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타이완 장화 대법제자
[밍후이망]
대법제자의 정념은 위력이 있는 것이다. 오직 대법을 확고히 믿고 관건 시각에 마음으로 법을 생각할 수 있다면 단지 몇 구절의 법리더라도 모두 비할 바 없는 위력이 있다. 수련의 길에서 혹은 생활, 가정, 일할 때에 밝은 등불이 이끌어주고 있는데, 이는 바로 사부님께서 우리를 책임지고 계시니, 제자로서 정말로 우주에서 가장 행복한 생명임이 틀림없다.
1. 대법을 수련하니 환경이 순조롭게 변했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갑 학교에서 일하다가 법을 얻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교장 시험에 합격하여 을 학교로 전근을 갔다. 이 학교는 백 년의 역사를 가진 중형학교여서 인사 관계에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나는 반드시 분쟁을 배제하고 분배해야 했기에 나중에 많은 원망이 모두 나한테로 돌아왔다. 법리는 나에게 심성을 제고할 수 있는 일거사득의 좋은 일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래도 마음이 고통스러워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내가 사무실에서 마음을 조절하여 평정을 찾은 뒤 아래로 내려가면 밖에서 얼굴을 찌푸리면서 나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부서와 마주해야 했다. 어떤 선생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도 그에게 웃음으로 대할 수 있나요?” 한동안 주임 선생이 나에 대해 특별히 원망하여 원한이 격화되어 있었다. 어느 날 연공할 때 사부님의 법이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 주셨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따르고, 말하는 대로 따라 한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당신은 부지중에 여러 사람을 삿된(邪) 길로 끌고 가게 될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창춘(長春)보도원법회설법] 그래서 나는 아침 회의할 때 선생님들에게 말했다. “수련 후 내가 체득한 것이라면 모든 일을 안으로 찾고 좋지 않은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모두 내가 말한 대로 따른다면 아마 내가 틀리게 해도 나는 모를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합당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는 사과하고 고쳐 나갈 것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의 지적에 감사할 것입니다.”
수련인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무사무사의 태도로 속인의 권력다툼을 처리하면 비록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결국에는 속으로 탄복하게 된다. 다양한 정황과 고험에 마주하여 법리는 곧 적당한 때에 머리에 나타났고 걸음마다 나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려주었다. 나는 늘 이렇게 발정념했다. ‘나는 대법제자이다. 학교의 어떤 사람, 사건, 물질도 나의 조사정법을 교란할 수 없으며 일체는 모두 대법의 필요에 따라 협조할 수 있을 뿐이다.’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고도 밝도다. (佛光普照,礼义圆明)” 이 여덟 글자도 늘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만일 학교에 난잡한 일이 생겼다면 나의 수련이 아직 매우 부족함을 대표한 것으로 여겼다. 나의 수련이 잘된 일면으로 주변의 난잡한 사람을 개변해야지 나의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여 속인의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었다.
선생님들과 아침 회의를 할 때는 나의 수련체득을 이야기했는데 많은 사람이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몇 년이 지나 우리는 관광버스를 대절해 션윈 공연을 보러 갔고 어떤 사람은 법을 얻었다. 학교가 서서히 변하자 점차 학부모들이 긍정했고, 나도 장화현의 협조인이 되었다. 많은 시간이 있어 대법의 일을 할 수 있었고 그 일은 또 늘 동료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주임으로 있던 갑 학교의 교장이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처음에 을 학교를 선택했을 때 나는 정말이지 조금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수련하는 것을 알고 있어서 반드시 잘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그 학교 상황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사람의 복잡한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7년 반이 지난 뒤 다시 교장 선거에 참가했더니 현장이 말했다. “허 교장님, 당신은 학교를 아주 잘 경영했습니다. 당신은 갑 학교 부근에 사니까 당신의 소원대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갑 학교는 내가 세 번째로 지원한 학교입니다.”라고 말을 끝내는 즉시 나는 자신의 마음속에 억울함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원망이 아닌가? 구함이 아닌가? 다시 작은 학교로 돌아가게 되어 체면이 상한 것으로 여긴 게 아닌가? 현장은 나와 아주 친해서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이지만, 사람의 정이란 차고 더운 게 변덕이 심하니 나는 이런 것에 상처를 입은 게 아닌가? 이런 느낌은 내가 아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즉시 나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현장님, 감사합니다!”
