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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법을 잘 공부할 수 있는가

글/ 대륙 대법제자 이명(理明)

[밍후이왕] 법공부의 표면적인 뜻은 바로 대법제자들이 매일 해이하지 않고 대법 책을 보는 것을 견지할 수 있음이다. 보건대는 간단하지만 진정으로 심태가 순정하게 법공부를 하며 또 각 층차에서 깨달은 법리의 지도 하에 다른 두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수련생들이 문장 중에서 법공부할 때의 그 순정한 심태와 경지를 담론한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너무나 부러웠고 남보다 못한 것으로 인해 몹시 부끄러웠다. 정법의 마지막 시각에 나는 또 법공부의 태도가 정확하지 못한 그런 수련생들로 인해 몹시 조급하기도 하다. 나는 이 몇 년간 각지에서 접촉한 일부 수련생들, 특히는 법공부 면에서 아직도 존재하는 극단적인 인식과 상태를 쓰려고 했다. 우리 함께 어떻게 법공부를 잘하겠는지 교류 연구하고 자신을 바로 잡으며 함께 정진, 제고하며 정법의 노정을 따라가면서 사부님의 자비한 고도(苦度)에 어긋나지 말자.

1. 법공부만 하고 일을 하지 않는다

여기도 몇 가지 부류가 있다: 한 부류 수련생들은 다만 ‘전법륜’만 보고 기타 설법과 경문은 보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구실을 찾아 말한다. “사부님께서는 일찍 다만 ‘전법륜’만 봐도 원만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의 모든 설법과 경문은 모두 ‘전법륜’을 에워싸고 이야기한 것으로 모두 ‘전법륜’ 법리에 의해 포용된 것이지만 우리들이 모두 깨달을 수 없다. 정법 노정의 추진에 따라 사부님께서는 더욱 깊은 법리를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모두 깨닫는다면 사부님께서 이야기하실 필요가 있는가? 사부님의 법마저 보지 않는다면 신사신법(信師信法)인가? 사실 이것은 ‘귀를 막고 종을 훔치는’ 격으로 법에서 자신에게 벗어날 수 있는 구실을 찾는 것으로 이는 속인의 교활한 심리다.

다른 한 부류는 법만 공부하고 일을 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시간을 법공부에 이용한다. ‘전법륜’을 이틀에 한 번 읽거나 심지어 하루에 한 번 읽으면서 자신이 법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건대 이런 현상은 사부님께서 언급하신 지금 승려들(경서를 얼마 읽는가를 수련으로 간주)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마음을 착실히 수련하지 않고 법의 요구에 따라하지 않으며 심성의 경지가 제고되지 않는다면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수련하지 않은 것과 같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의 위엄’을 평함”에서 일찍이 우리들에게 알려주셨다.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할 수 없다면 곧 대법제자가 아니다.” ‘건의’ 중에서 말씀하셨다. “오로지 대법 속에서 좋은 점만 얻으려 하고, 도리어 대법을 위하여 지불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신의 눈으로 본다면 이러한 사람은 가장 좋지 못한 생명이다. 게다가 이 법은 우주의 근본이다. 지금까지 걸어 나오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은 이번 마난이 지나간 후 곧 도태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법을 얻었으니 곧 대법 수련자라고 생각하지만 사부님께서는 이를 반드시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닐 때 한 수련생의 말을 들었다. “이처럼 큰 법을 얻었으니 곧 원만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것은 당신 자신이 자신에게 안배한 수련의 길입니다.” 사부님께서는 일찍 우리들에게 타이르셨다. 원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원만할 수 없다고. 또 한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수련은 개인의 원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중생구도의 중대한 사명을 부여 받은 것이다. 아직까지 걸어나오지 못한 수련생들은 각지에 모두 있다.

