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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수련생들은 농촌 수련생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아야 한다

글/대륙 대법제자

[밍후이왕] 정법은 최후의 단계에 이른 것 같다.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함에 있어 절대로 얼마만큼 했는가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 얼마나 많은 일을 잘하지 못했는지 보아야 한다. 나는 사부님의 최후 대심판에 관한 설법을 학습하고 나서 우리가 만약 두려운 마음, 안일한 마음 등의 사람 마음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대량의 중생을 구도하지 못하고 빠뜨린다면 우리에게 죄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뭐라고 사부님께 해명하겠는가?

나는 어릴 적에 남방의 농촌에서 자랐지만 장기간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일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기에 농촌과 도시에 모두 익숙하다. 대륙에서 대부분의 대법제자들은 대도시에 집중하여 진상을 해왔다. 나는 광활한 농촌에는 빈 곳이 곳곳에 있다는 것을 크게 느꼈다. 이는 아주 큰 과실이다. 내가 과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도시 대법제자는 약간의 시간과 재력을 들이면 농촌에 가서 사람을 구도하는 능력과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한두 달에 한 번씩만 농촌에 가도 더욱 많은 농촌 중생을 구도할 수 있다.

올해 9월, 사이트의 한 문장에서는 도시의 어떤 마트 사장이 받은 진상자료가 한 무더기가 될 만큼 사람을 구도하는 소중한 자원을 도시에서는 중복해서 나누어 주었지만 도시 대법제자들은 모두 보고서도 무관심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이 과실이라고 생각한다.

2006년 9월 17일, 밍후이왕의 ‘도시 대법제자도 농촌을 위해 자료를 제작하고 배포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글은 일부 수련생과 내가 실천 속에서 경험한 것이다. 당시 나는 사악한 감옥에서 오랫동안 감금된 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몇몇 수련생만 시외에서 소량의 자료를 만들고, 나누어 주는 것을 보았을 뿐 면적이 몇십 배, 몇백 배 더 넓은 편벽한 향과 진은 모두 공백이었다. 그래서 나는 곳곳에 가서 수련생들과 공동으로 농촌 진상팀을 만들었다. 밍후이왕에서도 끊임없이 이 방면의 문장을 발표하였기에 비교적 많은 수련생이 참여하였다.

하지만 농촌지역은 너무 넓어서 일종의 편견과 다른 공간의 사악이 아주 많았다. 수련생이 농촌에서 사당에 납치되어 노동교양을 받은 후 일부 수련생은 가려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농촌에서 진상자료를 나누어 주다가 납치되어 사당에 의해 몇 년의 중형 판결을 받았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는 가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어쩌다 수련생이 한두 번 가기도 하지만 힘이 너무 적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정체적으로 농촌 지역의 구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내가 10여 년간 사악한 감옥에서 고통을 받고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난 후 얻은 교훈은 바로 예전에 정념으로 농촌에 가서 사람을 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하려는 마음으로 대했고, 안으로 찾는 기제가 강하지 못했으며, 순정한 심태로 수련생과의 모순을 선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많은 수련생들은 진심으로 농촌에 가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사람을 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반복하여 권고한 후에야 간 것이다. 한 번 권하면 한 번 갔고, 권하지 않으면 가지 않았으며, 지도를 보는 것도 거절하면서 내가 노선을 안배해 주어야만 가려고 했다. 어떤 수련생은 “당신이 농촌에 가는 것을 주장하였고, 우리는 다만 당신을 따라 일만 하면 됩니다. 왜 지도를 보나요? 사람을 구도하는데 무슨 지도가 필요하나요? 모든 것은 인연에 따르면 되지요.”라고 했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농촌에 가서 사람을 구도하는 길을 걸으려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완전히 법에 있지 않았고 바빠서 법을 학습하고 연공할 시간도 없었으며, 발정념해도 마음이 조용해지지 않았다. 이는 구세력이 나를 데려가는 구실이 되었다.

