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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작품]창춘에서의 파룬따파(4)

-제4편 대법을 보호하다

[밍후이왕](윗 문장 창춘에서의 파룬따파(法輪大法)(3)를 이어)

사부님께서는‘홍음-난중불난(難中不亂)’에서 “정법 전(傳)함은 어렵고도 어렵구나 만마(萬魔)가 가로막나니 험난 속에 험난이 있구나” 라고 쓰셨다.

대법이 창춘에서 전하기 시작할 때부터 여러 방면에서 방해를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만난(萬難)을 물리치셨고 수련생들도 확고하게 대법을 보호했는데 사부님께서 20년간 법을 전하시는 과정 중에서 창춘 대법제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법을 보호하기 위해 자각적인 행동을 견지했다.

1. 파룬궁을 무고한 사건

1994년 파룬궁(法輪功)을 이용하여 돈을 벌려고 한 몇 몇 무뢰한들은 파룬궁에 죄를 뒤집어씌우는 모함으로 요언을 날조하여 명예를 더럽히는 비열한 수단을 구사하고 조작하여 사부님과 대법자료를 공격했다. 이런 황당무계한 무고(誣告)를 당하게 된 초기에 법을 얻은 장춘 노 수련생들은 냉정한 사고와 이성적인 분별력으로 그것들의 파괴적 방해 책동을 제거했으며 수련생의 수련환경을 온정하게 유지시켰다. 그러므로 그런 수련생들의 자세는 후에 법을 얻은 수련생들에게 부동한 방면에서 부동한 방법으로 다가오는 대법에 대한 방해와 파괴행위를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를 보여준 좋은 본보기가 됐다.

노 수련생은 몇 명의 무뢰한들이 죄를 뒤집어씌우는 정황에 대해 직접 기공연구회에 하나하나 모두 사실대로 해명했으며 특히 ‘창춘 극소수 사람들의 음모를 폭로한다(揭露長春極少數人的隂謀)’ 제하의 석명서(釋明)를 작성하여 창춘시와 지린성의 관련 기공협회에 제출하여 철저한 조사를 하도록 조치했고 여러 방면의 의견을 반복적으로 제기하여 진실이 밝혀져 결국 모두 파룬궁을 지지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파룬궁을 무고(誣告)했던 사람들은 비판 받으며 모든 분야에서 배척을 받았다.

일부 정황만을 알뿐 전반적으로 완전한 내막을 전부 알지 못하는 수련생들이 많았는데 노 수련생은 이들을 대법으로 가늠하도록 인도했다. 사부님께서 설법 중에서, 일부 거사가 수련생을 끌고 절에 가서 귀의시키거나 기공 치료반을 꾸려서 걸핏하면 손을 내밀어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며 기공사로 이름을 날려 돈을 벌려고 하는 행위, 법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 이런 행위에 대해 엄하게 비평하셨다.

당시 노 수련생은 파룬궁 책을 출판할 자금이 없어 어렵게 4만 위안의 돈을 차용하여 초판을 찍어내어 판매 대금으로 돈을 갚고 2판을 찍어내려고 했었다. 그런데 몇 사람이 인심을 얻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심사로 몇 천권의 책을 무절제하게 자기 맘대로 배부하는 바람에 책값에서 2만여 위안의 결손이 발생했다. 사부님께서는 “이 돈에 너희들이 감히 손을 대는가!?”라고 엄하게 나무라셨다.”라고 했다.

노 수련생은 그 때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중 몇 사람은 참으로 배은망덕했는데 그들은 제일 먼저 파룬궁을 만났고 또 사부님을 일찍 만난 사람들이었다. 승리공원에서 기공을 연습할 때 사부님께서 그들의 병을 치료해주셨을 때 당시 그들은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은혜에 감사를 드렸던 사람들이다! 사부님께서는 그들을 파룬궁 보도소의 책임자로 지정하시며 그들을 특별하게 대해주셨는데 그들은 오히려 파룬궁을 이용하여 명리를 추구하고 재물을 추구했다. 결과 대법을 파괴했고 자신도 훼멸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수련생들은 대법에 대해 초기 사람의 감정에 치우쳤던 표면적인 인식으로부터 점차 이성적인 인식으로 승화됐으며 대법의 진정한 내포를 이해하고 대법을 보호하며 대법을 실증하는 데로 자각적인 의식과 행동을 하게 됐다.

