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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자신을 연마하고 사람을 구하고 사명을 완성하자

글/ 후난 대법제자 구술(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10여 년이 지나갔다. 대법수련의 이 길에서 나는 많은 고생을 겪었고 많은 곤두박질을 쳤으며 ‘이해되지 않는 일도’ 아주 많았으며 비난을 받기도 하는 등 많은 일을 직접 겪었다. 나는 매 번 관을 넘을 때 사부님과 대법을 생각했고, 세인을 구도하는 것은 내가 인간에 내려온 사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이것을 꼭 견지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할 때 많은 관과 많은 난은 서서히 내 곁을 떠나갔다. 마지막에는 ‘다만 세인을 구도하고 사명을 완성하겠다.’라는 일념밖에 남지 않았다. —본문작가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합니까!

후난성의 여자 대법제자로 올해 나이 62세인데 1999년 2월 26일(음력)부터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일부 경력과 체득을 존경하는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또 수련생 여러분과 교류하고자 하니 부족한 곳은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내가 문화지식이 없는 관계로 문장을 쓸 줄 몰라서 구술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련생이 문장으로 정리해 주기 바란다.

절 안의 사람이 우리 집에 대신대도(大神大道)가 왔다고 했다

법을 얻기 전에 허리 디스크와 담낭염 등의 병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아침에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해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도와줘야 옷도 입을 수 있었다. 남편은 자주 현지의 일부 민속활동에 참가했는데 용춤(舞燈龍)을 추는 데 사용한 부처상을 우리 집으로 가져와 3층에 모셨다. 한 번은 남편이 절에 가서 점을 봤는데 절 사람 말이 “당신 집에 큰 구렁이의 영이 들어 와 있다.”라고 했다. 온 집안사람들은 놀라서 도처로 사람을 찾아다니며 방법을 구했다. 당시 부근에 대법제자가 있어 남편은 한 대법제자에게 이 정황을 말해줬더니 그 대법제자가 “파룬궁(法輪功)을 배우세요. 이것은 문제가 안 돼요.”라고 말했다.

음력 1999년 2월 26일, 나는 처음으로 연공장에 갔으며 그 후에 ‘전법륜(轉法輪)’을 구했다. 일주일 배운 후 ‘전법륜(轉法輪)’의 요구에 따라 대연화수인(大蓮花手印)을 하면서 사부님께 개광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절 사람은 “당신 집에 대신대도가 왔고 큰 구렁이 영은 없어졌다.”라고 했다. 남편은 의아해서 내게 “절 사람이 우리 집에 대신대도가 오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바로 우리 사부님이시다. 바로 파룬궁(法輪功)이다.”라고 했다. 손자는 그때 2세가 좀 넘었는데 이 전에 그는 그 저급한 영(靈)을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애들이 동물에 관한 책을 보면서 말했다. “우리 집 위에 있는 걸 본 것이어요!”라고 말하더니 즉시 용 그림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 보이며 “이것처럼!”하고 말했다. 그러자 애들이 “그럼 지금 이 동물이 어디로 갔니?”라고 묻자, 그는 파룬궁의 제3장 충관(沖灌) 동작을 해 보이면서 “할머니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쫓아버렸어요!”라고 했다. 그것은 내가 수련자이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보호해 주셨으며 사부님께서 그런 저급한 영을 제거해주셨다는 것을 수련인은 알고 있다.

나는 어릴 적에 1년 반밖에 공부하지 못했다. 법을 얻었을 때는 이미 50세가 다 됐고, ‘전법륜(轉法輪)’ 책의 글자를 거의 다 몰랐다. 연공장에서 한 글자 한 글자씩 젊은 수련생에게 물어봤고 수련생들도 아주 인내심 있게 내게 알려줬다. 집에 돌아오면 외조카 딸에게 물었다. 법을 얻은 초기 하루에 한 페이지씩 배웠다. 낮에는 일했고 밤에 법 공부를 해서 지금은 이미 모든 대법경문을 읽을 수 있고 하루에 적어도 ‘전법륜(轉法輪)’ 1강을 배웠다. 이 전에 몸에 있던 병은 벌써 이미 없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방법을 생각해 주실 거예요”

