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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15년간 불은(佛恩)의 혜택을 받다

[밍후이왕] 필을 들고 자신의 수련의 길을 쓰려고 하니 눈물이 먹물을 따라 흘렀다. 1년 사계절, 춘하추동, 15년간 불은의 혜택을 받았다. 십여 년간 인생의 길을 돌이켜보면 사부님의 은혜는 보답하기 어려운 것이고 오직 정진할 수밖에 없다. 사존을 우러러 바라보고 만면에 눈물을 흘리며 사존께 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자비하고 위대하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불은의 혜택을 받아 유익이 무궁하다

1997년 3월에 법을 얻었다. 법을 얻기 전에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았고 늘 애수에 잠기고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공장은 해산될 위기에 직면하고 있어 노동자는 운반공이 되고 일급제를 시행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 허리디스크에 걸렸다. 허리 통증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병원에 가서 전기치료도 하고 이부로펜(ibuprofen)을 주사했으나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대법을 수련한 후 허리 통증은 치료하지도 않았는데 다 낫고 기타 병도 온데간데 없어 졌으며 기분도 상쾌해져 마치 젊어진 것 같았다. 내가 연공한 후 가족도 따라서 혜택을 받아 몸은 모두 더욱 좋아졌다. 남편은 정부 행정 인원이었는데 담배 피우고 주정했고 매일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됐고 집에 돌아오면 욕하지 않으면 때렸으며 그릇을 내던지고 사발을 깼다. 내가 법 공부한 후 한번은 그가 담배를 피우는데 눈이 갑자기 벌게졌는데 담뱃재가 눈에 들어갔다고 하면서 비볐는데 비빌수록 아파서 병원에 갔다. 별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후에 남편이 담배를 피우면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 없어 했다. 이후로 담배에 인이 박였던 남편은 철저히 담배를 끊었다. 남편도 신기하다고 느꼈다. 후에 내 집은 연공점으로 되고 남편도 따라서 책을 읽었으며 좋은 사람으로 변했다.

초연으로 가득 차고 거의 붕괴될 처지의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으로 변했다.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내 가정을 구해주셨으며 대법이 내 가정을 바로 잡아주었다. 온 집식구는 사부님을 굳게 믿었고 대법을 굳게 믿었으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제때에 법 공부하고 연공하는 외에 또 일요일이면 거리에 가서 여러분과 함께 대법을 홍보했으며 어떤 때는 보도원과 함께 농촌에 가서 신 수련생에게 동영상을 보여주고 동작을 바로 잡아줬으며 여러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대법을 선전했다.

암흑의 나날에 대법 실증을 견지하다

1997년 ‘7ㆍ20’은 온 인류 역사상 가장 암흑 했던 날이다. 이날, 장(江)씨 집단은 고금 중외의 가장 악독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사부님과 대법, 대법제자를 미친 듯이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 수련생이 내게 “외지 수련생들이 베이징으로 간다는 것을 들었는데 갈래?”라고 하자 주저 없이 가겠다고 했다. 나는 집에 불과 300위안(약 54,000원)뿐인 돈을 가지고 떠났다. 집을 나선지 얼마 안 됐는데 한 수련생이 와서 각 길 어구는 모두 경찰에게 봉쇄됐고 떠난 사람은 모두 이미 되돌려 보내졌다고 했다. 며칠이 지나자 가장 먼저 베이징에 갔던 몇 명의 수련생이 구치소에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또 며칠이 지나자 경찰이 대법제자를 수색 체포하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이 천지를 뒤엎을 듯한 인간세상을 속이는 거짓말에 직면하고, 검은 구름이 날아오고 경찰차가 부르짖고 경찰이 미친개처럼 위협하는 것을 대면하고, 대부분 수련생은 방황과 고민에 빠졌다. 후에 우리는 사부님의 신경문 ‘나의 약간의 소감’을 보았다. 사부님의 지도로 우리는 법을 실증하려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직 진상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나와 한 수련생은 한 장의 마분지를 사서 붓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사부님의 청백(淸白)을 되돌려라. 대법의 청백을 회복하라.”라고 쓰고 그것을 행인이 많은 한 다리에 붙였다. 그때 사람들은 아직 이런 표어를 본 적이 없어 모두 둘러싸고 구경했다. 며칠 지나 한 노부인이 내게 “이 파룬궁(法輪功)은 무너뜨릴 수 없다. 그들이 큰 표어를 써서 사부님의 청백을 되돌려 달라, 대법의 청백을 되돌려달라고 하는데.”라고 했다. 이 말에서 나는 크게 계몽을 받았다. 나와 몇 명의 수련생은 손으로 표어를 쓰고 스스로 내용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 장씩 쓰면 완성되는 수량이 너무 적어서 복사지를 한통씩 사서 썼다. 이렇게 하면 한번에 4, 5장씩 쓸 수 있었다.

후에 외지 수련생이 우리에게 일부 진상전단지를 가져다줬으나 여전히 부족하여 우리는 주로 손으로 썼다. 후에 우리는 또 플래카드, 패널을 만들기 시작했고 아주 많은 큰 패널을 만들었으며 길이 5미터, 넓이 2미터 되는 큰 플래카드도 만들었다. 만든 후 가장 유리하고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을 찾아 걸었다.

우리 지방 주위에 산이 두 개 있는데 매일 아침 등산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경찰도 있고 각과 국장도 있고 간부와 각 계층 인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산의 한 플랫폼에서 휴식했다. 우리는 패널을 산꼭대기 가장 뚜렷한 곳에 걸어놓으려고 생각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은 다만 좁은 길 하나뿐이었고 산꼭대기는 가파르고 비좁고 가시나무가 무성했으며 낮에 올라가도 조심해야 했고 산꼭대기에는 지방의 TV 중계대가 있어 더욱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보통 두 사람이 저녁 11시쯤에 장대를 들고 어둠 속을 더듬으면서 올라가 평평하고 기세가 좋게 플래카드를 걸고 양쪽에 또 큰 패널을 조합해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걷다가 한편으로 표어를 붙이고 패널을 걸고 플랫폼 휴식하는 곳에 오면 진상자료를 좀 놓았다.