2. 일하는 것을 중시하고 법공부를 중시하지 않는다

이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법도 이미 여러 번 보았으며 모두 기억했고 어떻게 해야 함도 알기에 더 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을 하는 많고 적음을, 수련을 잘하고 못하고로 간주하면서 일하려는 마음이 중해 법공부를 형식적으로 대하며 공부를 마치 임무완성식으로 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공부하지 못한다. 사실 이것은 속인이 대법 일을 하는 것이다. 대법제자의 위덕에 건립된 것이 아니라 속인의 복을 쌓는데 지나지 않는다. 법의 요구에 따라 마음을 수련하는데 주의하지 않기에 심태가 불순하며 해낸 말은 들떠서 힘이 없고, 일한 효과도 좋지 않으며 많은 노력을 들이고도 성과는 적어 역시 진정으로 중생구도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법에 있지 않고 일을 한다면 역시 한 가지 집착으로써 매우 쉽게 사악이 틈을 타고 들어와 박해한다. 이런 일들이 몇 해 전에는 매우 많았는데 지금도 늘 발생하고 있고 심지어는 구세력의 박해로 어떤 수련생들은 세상을 떠났다.

3. 법공부만 하고 교류 문장을 보지 않는다

내가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닐 때 한 노수련생을 만났다. 그녀는 원래 현지 보도원이었는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밍후이 문장을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것이기에 나는 자신이 깨닫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비학비수(比學比修)’[1]하라고 하셨습니다. 수련생들의 교류와 서로 토론하고 연구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겨 준 수련 형식인데 지금 우리는 법회를 소집할 환경이 없기에 밍후이 문장을 본다면 법회를 소집한 것과 마찬가지로 차이를 찾을 수 있고 제고할 수 있습니다. 자기 수련의 참고와 거울로 삼는다면 자신이 굽은 길을 적게 걸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나는 돌아가서 당신의 말을 잘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이미 밍후이 문장을 본다고 말했다. 지금 밍후이왕을 보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 있지만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4. 법에 대한 이전 인식을 고수하면서 고층차로 돌파하지 못한다

어떤 수련생들은 ‘7.20’이전의 법에 대한 인식으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하는 일을 가늠하면서 쟁투심을 버림, 좋은 사람이 됨, 법이나 기율을 준수함 등을 생각하고 자신은 법에 있고 법공부를 잘하며 속인상태에 부합되며 착실히 수련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는 개인수련과 정법 수련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낮은 층차에서의 법에 대한 인식을 고집하는 이러한 부류는 이것이 곧 법의 참뜻과 내포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제고한 후의 깨달은 법리와 행동을 가늠하는데, 사실 이미 법에 대해 변형적으로 정의를 내린 것이며 심지어 직접적으로 사부님 말씀은 이 뜻이라고 단정하면서 자신이 법에 있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인식의 국한성을 보아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은 이미 매우 높게 제고됐음에도 스스로는 제자리에서 답보하거나 배회한다. 하지만 제고한 수련생들이 보건대 그 사람의 인식은 자신이 이미 걸어온 수련 과정이다.

사부님께서는 ‘취중’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당신들더러 사람의 인식을 전변하라는 것은, 당신들더러 사람이 대법을 인식하는 이 하나의 상태를 고수하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지(理智)적이지 못하고 이러쿵저러쿵 지껄이라는 것도 아니며, 당신들더러 대법을 청성(淸醒)하게 인식하라는 것이다.” ‘정론’ 중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대법 중에서 무엇을 깨달았든지 모두 끝없는 법리가 한 층차 중에 존재하는 법리의 한 점에 불과한 것으로, 이로써 법 또는 법의 어느 한 부분, 심지어 어느 한 마디 말에 대해 정의(定義)를 내릴 순 없다. 만약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한다면 말이 나오자마자 죄업(罪業)이 이루어지는지라, 중한 자는 심중(深重)하기가 산과도 같고 하늘과도 같으니 어찌 수련할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그 층차에서 본 고만한 일은 아직 차이가 너무나도 크고 우리가 말하는 법의 진정한 함의와는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왜냐하면 수련인이 이 일보에 이르렀고, 다시 말해서 그의 오성이 이 일보에 도달했고 그의 심성 표준이 이 일보에 도달했으며, 그의 지혜도 이 일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높은 층차 중의 것을 그는 믿지 않을 수 있다.”