교장은 대부분 일찍부터 학교를 찾느라고 사람의 처세에 바쁘다. 수련인의 길은 사부님께서 배치하시는 것이니 이런 것에 마음이 이끌려 힘들게 다닐 필요가 없어 정말로 좋았다! “사실 당신 이 사람이 얼마나 총명하고 얼마나 교활하든 결국은 마찬가지다.” (미국수도설법) 갑 학교로 돌아간 뒤 또 간고한 과정이 시작됐다. 내가 떠난 7년 반 사이에 많은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대법의 지도로 학교에 돌아간 후 아주 빨리 바른 궤도에 들어섰고 여러 사람의 신임도 얻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나에게 더욱 좋은 수련조건이 생겼는데 사부님의 배치는 언제나 도리가 있는 것이다.
2.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 (전법륜) 대법제자는 삼계의 이치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수련 전에 나는 속인의 마음이 매우 중했다. 수련 후 나는 사람은 비록 고층에서 왔지만, 이 사람의 가죽은 오곡을 먹고 자란 것이며 백 년 후에는 썩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가죽은 왠선(元神)과 후천적인 각종 지각과 정감을 싣고 있는 운반체이며 희로애락과 애한정구(爱恨情仇)는 직접 이 신체에서 반영되고 아울러 사람의 사상과 행위를 통제하고 있다. 일부 사람은 이로써 주의식이 자신의 집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를 관리하지 못해 그것에 따라 방종하여 패괴된다. 색정적인 서적, TV, 사이트 등 그 속에는 모두 색마가 있어, 보게 되면 곧 자신의 대뇌에 들어가고 또 이런 사한 영체를 초래하게 된다. 한동안 나는 농도 짙은 사진이나 이성 사이의 친밀한 글, 혹은 화면을 보거나 심지어 남편이 손을 만져도 …… 매우 괴로웠다. 나는 법 공부하고 발정념하거나 혹은 인터넷으로 교류해야 해서 부부의 생활리듬이 달랐다. 그래서 아주 자연스럽게 아래 위층으로 분리해 잠을 자게 되어 서로 편안하게 아무 일이 없었다. 남편이 참기 어려워하며 내 방으로 들어오면 나는 매우 괴로웠는데, 눈을 감고 나 자신에게 어떤 신체적 반응도 나타나지 말며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지키지 못할 때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알려 주었다. “그런 감각은 내가 아니다. 이 육신은 내가 아니다.” 그런 상태로 내가 아주 긴장해 있자 남편은 다소 원망했는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부님, 저를 도와주세요. 나는 마땅히 어떻게 부부생활의 시달림에서 피할 수 있을까요?” 사부님께서는 “불광이 널리 비추니 예의가 원명하고도 밝도다”라는 법을 말씀하셨고 또 고층차로 가면 다른 상태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부분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건 어떤 상태일까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사 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점차적으로 더는 그런 생리적인 욕구가 없어졌다. 매우 신기했고 또 매우 편안했다. 현재 우리는 마치 친구와 같이 소위 ‘젊어서 만난 부부 늙어서 동반자’ 상태로 됐고 서로 아주 믿고 있다. 수련 전의 환경,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있었는데 현재는 아주 커다란 자유공간이 생겨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안정된 사업과 수입원이 있고 자녀도 커서 수련하고 있으며, 집안일은 외국에서 온 보모가 돌보고 있고 남편도 스스로 자신의 여가시간을 배치했다. 나는 정말이지 너무도 감사하다! 이는 나에게 향수하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더욱더 대법제자의 사명을 잘 완성하라는 것이다.
3. 안으로 찾는 것을 배우다
사자회 300-C3 구역과 장터우 두 현을 포함한 80여 분회, 3,600여 명의 회원 중에는 기업가가 아주 많이 있는데 그들은 매우 방대한 중생을 대표하고 있다. 인연이 닿아 우리는 총감독과 11월에 진선인 미술전을 함께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후에 우리는 또 매체를 소개하는 시리즈활동에 가입했는데 총감독은 우리의 간결한 보고를 듣고 매우 감동했다. 그러나 내부 회의 후 피드백이 좋지 않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 격렬하게 정사 대전하고 있음을 느끼고는 즉시 수련생들에게 발정념으로 지원하게 했고 동시에 안으로 찾았다.