한번은 날이 어두워 패널을 걸려는 나뭇가지가 보이지 않아 “나무야, 이 패널을 네 몸에 걸면 구제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나뭇가지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났다. 정말로 신기했다. 나와 수련생이 매번 플랫폼에서 헤어져 각자 집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걸어야 했고 몇 곳의 무덤도 지나가야 했으며 새로운 무덤은 밤 속에서 더욱 눈을 자극했으며 산속에 자주 비정상적으로 죽은 사망자도 있었으며 어떤 때는 들개도 만날 수 있어 아주 무서웠다. 매번 나는 사부님의 “대법이 몸을 떠나지 않으니 마음에 眞善忍(쩐싼런) 있네. 세간의 대나한(大羅漢) 신도 귀신도 몹시 두려워하네.”[1]라는 법을 외웠다.

한번은 우리가 다른 산에 가서 큰 패널을 걸려고 했는데 그 산은 더욱 가팔랐고 길이 익숙하지 않아 낮에 가기로 했다. 산 중턱까지 올라와 패널을 걸 수 있는 아주 적합한 곳을 찾았는데 주위에 사람이 있었다. 한 수련생이 “안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자 좀 지나 정말로 큰 안개가 내렸다. 우리는 격동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계신다.”라고 말하면서 패널을 걸었다. 산에서 내려오고 집에 도착하자 안개도 흩어졌다. 대법의 신기함은 수련생들의 신심을 격려해줬다. 어느 날 저녁, 우리 여섯 사람은 이 산의 사람들이 오가는 많은 곳에 패널을 가득 걸어놓고 표어를 붙이고 많은 진상자료를 놓았는데 족히 1시간이나 걸렸다. 이튿날 온 시를 흔들어 놓았으며 힘있게 사악을 떨게 했다.

또 한 번은 우리가 아주 뚜렷한 곳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란 패널을 걸었다. 아침에 산에 올라가는 사람, 온 도시의 절반 사람이 모두 보도록 했다. 한 공안국 부국장이 몇 사람을 데리고 부리나케 올라가면서 “이 파룬궁이 건 큰 패널을 봐라, 정말로 들불이 아무리 심하다 해도, 봄바람만 건 듯 불면 새싹은 움트는구나.”라고 했다. 줄곧 지금까지 매번 민감한 날이 되면 수련생들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의 큰 플래카드를 우리 현의 가장 높은 곳에 휘날리게 했다. 우리는 사악이 사부님을 모욕해서는 안 되고 대법을 모욕해서는 안 되며 파룬따파 제자의 신사신법의 강한 의지를 눌러 깨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베이징에 가서 호법(護法)하는 것은 비바람도 가로막지 못한다

여러 번 베이징에 가서 호법하려고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2001년 6월 12일 우리는 사부님의 발정념하라는 두 개의 수인(手印)을 받았다. 이번에 우리는 정념으로 대법을 실증하고 사악의 층층 검문소를 돌파하고 베이징에 가서 호법하고 사부님을 위해 정의를 되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역전의 각 어구에 모두 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승용차는 막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는 높은 가격으로 차를 임대했다. 6월 15일 우리는 차를 임대해 놓았고 날씨도 아주 좋아 날이 어두우면 출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오후 6시가 넘어 내가 수련생을 찾으러 가는데 갑자기 광풍이 크게 일고 잇따라 비가 억수같이 퍼부었으며 얼마 되지 않아 도로에 고인 물은 무릎을 넘었다. 큰비를 무릅쓰고 수련생을 찾아갔다. 몇 명의 수련생도 모두 왔다. 여러분의 의지는 아주 확고했다. 칼이 내려도 간다고 했더니 기사도 아주 감동했다. 이렇게 우리는 큰비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았는데 다리에 한 승용차가 침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가겠는가? 나는 “그럼 오늘은 가지 말고 좋은 날씨를 찾아서 다시 가자.”라고 하자 동생 수련생은 “안 된다. ‘정법을 전하니 만마가 가로 막네’[2], 에둘러 가자.”라고 했다.

우리는 뒤돌아 다른 길로 갔다. 비는 갈수록 커졌고 길은 더욱 가기 힘들었다. 차는 걷는 것보다 얼마 빨리 가지 못했다. 비는 차의 창문 틈새로 우리의 옷을 적셨다. 우리는 차에서 사부님의 법을 외우면서 어렵게 앞으로 나아갔다. 10여 시간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이튿날 오전 8시쯤에 끝내 베이징에 도착했다. 큰비가 내린 뒤였기 때문에 날씨는 맑았다. 우리가 천안문에 도착했는데 거기의 경찰이 너무 많아 플래카드를 펼치지도 못하고 납치당한다고 들어 수련생들은 방식을 바꿨다. 어떤 것은 우산으로 어떤 것은 부채로 바꿨다. 나는 하늘색의 큰 우산을 가져왔는데 거기에 ‘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眞善忍好), 사부님의 청백을 되돌려 달라. 대법의 청백을 돌려달라.’를 가득 썼다. 수련생들은 먼저 성루(城樓)에 올라가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외치고 발정념 한 다음 우산을 펼치고 천안문을 한 바퀴 돌기로 했다. 그러나 성루에 올라가려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게 해서 우산을 수련생에게 주고 내가 먼저 성루에 올라갔다. 그러나 성루에서 내려왔는데 수련생을 찾지 못해 몇 바퀴 찾아봤으나 여전히 찾지 못해 마음속으로 아주 걱정했다. 나는 천안문 앞의 옥대 다리 위에 앉아서 사당의 우두머리를 향해 입장하고 발정념 했다. 얼마 안 돼서 한 사람이 나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기면서 큰 소리로 “뭘 하는 사람이냐, 뭘 하는 것이냐.”라고 했다. 돌아보니 키가 큰 경찰인 것을 보고 속으로 발정념 했다. 좀 지나 그의 말투는 변하고 “여행단의 사람이 아니니, 저기에 가라.”라고 하면서 나를 놔줬다. 오후가 돼서야 수련생들을 찾았다. 여러분은 모두 정념으로 대법을 실증했고 아주 기뻐했고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 두 아이에게 “베이징에 가서 감히 참말을 할 수 있니?”라고 물어봤다. 당시 나의 큰 아이는 10여 살 밖에 안 되고 작은 것은 6, 7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엄마가 감히 말한다면 우리도 감히 말해요.”라고 했다. 후에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줬다. 이튿날 내 아이는 몇 명의 수련생과 함께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고 돌아왔다. 두 아이는 기뻐서 “엄마, 우리는 성루 위에서 크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사부님의 청백을 되돌려라.’라고 외쳤어요.”라고 했다. 이후로 나는 걸어 나오지 못한 수련생을 연락하여 차를 임대해서 베이징에 가서 법을 실증하게 했다.