5.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일부로 전체를 평가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우화를 모두 알고 있다. 장님 몇 명이 모두 자신이 만진 코끼리의 일부분을 코끼리 전체 형상으로 간주한다. 수련생들이 법에 대한 인식 역시 유사한 상황이다. 이전에 일부 법리를 깨달은 것으로 인해 점차 일종 고집스러운 관념이 형성되어 자신의 이 인식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며 자신과 같지 않는 것을 모두 배제하고 역시 법에 대해 변형적인 정의를 내린다. ‘전법륜’ 중의 가짜 기공사(처음 약간의 이치를 깨닫고 후에는 진정한 기공사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을 기공사로 자칭하면서 간판을 걸고 행함)와 유사하다. 불교 중의 법은 이렇게 말법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인식은 어떤 한 가지 법리가 어떤 한 가지 각도에서 일부를 인식한 것이다. 만약 교류 중에 솔직하고 성실하며 겸허하고 인내심 있게 타인의 견해를 듣는다면 비로소 어떤 법리에 대해 하나의 완정하고 청성한 인식이 있게 되는데 이런 층차의 제고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이다.

며칠 전 수련생의 문장에서 제기한 것을 보았다. 지금 아직도 ‘관정’의 법리를 똑똑히 이해하지 못하는 수련생들이 있다고 한다. 법을 매일 공부하면서도 ‘실제적인 효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법에 대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서야 어찌 제고를 담론할 수 있단 말인가!

6. 사람의 생각과 신념(神念)을 확실히 분간하지 못하며 정념으로 문제를 보지 못한다

나는 2002년 사부님께서 창춘(長春) 대법제자들이 TV삽입방송일에 대한 경문 ‘정념으로 문제를 보다’를 볼 때 왜 이 제목을 사용하셨는지 생각하면서 삽입 방송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에야 명백히 알았다. 우리들이 수련 중 봉착하는 그 어떤 문제도 표면만 보거나 사람의 생각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마땅히 정념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말하기는 쉬워도 진정으로 하려 한다면 매우 어렵다. 반드시 법공부를 잘한 기초에서야만 비로소 해낼 수 있다. 어떤 수련생들은 책을 아주 열심히 본다. 하지만 구체적인 일에 봉착하면 여전히 속인 그 방법이고 근본적으로 자신을 법으로 지도하지 않는다. 무슨 쟁투심, 질투심, 명리심 등이 모두 올라온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그의 표준이고 이때는 곧 속인이다. 또 어떤 수련생은 완전히 사람의 총명함으로 일을 하지 정념에 의거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사람 일면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이는 제 1위가 아니라 정념정행이야 말로 가장 관건적인 것이다. 그런데 정념의 근원은 법에 있다. 하지만 그는 법공부와 수련 중의 구체적인 일을 완전히 분리시켰다.

또 어떤 수련생들은 법에 대해 매우 확고하지만 사람의 것도 매우 강하여 부딪히기만 하면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수련생이 의견을 제기해도 듣지 않는다. “말하지 말아요. 나는 이전에도 늘 이러했으니까요”라고 하면서 이전의 것이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속인은 관념을 개변하려면 매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대법제자이므로 아직도 사람의 것을 고수하면서 내려놓지 않는다면 정말 사부님께서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이 가장 내려놓기 어려운 것은 관념이다”이며, ‘재인식’ 중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당신들이 넘은 고비는 바로 당신들의 마성을 제거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한 차례 한 차례씩 각종 구실 또는 대법으로 덮어 감추어 지나갔으며 心性(씬씽)이 제고되지 못했고 한 차례 한 차례씩 기회를 놓쳐 버렸다”와 마찬가지다. 지금은 바로 정법의 최후 시각에 처해 있는데 이런 마음을 어느 때까지 남겨 놓겠는가? 오직 진정으로 수련하기만 한다면 법은 일체를 개변할 수 있다.