이때 밍후이왕에 때마침 수련생이 쓴 심득 ‘안으로 찾아야 진정으로 수련할 수 있다’는 문장이 등재돼 읽고 나서 모두 깨어났다. 어떤 문제에 봉착하든지 조금도 다른 사람에게서 찾지 말아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생각조차 말아야 하며 조금의 염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움직이기만 하면 긍정코 ‘밖으로 찾는’ 사유방식을 불러일으킨다. 당신이 다른 사람한테서 찾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이치가 있다’고 해도 옳지 않은 것이며 수련인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마음은 조금도 움직여서는 안 되며 착실하고 완정하게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나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안으로 찾았다. 일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예전에 기획에 참여한 이는 모두 줄곧 법 공부와 교류에 참가한 보도원으로서 모두 법에서 교류하고 자신의 사람 마음과 부족을 찾아 정체적으로 인식하여 아주 쉽게 항목을 완성했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스스로 진영이 어지러워진 느낌이 들었고 사람 마음이 떠오르고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며 서로 질책했는데 타 지역 수련생은 우리 장화지역에 왕이 매우 많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사람 중에서 주장이 매우 강하고 방법이 있었으나 단체법공부와 교류에 참여하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 어떤 사람은 회사 관리자인데 협조에 참여한 적 없는 수련생이지만 조직운영 능력과 지도력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큰 항목을 진행하면서 어찌하여 구체적인 방안과 여러 가지 토론도 없었을까. 일이 진행되는 진도도 잘 배치하지 않았고 각 팀의 보고도 미비하고 …….
나와 다른 한 수련생이 미술전 창구 앞에서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찌하여 모두 일만 말하고 있을까? 우리가 법 공부를 중시했는가? 자신을 잘 수련하고 순정하고 강대한 정념으로 중생을 구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일하기 위해 일하는 것인가? “당신들은 수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수련의 이 기초가 있어야만 비로소 사람을 구도할 수 있고, 수련의 이 기초가 있고 정념이 강해야만 비로소 사람을 구할 수 있으며, 비로소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 수련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데, 언제든지 모두 마찬가지다.” (2012년 미국수도국제법회설법) 이 안으로 찾는 과정에서도 조금만 주의하지 않으면 여전히 또 밖으로 보고 있었다. 이 잘못된 기제는 정말로 단단히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 나는 자신을 조절하여 오직 자신만 보고 자신만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찾으니 정말로 놀라웠다. 여전히 나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다. “대법의 일 또한 수련이다. 속인 사회 중의 일 처리 방법과 대법 책임자를 모두 한데 연결하게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전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형식과 일하는 방법이 없었다. 책임지면서 또한 보통의 수련자이다. 당신들은 탐색하면서 자신의 길을 걷고 있으며, 대법의 책임자도 모두 자신을 단련시키고 있다.” (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설법) 대법수련에는 조직이 없으나 진상을 알리는 일에서 팀은 일치하게 협조해야 하며 책임자는 곧 스스로 요구하고 전반 국면을 장악하며 조리 있게 효율적으로 해야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알고 보니 여전히 나 자신에게 부족했다. 사람마다 수련 중에 있고 수련이 잘된 것은 우리가 볼 수 없으며 폭로된 것은 모두 수련 중에서의 부족한 점이다. 이런 부족한 점은 바로 우리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거울로 되는데 우리가 어찌 그것으로 상대방을 비평할 수 있는가? 사람마다 할 줄 모르던 데서 할 줄 아는 데로 나아가고 있고 보도원이 아닌 수련생도 참여해 승화되고 단련되는데 얼마나 큰 중생 구도의 힘을 보태는가? 보도원은 수련생에게 안정된 수련환경을 개창해야 하며 우리의 마당에 수련생이 용해하여 들어오지 못함은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우리가, 교란이 나타나 책임을 찾고 다른 사람을 탓할 때, 사람의 마음으로 누가 맞고 누가 틀림을 강조할 때, 법에서 제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이번 주에 수련생들은 모두 조용해졌고 마음도 순정해졌다. 얼마 안 돼 좋은 소식이 왔다. “사실 총감독은 우리를 무척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각(内阁)이 미술전을 잘 개최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은 원래의 계획대로 기타 활동은 우선 취소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내려놓고 순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구도하기로 결정했다. 중생은 미술전을 통해 진상을 알게 될 것이고 자연히 정확한 선택을 할 것이며 자신에게 좋은 위치를 마련할 것이다. 이후에 무슨 진전이 있더라도 우리의 정념정행 하에 자연히 법의 배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고무 격려했다. “신사신법하며 수련생을 믿읍시다. 부족한 점이 보이면 자발적으로 보충해 나갑시다. 우리가 한 곳으로 힘을 모으고 다섯 손가락을 주먹으로 쥐어, 마치 줄 당기기를 하듯이 동심동력(同心同力)으로 한 방향으로 힘을 쏟읍시다.”
안으로 찾는 것을 배운 후 나는 늘 내가 어떤 염두를 움직였는지 살펴본다.