1997년 7월 20일 사당은 전면적으로 대법과 대법제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사악의 거짓말을 대하고 거짓말에 기만된 세인을 보고 나는 가슴 아프게 느꼈고 매우 마음이 급했다. 그리하여 수련생과 상의하여 진상자료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는 컴퓨터 워드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서 흑백으로 프린트했다. 내용도 아주 간단했다. 바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의 몇 글자였고 수량도 많지 않았다. 한 번에 100, 200여 장이었다. 후에 현지 수련생이 타 지역 수련생으로부터 A4 용지 진상자료 판을 가져와서 인쇄소에서 인쇄했다. 어떤 때는 한 수레의 진상자료를 저녁에 인쇄소에서 끌고 나와 한 자루 한 자루씩 수련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것으로 수련생들은 작지만, 일정한 지역 범위 내에서 서로 협조하며 배포했다. 그때 우리는 복도, 창문, 승용차의 앞유리, 자전거 바구니, 문틈 등등 쉬운 모든 곳 모든 장소에 배포했다. 어떤 때는 마트의 적당한 상품 안에 자료를 넣어 세인들이 상품을 사서 집에 가서 열어보면 진상 내용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설 명절 때는 빨간 봉투에 진상자료를 넣어 음력 그믐날 세인들 집에 배포했다. 많은 세인이 음력 정월 초하루 아침에 문을 열면 빨간 봉투에 들어 있는 진상자료를 받아 볼 수 있어서 아주 기뻐했다. 비교적 쉽게 진상자료를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대법을 수련한 후부터 나는 오직 언제든지 사부님을 믿고 대법을 믿는다는 마음뿐이었다

한 번은 나와 수련생이 성에서 10여 리 떨어져 있는 농촌에 가서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모두 배포한 후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의 연료가 떨어졌다. 길가에 작은 개인 주유소가 있었는데 주유소에는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서 아주 장시간 기다렸다. 수련생이 매우 조급해하는 것을 보고 나는 “걱정하지 마세요,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방법을 생각해 주실 거예요.”라고 했다. 좀 지나서 차 한 대가 오더니 기사도 내려와 주유하려고 했다. 이 사람은 주유소의 주인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 그가 주유소 주인을 금방 찾아왔다. 원래 주유소 주인은 마작하러 갔던 것이다. 우리가 기름을 가득 채우자 그 기사는 농담조로 “내가 없었으면 당신들은 언제 돌아갈지도 몰랐겠네요!”라고 했다.

사실 나와 수련생은 사부님께서 그 기사에게 우리를 돕도록 하신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사부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우리는 아주 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매 감방에 모두 손목시계가 하나 있게 되어 제때에 단체적으로 발정념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2004년 상반기에 진상자료를 배포하다가 진상을 모르는 공동방위대원에 의해 경찰에게 고발되고 불법 납치되어 2년 노동교양 처분을 받았다.

노동교양소 이 소굴로 온 후 악경(사악한 경찰)은 나를 강박하며 소위 ‘삼서(三書)’라는 것을 쓰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결연히 거부하며 그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 악경은 내게 작은 걸상에 앉으라고 했지만 나는 앉지 않았으며 악경도 무슨 방법이 없었다. 어떤 때는 바깥 수련생이 우리에게 사부님의 경문을 보내줘서 수련생들이 몇 부를 베껴 써서 다른 감방 수련생들에게 전해줬다. 나는 글을 쓸 줄 몰라 전해주는 일을 도왔다. 후에 수련생들의 정념이 갈수록 강해져 단체 발정념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계가 없어서 몇 개 감방의 수련생들이 시간에 맞춰 동시 발정념을 하기란 어려운 실정이었다. 나는 면회 온 가족에게 손목시계를 부탁했다. 다음 면회 때 가족이 7개의 손목시계를 가져와서 감방에 모두 손목시계가 하나씩 있게 되어 제때에 단체 발정념을 할 수 있게 됐다. 나는 2004년 하반기에 불법적으로 감금된 지 1년 만에 사부님의 보호와 가족의 도움으로 정정당당하게 노동교양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소상인들은 모두 자발적이고 적극 진상화폐를 사용했다