자료를 주고받고 생사를 두려워하지 않다

처음으로 외지에 가서 대법자료를 가져온 것은 2001년 봄이었다. 대략 3월의 어느 날, 남동생 집에 갔는데 그가 아주 속상해 갔다 왔다 하는 것을 봤다. 그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묻자 그는 “모시에 대법자료를 가지러 갔는데 가져오지 못해 내일 또 가야 해서 아주 열이나요.”라고 했다. 2000년 7월부터 그는 끊임없이 외지에 가서 자료를 가져왔고 형수가 지역별로 나누어줬다. 9월에 형수가 납치당했지만, 남동생은 혼자서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아주 괴로웠다. 남동생에게 “내일 내가 갈게.”라고 했다. 남동생은 “괜찮겠어요? 새벽 2시에 떠나 역전에 가서 새벽 3시 차를 타고 아침 8시에야 도착할 수 있는데, 집이 역과 그렇게 먼데 새벽에 감히 가겠어요!”라고 하자 “감히 갈 수 있다.”라고 했다. 이렇게 집에 돌아가 한 가방의 진상자료를 들고 이튿날 차에 올라탔다. 한 곳에 도착하면 진상자료를 배포했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자료도 모두 배포했다. 수련생을 찾아서 진상자료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면 이렇게 많은 진상자료를 가지고 왔는데 경찰에게 부딪히면 안 되는데 먼저 어머니 집에 좀 가 있자.’라고 생각했다. 금방 일어서 뒤돌아보자 뒤에 한 경찰이 앉아있는 것을 봤다. 정말로 두려움이 있으면 귀신이 있는 것이다.

그때 사악의 박해는 단계마다 심해졌다. TV에, 신문에, 광고판에 모두 사부님과 대법을 모욕하는 물건이었고 악한 경찰들은 더욱 날뛰었으며 재산을 몰수하고 사람을 잡는 것은 예사로운 것 같았다. 4월에 나도 불법으로 재산을 몰수당한 적이 있었지만,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로 잡혀가지 않았지만, 악인들은 내가 스스로 편집하고 쓴 진상자료와 복사 종이를 받아갔으며 줄곧 나에 대해 끊임없이 협박하고 위협했다. 7월에 ‘610’ 두목은 한 차의 사람을 태우고 내 집에 와서 나를 납치하려고 했으나 가족이 크게 소리 질러 그들이 나를 못 데려가게 했고 나도 재차 발정념해서 후에 그들은 풀이 죽어 갔다.

이 기간에 본지 몇 명 수련생은 교란을 받아 외지에 가서 집을 잡고 있었고 교란을 받지 않는 수련생도 외지에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수련생이 많다는 것을 듣고 한데 모여서 집을 잡고 마치 출가하여 수련한다고 해서 나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수련생이 가져온 진상자료를 모두 내 집에 놔뒀고 어떤 수련생은 돌아와도 집에 감히 가지 못해 내 집에서 숙식하곤 해서 나는 나가지 않았다. 가을이 되자 한 수련생이 왔는데 그녀가 그쪽의 수련생과 잘 안다고 해서 몇 개월 진상자료를 그녀 집에 보냈는데 사고가 나서 또 내가 이 일을 맡게 됐다. 그것은 2002년 음력 정월 18일이었다. 악한 경찰은 본지 몇 명 수련생을 납치했고 나도 교란을 받았다.

후에 진상자료는 갈수록 많아졌다. CD, 명혜기간, 명혜주간이 있었다. 낮에는 감히 정리하지 못하고 모두 저녁 11시 이후에 했다(이 시각에 사악은 보통 재산을 몰수하지 않는다.). 아이가 나와 함께 했다. 자주 소책자만 해도 몇백 권, 명혜주간이 100여 권이어서 온 침대에 가득했다. 그때 아이가 아직 어려서 여러 번 나와 소책자를 만들다가 호치키스를 들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를 몰랐다. 우리 매번 새벽 3, 4시에 다 만들어놓고 또 지역별로 필요한 것을 갈라놓고 마지막에 지역별로 수련생에게 줬다. 그때 자료의 수량은 아주 많았고 형세가 긴장하면 어떤 곳에서는 가지지 않았다. 방법이 없어 아이의 작은 책가방에 진상자료를 넣고 아이보고 메라고 하고 나와 함께 산에 올라가서, 층집에 가서 배포했다. 후에 한 노 수련생이 이 정황을 알고 내게 “누가 가지지 않으면 내가 가지겠다. 누가 돈을 내지 않으면 내가 내겠다. 배포하지 못하는 것을 모두 내게 줘라.”라고 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 어려운 세월에 악당의 적색 테러 하에 그녀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귀했다. 이후로 보내지 못한 진상자료는 모두 그녀에게 줬고 그녀가 빨간 봉투에 넣고 우리가 차를 빌려 농촌에 가서 배포했다. 어느 날 저녁에 어디에 왔는지도 몰라 내려와 물었더니 이미 기타 현에 왔던 것이었다. 차를 빌려 진상자료를 배포하면서 본 지역의 사면팔방을 다 돌아다녔다.

2003년 봄, 사스(SARS)가 퍼지자 길에서 가방을 수색한다고 했다. 사실 사악은 바로 기회를 빌려 대법제자를 박해하는 것이다. 자료를 보내지 못하는데 어떠하겠는가? 한 수련생의 집에 차가 있는데 자신의 차를 몰고 가고 그쪽의 수련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자료를 도중까지 보내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번 가봤는데 안 된다고 했다. 그녀는 납치당한 적이 있어 알아볼까 봐 두려워 낯익지 않은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몇 명을 찾았으나 모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내게 가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많이 생각하지 않고 다만 “대법제자는 법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가겠다!”라고 했다.