올해 사악한 감옥에서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농촌의 무량한 중생들을 빨리 구도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가려는 수련생이 매우 적었고 예전에 농촌에 갔던 수련생들도 대부분 다시 가려고 하지 않았다. 두세 명의 수련생들도 내가 가면 가려고 했지만 혼자서 스스로 가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일부 수련생들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데 그들은 고생을 하려 하지 않았고 그러한 모험을 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차례 박해를 겪은 후 두려워하는 마음, 안일을 구하는 마음이 더 많아졌다. 나는 사부님께서 왜 수련에서 처음처럼 하라는 법리를 말씀하셨는지 깨닫게 되었다. 농촌에 가려면 오토바이로 가야 하고, 더욱 많은 자료와 진상 화폐가 필요하며, 더욱 많은 수련생들이 참여해야 했다. 일부 수련생들은 내가 그들의 평온한 생활을 혼란시키고, 내가 법을 잘 학습하지 않으며, 일하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또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다고 했다. 나도 자신이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사악한 감옥에서 법을 학습하고 연공하지 못했기에 급히 보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두세 명의 수련생만 농촌에 가서 진상을 알린다면 목적에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줄곧 법을 잘 학습하는 여러 수련생을 방문하여 농촌 중생도 돌보기를 바랐지만 그들은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면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일부 수련생들은 나에게 밍후이왕에 문장을 써내라고 건의하였다. 아래는 자신의 몇 달 동안의 경험을 총결한 것이다.

1. 우리 도시 지도를 연구해야 남은 지역을 알 수 있다

역대의 정치가, 군사가, 경제학자들은 지도를 모르면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도하는 것은 한 차례의 정사대전으로서 사악으로부터 사람을 빼앗는 것이다. 사람마다 본(本)시 지도를 보아야만 주위의 인연 있는 사람에 만족하지 않고 구도 범위를 넓힐 수 있을 것이고, 더욱 큰 책임을 알게 될 것이며 비로소 우리가 남겨 놓은 공백이 어딘지 알게 될 것이다.

사실 조금만 문화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지급시(地級市)는 대법제자의 집중지일뿐만 아니라 대응되는 향진, 현의 행정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의 지급시는 몇 개에서 십 몇 개 현을 관할하고 있는데 몇십 개 혹은 몇백 개 향진을 포함하고 크기 또한 같지 않다. 대법제자는 주로 각 지급시에 집중되어 있고 각 현도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시 구역 대법제자는 마땅히 본시가 관할하고 있는 현, 향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지 손바닥만 한 시 구역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일부 시 구역은 면적이 하나의 향진보다도 작다.)

각 현도에는 대법제자가 아주 적고, 각 향진에는 더욱 적으며, 많은 향진에는 대법제자가 없다. 그들은 흔히 남을 돌볼 틈이 없고 정진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해도 힘에 부친다. 사악이 중점으로 박해하는 대상이 된 후, 광대한 농촌에 가서 진상을 하는 사람이 더욱 없다. 이것은 우리가 직접 조사한 결과이다. 나는 북방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 남방의 여러 성은 기본상 이러하다.

그러므로 여러 현도에 있는 몇몇의 수련생이 본 현의 모든 향진과 농촌을 책임지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시에서는 자료를 배불러 터지도록 많이 먹고 농촌에서는 배고파서 쓰러질 정도이다. 이는 농촌 중생이 구원되는 것을 지체하고 있다.

우리 친정은 작은 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친정 사람들은 진상 지폐나 파룬궁 전단지를 본 적이 없다. 사실 우리 고향 농촌에도 ‘7·20’ 전에 법을 얻은 노 수련생이 두세 명 있었다. 줄곧 법을 학습하고 연공하지만 나가서 자료를 배포하거나 진상 지폐를 사용하지 않는다. 거기는 다른 지급시와는 단지 3, 40리 떨어져 있지만 내가 억울한 감옥살이를 이렇게 오래 하는 동안 주요 도로 옆에 있는 농가에서만 진상자료를 한번 받아본 적이 있다고 했다. (지급시 수련생이 나누어 준 것이라 추측된다.) 도로 밖 넓은 농가에서는 전단지나 진상 화폐를 본 적이 없다. 개별적인 농촌 수련생은 아주 정진하지만 넓은 농촌에 대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는 너무 작아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사람마다 농촌에 갈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많은 수련생이 안일함 속에 있으면서 농촌 중생에 대해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마다 시간을 내어 농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체가 허락하지 않는 사람은 제외한다.) 일 년에 한두 번 가도 괜찮다. 농촌에 가본 수련생들은 바로 그곳은 구도될 범위가 거대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것 또한 개인의 용량을 확대하는 것이고 책임감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모두 닿도록 해야 한다.”[1]고 말씀하셨다.