1) 고속도로 추월선에서 차를 몰고 있는데 앞에 느리게 가는 차가 달리고 있으면 이런 염두가 뛰쳐나온다. ‘이렇게 느리게 가면서 감히 추월선에서 달리다니, 다른 사람이 다 앞으로 추월해 가는 게 보이지 않는가?’ 아! 그렇지 않다, 나의 조급한 마음이구나, 다른 사람을 눈에 거슬려 하는 마음이구나. 나는 마땅히 속인에게 이끌리지 말아야 한다. 나는 평상심으로 뒤를 따라 계속 차를 몰았다. 만일 내가 시간이 급하다면 그냥 추월해 가면 될 일이 아닌가.
2) 법회 원고모집 소식이 일찍이 들렸는데도 오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글을 쓸 수 있는 몇몇 수련생을 찾았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나는 글 쓰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나는 무슨 심득이 없습니다, 나는 최근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수련 심득을 쓸 경지가 안 되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답변만 들리는 것일까? 이런 것 역시 나의 내심에 대한 반영이 아닌가?
이런 원인으로 나 스스로도 펜을 들어 심득을 쓰지 않는 게 아닌가? 나는 그것을 돌파해야겠다. 펜을 들어 쓰니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었고 원고모집 선택여부에 상관없이 적어도 내심의 장애를 돌파하는 게 아닌가? (앞서 2년간 당선되지 못했다.) 또 펜을 들기 싫어하는 습성도 극복했다. 그리고 수련생의 반응에서 즉시 그것을 접수했다고 끝날 일인가? 사람이 수련하고 있는 것으로 정말로 다른 사람의 고무 격려가 필요하다. 나는 마땅히 수련생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고무 격려해야 하며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과 관념으로 장애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3) 우리는 스카이프로 많은 교류를 했는데 내가 사업진행 상황을 보고할 때였다. 상황을 잘 모르는 수련생이 즉각 질책하듯이 비판하는 어조로 나에게 하나씩 질문했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나에게 즉시 다른 한 수련생이 힘내라는 표정의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즉시 내가 어떤 염두를 움직였는지 살폈더니 아직 움직인 게 없어 다행이었다. 우리는 수련인이므로 대립하거나 말썽을 피우려는 게 아니다. 나에게 보낸 그 신호는 내 마음을 움직이지 말라는 것임을 알고는 참을성 있게 그에게 설명해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한 수련생이 ‘협조인 3명 중에 당신만 남았네요.’라고 말했다. 나는 사부님께서 비교적 충족한 시간과 조건을 배치해 주신 것임을 뚜렷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적으로 제한되어 각 방면으로 어려움과 압력이 있지만, 사람을 간절하게 구도하려는 마음이 있음을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우리는 서로 부족한 점을 보충해야 하는데 다만 여러 사람에게 전반 상황을 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수련생이 그렇게 느꼈던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닦아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법의 최후에 우리는 반드시 ‘동심(同心)’이 되어야 하며 절대 구세력이 틈타게 해서는 안 된다.
4. 맺는 말
정법은 이미 최후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우리가 걸어온 수련의 과정을 소중히 해야 한다. 하지만 또 유감이 많은데 그것은 내가 자신을 잘 수련할 수 있는 기회와 중생 구도의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다. 법 공부가 부족할 때 나는 늘 방향을 똑똑히 볼 수 없었고 다음 일보를 어떻게 내디뎌야 할지 몰랐다. 그럴 때는 법의 힘이 없었다. 역사상 다른 수련방식과 비교하면 사부님께선 정말로 우리에게 무슨 고생을 겪도록 하지 않으셨다. 내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람 마음의 실타래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사람 마음을 제거하는 것은 사람과 신의 구분이다.
물질사회 환경의 미혹에서 나는 늘 ‘정진’과 ‘느슨함’ 사이에서 맴돌고 있으며 잘하지 못한 경우도 많다. 잘했든 잘하지 못했든 우리는 확고하게 앞으로 걸어가야 하며 최후의 기회를 잘 틀어쥐고 과거의 부족함을 보충해야 한다. 중생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대법에 미안하지 않도록 우리가 세상에 온 서약과 소원을 완성해야 한다. 이상은 단지 개인 층차에서 제한된 인식이므로 법에 부합되지 않는 곳이 있다면 수련생들이 자비롭게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2년 타이완 파룬따파 수련심득 교류회 발언고)
문장발표: 2012년 11월 29일
문장분류: 수련마당>정법수련>해외법회 발언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2/11/29/265989.html