나는 차가 없어 차를 임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와 친척 관계가 좀 있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정황을 설명했는데 그는 좀 생각하더니 “가자.”라고 했다. 그러나 좀 가더니 아무리 말해도 가지 않겠다고 했다. 손으로 앞을 가리키면서 “봐라, 도처에 경찰이다. 정말로 세 걸음에 검문소가 하나 있고 다섯 걸음에 초소가 하나 있다. 차를 검사할 때 모든 사람이 내려야 하고 트렁크도 뒤진다. 그들에게 잡히면 정말로 몸에 날개를 달아도 날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할 수 없어 그에게 좋은 말을 하고 돈을 더 주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또 그에게 진상을 말해주고 대법의 신기함을 말해줘서야 끝내 그는 차를 몰고 앞으로 갔다. 갈 때는 좀 괜찮았다. 경찰이 우리보고 내려와서 이름을 등록하라고 했고 차의 번호판을 등록했고 약을 뿌리고 차 안을 자세히 한번 검사했다. 목적지에 와서 자료를 싣는 것도 아주 어려웠다. 수련생이 오토바이를 타고 트렁크 앞에 와서 빨리 트렁크 문을 열고 차에 던졌고 나는 차 창문으로 그들에게 돈을 쥐여주고 말도 걸지 않고 돌아서 왔다. 또 한 번은 경찰이 우리를 보고 즉시 이쪽으로 와서 우리는 차를 몰고 달아났다. 기사는 아주 총명했다. 길모퉁이를 돌았다. 뒤를 보고 한숨을 내쉬면서 “다행히 쫓아오지 않았다. 오기는 쉬웠지만 돌아가기는 어렵다.”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몇십 미터 가면 내려와 검사를 받아야 했다. 경찰이 차 뒤로 가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정말로 “고비마다 반드시 넘어야 하는데 곳곳마다 마(魔)로다”[3]라는 것을 체험했다. 이 검문소를 넘으면 또 초소가 있었다. 몇백 리 달렸는데 양쪽의 경찰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단 한 명의 경찰이 쓸데없는 일을 하여 트렁크를 뒤져본다면 후과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매번 사부님의 보호로 순조롭게 돌아왔다.

이렇게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에 맞춰 갔고 한 번도 대법제자가 자료를 보는 것을 지체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매번 차를 임대한 비용은 모두 내가 냈다. 대법제자의 돈은 진상자료를 만들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고 차를 임대하는 것은 제 생각대로 자신이 쓰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야 하고 자료를 만드는 돈을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봄, 사당이 무슨 회의를 한다고 해서 우리는 또 자료를 가지러 가야 했다. 이런 정황 아래 스스로 자료를 만들려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점을 건립하고 널리 중생을 구도하다

2004년 우리는 자신의 자료점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선 프린터를 사고 외지 수련생이 원고를 보내줬다. 그때 컴퓨터가 없어 수련생이 몇백 리 밖에서 우리에게 원고를 가져다줬는데 이것은 위험할 뿐만 아니라 여비도 아주 비쌌다. 그때 우리와 협력하여 진상자료를 배포했던 한 노인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 “자료점을 건립하려면 내 집에 건립하라. 내 집이 편리하다.”라고 했다. 몇 년 이래 그녀는 줄곧 아주 정진했으며 심성이 아주 높다고 생각하고 그녀의 집에서 만들고 내 집에 가져와 각 곳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후에 또 한 수련생이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와 함께 했다. 이렇게 세 사람은 하나의 작은 정체를 형성했다.

자료점을 건립하려고 해도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자금도 없고 기술도 없고 우리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고 얼마나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온 얼굴이 모두 까매지도록 몇 장의 자료를 만들어 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람을 구할 수 있겠는가. 후에 외지 수련생이 우리를 도와주고 또 우리에게 일부 설비를 줬으며 또 하나하나 기술을 가르쳐 줬다. 우리는 명혜주간, 진상자료를 만드는 데로부터 ‘9평공산당’과 여러 가지 대법 책을 만들었다. 외지 수련생의 도움 이외에 이후에 우리에게 뭐가 모자라면 스스로 시내에 가서 사왔고 자료점의 정상적인 운영을 확보했다.

사악을 폭로하고 정체로 제고하다

2003년 11월부터 사부님께서는 본지 민중에게 본지 사악을 폭로하는 평어 문장을 발표하셨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하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9년 ‘7ㆍ20’ 이후 우리 여기의 공안, 악한 경찰, ‘610’은 장씨 집단의 지시 하에 우리 본지 대법제자의 재산을 수차례 몰수하고 납치하고 소란피우고 재물을 빼앗아 갔다. 우리는 사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런 사악들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몇 개 심하게 박해당한 수련생의 사례를 정리하여 소책자로 편집하여 본지에 대량적으로 배포했으며 잇따라 본지 마을 사람, ‘610’ 공안경찰과 각 급 관원에게 선을 권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우리는 진상을 똑똑하게 알리고 중생구도를 주요 목적으로 했다. 일부분만 했는데 “이전에 배포한 자료는 사람들은 언제나 찢었지만, 본지의 것이라는 알고 사람들은 주워서 본다.”라는 일부 사람들의 피드백을 들었다. 듣고서 우리는 아주 크게 계발을 받아 철저하게 본지 사악의 악행을 폭로하고 민중이 진상을 명백하게 해야 하고 반드시 본지 사악을 폭로하는 자료를 배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당이 미친 듯이 박해했기 때문에 감히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수련생이 아직 아주 적었다. 이때 자주 우리에게 자료를 보내주던 외지 수련생이 말한 ‘정체제고 해야 한다.’라는 것이 생각났다. 어떻게 하겠는가?