일반 노수련생들은 청원하러 북경까지 갔지만 농촌에 가자는 말만 들으면 이유를 길게 늘어놓는다. “나는 늙어서 손자를 돌봐야 하고,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하기에 농촌에 갈 수 없어요.” 나이가 너무 많거나 불구인 수련생은 농촌에 갈 수 없더라도 농촌 지도를 보면 사람을 구도하려는 책임감을 강화할 수 있다.

2. 휴대폰으로 농민 근로자에게 진상을 알리는 것은 직접 농촌에 가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최근 몇 년 동안 생긴 큰 변화는 바로 휴대폰으로 진상을 알리는 것이다. MMS, SMS, 음성전화는 진상을 알리는 효과를 아주 크게 제고해 주었고 대법제자의 육체적 부담을 줄여주어 그처럼 크게 고생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한동안 해보니 그 역시 국한성이 있었다. 대부분의 농민은 휴대폰이 구형이어서 MMS 기능이 없고, SMS도 자주 통신사에 의해 차단되며, 음성전화도 대부분 처음 몇 마디만 하고는 전화가 끊긴다. 이러한 세 가지 항목은 모두 시효가 짧아서 사람들은 전단지나 진상 화폐를 대하듯이 반복하여 탐구하고 전하지 않는다. 우리 단위에서도 사람마다 MMS를 받았지만 대부분 그날에 삭제했다.

휴대폰 항목은 비용이 아주 많이 든다. 한번 계산해 보았는데 자동생성 방식으로 우리 시 휴대폰 번호를 모두 덮으려면 십 년이 걸려도 할 수 없고 자금은 몇백만 원이 필요하다. 또한 일부 수련생들은 통일된 번호를 배분받지 못해 중복된 것이 많다. 내용이 제일 많은 MMS라 해도 몇십 Km밖에 되지 않기에 상대방과 직접 왕래할 수 없다. 만약 이것으로 진상을 알리는 것을 대체한다면 휴대폰 수신율이 제일 높은 시 구역에서는 전단지, 진상 화폐, 대면하여 삼퇴를 알리는 것을 전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사실 이렇게 할 수 없는데 반드시 여러 방식을 동시에 해야 한다.

수련생들은 매번 션윈CD, 소책자, 생체장기적출 전단지, 스티커를 받으면 몇 년을 반복하여 시 구역에서 적극적으로 내보내고 붙인다. 누구도 “우리는 이미 휴대폰 소식을 내보냈기에 도시에서 이런 것을 내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농촌에 가는 것만 얘기하면 거의 사람마다 이유가 충분하다. “우리 시 SMS, 음성전화에는 농촌 번호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는 뭘 해요?”

휴대폰으로 진상을 알리는 것이 편하다 해도 두 달에 한번은 농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59일은 시 구역에서 휴대폰으로 항목을 할 수 있으므로 양자는 충돌되지 않는다. 왜 이 일보를 걸어 나오지 못하는가?

교류 가운데서 수련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농촌에 가면 모든 것이 낯설어 너무 고생스럽고 위험해요. 휴대폰으로 하면 안전하고 편하며 어차피 매일 사람을 구도하는 일을 하는데 왜 가서 그 고생을 하고 그러한 모험을 해야 하나요?” 터놓고 이야기해서 이것은 임무를 완성하는 식으로 대처하는 것이지 진심으로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수련생들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어 했다. “모두 이러한 상태이기에 농촌에 가기 싫어해요. 무슨 방법이 있나요? 누가 깨달으면 누가 얻는 것이지요.”

도시에 오는 농민 노동자에게 자료를 나누어 주고 진상을 알리는 것은 농촌 중생을 구도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대부분 문화정도가 비교적 낮은 노수련생만 덧붙여 하고 있지 다른 수련생들, 특히 휴대폰으로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들은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뼛속에 농민을 경시하는 독소가 아직도 남아 있었고, 따라서 효과도 이상적이지 못했다. 우리 고향의 많은 사람은 여러 도시에서 몇 해 동안 일하였는데 내가 그들에게 몇 명이나 진상자료를 받은 적이 있는가를 묻자 소수만 받은 적이 있었고 집에 가져가서 친척들에게는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식 역시 더욱 많은 수련생이 와서 참여해야 하고 직접 농촌에 가는 것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서 대부분의 인구는 아직 농촌에 있다.