또 일부 수련생들은 자신이 문제에 봉착하면 정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면서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 이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돌아가면 또 사람의 그 한 세트다. 이것은 법공부가 착실하지 못해 관건적인 시각에 사람의 생각이 주도적이 되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 중에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줄곧 자신을 더 사고하지 않게 하면서, 오히려 일체를 아끼지 않고 대가를 치러도 동요할 수 없게 하는 이런 염두(念頭)를 자신의 사상이라고 인정하여 진리를 보아도 다 배척한다. 사실 사람은 선천적인 순진(純眞)을 제외하고 일체 관념은 모두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지 자신이 아니다. 만약 이 후천적인 관념이 아주 강하게 변한다면 그는 곧 도리어 사람의 진정한 사상과 행위를 지배하는데, 이때에 사람은 아직도 자신의 생각이라고 인정한다. 현대인은 거의 사람마다 이러하다.”

7. 문제를 보거나 일을 함에 있어서 극단으로 잘 나간다

이 역시 법공부가 깊지 못하고 정념이 강하지 못하며 이지가 결핍하고 성숙하지 못한 표현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 문제가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비록 출발점은 좋고 다른 수련생을 위한 것이지만 어조가 선하지 못하고 질책하고 원망하며 강제로 내려 눌러 상대방이 접수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때 자신의 마음도 평형되지 못하고 매우 억울해 하게 된다. “나는 좋은 마음으로 당신을 돕는데 이해하지 못하므로 이후 당신이 어떻게 하든지 더는 상관하치 않겠다”하면서 다른 극단으로 향하면서 자신을 찾지 않고 다른 사람을 찾는다. 이 일을 통해 쌍방이 모두 제고해야 할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상대방의 결점을 지적하는 것은 선한 마음의 체현으로서 아마도 사부님께서 안배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어조는 선해야 한다. 왜냐하면 수련 중에는 상사가 없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일찍이 ‘청성(淸醒)’ 중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늘 말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치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이야기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단지 당신들에게 대법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나의 작풍(作風) 역시 당신들에게 남겨놓은 것이다. 사업 중의 어투, 선한 마음(善心), 게다가 도리(道理)는 사람의 마음을 개변시킬 수 있으나 명령은 영원히 될 수 없다!” 내가 인용한 법을 수련생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왜 잘하지 못하는가? 관건은 법이 마음속에서 깊이 뿌리박지 못했고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법을 잘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선(善)은 부동한 층차와 부동한 공간에서 우주 특성의 표현이며 또한 대각자들의 기본 본성이다.”[2], “대법제자의 선(善)이 없다면 수련인이 아니다.”[3] 대법제자는 반드시 선을 수련해야 한다.

이상 몇 가지 상황이 나타나는 근본 원인은 여전히 법공부가 착실하지 못하고 제 위치에 오르지 못했으며 “일마다 대조하여 할 수 있음이 수련이노라”[1]를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모두 같은 수련생이다. 내가 무의(無意)로 지적하지만 나는 사부님께서 매우 조급해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나도 수련생들 때문에 조급하다!

다만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일해야만 심성의 제고에 따라 층차의 경지도 제고된다. 진수 대법제자마다 모두 이렇게 착실히 수련해 왔다. 수련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는바 심성을 제고하는 것만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만약 인식이 부족한 곳이 있다면 수련생들의 자비로운 시정이 있기를 희망한다!

주:[1]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착실히 수련[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선을 알기 쉽게 헤설하다[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대법의 위엄‘을 평함

문장완성: 2013년 1월 10일
문장분류: 수련마당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3/1/10/26759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