노 수련생, 금방 돌아온 수련생과 우리 셋이 교류했다. 금방 노동교양소에서 돌아온 수련생은 “도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한 곳에 나와 함께 노동교양 받았던 수련생이 있는데 그녀는 거기에 7~80여 명의 수련생이 있는데 박해 중 아마 다 수련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먼저 거기에 가보자.”라고 했다. 이렇게 그녀는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데리고 함께 갔다. 2003년 깊은 가을이었다. 사람들은 마침 밀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산길은 구불구불했으며 우리는 산을 오르지 않으면 강을 건너야 했다. 간신히 그곳을 찾아 아는 수련생을 찾아서 그에게 이전의 책임자를 연락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여러 번 전화를 걸었으나 오지 않았다. 할 수 없어 우리는 돌아왔다. 며칠 후 우리는 또 갔다. 이번에 수련생에 집에 하루 묵었으나 여전히 그 수련생을 기다리지 못했다. 수련생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우리는 또 돌아왔다. 우리는 연속 3번이나 가서야 그 책임자를 만났다. 그와 그의 아내(역시 수련생)가 함께 왔다. 그의 아내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그를 밖으로 당겨가려고 했다. 우리는 시간을 다그쳐 수련생과 교류했고 옆집의 몇 명 수련생도 왔다. 교류를 통해서야 그들은 이미 책을 모두 파묻어 놓고 아예 연마하지 않지만, 아직도 연마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고 내려놓지 못하고 줄곧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우리를 안배하셔서 오게 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들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신다.”라고 했으며 그들과 함께 사부님의 최근 설법을 배웠으며 동시에 현재 정법노정을 교류했다. 이때 가려는 사람은 없었고 사상에 전변이 생겼다. 교류한 후 우리는 돌아왔다. 마음이 상쾌해졌고 오토바이도 빨라졌으며 우리는 기뻐서 대법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이튿날 오전, 그 책임자는 내 집에 와서 기뻐서 “당신들이 우리와 교류한 후 우리 거기의 수련생들은 180도로 변했습니다. 특히 나의 아내, 오늘 자료를 가지러 오고 대법을 위해 일을 좀 하겠다고 했는데 내가 먼저 오고 다음에 그녀보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했다. 나는 아주 기뻤다. 곧 그에게 일부 자료를 정리하여 가져가게 했다. 후에 우리는 또 몇 번 갔고 그곳의 수련생은 대부분 모두 걸어 나왔고 아주 정진했다. 이것으로 우리는 아주 큰 계발을 받았다. 잇따라 나와 수련생은 한 개 촌 한 개 촌 수련생을 찾아 교류했다. 촌에 한두 사람만 있어도 우리는 그들을 찾아 교류했으며 그들을 조직하여 함께 법 공부하고 교류해서 그들이 정체에 들어오게 하고 정법의 노정을 따르도록 했다.

수련생이 정법노정을 따라가도록 격려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외국 대법제자들이 ‘전 세계에서 장쩌민을 공개 재판한다.’고 쓴 큰 패널을 들고 있고 장씨를 심판하는 대연맹을 건립한다는 것을 봤다. 또 밍후이왕에서 어떤 수련생이 장씨를 짓밟는다는 것을 봤다. 이 몇 년 동안 수련생들이 박해를 받아 장씨를 극도로 미워했다. 수련생을 도와 빨리 걸어 나오게 하려고 우리는 장씨를 심판하고 장씨를 짓밟았다. 먼저 시내에서 하고 후에 또 농촌에 가서 했다. 한곳에 가면 먼저 장씨의 추상을 그리고 수련생들이 그의 악행을 폭로하게 했다. 한 촌의 수련생 집에 갔는데 두려워 우리를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촌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우리는 큰 모래언덕에서 했다. 큰 돌에 장씨의 초상을 그려놓고 수련생들은 우는 것은 울고 말하는 것은 말했다. 이 온갖 나쁜 짓을 다한 대 악마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고 사람을 죽였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의지할 곳을 잃고 유랑하게 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적색 테러 속에 생활하게 했는가. 수련생들은 의분이 가슴에 가득 찼고 모두 장씨의 죄행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한 번의 장씨를 심판하는 교류법회가 끝나자 수련생들의 두려움도 많이 적어졌고 사부님을 따라 정법 하려는 마음도 절박해졌다. 잇따라 우리는 또 장씨의 초상을 그려 하루 저녁에 본지 수련생들이 함께 행동하여 온 거리에 붙였다. 이 죄악이 극도로 큰 대 악마가 천명의 사람을 짓밟고 만 명의 사람을 누르게 했다. 그때 심리상태는 아직 좀 사람의 정이 많았다.

수련생들을 도와 빨리 정체에 들어오고 정법 노정을 따라오고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하게 하려고 우리는 한 번 또 한 번 시내 각 지역 및 농촌의 수련생과 교류했다. 한번 둘러보면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농촌에 가는 것은 거의 저녁이었다. 우리는 모두 오후에 떠났다. 농촌의 수련생이 바빠서 저녁 9시가 되어도 모두 모일 수 없었고 좀 교류하다가 매번 돌아가면 거의 저녁 12시가 넘었다. 어떤 때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어떤 때는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겨울이었고 어떤 때는 더워서 견딜 수 없는 여름이었고 어떤 것은 가파른 산길이었고 어떤 것은 구불구불한 좁은 산길이었고 어떤 때는 넘어졌고 어떤 때는 밤이 어두워 길을 잃어 어떻게 해도 걸어 나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강가에서 한 여자가 우는 소리를 똑똑히 들었고 마치 눈앞에 온 것 같은데 오토바이는 아무리 해도 시동을 걸 수 없었다. 대략 저녁 12시쯤이었다. 정말로 놀래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같았다. 나는 속으로 사부님의 법을 외웠지만, 수련생에게 감히 알려주지 못했다. 그녀가 이후에 여기에 왔을 때 두려워할까 봐.

또 한 번은 시내와 7~8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인데 길에는 석탄을 나르는 차뿐이었다. 저녁에 돌아올 때 석탄을 산처럼 쌓아 놓은 차에 우리가 중간에 끼였다. 수련생은 울음소리로 “아, 무섭다.”라고 외쳤다.

또 한 번은 길에서 한 곳에 불이 환하게 켜있는 것을 보자 수련생에게 앞으로 가서 진상자료를 좀 놓자고 말했다. 앞에 가 보니 죽은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20여 살인데 감전돼 죽었다고 들었다. 새벽에 우리 여자 둘밖에 없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몇 십리 길인데 대법을 연마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감히 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수련생에게 번거로움을 주지 않기 위해 수련생 집에서 숙박하지 않고 밥을 먹지 않고 밤이 아무리 깊어도 집으로 돌아올 것을 자신에게 요구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몇 개 촌을 다녔으며 밥 먹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촌 밖에서 좀 기다렸다가 밥 먹는 시간이 지나면 들어갔다. 나와 수련생이 배고프면 사부님의 ‘벽곡(辟穀)’의 법을 외웠다. 매번 교류한 내용은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바싹 따르고 법 공부를 잘하고 심성을 제고하고 발정념과 정체배합을 중시하고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본 지방 대법제자의 응집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기억하기에 2003년 사부님의 생신 날 여러분이 모였는데 20여 명이었고 2004년 이날에는 7, 80여 명이 됐다. 2005년 사부님께 생신을 축하할 때 이미 100여 명에 달았으며 외지 수련생도 있었다. 우리는 사부님의 큰 법상을 걸고 과실과 꽃을 놓고 어떤 이는 사부님의 법상 앞에 꿇고 절을 하고 울어 머리도 들지 못했다. 몇 년의 잔혹한 박해에 수련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고생스러웠는가. 사부님의 법상이 높이 정정당당하게 정면의 벽에 걸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심정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중생을 구도하고 신이 인간에 있다