3. 여러 구실은 모두 사람 마음이다

나는 수련생들이 농촌에 가지 않으려 하는 많은 구실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하는 휴대폰진상에는 농촌 사용자도 포함되어 있는데 또 농촌에 가서 뭘 하는가?”

“일부 수련생들은 도시에 들어온 농민 노동자에게 진상을 알린다고 하는데 그럼 된 것이 아닌가?”

“나는 나이가 많아 지도를 보지 못한다.”

“나는 시력이 좋지 못해 지도의 문자를 똑똑히 보지 못한다.”

“나는 개가 무섭다.”

“나는 농촌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도시와 농촌의 말투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대부분의 농촌 사람들은 표준말을 할 수 있는데 특히 매점 주인은 더욱 그러하다).”

“당신들이 농촌에 가면 되지 않는가. 나는 나의 항목이 있는데 왜 꼭 내가 농촌에 가야 하는가?”

“모모 현은 어느 수련생의 고향인데 당연히 그가 가야 한다. 나는 도시 사람으로서 우리 도시를 잘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 도시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이 진상을 명백히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 도시도 아직 모두 구도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먼 농촌에 가서는 뭘 하는가?”

그들은 “당신만이 농촌에 가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가라고 하지만 사실 일부 수련생들은 줄곧 농촌에서 하고 있어요. 그렇게 많은 걱정을 해서는 뭘 하나요? 예를 들면 a 향진의 A 수련생도 갔고, b 향진의 B 수련생도 갔으며, d 향진의 D 수련생도 갔어요.”라고 말한다. 나는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는데 이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것임을 발견하였다. 기본적으로 본 시 교외지역 5, 6개 향진에 나누어 주었고, 우리 도시 거의 백여 개 향진(이웃 도시는 2백여 개 향진)에 이 수련생들은 일 년에 한두 번만 갔으며, 매번 다만 1, 2백장의 전단지만 나누어 주었을 뿐이었고 도로변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D 수련생은 몇 년 동안 제일 편벽한 몇몇 향진에 가서 자료를 몇 번 나누어 주었지만 역시 도로 옆 농가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모두 합해도 몇천 부밖에 되지 않는 전단지는 몇백만 명의 농촌 인구로 놓고 볼 때 정말 턱없이 부족하다.

비교해 보면 우리가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여러 번 반복하여 자료를 나누어 주어도 수련생들은 “여기는 이미 나누어 주었기에 나누어 줄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넓고 넓은 농촌에는 아주 가끔씩 고만한 자료를 나누어 주면서도 많은 수련생은 그것을 자신이 농촌에 가지 않는 구실로 삼고 있다. “다른 수련생이 농촌에 가서 나누어 주었는데 우리가 또 가서 자료를 나누어 주고 진상 화폐를 써야 하나요? 우리가 시 구역에서 사용하는 진상 화폐는 언젠가는 농촌으로 흘러갈 것인데 이것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요?”

“농촌에 가면 위험이 커서 나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아요.” 시 구역에서 자료를 나누어 주며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면서 납치된 수련생은 끊임없었고 모험성도 농촌보다 더 컸지만 수련생은 줄곧 견지해 왔다. 왜 농촌에 간 몇몇 수련생이 납치된 후 거의 모두 가려 하지 않는가? 가장 큰 원인은 농촌에 가면 고달픈데, 바로 안일을 구하는 마음 때문이다. 주관적인 이유에 속하지 객관적인 이유 때문에 대법제자가 농촌에 못 가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는 사람을 구도할 항목이 있으니까 당신은 농촌 항목을 하고 나를 교란하지 마세요.” 이 구실은 그럴듯하다. 하지만 농촌 진상을 하나의 항목 개념으로 보면 안 된다. 농촌은 하나의 지역과 한 무리 개념으로서 우리는 무슨 항목을 하든지 모두 농촌을 고려해야지 그들을 빠뜨리면 안 된다. 만약 대법제자마다 자기 주위만 한다면 선생님은 주로 학생들에게 알리고, 관리직에 있는 사람은 관직에서 알리며, 문화정도가 낮은 사람은 길거리에서만 한다면 이 광활하고 거대한 농촌 중생은 아주 적은 농촌 수련생들이 가서 알려야 하는가? 사실 이러한 추세라며 농촌 중생 가운데서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이 도태될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도시 대법제자들이 교수, 고관, 예술가, 노동자, 장사꾼이든 모두 힘을 나누어 농촌 중생을 구도하는 것이다.

