 아닌가?
하고자 하는 말은 많으나 전부 표현할 수 없어 진심으로 우리 대법제자들이 모두 정진하고, 다시는 마비되고 소극적이지 말아야 하며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제자가 할 책임을 다해야 한다. 정말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수련의 기연은 곧 지나간다.
처음 투고하니 타당하지 못한 점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의 자비로운 지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허스
주:
[1] 리훙쯔 사부님 저서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밍후이왕 제9기 중국대륙대법제자 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2년 11월 29일
문장분류: 밍후이대륙법회>제9회(2012년)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29/2643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