노동교양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나는 현지 수련생과 연결할 수 있었다. 내가 만난 한 수련생은 젊은 수련자인데 나에게 “프린터기를 한 대 사서 작은 자료점을 건립하라.”라고 건의했다. 나는 “다만 3권의 책밖에 읽지 못한 사람이라 아마 그걸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라고 했지만, 수련생은 “다른 지역에서는 70여 세 노인도 다 배워서 하고 있어요. 대법제자는 자신이 없어서는 안 돼요! 제가 책임지고 가르쳐 드릴 터이니 천천히 배우세요.”라고 독려했다.

수련생의 격려와 가르침으로 컴퓨터와 흑백 프린터기와 관련 소모품 등을 구입하였다. 수련생이 나를 도와 컴퓨터의 모든 기기를 설치하고 디스크에 암호까지 설정해 주었다. 우선 컴퓨터를 켜고 들어가기와 닫기를 배웠다. 수련생은 절차와 순서를 하나하나 종이에 적어주어 나는 반복해서 그대로 해봤다. 내가 컴퓨터를 어느 정도 능숙하게 작동할 줄 알게 되자 그는 인터넷에 접속하여 ‘밍후이왕’을 보는 방법도 알려줬다. 역시 절차와 순서를 하나하나씩 종이에 적어줬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바보 식으로’ 컴퓨터를 배웠다. 이상 두 개의 절차를 능숙하게 배운 후 프린터 하는 것도 배웠다. 수련생은 자료를 암호로 설치한 자기 디스크에 다운하여 압축을 풀은 후 그 절차와 순서를 종이에 적어 주어 그것대로 조작할 수 있었다.

프린트하는 것은 전의 두 개 절차처럼 쉽지 않아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혔다. 어떤 때는 암호를 설치한 자기 디스크를 열 수가 없었고, 어떤 때는 파일을 찾을 수 없었으며, 어떤 때는 버튼을 잘못 눌렀고, 어떤 때는 프린터기에서 종이가 걸렸다. 어떤 사소한 문제라도 발생하면 나는 조급해 쩔쩔매면서 감히 기계를 더 고장 나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지지 못하고 전화로 수련생을 불렀다. 이렇게 한 개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야 프린터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특히 후에 컬러프린터기를 샀는데 발생하는 문제는 더욱 복잡해져 수련생이 조금은 귀찮게 여기기도 했다.

후에 밍후이왕의 교류문장을 봤는데 프린터에 문제가 생기면 우선 자신을 연마하고 발정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로 일단 프린터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집착심을 찾았다. 정말로 자신의 과시심, 쟁투심, 원망심, 명리심 등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런 좋지 않은 마음을 배척하고 이런 마음을 억제하여 확실히 많은 집착심을 내려놓았다. 사부님의 가지로 수련생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으며 이렇게 수년간의 곤란을 겪고 지금 나는 이미 독립적으로 인터넷에 접속하고 다운받아 프린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

우리가 프린트한 자료는 모두 밍후이왕에서 다운받은 것이었다. 주로 ‘후난의 광’, ‘명혜주간’(후난판), ‘진상’, ‘천사홍복(天賜洪福)’, ‘삼퇴와 평안’, ‘명백’ 등의 전단지와 간행물이었다. 그리고 부동한 세인의 특징에 따라 자료를 부동하게 협조를 하며 지퍼 백으로 포장하여 세인들에게 배포했다.