4. 정념으로 다른 공간의 교란을 대해야 한다

우리는 광대한 농촌을 십여 년 동안 가만히 놔두었기에 다른 공간에서 농촌에 집결된 사악은 아주 많다. 나는 매번 농촌에 가기 전 며칠 늘 악몽을 꾸었는데 감옥에 들어가 악경들에게 둘러싸인 꿈을 제일 많이 꾸었다. 한번은 꿈에서 자전거를 타고 농촌에 갔는데 머리 뒤에서 누군가 “와, 하늘에 이렇게 큰 뱀이 있다니.”라고 소리쳤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큰 구멍이 뚫렸는데 거대한 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내가 곧 차에서 뛰어내려 발정념하자 깨어났다. 나는 일어난 후 아주 오랫동안 정념을 내보냈다.

또 한 번은 내가 농촌에서 사당에 납치된 것을 꿈꾸었는데 어떤 촌민들은 고소하게 여겼다. 그래서 매번 농촌에 갈 때는 정말로 한 차례 정사대전을 진행하는 것 같았다. 일체 일을 내려놓고 전문적으로 법을 학습하고 발정념하였으며 심성의 누락을 찾았다. 나는 같이 가려던 수련생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발정념을 많이 하고 안을 향해 심성의 누락을 많이 찾으라고 알려주었다. 상대방은 오히려 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기에 가면 문제가 생긴다거나 이것은 사부님께서 가지 말라고 점화해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다른 몇몇 수련생들에게 발정념하여 농촌에 있는 사악을 제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이것은 조짐이므로 나보고 농촌에 가지 말라고 권하였다. 나보고 집에서 법을 많이 학습하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여러 사람을 동원하여 내가 농촌에서 진상 화폐로 사 가지고 온 물건을 사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저는 확실히 법을 많이 학습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법을 학습하였으니 당신들도 한번 농촌에 가기를 바랍니다. 나만 이렇게 바쁘게 뛰어다녀서는 안 됩니다. 우리 돌아가면서 농촌에 가는 것이 어때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누구도 농촌에 가려 하지 않는다.

두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와서 이 일을 토론하면서 점차적으로 자신이 마땅히 농촌에 가야 하는 것을 느꼈고 그중의 한 사람은 나에게 이 문장을 쓰라고 건의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튿날 바로 변했다. 알고 보니 그 둘이 집에 돌아간 후 한 사람은 감옥에 들어가 반박해하는 것을 꿈꾸었다. 다른 한 사람은 우리 집에 왔다가 너무 편해서 늦잠을 자게 되었고 6시 발정념도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 집 다른 공간이 깨끗하지 못해서 그를 편안함 속에서 늦잠을 자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둘은 나보고 잠시 농촌에 가는 것을 멈추라고 권하였고 그들도 지금까지 농촌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사부님의 설법을 보고 우리가 입정 속에서든 꿈속에서든 사악한 생명을 보았다면 꼭 정념으로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념으로 이러한 현상을 대해야지 절대 놀라서는 안 되며 반드시 정념정행하여 그것을 돌파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여 안으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진실하게 농촌으로 가는 것은 정말로 하나의 큰 관문으로서 중생을 구도하고 심성을 제고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5. 진상 글씨를 쓰고 진상 화폐를 사용하면 농촌의 집집마다,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