2. 광명일보 사건

당시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를 주관하는 뤄간(羅幹)과 중공 중앙선전부 딩관건(丁關根) 등의 족속들은 정치적 술수로 개인적인 치부를 위해 사람을 사주하여 파룬궁에 대한 문제를 만들어낸 것이다. 1996년 6월 ‘광명일보(光明日報)’는 ‘거짓과학을 반대하기 위해 경종을 길게 울려야 한다(反對僞科學要警鍾長鳴)’란 논평을 통해 당시 베이징에서 베스트셀러 제1위에 올라 있던‘전법륜(轉法輪)’을 ‘거짓 과학이다.’라고 비판했다. 그 뒤를 이어 1996년 7월 24일 중공 중앙선전부는 ‘‘전법륜(轉法輪)’은 미신을 선전하는 책이니 각급 신문출판국은 물론 중국 전 지역의 출판사에서는 ‘전법륜(轉法輪)’과 파룬궁 등 관련 서적을 출판해서는 안 된다.’는 내부 지령문을 시달하여 출판을 금지시켰다.

해괴한 광명일보의 보도를 본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나서서 보도의 부당성을 말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극히 선량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나서서 ‘‘전법륜(轉法輪)’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커다란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대법은 국가와 인민에게 혜택이 있는데 높은 도덕심을 함양시키는 것으로 백가지 이익은 있어도 나쁜 점은 단 한 가지도 없다.’라고 파룬궁을 실증하고 광명일보의 거짓말 보도를 폭로했다.

당시 많은 수련생들은 갓 대법수련의 길에 들어선 때였으나 몸과 마음의 커다란 변화로 그들은 모두 기뻐하고 격동되어 있었다. 이런 상태는 또한 그렇게 진실하고 가까웠다. 그들은 필을 들어 자신의 최근 수련체득을 썼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대필해줄 사람을 찾아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꼭 말하려고 했다. 이런 노년 수련생의 심신의 변화는 가장 두드러졌는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참된 말은 참으로 생동감이 있고 그 심태가 극히 평화롭고 선량해서 보는 이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어떤 수련생은 직접 진리를 찾다가 대법을 얻게 된 사연과 함께 역사, 종교, 철학, 현대과학 등의 각도에서 이성적으로 분석하면서 무엇이 진정한 과학인가를 논리 정연하게 서술하면서 광명일보 문장의 황당무계를 논평으로 반박했다. 편지를 쓰는 과정 중에서 여러 사람들이 서로 보여주고 수정하고 읽으면서 격려하여 마치 대법수련 심득교류회와 같았다.

이렇게 작성된 편지들은 ‘광명일보’와 각 신문출판국과 중공 중앙선전부 및 현지 신문 등 각종 매스컴과 국가체육위원회 등 각급 기관단체와 부서로 발송했으며 또 많은 수련생들은 지린성, 창춘시 기공협회, 중국기공과학연구회로 발송하기도 했다. 수련생의 서신을 받은 그들은 후에 파룬궁을 위해 많은 정면적인 소개를 했다. 그 외 많은 사람과 직장에서 수련생들의 서신을 받아보고 대법에 대해 정면적인 방향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일부 사람들은 대법수련의 길로 들어섰다.

대법 책이 출판 금지됐기 때문에 법을 얻은 신 수련생은 당장 대법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노 수련생들이 책을 베껴 쓰고 책으로 만들어 신 수련생에게 줬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서적의 발행은 반드시 일률로 정규 사회 발행방식을 따라야한다고 요구하셔서 속인의 방식대로 출판회사에서 발행했기 때문에 보도소는 돈을 관리하지 않았으며 돈이나 물건을 저축하거나 비축하지도 않았다. 수련생들은 아주 어려운 시기에도 아주 올바르게 걸었다.

3. TV 방송국 ‘선택’의 풍파

1997년 말, 지린성 TV 방송국에서는 특집으로 ‘선택’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는 랴오닝 TV 방송국, 북경 영화스튜디오, 북경 진잉마(金英馬) 유한책임회사 등이 공동으로 제작한 소위 사회정화를 위한 내용으로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고양시킨다는 목적의 드라마다. 등장인물 중 부패하고 타락하다가 최종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반사회적 인물로 설정된 인물이 바로 ‘파룬궁제자’였다. 이는 대법을 희롱하고 모욕하는 고의적인 처사였다. 드라마 방영 중의 제 5, 9, 10, 17회에서는 파룬궁을 묘사하는 화면과 음악 등이 모두 대법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그 스토리와 수법이 아주 치졸하고 극히 악독했다.