밍후이왕에서 진상화폐를 제작하는 문장을 본 후 나도 진상화폐를 프린트하기 시작했다. 액면은 1위안, 5위안, 10위안, 20위안짜리를 주로 하고 그 외 50위안, 100위안짜리를 부차적으로 했다. 우선 자신부터 사용했고 후에 기타 수련생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현지의 많은 수련생은 이미 진상화폐를 완전히 일상생활에서 융해했다. 많은 세인이 진상화폐를 좋아했다. 특히 장사하는 사람들은 진상화폐를 사용한 후 장사가 잘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진상화폐를 바꿔줘서 세인을 도와 사용하라고 주면서 시험해 봤다.

많은 소상인을 아는데 그들은 모두 진상을 명백히 안다. 그들이 장사하는 데는 많은 잔돈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번에 10장, 20장씩 그들에게 바꿔줬다. 그들은 기뻐했고 진상화폐를 사용한 후 장사는 갈수록 좋아졌는데 대법은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줬다. 후에 나는 그들에게 매번 바꿔주는 진상화폐의 수량을 증가시켰다. 지금 닭, 물고기, 쌀, 고기를 파는 사람에게 주었는데 신문판매대를 운영하는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진상화폐를 사용했다. 매번 내가 채소시장에 가면 그들은 모두 나를 찾아와 진상화폐를 달라고 했고, 매일 1,000위안, 200위안 상당액수의 진상화폐가 소비돼 나갔다.

2011년까지 내가 바꿔준 진상화폐는 15만 위안(약 2,640만 원) 전후였는데, 올해 아마 30만 위안(약 5,280만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당신들은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좋은 사람을 잡아서는 안 된다!”

저령이 제거된 신적(神跡)을 봤기 때문에 가족은 줄곧 내가 대법을 배우는 것을 지지했다. ‘7. 20’ 이후 비록 자녀는 좀 이해해 주지 않았지만, 장기적인 진상을 알리는 것을 통해 지금은 모두 이해해 주고 있다.

남편은 줄곧 내가 대법을 배우는 것을 지지했다. ‘7. 20’ 후 내가 자료를 만들고 배포하고 ‘삼퇴’를 권하는 등 이런 일들을 남편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반대한 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내가 ‘삼퇴’를 권할 때 남편도 옆에서 거들어줬다. 세인들은 수련하지 않는 남편까지 말하는 것을 보고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는데 왕왕 아주 통쾌하게 ‘삼퇴’를 동의했다. 몇 년래 남편은 내가 진상을 알리는 것을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도와 반 박해를 했다.

2005년 어느 날, 내가 노동교양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5, 6명의 국가보안 경찰이 집을 수색하러 왔다. 그날 남편이 마침 집에 있었다. 그때 남편은 경찰이 악행을 가하려고 하자 즉시 그 중의 한 사람의 멱살을 잡고 “이 건달 같은 당신들, 뭘 하러 왔는가?! 우리 집은 당신들 때문에 아주 비참하게 됐다. 나쁜 사람은 잡지 않고 뭐하는 짓인가? 인신매매, 도둑질, 오입질과 도박, 매음하는 사람은 잡지 않고, 북쪽 문에서 홍흑보(紅黑寶)를 맞히는 도박하는 사람은 잡지 않고, 전문적으로 좋은 사람만 잡는구나? 파룬궁을 하는 사람 중에 어느 누가 좋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당신이 그들에게 1위안을 줘도 그들은 받지 않을 것인데, 당신들은 해낼 수 있는가?”라고 대들었다. 5, 6명의 국가보안은 놀랐다. 그 중의 차이(蔡) 씨라는 자는 놀라서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우리도 파룬궁은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위에서 이렇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우리도 방법이 없다. 우리도 밥을 먹어야 한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자 남편은 “당신들이 밥을 먹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은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 된다! 얼른 꺼져버려!”라고 힐책했다. 5, 6명의 국가보안은 풀이 죽어 그대로 나갔다. 이후로, 다시는 사당이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2010년 현지 수련생이 외지에서 사당에게 납치되어 불법 판결을 받았다. 현지 수련생과 성 소재지 수련생들이 협조하여 돈을 써서 변호사를 선임하여 수련생을 변론했다. 나는 이 일을 남편에게 알려주어 남편의 동의를 얻어 9,000위안(약 160만 원)을 수련생 가족에 빌려주어 소송비용으로 쓰라고 했다.

