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산둥 대법제자
[밍후이왕] 568기 ‘밍후이주간’의 ‘수련생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안으로 찾음을 논함’ 문장은 나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때 나도 감수를 쓰려 했지만 몇 번이나 펜을 들어도 문장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다지 정진하지 않는 느낌이라 쓰면 좋은 작용을 일으킬까? 라는 등의 각종 사람 마음이 글 쓰는 것을 방해했다. 오늘 각종 사람 마음을 청리한 후 나는 자문했다. 이 문장을 쓰는 기점은 무엇인가? 답은 법을 실증하려는 것이다. 반년 전에 쓰려는 문장을 마침내 쓰게 됐다.
나는 이전에 일을 하는 것을 수련으로 간주했다. 장기간 자신을 착실히 수련하지 않고 집착심이 너무 심해 사악이 틈을 타 불법노동교양을 당했다. 소굴에서 즉시 안으로 찾아 자신을 바로 잡지 못하고 반대로 수련생을 원망해 자발적으로 수련을 포기했고 굽은 길을 걸었으며 자신에게 오점과 영원한 유감을 남겼다. 돌아온 후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자포자기하고 구세력의 일체 배치에 이끌려 모 수련생이 나를 해쳤다고 생각했다. 모든 이 일체는 다 그가 조성했다고 생각했으며, 함께 죽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마성이 커지고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이렇게 노동교양소라는 유형의 감옥에서 더욱 위험한 무형의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문장에서 수련생이 말한 바와 같이 마난 중의 수련생은 정념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정념은 커녕 근본적으로 주의식도 청성하지 않다. 이것은 매일 법공부팀에서 법공부를 하는 수련생과 차원이 다르고 소굴에서 확고하게 박해를 반대하는 수련생과 또 차원이 다르며, 동시에 2년간 법공부를 하지 않아 머릿속에는 주입한 독념(毒念)으로 충만되고, 근본적으로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를 분간하기 어렵다. 그때 사악한 마에 조종되어 한 일을 현재 보면 극히 황당스러우며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러운 일이다.
내 이런 상태를 대면하여 나의 상황을 알고 있는 수련생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질책도 하지 않으며 마음도 움직이지 않고 정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내가 어떻게 표현하든 내가 반복적으로 좋았다 나빴다 하든 수련생은 무조건 안으로 찾고 온화하고 관용하며 자비롭고 선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 주었다. 나는 이런 안으로 찾는 강대한 에너지장 형식에 포위되어 몸과 마음이 크게 진동하고 내 공간장의 그런 바르지 못한 요소가 잇따라 해체되는 것을 느끼게 됐다. 마치 사부님께서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그러나 그런 자비는 위대한 불법(佛法)의 힘의 체현이다. 당신이 아무리 좋지 않고, 아무리 나쁘더라도 마치 강철과 같은 것이라도 불법의 자비한 위력 앞에서는 모두 녹아버린다. 그러므로 마(魔)는 보기만 하면 두려워한다. 그것은 정말로 두려워하는데 그것이 녹아버릴 수 있고 없어질 수 있는데 절대 사람이 상상하는 것과 같지 않다.” 이 상서로운 마당은 나로 하여금 스스로 안으로 찾게 하고 심지어 나는 수련생이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의 매 한 방울의 눈물에서는 자비롭고 성결한 빛이 났다. 그것은 속세의 애증에 미혹되어 깨닫지 못하는 생명에 대한 연민이다.
문장에서 말했다. “실제 구출 중에 구출되는 수련생이 정념이 없어도 마찬가지로 구출에 성공할 수 있다.” 확실히 그렇다. 만약 다른 수련생의 원망과 질책이 마난 중에 수련생에게 나쁜 물질을 더했다면 수련생의 자비로운 정념은 사실 바로 마난 중의 수련생에게 정념의 에너지를 수송한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찾으면 법의 요구에 부합되고 법의 강대한 위력을 체현한다. 자비로운 에너지장은 바로 사악을 해체하는데 마찬가지로 정사대결이다. 수련생이 신사신법(信師信法)하는 이 마음을 보고 사부님께서는 정념으로 가지해 준다. 본래 “수련은 자신에 달렸고 공은 사부에 달렸다.”[1]
이렇게 나는 수련생 집에서 먹고 머물러 있었다. 왜냐하면 이 마당을 떠나면 주의식이 똑똑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러 수련생 집에서 먹고 머물며 심지어 그 수련생 본인도 병업 마난에 부딪힐 때도 여전히 최대한 나를 도와주었다. 또 수련생과 법공부를 하고 발정념 하는 것을 통해 나의 주의식이 마침내 청성해지고 수련생의 자비로운 정념은 성공적으로 나를 구출해 냈다.
지금까지 나는 행복하게 조사정법, 중생을 구하는 길을 걷고 있다. 비록 정진하는 수련생과 비기면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오늘까지 온 것은 사부의 자비로운 배치와 수련생의 관용한 도움과 갈라놓을 수 없다. 아울러 다시 마난에 부딪힌 수련생을 만나면 나는 수련생이 나에게 준 사심 없는 도움이 생각나고 상대 수련생이 어떤 표현이든 반드시 그에게 하나의 정념을 줘야한다고 자신에게 알려준다. 단지 우리가 정념으로 가지해 주고 스스로 안으로 찾고 수련하면 일체는 사부님께서 책임지신다. 설령 수련생의 원망과 질책에 대면해도 대체로 그에 이끌려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이미 충족한 정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수련생이 나에게 물었다. 상대 수련생에게 문제가 있는데 말하지 않고 단지 자신이 안으로 찾으면 이것은 그 수련생에 대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그 수련생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은 사람 마음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선의적으로 지적해 줘도 된다. 그러나 질책과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만약 상대 수련생이 즉시 지적해준 문제를 인식했다면 일찍 마난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수련생은 당시 상황이 이미 수련생의 상태라고 말할 수 없고 충고를 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난 중의 수련생의 상황은 다 비슷하지 않다. 단지 무사무아하고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각도에서, 다른 사람을 관용하는 각도에서, 바로 새우주의 무사무아의 표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그들은 어떤 심태(心態)인가? 바로 관용(寬容)인바, 매우 홍대(洪大)한 관용으로서, 다른 생명을 용납할 수 있고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생명을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많은 사람들이 수련과정 중에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은 점차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도달하려 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2] 나는 단지 자신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일에 부딪히면 무조건 법의 요구에 따라 하는 수련인을 만났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헤메고 있을 때, 자신이 이미 안 된다고 생각할 때, 나를 도와주는 수련생은 사부님의 한마디 말씀 “불법은 끝이 없다”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정말로 법의 요구에 따라 하면 법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다만 자비로운 사부님이 가르친 제자, 위대한 불법이 성취한 생명이야 비로소 이 일체를 할 수 있다.
마난에 직면한 수련생을 보고 무조건 안으로 찾고 정념을 가지하면 바로 수련생 간의 신성한 법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며 바로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중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며 바로 사부님께서 주신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있는 층차에서의 약간의 깨달음이다. 법에 있지 않는 곳은 수련생께서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사심 없이 나를 도와준 모든 수련생에게 감사드립니다.
주:[1]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역 설법2-2002년 미국필라델피아설법’[3] 리훙쯔 사부님 저작: ‘미국법회설법-뉴욕좌담회설법’
문장발표: 2012년 12월 31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2/31/2671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