2004년 9월에 사부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고 세인을 구도하자’는 신경문을 발표하셨다. 이때 우리 지방의 대법제자는 이미 타파할 수 없는 굳은 정체를 형성했다. 진상표어는 각 도로의 전봇대에 붙었고 패널에는 모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가 쓰여 있었고 대법의 플래카드는 도처에 휘날리고 있었다. 또 대법제자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길가의 돌에 새겼다. 이때 사악의 기염은 마치 단번에 사라진 것 같았다. 우리의 자료점도 성숙해졌다. 그저 이따금 일을 조심하지 않아 납치당하는 것이 있었지만 아주 빨리 돌아왔다. 수련생들은 “우리는 마치 또 7ㆍ20 이전에 돌아온 것 같다.”라고 했다.

비록 이렇지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곳곳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모두 닿도록 해야 한다.”[4]는 것에는 아직 매우 부족한 것이었다. 우리는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본지 지도를 찾아서 침대에 꿇어앉아 작은 칼로 한 개 향 한 개 향을 파내고 또 컴퓨터에서 확대해 한 장의 작은 지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보니 많은 작은 촌을 우리는 근본적으로 몰랐으며 여기에 얼마나 많은 향진이 있고 얼마나 많은 촌이 있는지 아예 몰랐다. 사부님께서 지도하시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런 곳의 중생은 구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또 조직해서 교류회를 열고 착실하게 사부님의 신경문을 배웠다. 그리고 지도를 주면서 수련생들이 조합해서 지역별로 책임지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진상자료를 중복으로 배포하고 촌과 매개 집을 누락하는 현상을 면할 수 있었다. 대법제자가 없는 곳은 가깝게 있는 대법제자가 했다. 세 집, 다섯 집이 되지 않는 촌에도 모두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그중 한 수련생이 주동적으로 큰 향진을 맡았다. 25개 자연촌에 진상자료를 배포하는 책임을 졌다. 대법제자들이여, 중생을 구도하기 위해 참으로 하나를 가지고 열을 당하고, 열을 가지고 백을 당했다.

나와 몇 명의 수련생은 시내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외딴 마을을 책임졌는데 거기는 산이 아주 높고 늑대도 있다고 들었다. 저녁에 진상자료를 배포할 때 무슨 무기를 가져갈까도 생각했다. 우리는 오전 8시에 차를 임대해 가면서 자료를 배포했는데 이튿날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몇천 개 진상자료를 모두 배포했고 천여 개의 표어를 붙였다.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전단지를 주었다. 그들은 “너무 수고해요. 감사해요.”라고 했다.

수련생이 세 가지 일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단번에 10여만 부의 진상 전단지, 소책자, CD도 만들었다. 수련생들은 진상자료를 메고 인스턴트 라면을 지고 산을 넘고 고개를 넘어 마을 집집이 다니면서 직접 전단지를 배포했다. 한 곳에 자주 차가 막혔는데 본지 사람이 작은 떡을 만들어 기사에게 파는 것을 봤다. 대법제자는 진상을 알리기 위해 따라서 작은 떡을 만들어 팔았다. 다른 사람이 1위안(약 180원)에 팔면 그들은 0.5위안(약 90원)에 팔았다.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진상을 알리고 세인을 구도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여기에 사당의 기념관이 하나 있다. 수련생들은 이곳은 사악의 소굴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정체에 배합해서 거기에 가서 발정념하고 진상을 알렸다. 한번은 사당의 두목이 여기에 와서 시찰한다는 것을 듣고 대법제자는 많은 표어와 패널을 만들어 사악 두목이 지나가는 곳에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사당은 대법제자가 표어를 붙일까 봐 매개 전봇대 앞에 50위안(약 9천 원)을 써서 한 사람을 고용하여 지키게 했다. 그리고 또 많은 외지 경찰이 왔고 본지 경찰도 모두 출동하여 거의 큰길의 양쪽에 안배했다. 공포를 느꼈고 긴장했다. 우리는 정체로 교류하고 여러분은사부님의 “이지(理智)로 법을 실증하자.”[5]란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둬야 한다고 했다. 단체적으로 사부님의 ‘심자명’의 “생사란 큰소리쳐서 될 일이 아니니 될 수 있는가 없는가는 진상을 보아야 하리라”[6]를 외웠다. 그중 일부분 사람은 집에서 발정념하고 나가서 하는 대법제자는 이지로 지혜로 에둘러 길 양쪽의 산길을 따라가서 교묘하게 패널을 나뭇가지에 걸었다. 사악은 대법제자의 그림자를 보지 못해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이튿날 아침 큰길 양쪽의 산의 도처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의 패널이 휘날리고 있는 것을 봤다. 수련생들의 정체제고는 사악이 벌벌 떨게 하도록 했고 두려워하게 했다. 한번은 박해에 참여한 한 사람이 “우리 여기의 파룬궁은 도대체 사람이 얼마 있니, 하루 저녁에 전단지를 천지를 뒤엎듯이 도처에 뿌리니”라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만 명이 있다.”라고 말하자 이 사람은 놀래서 “만 명도 많은 것이야 정말로 곳곳에서 꽃이 피구나. 탄압할수록 더욱 왕성해진다.”라고 했다.

대법제자가 정체 제고했기 때문에 우리 본지 환경은 갈수록 편안해졌고 종래로 감히 나오지 못하는 수련생도 나왔으며 7ㆍ20 이후 연마하지 않던 사람도 또 새로 나와 연공했으며 동시에 또 새로운 수련생이 끊임없이 걸어 들어왔다.

박해를 받아 집이 있어도 돌아가기 어렵다.