2011년 현지 몇 명의 수련생은 한 농촌 파출소의 악경에게 납치당했다. 일이 발생한 후 현지 수련생들이 전면적으로 협조하여 여러 가지로 구원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이 과정 중에서 남편은 이 파출소 소장의 아버지(남편이 잘 아는 사람이고 공안국에서 퇴직한 사람이었다.)에게 진상을 알렸으며, 그가 파출소장인 아들에게 “대법제자를 괴롭히지 말라.”라고 말했다. 그는 아들에게 진상을 명백하게 말했다. “형세를 똑똑하게 인식하라. 파룬궁을 박해하지 말라.”라고 했으며. 또 공안국으로 가서 주관하는 부국장과 국가보안 대대의 경찰을 찾아가서 그들에게도 “대법제자를 괴롭히지 말라.”라고 당부했다. 최후에 모두가 공동으로 노력한 결과로 구원은 아주 좋은 효과를 얻었다. 더욱 기쁜 것은 이 소장의 아버지는 진상을 명백하게 알고 ‘삼퇴’를 했으며, 매일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읽으면서 그의 아들인 파출소소장에게 ‘전법륜(轉法輪)’을 보라고 권했다.

우리는 그를 초기 대법을 배우는 세인으로 대하자”

현지에 어떤 수련생은 ‘3가지 일’을 하는데 정진하지 않았고 또 어떤 수련생은 장기적으로 구세력의 병업 형식으로 박해받고 있었다. 나와 기타 수련생은 자주 이런 수련생을 도와주고 독촉했다. 할머니 수련생인 잉(英)은 반 박해를 아주 단호하게 하여 현지에서 일정한 영향이 있었다. 그러나 2007년 어느 날 잉은 가부좌하다 쓰러져 병원에 보내져 검사를 받았는데 고혈압의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됐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세인들의 의론이 분분해졌다. 수련생들은 조급했다. 수련생들이 많은 교류를 통해 잉 할머니 문제는 수련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데 의견이 귀결됐다. 그녀는 원래 전에 습득했던 다른 공법을 내려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예전의 그 공법으로 다른 사람의 병을 봐줬는데 남편과 이웃들의 병을 고쳐줬다고 했다. 그때 수련생이 그녀를 찾아가서 교류하며 지적해줬는데도 듣지 않은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자 많은 수련생이 잉 할머니를 찾아가서 함께 교류하고 발정념도 해줬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으며 끝내 2010년 10월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또 현지의 핑(萍) 수련생은 평소 나와는 비교적 많이 연락했던 수련생이었다. 몇 년 전에 병업의 박해현상이 나타나 나는 자주 그녀와 교류하며 수련 중의 문제점을 지적해 주고 온 힘을 다하여 그녀를 도왔으나 그녀 역시 최종적으로 병업의 박해 중에서 걸어 나오지 못하고 2011년 세상을 떠났다.