창춘 수련생은 이 사건을 들은 후 누구와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람이 지린 TV 방송국으로 갔다. 저녁 7시 반 뉴스가 끝난 후 이 드라마가 방송 될 때 대법을 모욕하는 장면이 방영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광범위하게 이걸 민중들에게 시청하게 하여 민중들이 드라마에 속아 상해를 입개 해서는 안 되며 또 이런 행위로 TV 방송국이 대법에 죄를 짓게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는 계절적으로 겨울철이어서 하늘에서 많은 눈이 내렸고 찬바람이 살을 에이 듯이 불었다. 수련생들은 직장에서 퇴근하고 곧바로 TV 방송국으로 왔기 때문에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않았고 식사도 거른 상태였다. 모두 TV 방송국 앞 작은 광장에서 기다렸다. 수련생 대표 몇 명이 건물 안에서 방송국 책임자와의 대담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어떤 수련생은 ‘선택’이란 소설책을 들고 와서 원작품에는 대법을 공격하는 내용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떤 수련생은 전화로 이 드라마가 방송됐던 베이징과 선양의 수련생과 연락하여 드라마 5, 9, 10, 17회에서 대법을 모독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또 어떤 수련생은 직접 자신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TV 방송국의 고위 간부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많은 수련생들은 그 자리에서 조용하게 기다렸다.

바깥 날씨는 매우 춥고 마음은 급했다. 그 드라마 방영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방송국 건물 안 대기실로 들어가서 교섭 결과를 기다렸다. 단번에 들어 온 많은 사람들이 대기실을 가득 메웠다. 유리차단벽을 통해 안쪽의 대형 스크린이 보였다. 사람이 더욱 많이 들어찬다면 장소가 협소하여 자칫 유리가 파손되고 스크린이 파손될 수도 있었다. 수련인은 이런 와중에서도 중공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여 유리를 다치지 않게 서로 손을 잡고 중앙으로 모여 스크린이나 유리에 몸이 닿지 않게 간격을 유지 시켰다. 이런 수련자들의 모습을 방송국 직원이나 경비원들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들은 무엇을 말할 필요도 없었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도 없었고 또 누구를 막을 필요도 없었다. 수련자들 스스로 질서를 잡고 안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간 수련생 대표는 당직 책임자와 대담 중이었다. 7시 반이 넘었다. 문제의 그 드라마를 방송하던 시간대에 드라마를 방영하지 않고 대신 스포츠 방영으로 대치하여 모였던 많은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좀 지나서 방송국 당직 책임자가 수련생 대표와 악수를 하면서 배웅을 할 때 수련생 대표는 눈물어린 모습으로 “방송국 책임자들이 파룬궁 수련생들의 심정을 이해해줘서 감사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향해 “여러분 감사합니다. 방송국을 위해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줘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여러 수련생들은 문제가 해결된 것을 확인하고 모두 질서 있게 문을 나섰는데 TV 방송국 정문 밖에 수련생 2명만 남겨 놓고 모두 돌아가면서 후에 도착한 수련생들에게 문제가 해결됐다며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고 통지했다. 후에 그 드라마는 몇 회 더 계속 되지 않고 종영됐다. 이것이 바로 중공이 말하는 ‘파룬궁이 지린 방송국을 포위 공격하여 파룬궁을 진압했다.’라고 주장하는 날조된 사건의 진실인 것이다.

4. ‘4.25’ 상방(上訪)

‘톈진사건’과 ‘4.25’사건의 발생전후 창춘 대법제자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이 법 중에서 인식한 것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선택했다.

가장 먼저 소식을 들은 수련생들은 직접 텐진으로 갔기 때문에 당시 그곳에서 일어난 소위 ‘텐진사건’과 ‘4.25’ 그날 베이징 중남해의 상방[陳情]에 대한 전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겪은 수련생은 창춘 대법제자 중의 극소수였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4.25’전 날이거나 당일의 일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동안 비록 중공당국이 자주 각 지역에서 수련자에 대해 같지 않은 정도로 소란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현장에서 40여 명이 한꺼번에 집단으로 납치되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구타를 당한 사실은 충격이었다. 선량한 대법제자들은 중공의 그 같은 악행에 대해 경악하면서 납치된 수련생들을 구조하는 일을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수련생은 택시로 또 어떤 수련생은 항공편을 이용하여 베이징으로 갔다. 그 중에는 20세도 채 안된 젊은 수련자가 혼자 자전거를 타고 베이징을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창춘부터 베이징까지의 거리는 장장 1,000km의 긴 노정이었다.