2005년 11월 2일 오후 3시쯤, 몇십 명 경찰이 갑자기 집에 들어와 “이미 몇 명이나 잡았다. 다 말했다. 여기가 아주 중요하다고. 앞문 뒷문을 모두 막아라. 재산을 몰수하라.”라고 흉악스럽게 소리 질렀다. 그들은 내 컴퓨터, 프린터 두 대, 녹음기, 사부님의 법상, 녹음테이프와 대법 책, 그리고 또 향로와 화병 등 가치가 1만위안(약 180만 원) 되는 물건을 빼앗아 갔다. 사부님의 보호로 나는 정념으로 도망쳐 나왔지만, 이후로 의지할 곳을 잃고유랑했다.

가출한 후 사악은 나에 대해 더욱 심하게 박해를 했고 매일 가족에게 소란을 피웠고 가족을 협박하여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했으며 학교에 가서 딸도 협박했다.

그때 딸은 12살도 아직 안 됐는데 악인에게 위협당해 떨어서 두 다리로 설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아이가 가련해 보여 옆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 조급해하지 말라.”라고 했다. 경찰이 아이를 위협해서 내가 어디에 있고 다른 수련생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하라고 했으며 또 아이에게 겁을 주면서 “엄마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살인방화보다 더하다. 살인방화는 형사 죄지만 엄마가 진 죄는 정치범죄다. 살인방화는 돈을 좀 써서 나올 수 있지만, 엄마는 돈을 써서라도 나올 생각하지 말라.”라고 했으며 또 “대학에 가고 군대학교에 가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남편은 파출소로 불려 갔고 마지막에 내 집의 문에 봉인지를 붙이려고 했다. 남편은 갈 길이 없이 몰아붙여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어차피 나도 살 수 없다. 내가 누울 테니 칼로 찍어라. 아니면 당신들이 누워라. 내가 칼로 찍을 테니.”라고 했다. 경찰들은 이 장면을 보고 다시는 감히 우리 집에 봉인지를 붙이지 않았다. 사악은 나를 본지 박해의 중점으로 정했다. 사악은 가족에게 “알려줄게. 만약 잡히면 죽이는 것은 노는 것과 같다. 다른 누구도 괜찮다. 그녀는 안 된다.”라고 했으며 내가 만든 일부 자료를 보여주고 모두 내가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나를 인터넷 지명수배하고 도망 범죄인으로 정하고 사진을 들고 도처에서 나를 찾아다녔으며 자주 가족에게 “안 돌아오면 고소한다. 빨리 돌아오라고 하라.”라고 위협했다.

나는 할 수 없어 도처로 도망갔다. 한 면으로는 사악이 쫓는 압력을 감당해야 하고 다른 한 면으로 가족을 떠난 고통을 감당해야 했으며 특히 어린 작은딸을 생각하면 생사 이별 같은 느낌이었다. 또 다른 한 면으로 사악이 우리 본지 대법제자에 대해 더욱 심하게 박해할까 봐 걱정했다. 그들은 많은 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가라앉은 다음에 착실하게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대법제자가 정체로 제고한 후 환경도 편안해지자 우리는 환희심이 생겼고 일하는데 바빠서 법 공부하고 발정념하는 것을 소홀히 했으며 안전문제에 대해서도 주의하지 않았다. 2005년 11월 1일 저녁 정체에 배합해서 진상자료를 배포하고 한 신 수련생이 납치당했는데 이튿날 저녁 자료점의 재산은 몰수당하고 자료점을 책임지는 노 수련생이 박해를 받아 정념으로 도망쳤고 자료를 프린트하는 수련생 부부는 납치당했다. 또 일부 농촌의 주요 책임자 수련생들도 교란을 받아 아주 큰 손실을 당했다. 내 압력도 아주 컸으며 거의 견뎌내지 못할 뻔했는데 그때 사악은 줄곧 나를 쫓아다녔고 끊임없이 가족에게 소란을 피웠으며 집의 전화도 감시당해 할 수 없어 공중전화로 딸의 동창 집에 전화했다. 딸은 울어서 눈물 때문에 말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며 멀리 가면 갈수록 좋다고 했다. 나는 고정된 잘 곳이 없고 어떤 때는 몸에 한 푼도 없었고 어떤 때는 날이 어두워도 잘 곳을 찾지 못했다. 경제가 곤궁하여 나는 세끼에서 두 끼, 두 끼로부터 한 끼로 고쳤다. 도난 중에 다른 사람보고 도와달라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그중 받은 비웃음, 조롱과 업신여김을 당해 나는 더욱 비통했으며 거의 정신이 붕괴될 것 같았다. 나도 진정으로 세태염량을 체득했고 인정이 종이처럼 얇다는 것을 체득했으며 몇 개월 동안에 머리카락이 하얘지고 이빨이 다 떨어지고 체중이 60kg으로부터 40여 kg으로 변했다. 이렇게 궁지에 빠졌을 때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해주셨다. 한번은 100위안(약 18,000원) 밖에 남지 않았는데 가스비를 내면 돈이 없게 되는데 내가 돈을 가지고 내려고 하는데 200위안(약 36,000원)으로 변했다. 이런 정황에서 돈을 틀리게 헤아릴 수 없지만 반신반의했다. 또 한 번은 또 100위안(약 18,000원) 밖에 남지 않았는데 속으로 또 100위안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똑똑하게 금방 100위안을 침대에 놔두었는데 가서 또 꺼내보니 또 200위안(약 36,000원)으로 변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통곡했다. 정말로 수많은 말로 불은호탕의 말을 못하고 오직 정진하고 정념정행해야만 사부님의 은혜를 보답할 수 있다.

그때 사부님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든지, 사악이 미친 듯이 박해하든지, 생사에 관계되든지를 막론하고, 당신이 여전히 수련의 이 한 갈래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면서 인류사회 중의 어떠한 일도 수련의 길에서 행보를 교란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7]라는 법이 생각났다. 나는 갑자기 청성했다. 그리하여 법을 외우기 시작했고 매개 정각에 발정념하는 것을 견지했다.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첫해에 ‘전법륜’을 7번 외웠다.