수련생의 사망은 대법제자 중에서 하나의 파동을 일으켰다. 모두 계속해서 생각하고 물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번은 나와 갑 수련생이 이 일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말했다. 갑 수련생은 “밍후이왕에는 성공적으로 수련생을 도와 병업의 박해를 벗어나게 한 사례가 많다. 같은 수련생인데 왜, 우리는 안 되고 다른 수련생의 효과는 그렇게 좋은가? …… 현지 수련생도 많은 시간과 정력을 써서 도와줬는데 왜 효과가 좋지 않은가, 차이점은 바로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쓰지 않았고, 자기 일로 생각하지 않았고, 인내심이 없었고, 자비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수련생을 돕는 과정이 바로 자신을 연마하는 과정이고 수련생의 결점을 보고 우리가 그를 질책하지 말아야 하며, 말로 그를 자극하지 말고, 인내심 있게 격려하며 그를 도와 강철을 녹여버리는 듯이 자비롭게 우리가 장(場)을 형성했다면 그 사악은 감히 거기에 머물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갑 수련생의 이 말을 듣고 나는 갑자기 나 자신이 수련에서 누락이 있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나도 아주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의 수련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줬지만, 효과는 언제나 좋지 않았으며 내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아직도 자신이 다른 수련생을 돕는 어조가 상냥하지 않고 상대방을 자극했으며, 마음가짐이 평온하지 않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의 원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신의 부족을 명백히 안 후 갑 수련생에게 “꼭 고치겠다.” 또 “C 수련생이 여전히 병업의 박해를 당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물었다. 갑 수련생은 “수련생이 병업의 박해로 사망한 현상은 핑 수련생까지다. 더는 나타나게 해서는 안 된다. 현지 모든 수련생도 이 일념을 확고하게 해야 한다. 일단 수련생이 병업의 박해가 있으면 현지 모든 수련생은 모두 이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큰일로 대해야 한다.”라고 했다.

갑 수련생은 C 수련생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건의했다. (1) 모든 수련생에게 통지하여 알리자. 올 수 있을 때는 오고 방문할 수 없을 때는 집에서 발정념을 할 때 C 수련생을 가지해 주고, C 수련생의 일을 자기 일로 여기자. (2) 방문할 수 있는 수련생은 C 수련생 집에서 법 공부 팀을 건립하여 정기적으로 법 공부를 하자. C 수련생에게 아무런 요구도 하지 말고 우리는 그를 초기 대법을 배우는 세인으로 대하자. 그가 얼마나 제고할 수 있으면 제고하게 하자. 우리 매 수련생은 우선 자신을 바로 잡고 맹목적으로 조급해하지 말고 그를 자극하지 말며 인내심 있게 그를 대하고, 자비롭고 평화로운 환경을 만들어주어, C 수련생이 이 환경 속에서 자신의 정념을 수립하여 스스로 곤경에서 걸어 나오게 하자.

이렇게 결정한 후 우리는 각기 현지 모든 수련생에게 통지했는데 나도 몇 명의 수련생에게 연락했다. C 수련생 집에서 법 공부 팀을 건립한 후 매주 금요일 정기적으로 법 공부를 했다. 매번 법 공부하기 전에 우선 발정념 15분을 하고 번갈아 읽으면서 법 공부를 했다. C 수련생은 법 공부할 때 자주 틀렸다. 글자를 빠뜨리거나 글자를 더해 하거나 글자를 틀리게 읽었다. 잘못이 나타나면 기타 수련생은 제때에 지적해줬다. 이렇게 C 수련생이 정신을 차려 법 공부를 하게 했다. 법 공부를 한동안 견지하자 C 수련생의 상태는 크게 개선됐다. 이전에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기색도 좋아졌고 얼굴도 희멀쑥하게 변했다. 법을 읽는 것도 많이 유창하게 됐다. C 수련생의 상황에 따라 우리는 진일보 중점적으로 그를 협조하여 진상을 알리는 방면에서 돌파하려고 했다.

10여 년이 지나갔다. 대법수련의 이 길에서 나는 많은 고생을 겪었고 많은 곤두박질쳤으며 ‘이해되지 않는 일도’ 아주 많았고, 비난과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과 직접 만나게 된 적도 있다. 매번 관을 넘을 때 나는 사부님과 대법을 생각했고 세인을 구도하는 것은 내가 인간으로 내려온 사명이라고 생각하며 꼭 견지하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내가 이렇게 생각할 때 많은 관과 난은 천천히 내 곁에서 떠나갔다. 마지막에는 다만 세인을 구도하고 사명을 완성하려는 일념밖에 남지 않았다.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수련생에게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2002년 워싱턴DC법회에서의 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2004년 미국서부법회에서의 설법’

문장발표: 2012년 11월 1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제9회 밍후이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19/263704.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12/12/5/1365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