위에서 휴대폰 진상은 농촌에 아주 큰 국한성이 있다는 것을 말했다. 직접 농촌에 가서 자료를 나누어 주는 것은 흔히 도로나 길가의 농가에 국한되어 있다.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가서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어쩌다 수련생이 한두 번 간다 해도 역시 턱없이 부족하여 대면하여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한 것은 더욱 보기 드물다. (농촌 친정에 돌아가 친척이나 친구에게 진상을 알리는 수련생을 제외하는데 그 범위도 아주 작다.) 농촌은 아주 넓기에 몇 번 농촌에 가본 수련생들은 모두 진상 글씨를 칠하고 진상 지폐를 사용하는 것은 농촌의 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여긴다. 이는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고 틈만 있으면 집집마다 반복하여 들어갈 수 있다. 설령 두메산골이라 해도 농촌 가게에서 물건을 사야 하고 시골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1) 농촌에 가서 진상 글씨를 칠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농촌에 가서 여러 번 진상 글씨를 칠한 한 수련생은 나보고 가서 해보라고 건의한 적이 있다. 나는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 시에서도 진상 글씨를 칠한 적이 있지만 별로 효과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확실히 시에서는 전단지, CD, 스티커를 붙여도 큰 효과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 열 몇 글자가 무슨 문제를 해결해 주겠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상을 본 적이 없는 농촌에서는 그 열 몇 글자가 마치 대형 폭탄처럼 농민들을 진동시키고 그들에게 곳곳으로 가서 말하게 할 것이다. 나는 직접 그 효과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이 점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어느 농촌 소학교 문 앞에서 멀지 않는 전봇대에 ‘하늘이 중국공산당 사교를 멸하려 하니 당·단·대에서 탈퇴해야만 생명을 보호할 수 있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를 칠한 적이 있다. 학생들이 매일 지나면서 보게 될 것이며 학부모에게도 알려줄 것이다. 낮에 지나왔던 향진엔 사람들이 끊임없이 길에 다니기에 글을 쓰기 불편하였다. 그래서 지도를 보고 노선을 기억한 다음 저녁에 다시 와서 칠하였다. 왕복 3, 4백 리 되므로 비용이 적지 않게 들어가므로 오는 김에 소책자, CD, 스티커도 나누어 주고 진상 지폐를 써서 수련생들을 대신해 생활용품을 사다 줄 수도 있다.

작은 진에 있는 진상 글자는 흔히 얼마 후에 사당에 의해 지워지지만 시골 길의 전봇대에 쓴 진상 글자는 지우는 사람이 없다. 한두 달 후에 내가 다시 길을 지날 때 멀리서 이 글자들이 보였고 나는 내심으로 아주 격동했다.

2) 진상 지폐는 농촌의 어떠한 사각 지역에도 들어갈 수 있다

대법제자들은 대부분 크고 작은 도시에 집중되어 진상 지폐도 주로 도시에서 사용하고 유통할 수 있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교환을 할 때 얼마나 많은 진상 지폐가 농촌지역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다. 얼핏 농촌에 가서 알아보면 정확한 정보를 알아낼 수 없지만 장기간 농촌에 거주해 있는 친척이나 친구들은 똑똑히 알고 있다. 우리 몇몇 수련생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진상 지폐는 편벽한 농촌 향진에 거의 들어가지 못했다. 몇몇 수련생들의 고향은 시 구역에서 다만 몇십 리만 떨어져 있었지만(‘시’는 지급시를 얘기하는 것이고, 현급시는 ‘현’으로 이야기한다.) 장기간 진상 지폐를 보지 못하였다. 다른 현성에 있는 몇 명의 수련생도 소량으로만 진상 지폐를 사용하였다. 30리 밖의 작은 진에서 우리는 대량의 진상 지폐로 물건을 구매하였는데 몇몇 가게 주인은 종래로 진상 지폐를 본 적이 없다고 하였고, 광주 원교에서 일 년 넘게 산 어떤 수련생도 진상 지폐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도시의 진상 지폐 사용량이 여전히 부족하고 화폐 유통은 지역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도시 대법제자들은 농촌 향진에 가서 물건을 구매해야만 편벽한 지역에서 진상 지폐를 유통시킬 수 있다. 나와 수련생은 차를 몰고 편벽한 향진을 한 바퀴 돌면서 천 원가량의 진상 지폐로 쌀, 식용유, 국수, 소금, 가루비누, 휴지 등 보존하기 쉬운 생활용품을 샀고, 전단지, 션윈 스티커를 붙였다.