후에 아들이 다니는 대학에 왔다. 속으로 이 대학생들이 진상을 알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대학생들이 여행을 갔는데 나도 따라갔다. 길에서 한 학생과 진상을 말하자 그 학생은 “아야, 놀래 죽겠어요.”라고 했다. 두 사람에게 말했는데 모두 이렇게 말해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다. 경승지에 도착하고 한 동굴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 불상이 있었다. 학생들은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며 나를 끌어당기며 찍었다. 이튿날 사진을 컴퓨터로 보여줬는데 나의 머리 위에 큰 파룬(法輪)이 떠있고 몸 옆에 작은 파룬 몇 개가 있는데 그림은 보일 듯 말 듯한 것을 봤다. 이것을 학생들보고 보라고 하자 그들은 모두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다. 책의 파룬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비교하여 보라고 했으며 또 그들에게 진상을 말해주자 그들은 모두 듣기 시작했고 모두 삼퇴했다. 후에 나는 교자를 만들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 아들이 아는 교수와 학생을 데려오라고 하고 그들에게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해줬다. 후에 우리는 또 ‘작은 꽃’을 피워 진상을 알리는 한편 진상자료를 배포했으며 우리는 ‘9평공산당’을 만들고 학생들에게 나누어줬다. 그들은 본 후 모두 좋다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복사도 했다. 후에 사악이 호구를 조사하는 바람에 집주인이 더 못 있게 해서 떠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힘들든지 간에 나는 견지하여 세 가지 일을 잘했다.

올림픽 전에 나는 또 집으로 돌아왔으나 종래로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기타 지방 수련생들이 납치당했다는 것을 봤기 때문에 올림픽 전에 사악이 대법제자에 대해 박해를 가중하려는 것을 생각하자 나는 수련생과 상의해서 한 바퀴 돌면서 수련생과 교류하고 발정념하는 것을 강화하자고 했다. 금방 두 곳에 갔는데 사악은 출동해 경찰차가 길 어구를 막았다. 나가지 못해 한 친척 집에 갔다. 어느 날 친척이 내게 “대대 서기를 만났는데 한 파룬궁수련생을 집에 숨겼다고 말했고 대대에 사진이 있다고 했다.”라고 하면서 친척도 감히 나를 숨기지 못하고 또 다른 친척 집에 갔는데 감히 숨겨주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 친척도 감히 숨겨주지 못하겠다고 해서 할 수 없어 나는 부근의 산에 갔다. 한번은 곧 비 내릴 것 같아 양을 기르던 집안 같은데 들어가려고 금방 앞에 갔는데 주인이 와서 나는 또 떠났다. 저녁에 사람이 없을 때 나는 모래밭에서 책을 외우고 가부좌하고 발정념했다. 여름철이라 땅바닥에 아주 습기가 많고 벌레가 많아 몸에 옴이 생겼다. 가려울 때 안절부절 했고 정말로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악인은 매일 집에 와서 가족에게 소란을 피웠다. 처음에는 집에 돌아와 자수하라고 하고 후에는 보증인을 세워 소환하는 수속을 하면 된다고 했다. 가족은 와서 상의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돌아가겠다.”라고 했다. 곧 올림픽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은 응낙했다. 그들은 내가 베이징에 또 가면 그들의 밥그릇을 깰까 봐 두려웠다. 집에 돌아온 이튿날 국가보안 대장이 집에 왔다. ‘보증인을 세워 소환’하는 수속을 가져와 나보고 서명하라고 했으나 나는 서명하지 않았다. 가족은 내가 잡혀갈까 봐 대신하여 서명했다.

이후로 나는 의지할 곳을 잃고 유랑하는 생활을 결속했다. 그렇지만 잇따라 직장의 정부 국장, 사무실 주임, 네 사람이 번갈아 집에 와 앉아있으면서 나를 감시했다. 그들은 내가 빼빼 말라 피골상접이 되고 몸에 옴이 생긴 것을 보고 아주 동정했다. 나는 몇 마디 말을 써서 그들에게 줬다. ‘의지할 곳을 잃고 유량해 온 근 3년, 오곡과 잡곡을 모두 맛봤네. 공산 사당이 나를 쫓고 사악한 소인이 나를 모욕하고 1년 365일 바람과 서리 도검(刀劍)으로 엄하게 핍박했네. 걸음마다 핏방울이 떨어진 길, 글마다 눈물로 썼네.’ 그들은 보고 눈가가 촉촉해졌고 공산당이 나쁘다고 했으며 모두 ‘삼퇴’를 했다. 올림픽 후 많은 수련생이 이끌어 나가서 우리는 또 지역별로 수련생과 교류했고 여러분이 법 공부팀을 건립할 것을 바랬다. 발정념하는 것을 견지하고 정체로 배합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진상을 알리고 이전의 수련생을 불러 돌아오게 하며 법 공부 팀의 인원을 조합해 글 모르는 수련생이 모두 ‘명혜주간’과 사부님의 설법을 듣게 하고 정체로 승화하고 정체로 제고하게 했다.

목전, 우리 여기의 환경은 비교적 편안해졌고 수련생들도 평온하게 자신 수련의 길에서 걷고 있다. 사부님의 최근 몇 번의 설법 중에서 더욱 명확하게 사람을 구하는 중요성을 말씀하셨으며 수련생들도 시간의 긴박함을 느꼈으며 나도 수련생과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시간을 잘 안배하고 나가서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고 자비로 속인의 양지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십 여년 동안 정법의 경력은내가 한 명의 대법제자로서 걸음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로 사부님의 심오한 법리의 지도로 걸어온 것이며 우리가 다만 법 공부를 잘해야만 강대한 정념을 유지할 수 있으며 확고하게 신사신법하고 안을 향해 찾고 심성을 제고하고 곳곳에서 법으로 자신을 가늠해야만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있고 진정한 수련인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체득했다. 나도 제9회 중국대륙 대법제자수련심득교류회에 참여하려고 한다. 비록 잘 연마하지 못했고 문장 쓰는 수준도 높지 않지만, 이것은 나의 실제적인 수련 경력이다. 이것을 써내어 사부님께 답안지를 바치겠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가 ‘홍음-위덕(威德)’

[2]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신생(新生)’

[3] 리훙쯔 사부님의 시가 ‘홍음-마음고생’

[4]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사람의마음을내려놓고세인을구도하자’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이성(理性)’

[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심자명(心自明)’

[7]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길’

(밍후이왕 제9회 중국대륙 대법제자 수련심득교류회)

문장발표: 2012년 11월 2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9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21/265011.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3/1/12/13708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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