‘4.25’ 당일에 창춘시에서는 두개의 대형 법회가 있었다. 하나는 도시의 동쪽에서 또 하나는 도시의 서쪽에서 열렸는데 법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래서 법회에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이 ‘톈진사건’과 베이징의 상방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베이징을 향해 떠났는데 대략 시간은 오후와 저녁시간이었다. 한 무리 수련생들은 공항으로 가서 소형 비행기를 전세 내어 갔고, 열차편을 이용한 사람 버스를 이용해서 간 사람도 있었고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열차로 가던 사람들은 중간 지역인 선양에 도착했을 때 총리가 사건을 적절하게 처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십여 대의 중대형 버스를 전세 내어 떠난 수련생들은 인근 스핑 지역에서 공무원을 대동한 시장이 직접 나서서 가는 길을 막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는데 바로 그날 저녁 보도원 집에 경찰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데 시임(时任) 총리가 직접 나서서 이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톈진의 수련생들은 잡혀간 사람들을 당장 귀가시켜주고 또 이후 수련생들이 평화롭게 수련할 수 있도록 환경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오직 가장 기본적인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총리는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수련생들은 모두 기뻐했다.

‘4.25’사건 때 얼마나 많은 대법제자들이 창춘에서 베이징에 갔는지는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다. 당일의 열차표는 역내의 사람을 통해 샀는데 한번에 100장씩 150장씩 또는 한 객차의 표를 모두 사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한 개 객차의 손님이 모두 대법제자였다. 그러자 역무원들은 ‘설을 쇠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의 방학기간도 아닌데 어찌 이렇게 한꺼번에 열차표를 대량으로 매입하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두 베이징으로 간단 말인가?’ 라고 물었다. 그 때 공항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징행 항공권이 갑자기 대량으로 매표되고 심지어 비행기를 통째로 전세를 내자 이 같은 현상은 보기 드문 일이여서 공항 전체가 긴장한 분위기로 돌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는 며칠이 계속됐는데 현과 시의 외지 수련생들이 소식을 듣고 계속 베이징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현상은 ‘5.1절’까지 지속됐다.

사실 ‘4.25’전에 뤄간, 허쭤슈(何祚庥) 등의 패거리들은 이미 일의 전말을 의도적으로 끊임없이 격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웃 성인 랴오닝에서 수차례 수련생들의 아침 연공을 가격하는 방해를 했고 또 수련생의 가택을 강제로 수색하여 금품을 약탈한 불법행위가 나타났던 것이다. 창춘시에서는 각 연공장에 대한 감시의 눈이 많아졌으며 법 공부 팀에도 느닷없이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수련생들의 마음속은 아주 평온했다. 사부님께서는 제자에게 시종일관 ‘진선인(眞善忍)’을 언행의 표준으로 하라고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포용했으며 주위에 찾아오는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미혹 속에서 깨어난 생명의 의의를 알고 깨달은 자임을 보여주었다. 이런 각오와 이성으로 대선대인의 정신을 발휘하여 우주 대법이 성취한 이것은 국제사회 상으로 볼 때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돌이켜 보더라도 ‘상방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지만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평화롭고 가장 원만한 상방이었다.’라고 평가되어 중국은 물론 세계를 감동시켰는데 바로 ‘4.25’의 평화로운 상방이었다.

法轮功学员石采东
파룬궁 수련생 스창이둥

시임 총리가 파룬궁 수련생 대표 3명을 중남해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들로부터 정황 설명을 들었다. 그 수련생 3명 중에는 스차이둥(石采東)이라는 수련생도 있었다. 그는 96년 창춘에서 석사 공부를 할 때부터 대법을 연마하기 시작했는데 98년에 중국과학원 지구물리연구소 박사과정 중에 있었다. 스차이둥은 총리에게 ‘한 사람이 진정한 진리를 알았고 옳고 그름,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안다면 그가 선택한 일은 어떤 압력이나 이익 앞에서도 의지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사실 당초에는 무슨 선택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런 정황, 그런 경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수련생들의 상방은 자각적으로 자연스럽게 자기가 선택한 것이다. 만약 나에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진리가 모욕을 받을 때 나는 여전히 나와서 진리를 보호할 것이고 모든 사람을 위하고 좋은 사람을 위해 권리를 쟁취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창춘 파룬궁 대법제자들의 속마음을 대표했다.

‘4.25’이후 리훙쯔(李洪志) 사부님께서는 1999년 6월 2일 ‘나의 약간의 소감’이라는 문장을 발표하셨다. 그 문장에서 사부님께서는 “나는 오로지 사람에게 선(善)을 향하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무조건 사람들을 도와 질병을 제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높은 사상경지에 도달하게끔 하였다. 나는 어떠한 금전과 물질적인 보수도 받지 않았다. 사회에 대해, 국민에 대해 긍정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보편적으로 사람의 마음이 선(善)을 향하고 도덕이 고상(高尙)해지게 했다.”, “사실 나는 거듭 사람들에게 인간이 되는 데에 眞(쩐)·善(싼)·忍(런)을 준칙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바, 자연히 나도 모범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