진상 지폐를 농촌에 보내는 것은 전단지를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는 반복하여 유통될 수도 있다. 몇백 장의 진상 지폐는 도시에서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진상 지폐를 본 적이 없는 농촌에서는 더욱 큰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 향정부 소재지마다 모두 몇백 개 상점이 몰려 있는데 향정부가 관할하는 마을마다 여러 개의 상점이 있다. 모든 농가, 촌민은 모두 이러한 상점에서 물건을 사는데 몇백 장의 진상 지폐를 사용하면 반복하여 유통하여 한 마을을 덮을 수 있고 사람마다 모두 알게 된다. 나는 한 친척이 있는 향진에서 몇 번에 걸쳐 2, 3천 원의 진상 지폐를 사용하였다. 진상 지폐는 바람처럼 순식간에 모든 편벽한 구석까지 파고 들어갔는데 이러한 구석구석은 모두 전단지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7, 80세의 농민마저 모두 ‘하늘이 공산당을 멸한다.’는 화제를 이야기하였다.

대법제자의 자비는 나에게 무변무제(無邊無際-끝없이 넓다, 일망무제)한 농촌 중생들을 누구도 가서 구도하지 않는 것을 보고만 있게 하지 않는다. 나는 정념을 견정히 하면서 해 나가고 있다. 도시 수련생도 함께 협조하여 도시도 잘하고 농촌도 잘하기 바란다.

6. 아래에서 우리의 일부 경험을 소개한다

1) 진상 지폐

진상 지폐의 내용은 전면적으로 써야 한다. 나는 진상 지폐마다 ‘파룬따파하오! 쩐싼런 하오!’를 썼고, 하늘이 중공 사교를 멸한다거나 삼퇴에 관한 내용을 썼으며, 당·단·대를 모두 ‘당단소선대’로 고쳤다. 도시에서 사용하는 진상 지폐는 내용이 같아도 상관없다. 하지만 농촌에는 한번 가기가 쉽지 않으므로 진상 지폐마다 최대의 작용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용을 전면적으로 써야 한다. 내용이 70글자에서 100글자가 되면 지폐 유통에 영향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작은 전단지처럼 많은 진상을 똑똑히 이야기할 수 있다. 나는 많은 향진과 농촌에서 몇십 원, 몇백 원을 사용하면서 농민들은 여기에서 기본 진상을 보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적어도 “공산당은 사교로서 하늘이 그를 멸하니 당, 단, 대에서 탈퇴하여 평안을 지키라.”는 소식은 바람처럼 전해졌다.

글씨는 커야만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다. 어떤 진상 지폐에는 열 글자 정도의 글자만 있을 뿐인데 글자도 작아서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의 목적은 모든 사람에게 보게 하고, 많이 보게 하는 것이므로 자질구레한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진상 지폐의 설계에 대해 수련생들의 의견 역시 매우 많다. 밍후이왕에는 진상 지폐 버전이 아주 많다. 대, 중, 소 글꼴이 있고, 글자 수에도 대, 중, 소가 있으며, 또한 수정할 수 있는 기능도 있어서 여러 가지 필요에 따라 사용하도록 하였다. 사부님의 상유심생 법리를 다시 학습하고 나서 나는 대법제자가 정념 중에서 만약 큰 글씨체가 더욱 많은 사람을 구도하고, 글자 수가 많을수록 더욱 진상을 잘 알린다고 여긴다면 세인들도 정상적인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내가 본 진상 지폐 가운데서 글씨체가 제일 큰 것은 ‘전법륜’의 글씨 크기와 같은 것이고[5밀리미터 짼팡(見方) 글꼴], 글자 수도 백 개를 초과하지 않았다. [4밀리미터 짼팡(見方) 글꼴]

그러므로 글꼴은 반드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고 사람에게 진상을 명백히 알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농촌에서 진상 지폐를 사용할 때는 기본 진상을 위주로 해야 한다. 농민들은 아직도 ‘9평’이나 ‘삼퇴’ 이러한 명사를 들은 적이 없기에 단독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쩐싼런하오(眞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 외에도 ‘병을 제거하고 평안을 지켜준다.’ 한마디를 추가하면 더 좋으며 삼퇴 이야기는 상세해야 한다. 한 향진에서 진상 지폐를 많이 사용한 후에는 생체장기적출 진상을 써야 한다. 기본 진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향진 가게에서 새로운 지폐만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데, 가게 주인이 위조지폐라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한 가게에서 몇십 장 혹은 백여 장을 쓸 때 1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하여 유통수량을 최대한도로 많게 해야 한다. 십 몇 리 떨어진 곳에서 또 일부를 구매하여 되도록 진상 지폐를 확산시킨다.

자비로 사람을 구도하는 마음과 발정념은 지극히 중요하다. 매번 농촌에 가서 물건을 구입하고 자료를 내보내기 전에는 한차례 정사대전이라는 감각이 있다. 그러기에 전심으로 발정념하고 엄격하게 안으로 심성의 누락을 찾아야 한다. 2006년에 나는 온 힘을 다해 농촌에 가서 자료를 나누어 주었지만 사악에 납치되었다. 제일 심각한 교훈은 그때 나는 수시로 자신이 사람 마음으로 일하는지 아니면 정념으로 일하는지를 구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기본적으로 수시로 아주 똑똑히 할 수 있으며 특히 매번 농촌으로 가기 전에는 더욱 이러하다. 어느 향진에 처음 갔을 때 출발하기 전에 발정념을 충분하게 하지 못했고 가게에 들어가서 물건을 구매할 때도 발정념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속인의 방식으로 상대한 결과 가게 주인은 진상 지폐의 문자를 발견하고는 물건을 되돌려 주었다. 또 남자 가게 주인이 위협한 적이 있었는데 진상을 알려 선해 시킬 수 있었다. 어렵게 한 바퀴 진상 지폐를 사용하고 나서 다시 한두 달 후에 똑같은 향진에 가서 물건을 살 때에는 훨씬 쉬웠다. 편안하게 가게 주인에게 “내 돈에는 글자가 있는데 당신은 요구하나요?”라고 묻는다. 절반 정도의 가게 주인이 받는다. 세 번째로 진상 지폐를 사용할 때 일부 가게주인은 3, 400백 장의 진상 지폐도 받는다. 아마 다음번에 그들은 1원짜리 진상 지폐를 바꾸어 주는데 동의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몇십 번 진상을 했는데 참가한 수련생들이 나누어서 물건을 샀다. 결국 사람을 구하는 일이고 찬성하는 수련생도 갈수록 많아졌으며, 반대하던 사람들도 찬성으로 바뀌었다. 심지어는 속인마저도 쌀을 요구했다. 마음이 중생을 구도하는 데만 있다면 합리적으로 생활필수품을 안배하여 구매계획을 세울 수 있으며, 적은 수고로 일상적인 소비와 편벽한 곳의 농촌 중생을 구도하는 것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데 일거양득이다. 채소는 모두 시 구역에서 사므로 시 구역 진상 지폐의 사용에는 영향이 없다

2) 농촌에 갈 때는 반드시 지도가 있어야 한다. 나는 본 성시 교통지도책을 한 권 사서 도시 지도를 확대해서 복사했다. 대부분의 수련생에게 한 장씩 주어 사람을 구도하는 시야를 넓혀 주었는데 이는 수련생들이 농촌에 가서 진상을 하는데 편의를 주기 위해서이다. 나는 길을 잘 기억해서 이번에 어느 향진에 갔으면 다음번에는 다른 향진으로 바꾼다. 제일 좋기로는 갔다가 올 때 동일한 노선으로 오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한곳을 중복해서 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 바퀴 돌아가면 더욱 많은 향진을 돌아볼 수 있다.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가장 최근의 지도책이라 하더라도 크고 작은 주요 도로만 표시되었을 뿐 많은 향진의 짧은 도로는 표시되지 않았다. 나는 늘 주도로에서 금방 닦은 시멘트 길목을 보고 지도를 펼치면 찾을 수 없다. 이때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아봐야 하고 본인도 지도에 표시를 잘해야 한다. 대부분은 농촌의 작은 길과 통해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자료를 나누어 줄 수 있다. 또 일부는 다른 향진의 새 길과 통해 있는데 이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반드시 잘 기억해야 한다. 자료를 나누어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일부 상점도 있기에 진상 지폐도 사용할 수 있어 편벽한 모퉁이와 자료가 들어가지 못하는 큰 구역에 파고 들어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